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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일 금요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바룩 1,15ㄴ-22
복 음 : 루카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을 여행 중인 어떤 형제님께서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성당이 있는 모르기에 호텔에서 나가
교통경찰에게 성당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받은 성당으로 가는데, 가는 길에 보니 다른 성당도 있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아까 소개했던 교통경찰에게
더 가까운 곳에도 다른 성당이 있던데 왜 더 먼 곳을 소개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성당이 좋은 성당인지 제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교통정리를 해보니까
이 성당에서 나오는 신자들의 표정이 가장 행복하고 기뻐 보였습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많은 성당이 가장 좋은 성당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긴 나쁜 성당에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한 곳에 어떻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가득한 곳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있는 공동체는 어떤 것 같습니까?
기뻐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인상을 쓰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탄식이 이해됩니다.
갈릴래아 호수 북쪽 물가에 있는 도시들을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실을 꾸짖습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당시에 상업적으로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도시를 자주 방문하셨고 또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계속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제1독서의 바룩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18)
지금 우리는 기쁘게 살고 있나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믿음이 없어 기쁘게 살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님의 탄식을 부르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루카 10,13)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을 충만히 누렸음에도
죄악에는 기민했고 믿음에는 게을렀던 탓입니다.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꾸짖음의 내용을 잘 들어 보면 그 안에는 사실 꾸짖는 이의 기대와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하느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통해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시는 겁니다.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행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모든 죄와 잘못에 대해 자비를 청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지요.
자루옷은 어떤 장식도 없는 투박하고 거친 천으로 자신의 비천함과 고행을 드러내며,
재는 세상 것에 한 눈 팔고 달리다가 끝내 맞이하게 될 허무한 종말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근원과 목적을 외면하는 이는 결국 다 타고 남은 재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실패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고을들을 각별히 사랑하시고 더 많은 정성과 애정을 쏟아 부으셨음에도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하셨다는 걸 예수님도 인정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제대로 보답 받지 못해서라기보다,
구원을 가로막는 완고하고 굳은 마음을
그들 스스로 고수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꾸짖으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절절한 회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
이것이 패망과 유배라는 민족적 고통과 치욕 앞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고백하는 자성의 골자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의 죄는
그분과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보다 당장 자신들을 더 영화롭고 풍요롭게 해 줄
다른 목소리를 듣고 따르면서 그분과 점점 멀어졌고,
그렇게 멀어질수록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을 잃고 맙니다.
이민족에게 패방하여 이국땅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하는 유배의 기간은,
이방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인 야훼 신앙을 되찾아 수호하며
다시 그분과의 관계를 간절히 갈망하게 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내쳐버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뼛속까지 통회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이는 반드시 해방의 선물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과 사회, 신앙 안에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여정을 충실히 살아갑니다만,
때때로 잠시 멈추어 자신의 구심점과 방향성을 점검하는 순간이 꼭 필요합니다.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존재적 소명과 정체성을 가다듬는 노력이지요.
부족하고 나약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언제라도 그 품 안으로 달아드는 어린아이처럼
정화와 성화의 노력에 결코 지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실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이 말씀은 교회가 이 어린 성녀의 살아있는 모범으로 그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복음적인 이념이다.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15세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9년을 살았고,
그곳에서는 특별한 영적인 노력을 하였다.
성녀는 그의 언니 첼리나의 명을 들어 내적 체험을 썼는데
그것이 “영혼의 이야기”이며, 이것으로 성녀가 존경을 받게 되는 자서전이다.
그리고 성녀는 그의 작품 “영적인 아이의 작은 길”에서 무한한 봉헌을 하고 있다.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 말은 자신의 “성소”를 발견한 교회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성녀는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그리고 한번 들어가면 바깥 구경을 전혀 할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살았으면서도,
그 안에서 전교 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 지방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하였다.
자신은 한 번도 전교 지방에 가서 전교해본 일이 없으면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성녀는 수도원 안에서 몇 년간의 수련장으로 일했으며,
많은 사람을 위해 영적인 삶의 스승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성녀를 조금씩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모두 바치도록 인도하셨다.
여기서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삶을 이를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문을 조용히 닫는다든지, 복도를 다닐 때 조용하게 하는 것 등이다.
성녀는 특별한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성녀가 되신 것이다.
또한, 성녀는 성체를 통해 자신의 사도적 역할을 발견하였고,
이 성체는 오늘 우리에게 역시 성체의 “영적인 가난”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전교 지역의 교회에 대한 큰 지향을 통하여 성녀를 닮을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축성된 적은 양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가장 미소한 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을 십자가로써 가르쳐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는 도움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언제나 하느님께 달아 들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실천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며,
그러한 삶을 사신 유일한 어린이이신 아드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한 어린이와 같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학교에서 배웠던 과목 중에 ‘논리학’이 있었습니다.
논리학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남에게 전하는 방법입니다.
논리학의 방법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3단 논법이었습니다.
3단 논법은 구체적인 사항을 예를 들면서 보편적인 가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귀납법이라고 하였고, 경험론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보편적인 예를 들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연역법이라고 하였고, 합리론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에 산아제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표어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산아제한 운동이 지속되면 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고령화 사회, 초 고령화 사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변화는 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가 자연스럽게 줄고 있습니다.
교회도 급속하게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출산장려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비판하였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는지, 내지 않는 것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대해서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을 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에서는 단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끝나면 단식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오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워하였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결단과 행동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들었지만 엘리야가 찾아간 것은
이방인 여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엘리사가 치유한 것은
이방인인 나아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것은
갈릴래아와 실로암이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라진과 베사이다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문, 혈통, 민족은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성공, 업적, 능력도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선택하신 것도
구원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행동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말해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회자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한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가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나이의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도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명의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평생 여기저기를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의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