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콜록.."
아침부터 다솜이 콜록이고 있다.
그런 다솜이 걱정되어 다진은 한 번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솜은 고작 감기일 뿐인데
뭐하러 병원까지 가냐며 다진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누나, 이상이 있을 땐 정확하게 하고 넘어가야죠.
누나가 의사도 아닌데...혹시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
다른 병에 걸린 거라면 어떡할 거예요?"
"쓰읍, 얹혀사는 주제에 말이 많다."
"누나..."
정확히 두 달 전, 다솜은 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를 내게 되었다.
한 남자와 차의 충돌,
차가 입은 손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남자가 입은 손상은 컸다.
덧붙여 말하자면
육체적인 손상과 함께 정신적인 손상도 컸다.
오랜 의식불명 끝에 깨어난 남자가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름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그 어느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른바 기억상실....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를 다솜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추억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자기 때문에 기억상실에 걸리게 되었는데...
어느 누가 그 남자를 태평스레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시길..
아마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솜은 그 남자에게 방을 하나 내주었고,
새로운 이름도 하나 정해주었다.
그 이름이 다진이었다.
그렇다...
다솜의 차에 치인 그 남자가 바로 다진이었다.
두달이 지난 지금, 다솜과 다진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할 것-서로가 알려 주는 것-들을 알고 있다.
"누나, 누나가 전에 사진 찍는 게 취미라고 했잖아요."
"흠....그랬지. 근데 그게 왜? 내 취미가 사진 찍는 거라서 기분 나쁘기라도 하냐?"
"그런 건 아니고요. 왜 취미가 그건지 궁금해서요."
다진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궁금해?"
"네..."
"그러면 넌 취미가 왜 책 읽긴데?"
"재밌잖아요.."
"뭐가? 책이?"
"네."
"넌 그 지루한 게 재밌냐?"
다솜이 안경을 약간 내리며 다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때때로 안경의 렌즈를 배제한 채 얻은 것들이
더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진은 다솜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봤다.
"지루하다니요?!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다진은 다소이 자신의 질문에 재대로 된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아,
접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후우,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사진은...
그 순간의 추억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래서 난 사진 찍는 게 좋아.
참고로 난 기억력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한 추억이든 금방 잊어버리고 말아.."
다솜의 말이었다.
다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다진은 책에서 시선을 거두어 다솜을 쳐다보았다.
뭔가 소중한 걸 빼앗기고 난 뒤 체념한 듯한 눈빛이었다.
"추억이라면 사진이 아니라도 충분히 남길 수 있잖아요."
"아니..사진 말곤...없어. 다른 건 믿을 수가 없으니까..."
라고 말한 다솜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창밖엔 어느덧 별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그 중 유난히도 밝은 별 하나가 다솜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저 별 이름이 뭔 줄 알아? 바로 개밥바라기래...
개가 밥 달라할 때 쯤에 하늘에 있다고...참 불쌍해. 저 별은...
샛별이란 이쁜 이름과 개밥바라기란 이상한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까.."
다음날 다솜은 결국 다진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솜은 단순히 감기인줄만 알았다.
다솜이 찾아간 병원의 의사가 자세하게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했을 때서야 자신의 상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솜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요?"
"뭐라긴...단순한 감기일 뿐인데 따로 할 말이 뭐가 있냐?
그냥 약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는 말 밖에 안 하지...근데 요즘 약갑은
왜 그렇게 비싼지..그냥 하루 푹 쉬면 나을 건데
약 사먹으려니까 돈이 아깝다, 아까워..."
"정말이죠?"
"그럼~!"
그날 저녁, 다솜은 저녁 9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다진이 물었다.
"누나, 오늘 누나 좀 이상한 거 알아요?"
"내가?"
"네. 평소보다 말도 약간 많아진 것 같고....
거기다 저녁때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있잖아요. 정말 수상해요."
"그게 사실...나 오늘 남자친구한테 차였어.."
"에이~ 누나한테 남자친구가 어디있다고 그래요.."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그럼 차인 이유가 뭔데요?"
"내가 뚱뚱해보인데...그래서 오늘부터 다이어트 하려고.."
다솜은 다진을 속이기 위해 여러 거짓말들을 꾸며냈다.
그러는 자신은 정작 무슨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는지 기억하질 못했다.
"뭐...사실일 것 같지는 않지만..누나가 그렇다고 하니까 믿어야죠, 뭐."
그로부터 한 달 뒤, 다진은 여전히 옛 기억들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부스럭 부스럭, 즈윽즈윽, 찌이익 등의 잡다한 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읽는데 그 소리들이 상당히 거슬렸던 다진은
그 소리들의 근원지를 찾아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참 많은 것들을 펼쳐놓고서 짐을 꾸리고 있는 다솜이 보였다.
"누나?"
"아...바다로 여행 좀 다녀오려고..."
"혼자서요?"
"응. 머리를 비우려면 혼자 가야지..."
두 시간동안 부스럭 부스럭, 즈윽즈윽, 찌이익거린 끝에
다솜은 여행 가방을 다 쌀 수 있었다.
다진은 몇 주동안 다솜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배웅나왔다.
"누나 없는 동안 정말 외로울 거예요."
"임마, 너랑 나랑 피가 같은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언젠간 남남처럼 살아가게 될텐데 뭘 그러냐..
니가 자꾸 그러니까 꼬...다섯살박이 아들이 볼일 보러 나가는
엄마더러 빨리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
"이렇게 긴 시간동안을 누나와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실은...누나가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상상이 안 가요.."
"자식.."
다솜은 다진의 등을 가볍게 치고는 택시에 올라탔다.
곧 택시는 출발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택시 뒷꽁쿠니를 지켜보며
몇 일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다솜이 외출하고 집에 없을 때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다 먹고 난 뒤 근처 도서관에서 대출 받아온 책을 펼쳤다.
먼저 머릿말을 읽고 목차를 쭉 훑고 있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따르릉....따르릉...
아무런 의심없이 전화를 받았다.
딸깍...여보세요?
다솜씨 계십니까? 여긴 엠뷸란스 병원입니다.
지금 없는데요...근데 병원에서 무슨 일로?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전화하도록 하죠.
아니에요. 제가 전해줄테니까 대신 저한테 마씀하세요.
그래주시겠습니까?
네...
그럼 수술날짜가 잡혔다고 전해주십시오.
수술이라니요?
모르셨습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사실 다진은 모든 비밀을 알고서 다솜을 배웅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다솜의 수술에정일의 아침이 밝았다.
다진은 초조한 얼굴로 10분에 한번씩 시계를 쳐다보았다.
1시...1시 10분...1시 20분...1시 30분...
한참 다솜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을 시각이었다.
"신이시여...신이시여..."
다진은 간절히 기도했다.
누나만은 꼭 살려달라고...
자신의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 누나만은 살려달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사람들의 위대한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따르릉..따르릉..여보세요? 네?! 뭐라구요?! 누나가?!
수술도중에 그만 다솜이 죽고 만 것이었다.
다진은 문 잠그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달려나갔다.
"택시...택시.."
택시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이봐요....이봐요....여기요..!! 누가 119 좀 불러 주세요!!
여기 사람이 차에 치였어요!!! 여기요!! 제발 누가 119 좀 불러주세요!!"
다솜은 죽었다....
다진은 차에 치였다....
다진은 죽지 않았다..
먼 훗날....
한 중년의 남자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길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떤 이끌림에 끌려 차를 갓길에다 세웠다.
"아빠, 갓길에 차 세우면 벌금내야 되는 거 아니야?"
이제 막 어린이 딱지를 뗀듯한 여자아이가 물었다.
"잠깐만요, 공주님. 잠깐동안은 괜찮아요."
"근데 왜 멈췄어? 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런건 공주님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네요."
"치이...아빠 또 나 어린애 취급이야..."
중년 남자는 차에서 내려 도로 쪽을 쳐다보았다.
낯이 익을 이유가 없는 도로가 너무나도 낯익게 보였다.
아무 추억도 없을 도로가 너무나도 소중해 보였다.
한동안 도로를 쳐다보던 남자는 도로 차에 올라탔다...
"아빠...내 친구, 수연이 알지?"
"음...."
"왜...나랑 같은 학교 다니다가 부산으로 전학간 애 말야..."
"아.."
"걔가 어떤 얘기를 해줬는데....바다보니까 그 얘기가 생각나..."
"무슨 얘긴데?"
"걔가 호기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게 취미였어..
근데...어느날 아주 낡은 일기장을 하나 발견했대...당연이 호기심이 많은 애니까
일기장의 내용을 읽어보았어. 그 내용이 대충이런 거였대...어떤 한 여자가..
자신의 동생과 바다로 여행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냈고...그 교통사고로 인해
동생은 죽었고, 다른 한 남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었대...어쩔 수 없이
그 여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를 책임질 수 밖에 없었어...아빠, 여기서
책임진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지?"
"그럼...이야기나 계속해보렴."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자기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억상실 남자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어. 아마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던 거겠지...하지만 남자는 그 사실을 어쩌다 알게되었고, 그 남자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줬어."
"그래서?"
"근데 사랑엔 비극이 많은 법이잖아. 그래서 여자는 수술중에 죽고말아.
정말 슬픈 현실이지.. 그리고 그날 남자는 행방불명...왜 그렇게?"
"아빠야 모르지.."
"치이, 아빠 바보...왜 그러냐면 너무 급히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거야.
그리고 또다시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되찾게 된 거지....하지만
여자와 지낼 때의 기억은 전부 포멧...여자만 불쌍하게 된 거지...어때?
너무 슬픈 얘기지 않아? 참, 근데 그 여자가 수술중에 죽는 내용부턴
수연이가 지어냈대....일기장엔 수술하기 위해 입원한다는 내용밖에
없었다고....그래도 너무 슬프지?"
"그래요, 우리 귀여운 공주님..."
중년의 남자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다진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다솜은 죽었다...
다진은 죽지 않았다...
다솜만 불쌍하게 되었다...
그 지어낸 이야기는 무섭게도 사실이었었다.
다진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을 법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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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소녀] 잊지 못할 기억을 두 번 잊어버리다
월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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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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