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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암 일출
우리나라 최고지에 위치한 사찰로는 지리산 법계사(1450m)가 꼽힙니다.
하지만 암자까지 포함한다면 아무래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위치한 이 묘향암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지에 위치한 이 암자를 통상 우리들이 흔히 부르던 대로 묘향대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암자 이름 그대로 묘향암이라고 불어야 하나요?
만복대의 ‘대臺’의 의미는?
대臺는 보통 외형 상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을 얘기한다. 그런데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臺가 많다는 것이다.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대臺'가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에는 ‘지리10대’ 가령 문수대, 우번대, 서산대, 문창대 등 이런 ‘대臺’가 10곳 이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이와 같은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암벽과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대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유명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짓는 형태로 변했는데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臺라 칭한다 한다. 그러니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만복대는 이런 ‘대臺’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저 봉우리의 다른 이름 즉 ‘정상이 두드러지게 평평한’의 의미인 돈대墩臺의 뜻으로 쓰였으니 위에서 얘기한 ‘대臺’와는 좀 다르다 하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83쪽
이런 취지로 묘향대라 부르면 되지 굳이 묘향암으로 부를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졸저 전게서 344쪽을 잠깐 보겠습니다.
멀리 구간 도착지인 오미리 일대와 문수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수지라고도 부르는 문수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산모퉁이 끝에 문수사가 나온다. 문수사로 오르는 길은 토지천과 함께 한다. 이 문수사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사찰이다. 연곡사와 함께 의병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하여 몇 번의 폐사와 중창을 거듭했다.
547년(백제 성왕25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이 사찰은 만수사리 즉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한다. 이 문수사는 반야봉과 나누어 얘기할 수 없다. 즉 차와 함께 살았기에 다송자茶松子라고도 불리는 금명 보정(錦溟 寶鼎, 1861-1930)의 지리산문수암모연문智異山文殊菴募緣文을 보면 “암자는 제일봉의 불묘佛廟 아래에 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면 반야의 현묘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것이며, 중생들을 오랫동안 먹여 살릴 복전이로다.”고 하였다.
여기서 불묘란 지리 서쪽의 제1봉이니 제4부 지리종주 중 반야봉을 지나면서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어쨌든 문수보살이 반야봉에서 설법을 행하면 그 법문이 왕시루봉에 부딪쳐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 바로 이 문수사 터여서 여기에 문수사를 건립한 것이다. 연기조사가 후에 반야봉에 들어 묘향대에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하였다는 것이 다 이런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는 지리의 중심은 반야 즉 불묘佛廟였습니다.
참고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불무장등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불무장등이라는 지명은...
어떤 이들은 산의 모양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켜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거다. 또 다른 이들은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보기도 하는데 그 의미도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 즉 지명이 있다. 사람은 이름이 있어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듯이 지명은 그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이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따라서 지명은 지역의 역사, 형상, 풍속, 의식, 도덕, 종교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지명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흐르면 처음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이름으로 변해 있어 엉뚱한 의미로 불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 고유 글이 없다가 한자가 들어오면서 한자식으로 발음을 하다가 다시 한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걸 일제강점기 때 그들의 편의대로 일본식 한자로 바꾼 경우도 많아 정확한 뜻을 알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불무장등 정상 정경
살펴보자. 사실 지리산 자체가 승도僧都 혹은 불도佛都라고 하였으니 불교 용어와 관련지어 본다. '불무'라는 발음에 주의한다. 지리의 서쪽을 책임지는 제1봉이 반야봉이다. 이 반야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지위를 느껴보기 위해 반야봉으로 올라보면 더 확실해진다. 대저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컫는다 했다. 화엄사와 연곡사 등을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라는 것도 둘레길 제14구간에서 이미 살펴봤다.
어쨌든 이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날라리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지리 99팀’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시 지리산하면 ‘지리 99’팀의 연구가 돋보인다.
이렇듯 반야봉에서 부처님의 법을 깨우친 연기조사는 연곡사나 화엄사 등으로 내려가지 않고 이 반야봉에 머물면서 수행을 계속합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반야봉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 산의 정상 즉 꼭대기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정상은 산 아래나 주위를 굽어보거나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과 청량감을 주지만 우리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은 못 됩니다.
더욱이 비바람이나 눈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이런 정상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힘들기조차 합니다.
그러니 그런 곳에 사람이 살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렇게 문수보살의 가르침과 기가 넘쳐흐르는 곳.
그곳이 이렇듯 비바람을 막아주고 큰 바위가 함께 하고 있는 곳이고 석간수가 풍부하게 흐르는 곳이라면 구도자求道者가 거주하며 수행하기에도 안성맞춤이고 더욱이 기도발도 받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지리 주릉 종주를 할 때 토끼봉을 오르면서 잠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뒤를 돌아 반야봉을 바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즈음 그 반야봉 정상 바로 아래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무의식적으로 그 바위를 눈여겨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 정도의 바위 밑에는 분명 석간수가 흐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음에는 꼭 저곳을 한번 가봐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동경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미지의 곳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하겠고.....
그리고 그후 이런저런 이유와 티끌만한 지식에 근거한 자만감 등이 그곳으로 안내합니다.
반야봉에서 좁은 길을 따라 그곳을 처음 내려설 때의 감흥.
양철지붕과 석간수 그리고 툭 트인 조망이 말 그대로 별천지로 들어온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묘향암 앞마당의 코끼리상
다만 문수보살이 타고 다녔다는 사자 대신에 보현보살과 함께 한 코끼리 뒤로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
이곳이 바로 묘향암 즉 묘향대입니다.
제1감은 묘향암이나 공부를 한 우리니까 묘향대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곳은 노고단이나 천왕봉 그리고 영신봉도 같은 여건이기는 합니다.
그 먼 옛날 연기조사는 득도를 한 후, 이 묘향대에 자리를 잡습니다.
물론 그 이름이 묘향대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곳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묘향대일까요?
묘향대에서 바라본 묘봉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묘향대가 반야봉의 묘방향에 위치해 있다거나 토끼봉卯峯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묘향대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취지로 묘방卯方과 관련된 이름이라면 당연히 卯向臺·혹은 卯向庵이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향대는 妙香臺이고 妙香庵입니다.
또한 ‘지리 99팀’의 ‘엉겅귀’님의 연구에 의하면 묘방卯方은 정동正東쪽을 가리키는데, 묘향대는 반야봉의 묘卯방향이 아니고 오히려 축丑방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찰 이름을 지을 때 방향을 보고 짓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얘기도 함께 들려줍니다.
즉 절이나 암자이름은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죠.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문제일인자多聞第一人者인 아난존자가 쓴 여러 경전 중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의 줄여서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여기서의 이 묘妙도 ‘오묘한, 심오한’이라는 의미로 부처님 말씀인 심오한 ‘법’을 ‘연화’를 통해 화엄 사상으로 발전시킨 ‘연화장’ 세상을 말한다고 하니 그분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묘음(妙音) 묘지(妙智) 묘관(妙觀)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유(妙有) 묘각(妙覺)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인다.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다. 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구족원만(具足圓滿 *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안다.
예를 들면,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부처의 깨달음을 억지로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다. 그래서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유마경》 제10품『향적불품』에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는 말이 나온다. 《아함경》에는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을 묘향(妙香)이라 하였다.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妙香은 등장한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峯 아래 묘향대가 있고, 그 신비스럽기조차한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니 반야봉과 묘향대는 이름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묘향암의 풍경
물론 연기조사가 용맹 정진한 묘향대가 비로 지금의 이 묘향대라는 어떤 확증도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림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1970년대 현재의 모습의 토굴이 갖춰진 것은 맞고 그 이후 지금까지 여러 스님들에 의해 끊임없는 수행 또한 이루어졌으니 그 이전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같은 형식의 수행이 이뤄졌지 않겠냐고 하시는군요.
즉 묘향암의 정신만큼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쨌든 이런 고지高地 나아가 이 정도의 수행처가 부근 다른 곳 어디에고 찾아볼 수 없음에 비추어 바로 이 묘향암이 스승에서 제자에게 이어주는 한 끈의 흔적일 수도 있겠고 그 끈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혹시 인도에서 연鷰을 타고와서는 이 지리산의 연곡사, 화엄사, 법계사, 대원사 등에 화엄사상을 갈파한 연기조사를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제 토끼봉 이름도 卯峰으로 불러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야봉 아래 자리한 묘향대.
우리들은 묘향암을 묘향대라고도 부르지만 호림스님께서 이런 말을 들으시면 당장이라도 크게 호통을 치실 겁니다.
묘향암이라고 하시는 거죠.
고유명사이니까.....
그 호림스님께서 작은 법회를 하나 여신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그저 인사만 드리고 갔었는데 이번에는 지리산 관련 제 책도 나왔으니 졸저도 한 권 올리고 스님께 저간의 사정도 고할 겸 묘향암을 방문하기로 합니다.
성지 순례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보통 묘향암을 방문할 때면 성삼재에서 주릉을 타고 반야봉으로 올라 묘향암으로 내려가는루트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내린 비로 계곡물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함박골 이끼폭포의 연한 초록색이 더욱 싱그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뱀사골 ~ 함박골 ~ 묘향대 루트가 떠오릅니다.
이번 성지순례 코스는 그 루트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지리산 함박골의 이끼폭포
오늘 순례에는 고남님의 후배들도 참여하여 인원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내대로님과 푸우님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로만 꾸미려던 행사 참여단이 조금 더 늘게 되었습니다.
22:53 영등포를 출발한 여수 엑스포역 행 열차는 예정 시간보다 10분 늦은 02:48에 남원역에 도착합니다.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신 푸우님.
낮이었다면 남원역에서 만복대와 종석대를 보면서 지리산의 예고편을 본다며 조금은 흥분했었을 것인데.....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이른 조반을 위해 구인월 부근의 청솔식당으로 갑니다.
이번 묘향대 순례에 따른 몇 가지 당부들을 듣습니다.
정성껏 준비된 된장찌개와 비빔밥으로 배를 채우고....
지도 #1
05:08
지도 #1의 '가'의 곳인 와운마을 입구입니다.
와운臥雲.
구름이 누워 있다는 말이니 와운마을은 구름이 늘상 덮여 있는 동네라는 뜻 같습니다.
심마니 능선과 연하천 대피소 뒤를 흐르는 명선북릉 사이로 흐르는 뱀사골의 깊은 물줄기로 인해 늘 안개가 끼어 있는 곳이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아니 어쩌면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이 부운리浮雲里이니 그 이름에 대한 반동으로도 들립니다.
즉 능선 위에서 보면 와운臥雲이요 마을에서 보면 부운浮雲이라는 뜻일 겁니다.
2차 짐 즉 내일 하산하여 갈아 입을 옷 등을 정비하느라 2진이 조금 늦게 도착합니다.
05:30
그 아름답고 늘 그리기만 하던 뱀사골 물줄기를 건넙니다.
"1949. 4. 9. 이 지리산 배암사골 반선마을에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사살되었다."라며 이태는 남부군에서 이 골짜기를 뱀사골이 아닌 배암사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선半仙이죠?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든 반 신선같은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우리를 데려다 준 남원의 택시들은 속세로 떠나고....
우리는 반 신선이 되어 선계로 들어갑니다.
05:33
서로 뜻을 같이 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이해하는 산우들과의 동행.
그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화개재라는 안내글이 보입니다.
이 루트가 역사지리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빨치산과 토벌군만은 아니고 바로 왜구들 때문이기도 하죠?
여원재와 이성계 그리고 고토 분지로
뒤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산줄기에 관한 한 고토 분지로는 우리에게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00. 8.부터 시작된 그의 지질조사는 1901. 1. 24. 부산을 출발해 목포로 향하던 중, 이 여원재를 지나게 된다. 단순한 지질학자가 아니며 역사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고토는 여원재를 지나면서 520년 전인 1380년 8월을 떠올렸다. 바로 진포대첩이다. 일본 해군이 군산에서 고려의 최무선에게 참패했던 분함을 그는 곱씹고 있었다. 진포대첩은 세계 최초의 함포대전이었다. 일본해군은 그 전쟁에서 500여척의 정크선에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러나 함포를 장착한 최무선의 전함에 무참히 참패를 당하게 된다. 불명예였다. 일본군이 고려 해군에 참패를 당하다니! 당시 배를 잃은 패잔병들이 산줄기를 이용하여 도주를 하였다.
당시 상황을 보자. 군산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이른바 ‘왜구(倭寇) 루트’를 통하여 도망갔다. 김천을 지나 그들의 2차 집결지는 지금의 바로 이 남원 운봉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토벌군의 구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하여 백두대간 상의 이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게 된다. 그때 홀연히 백발의 여인이 꿈에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 칠 계략을 일러준다.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택리지에도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토는 택리지의 일어 번역본인 조선팔역지를 통하여 익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이 여인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하였다. 그러니 여원이 있는 부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여원재(女院岾)라 불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여원치(女院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또 패한 나머지 왜구 잔당들은 반선으로 도망간다. 그들은 거기서 뱀사골을 이용하여 화개재로 오르게 된다. 그러고는 거기서 동진을 하여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고 천왕봉까지 간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잔당들은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는 최초의 일본인이 된다. 천왕봉 정상에 선 그들은 거기서 사당 안에 있는 성모 석상을 본다. 그러고는 쓸데없는 분풀이를 그 성모석상에 가한다. 그 석상의 목을 자른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90쪽
바로 그 루트인 것이죠.
이때의 이 상황은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뱀사골은 크고 작은 소沼가 줄을 지어 산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대저大抵 지리는 보는 이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나 사무침은 각기 다르리라고 봅니다.
그 골이나 능선들은 나름대로 자신들 만의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한신계곡은 폭포로, 칠선계곡은 적요한 원시자연경관으로 자신의 이름을 보여준다면 이 뱀사골은 소沼와 징담澄潭으로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고 얘기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도장골은 이 모든 것을 구비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긴 합니다만.....
그만큼 자잘한 소가 발걸음을 잡습니다.
지리의 참맛을 보러 오신 분들.....
맑은 소의 잔잔함 만큼이나 환희보다는 묵언으로 진행하게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묵언수행.
골은 좁기도 하지만,
널널함을 주기도 합니다.
세상 풍진을 떨쳐버리고자 합니다.
항상 제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사랑하는 동생 내대로님.
다음 주에는 둘레길 세 구간 정도를 한방에 하실 것이고.....
06:19
병소甁沼.
상부 소와 하부 소가 호리병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가요?
아기자기한 그 아름다운 소에 대한,
설명을 봅니다.
지도 #2
음......
자잘한 폭포......
계류.
몇 개의 다리를 건너,
또 다른 소를 만납니다.
푸우님.
현주씨.
이곳이 제승대라고 하며 유래를 밝혀놨는데 좀 미심쩍습니다.
아주 빠른 물살.....
무명소.
예전에는 이런 난간을 줄을 잡고 걸었을 것인데....
이제는 데크로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콰이강의 다리....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이 골.
노후화된 것은 아닌데 등로를 변경하다 보니....
07:27
드디어 함박골 입구를 가리쳐 주는 안내판을 지납니다.
철책이 그 골 앞을 지키고 있지만.....
오늘은 지리 주릉이 아닌 이 함박골 루트를 이용하여 묘향대로 오르기로 합니다.
이름도 예쁘죠?
함박꽃을 연상시킵니다.
함박골의 함박은 한밭의 변형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함지박을 뜻하는 함박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크다의 의미를 가진 "한"과 "밭"의 "한밭"이 "골"과 붙어서 "함박골"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근에 사람이 살던 집터로 보이는 곳은 물론 그들이 경작하던 밭뙈기 흔적도 여럿 보았으니.....
자, 치고 오릅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잘들 오릅니다.
오늘은 이따 있을 행사때문에 제물과 공양물들을 많이 지고 가는 바람에 다들 가방이 무겁습니다.
양초만 해도 사실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거니와 쌀과 된장 등 부식거리의 무게도 상당합니다.
그래도 다른 곳이 아닌 성지순례의 여정인 만큼 무거움 대신 모두의 마음은 즐겁기만 합니다.
혹시나 연기조사의 흔적을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흔히들 골치기라고 하면 무조건 골짜기만 따라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 보면,
그 골 좌우로 기가 막힌 길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역할은 너덜이 분담하기도 합니다.
그 큰 너덜을 지나,
아파트 한 동 만한 크기의 바위를 지납니다.
아!
오래 전 기억 속의 그곳!
이끼 폭포입니다.
막내님과 현주씨가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시고.....
그리고 내대로님.
이 멋진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는 푸우님.
어쨌거나 40분 정도를 머무르다 자리를 뜹니다.
스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니....
물줄기 두어 개를 지난 다음부터는 등로가 바짝 고개를 쳐듭니다.
09:30
그러면 이제부터 그저 아무 생각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면 됩니다.
속세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문자메시지가 날아옵니다.
우리도 땀을 흘리기는 속세와 마찬가지이겠지만 지리의 더위는 속세의 그것과 분명 차이가 납니다.
특히 끈적임이 없으니....
더위에 대해서 이구동성 같은 느낌들이랍니다.
10:47
이 정도의 바위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곳 두 군데는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10:52
오늘 처음으로 능선이 보입니다.
북부능선의 영원봉1290.5m 입니다.
저 봉이 중요한 것은 바로 '와운카페' 때문이죠.
벌바위 .......
10:55
다시 능선을 회복하고 나니 이제 좀 부드러워졌습니다.
드디어 지리 주릉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앞의 명선봉과 뒤 중앙으로 영신봉과 그 우측의 촛대봉과 시루봉이 보입니다.
묘향대.
노란 지붕의 절집입니다.
멀리서 보면 이렇듯 아름다운 곳.
반야봉 바로 아래 있는 연기조사의 묘향대입니다.
4개월만에 뵙나요?
호림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공양도 올립니다.
후미 대원들까지 도착하자 그렇게 묘향대에서의 행사는 이어집니다.
행사를 마친 후......
17:43
스님 법문도 듣고 소위 야단법석도 마친 다음 개인 시간을 갖습니다.
후배들을 위하여 함께 반야로 오르기로 합니다.
물론 지금 날씨로 봐서야 일몰 감상은 틀린 것이긴 하지만.....
18:19
혹시나 하는 기대로 올랐던만 역시나...
연안김씨 음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내대로님,
헬기장을 지나.....
18:30
금줄을 넘어,
잠시 동심으로 ....
반야봉 정싱에 올랐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노고단 고개 즉 지리주릉을 통해 올 것입니다.
다시 내려갑니다.
이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열대야에 시달리는 속세와는 달리 지리 그것도 반야봉의 밤은 춥기만 합니다.
05:11
이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됩니다.
명선봉 뒤로 붉은 기운이 돕니다.
묘향대의 하루도 또 시작입니다.
스님은 정확하게 4시에 새벽예불을 마치셨고.....
이분은 바위 위에서 명상에 잠기셨고....
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만들고.....
묘향대와 묘봉.
이제 해는 다 떠올랐고....
갈 준비를 해야죠.
물맛이 기가 막힌 석간수.
수도처.
아침을 먹고....
묘향대는,
수도하는 이와,
떠나는 자로 구분합니다.
기념촬영을 하고,
남은 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스님 또 뵙지요.
스님 수행하시는데 방해를 드려서 너무 죄송할 따름....
생이 고달프고 힘들 때면 언제라도 또 오소!
광주에서 온 교장선생님 팀.
코끼리 상도 보고는 반야봉을 향해 오릅니다.
08:12
잠시 휴식 시간 중의 내대로님과 승달님.
김치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르던 중 날라리봉 끝자락을 살짝 봅니다.
반야봉은 구름에 가렸고....
올라가봤자 조망은 별 게 아닐 것 같은 느낌.
08:50
중봉의 연안김씨 묘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만 더 진행하기로 합니다.
중봉 무덤 위에 핀 꽃.
반야봉까지 진행하려 했으니 아무래도 꺼림칙하여 그냥 심마니능선으로 진행합니다.
08:58
헬기장에서 좌측 길을 택합니다.
이 길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나누는 도계능선道界稜線에서 우측으로 가지를 치는 지능선枝稜線입니다.
즉 이 능선은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을 구분합니다.
심마니능선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심마니능선이라고 했으니 약초꾼이 연상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중국 진시황제와도 연결을 지을 수 있습니다.
BC 221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삼신산 중 하나인 대방국 남쪽의 '방장산'에서 불로초를 구해올 것을 명합니다.
그때 그 파견대장이 서불徐市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영원령에서는 남원부사로 임명된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꿈에도 그리던 '두류산 유람'에 올라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들뜬 마음의 그 일행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산꾼들을 만난 어우당은 "나는 올 봄에 용성(남원)부사로 부임한 응문이라는 자를 쓰는 어우당 유몽인이라 하오. 나는 두류산을 유람하는 오랜 숙원을 풀고자 순천 수령 유영순, 진사 김화, 생질인 순창 사람 신상연, 신제 등과 유람 길에 오르게 된 것이오. 본시 두류산은 방장산이라 하잖소?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句가 있고,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용성이 대방이고 두류산이 곧 삼신산 아니겠소! 일찍이 진시황과 한무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 우리들은 이렇게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오!"라는 지리산 예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490쪽
중국 산동성을 출발한 서불徐市 일행이 서해를 거쳐 강화도를 지나 방장산으로 들어온 곳이 바로 이 산동면 위안리.
이 산동면이라는 지명은 이렇게 중국 산동반도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산동면의 산수유 또한 중국 산동성에서 가져와 처음으로 심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얘기도 그저 우연스럽지만은 않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조금 더 들어가볼까요?
조금 전 얘기한 파견대장 서불의 市는 '저자 시'로 독음하지 않고 '슬갑 불'로 읽습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분지하여 다름재 ~밤재 ~ 견두산 ~ 천마산 ~ 깃대봉을 지나 구례의 진산인 봉성산 경유 서시천과 섬진강의 합수점에서 만나는 도상거리 33.2km의 서시지맥이라는 지맥이나 이 서시지맥이 대간에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의 이름인 서시천이나 모두 서불의 '슬갑 불'을 '저자 시로 잘못 읽어 비롯된 이름인 것입니다.
엄격하게 부르면 서불지맥이 되어야 했고 서시천이 아닌 서불천이 되었어야 맞습니다.
그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났으니 이곳 어느 바위를 유심히 찾아본다면 '서불차과徐市此過'라는 각자가 있을 법도 합니다.
이 능선이 심마니 능선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또 이 부근이 약초꾼이 선호하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09:32
지리북부능선.
영원령 너머 소위 와운카페를 조망하고....
좌측이 삼각고지와 이 북부능선 사이로 갈라지는 골짜기인데 이 능선에서 보면 구름이 누워 있는 모습이지만 저 아래 마을에서 보면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와운골臥雲谷이고 부운리浮雲里인 것이다. 그러니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명선봉1583.4m의 그런 아름다움을 연하煙霞라고 불러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나타낸다고 하여 조금도 과장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넘쳐흐르는 맛깔난 물이 괜히 연하천煙霞泉이 아닌 것이다. 은근한 미美를 가지고 있는 곳. 바로 지리산 아니던가!
- 졸저 전게서 492쪽능선 바로 우측에 있는 심마니 샘터의 물로 수통도 채웁니다.
아!
그런데 이곳에 있어야 할 '몽화'님의 국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산꾼 몽화님은 지리산 구석구석에 있는 샘터를 찾아다니며 국자를 갖다놓아 지나는 꾼들에게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게끔 한두 개의 그것을 비치해 두었습니다.
우리가 지리의 샘물을 이용할 때 몇 번은 이용했을 그 국자......
아무래도 이런 샘터 옆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국자가 있던 자리에 다행히 국그릇 하나가 놓여 있어 그나마 걸로 물을 퍼담을 수 있었씁니다.
09:43
좌담회 그만 하시고.....
산수국.
오늘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10:09
투구봉 전위봉을 지나,
10:17
지리북부능선을 볼 수 있는 투구봉으로 오릅니다.
우측의 명선봉에서 삼각고지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인 북부능선.
그 흐름이 힘차게 느껴집니다.
10:51
망바위봉1378.8m.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곳이죠.
여기서 좌틀하면 광산골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광산골은 지난 번 다녀왔던 곳으로 바로 달궁으로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며 그 길은 남부군의 옛 전북도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 이한검 대장님의 표지띠도 보이는군요.
늘 안산하소서!
심마니능선은 조망이 없습니다.
11:20
몇 곳을 제외하고는 길도 선명합니다.
다만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정신을 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1258.4봉을 오릅니다.
11:23
1258.64봉에 오릅니다..
그래도 봉우리라고 조망처는 있군요.
죽은 산죽.
우측으로 도솔암 가는 선명한 길을 지나면 죽은 산죽 밭을 지나게 된다.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을 떠올리게 된다. 고도를 떨어뜨리는 암벽구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이내 1169.4봉 아래에 있는 고개이다. 마천 삼정리 사람들과 산내의 부운리 사람들이 교류하던 길이었을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93쪽
이제 영원봉이 정면으로 보이는군요.
이게 마지막 조망터인가요?
11:51
1319.0봉을 지납니다.
좌측으로...
희미하긴 하지만 지리서부(북)능선입니다.
좌측으로 만복대가 그 우측으로 푹 꺼진 곳이 정령치....
12:16
와운카페.
그리고 그 아래로 와운골 길이 선명합니다.
12:22
그런데 좀처럼 고도가 떨어지지를 않는군요.
살짝 조망이 트이는 곳...
바래봉....
인월에서 14:55 버스를 예매해 놓았는데 시간이 빠듯합니다.
13:02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여울 것 같아 이곳에서 우측 석실 방향으로 방향을 틉니다.
너덜지대와,
간단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길.
14:03
와운마을로 가는 길로 떨어집니다.
쉼없이 차들이 왕래를 하고....
먼저 도착한 유대장님이 차를 가지고 올라오시는군요.
반선에 더착해 보니 행락객들로 인해 택시는 구경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인월터미널로 전화를 하여 취소를 하고 뒷 차로 예약을 다시 변경합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뒤풀이를 해야죠?
여러 개의 식당.
다 지리산의 봉우리나 계곡 이름이 붙었습니다.
낯익은 이름.
물론 '노고단'입니다.
어제 왔다 가셨나?
노고단 식당에서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을 그리며 나누는 하산주 속에 노고단님의 명언(?))을 떠올립니다.
"하산주가 없는 산행은 노가다인 것이여!"
첫댓글 멋진 지리산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
수고 하셨습니다.
이끼폭포를 참 오랜만에 보는 군요. 즐감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산행기 즐감 하고 갑니다.
험한곳으로 긴산행을 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지리산에서 만나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일만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