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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교의 개혁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불교란 총체적 아이템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들에게 부담이 되는 상품이 아니라 그 만큼 투자해도 그 투자를 한 사람들에게 그 투자액 보다 더 큰 이익이 되는 상품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불교를 사회화할 때 그 것은 어떤 불교적 가치를 생산하여 그 가치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무소유라고 했을 때 그 가치를 평가하려 하면 그 것을 삶 속에 어떻게 실현해서 그 무소유란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내느냐에 있고 그 가치로 사는 사람과 관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느냐에서 평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소유란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는 매우 큰 불교 정신 아이템이다. 그리고 불교에는 무수한 고부가가치의 아이템들이 아주 매우 많다.
그런데 이런 고찰 없이 부처님이 설한 것이니까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 패배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발상이란 기우 때문에 그 것을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을 심히 경계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런 우려와 경계를 어떻게 불식시키고 불교 아이템들을 사회 행복 또는 발전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 삶 속에 가치 있는 무소유의 실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 이런 것을 스님들이 연구하고 참구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그에 대한 생활을 만들어 내고 그에 대한 모범적인 실천을 일궈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스님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 전혀 아니다.
그 넘에 화두에 빠져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 신도도 저 신도도 그런 불교에 대하여는 관심조차 없다. 그 넘에 염불에 빠져서 불교의 가치를 어떻게 사회화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염불이 나쁜 것이 아니건만 화두를 드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건만 그러나 그 속에 쳐 박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교는 진정 좋은 불교는 아니다. 사회인들은 자신의 문제가 코앞에 태산처럼 버팅기고 있는데 염불만 하라니 자신의 고민이 눈과 귀를 모두 막고 있는 사람에게 화두만 하라니 사람들과 불교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그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에 쫓기지 않고 시간적으로 느긋한 노인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노인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자아를 찾게 하는 게 염불이고 화두인데 오히려 화두와 염불 때문에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2. 지적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공동체 교육이 있는가 ?
불교란 사회 사람들을 상대로 그 것을 받아들이게 해서 진정한 행복을 일구고 안락한 삶을 일구고 진정한 이익을 일구라고 길에서 자면서 길에서 길로 다니며 가르친 중생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에 어떤 사람은 출가를 하여 이익과 행복을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재가로 있으면서 이익과 행복을 얻었다. 불교의 목적은 중생들의 행복과 중생들의 이익과 중생들의 안락에 있다. 그 목적과 가치를 상실하면 불교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냐 아니냐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기본 틀이고 이것이 가장 큰 틀이다.
그러나 불교를 믿기 때문에 좌절이 생기고 불교를 믿기 때문에 열등하게 되고 불교를 믿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행하며 뒤처지는 삶을 산다면 교단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점검해야 한다.
문제는 문제대로 놔둔 채 그에 무조건 부처님 경구절만 외워 주면서 만족하라고만 할 것인가 ? 무아이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만 할 것인가 ? 가난해도 마음만 편하게 쓰면 되니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는 얘기만 들려주며 가난을 싫어하지 말라고만 할 것인가 ?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인들은 불교를 멀리하게 될 것이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멀리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지금 네 모습은 싫다이다. 그러면 끝장나는 것이다. 그 정도는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인들이 불교에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지 문제의 포기가 아니다. 해결 못하면 해결할 수 있는 지혜라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간절한 소원을 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에 값을 치르는 것이 수행공동체에 대한 보시다. 그러나 보시는 복을 쌓는 길이라고 하는 데 그런 해결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공동체에 보시를 해도 복을 쌓는 길이 될까 ? 부담만 쌓는 길이 될 것이다. 사회를 이간질하는 종교에 열광하면 열광할수록 사회분열은 획책된다. 사회를 무능에 빠뜨리는 종교에 열광하면 열광할 수록 사회사람들이 얻는 것은 사회적 무능이다. 그 것은 마약에 빠지면 빠질 수록 돈을 잃고 몸을 망치는 현상과 같다. 과연 그 들이 그 종교에 수많은 돈을 가져다주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 ? 사회분열이다. 불교는 고찰을 통해 중생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런 불교가 목적을 잃고 방향을 잘 못 잡아 나가면 그 잘 못된 종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
3. 그 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법들은 우리가 만든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법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은 그 시대를 그렇게 감당했었다. 최상의 대안이었기에 그렇게 감당하는 법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르치고 이끌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시대로부터 오래 흘러 멀어져 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감당했다고해도 우리의 현대 사회는 구조와 성격이 그 때와 완전히 다른 데 그 때의 것으로 지금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그렇게 해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무엇인가 바꾸어야 함에 우리 불교는 윤활유와 같이 원활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법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관점을 세우라는 금강경의 이해만 있어도 가능하다. 實理 자각에 의한 무소유란 법은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기존의 틀을 바꾸는 데 주저할 일이 없도록 해 준다. 소유만이 삐꺽거리고 뻑뻑하게 만든다. 이런 부분들은 나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는가 ?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보라 ! 물론 의식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침 속에 현재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내 것이라고 착각한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분명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기득권을 바라고 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건전한 방향의 개혁이 실현될 수 있다. 그 가진 것들은 오히려 고쳐야 될 일을 함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이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보수만 죽는 것도 진보만 죽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공멸하고 만다.
개혁은 개혁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기틀을 잡는데 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접근이 교육을 통한 개혁이다. 현재 다중에 의한 보편적인 인식에까지 이르지 못한 특정 지식인에 의해 특별히 준비된 개혁이란 이상적인 비전들이 이상에 그치는 비전들이 아니 되려면 교육적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참선이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옛 날 방식의 참선은 현상황을 타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은 나쁜 것이 되었다. 선이 나쁜 것이 아닌데 현상황은 선이 좋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보완이 되지 않으면 선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안을 짜야 하겠는가 ? 현재 선이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무엇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이 좋으면서도 좋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 총체적인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품화다. 그렇다면 선이 현재에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이 것이 우리가 교육으로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은 생사해탈의 쳡경이니까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 사람들이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 보니까 시간도 그렇고 방법도 그렇고 전혀 소화가 안 된다. 그 게 현실이다. 이 현실 인식을 해야 한다. 네 방법이 잘 못 되었으니 바꿔보라. 이렇게 아무리 말한들 누가 그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인가 ? 그렇다면 누가 바꾸어야 하는가 ? 현대 사회 사람들 모두가 문명 산업기반 모두를 버리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선만을 해야 하는가 ? 아니면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보완하여 기존의 선의 방식에서 빼야 할 것은 무엇이고 더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바꾸어야 하는가 ? 이러한 분별은 너무나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모르겠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불교의 선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만이 그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선의 효과나 목적은 달성하면서 현대인들에게 맞는 선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그런 사람을 찾아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양아치들은 아상들이 많기 때문에 준비되어 있어도 하지 못한다. 법상에 그렇게 자주 올라가 감언이설을 떠들어 대 신도의 눈과 귀를 미혹하게 한 사이비들은 몰라서도 못하지만 그럴만큼 화끈하지도 못하다. 그들이 그 방향으로 가려고 발을 내딛으면 돈이라는 마누라(사주상 편재 정재) 가 완전히 다리쭉지 붙들고 늘어지든지 아니면 걸어가는 그를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든지 할 것이다. 쪽팔리거나 말거나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불교를 맡기면 결국 얻어내는 것은 열등한 불교로 전락함이란 것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진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이런 문제를 놓고 보수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다. 진정한 사회 대안자 불교대안자만이 참 보수요 참 진보다. 어떤 이념이든 생각이든 발상이든 사고방식에 기브스 한 사람들이 나는 진보다 나는 보수다 하면 그야말로 꼴깝 떠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단 내에 정치도 모르면서 정치가 흉내 내는 꼴깞들이 얼마나 많은가 ?
4. 교육 개혁의 방향은 총체적일 때 총체적인 접근을 해야 부작용이 없다.
그나마 현재 수준에서 더 패퇴하지 않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해가려 한다면 그 목표가 원활하게 달성될 수 있는 대안들을 실천할 인재들을 교육으로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개혁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 것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없다면 몽 땅 도루목이다. 나는 이데올르기 대립이 심할 때 그 이데올르기의 목적성을 부각 시켜서 수단에 인권을 함몰시키지 말라고 경고함으로서 이데올르기에 목을 매단 사람들에게서 이데올르기를 떼어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놓은 사람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또라이라고 생각하며 네까짓게 무슨 이라고 생각하며(생각의 일치 ㅎㅎ) 나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게 개혁하려고 할 때 나는 뒤에서 인재양성론을 주장하고 사회주의체제의 우수한 인력들을 유학을 보내 자본주의를 배우도록 주문했다. 중국은 이런 주문을 충실히 따랐고 러시아는 이런 주문을 무시하고 그냥 확 터 버리자고 했다. 그 결과 누가 더 성공할 수 있었는가 ? 오늘 날 결과를 놓고 바라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중국은 최대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돈을 빌려다 쓰는 입장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평가하면 러시아가 앞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로 진입함에 있어 이상을 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그에 대한 인재를 길러냄으로서 현실로 만든 쪽은 중국이다. 인적 과학기술과 자연 자원은 러시아가 풍부한데도 지금 결과가 그렇다. 교육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 사람의 정책 선택이 그런 그 차이를 만들어낸다. 지나친 관료주의는 민중의 아이디어를 국가가 발목을 잡고 지나친 개인소유주의는 개인이 국가의 총체적 아이디어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중국은 사회주의로서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여 개인의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중가의 총체적 아이디어들이 실현될 수 있는 완전소유를 부정함으로 개인이 국가산업기반정책에 대한 발목을 잡지 않게 함으로서 국가발전에 가속을 붙일 수 있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전체민중의 부의 축적은 개인소유가 안정되게 하는 반면 국가 정책을 발목을 잡게 하는 면이 다분히 강하다. 기반산업들이 발전하는 데 한계에 부딛힐 수밖에 없는 면도 많다. 지금 조계종이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능면에서가 아닌 소유면에서만 강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 불교 무소유정신과 이반되어 있고 신도들에 의해 형성된 자본이 몇 몇 독점가들에 의해 독점되어 아이디어가 있는 스님들이 활동할 수 있는 명줄을 쥐고 있다. 그 훌륭한 능력과 아이디어들이 화두하나의 명분 속에서 다 퇴치 사장 되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의 개인적 역량은 매우 뛰어나지만 조계종이란 독점가들에 의해 독점된 자본이 기반 사업을 (교육 사업 일자리)함에 발목을 잡기 때문에 그 역량을 펼칠 수 없도록 하고 있어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형태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본독점에 의한 강한 사회주의적 관료주의 형태다. 그 것은 자본독점에 의한 사회주의적 관료주의라는 것이다. 그 전체 구성원의 현실문제를 타개해 주기 위한 일은 안중에도 없는 권위만 앞세운 그런 무능한 관료주의라는 것이다. 자본이 쓰여지는 일에서 쌍방향의 소통을 잃어버리면 그 날로 망할 날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 아무런 지원도 없이 인사권을 휘두르는 일방적 권력에 대한 조폭성 상납주의는 포교의 어려운 요소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거기다 작은 일자리에 개똥철학성 전통주의를 앞세우니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거나 소통시키려 하지 않는 작태로 잠잠함을 유지한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는 되바라진 짓을 한다 하여 대번에 왕따 당한다. 그러니 발전은 꿈도 못 꾼다. 그런 현실에서 불교는 그런 무능을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자료에 불과할 뿐이다. 붓다는 그런 내적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악하게 자신의 가르침을 일부를 떼어다가 악용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사악의 방법이 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 것이다.
5. 양아치가 기른 신도는 양아치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눈먼 중생들이 지혜로운 사람을 가려낼 줄 아는가 ? 신뢰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도 그에 대하여 너무나 인색하고 너무나 무지하고 너무나 왜곡되어 있다. 이것이 양아치 불교가 갖는 문제며 양아치 스스로 들인 자신의 극복하기 힘든 병이다. 그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황금을 똥통에 던져 넣고 가난뱅이로 사는 거지와 같다. 뭐 하나 해내려고 하려면 제 자신의 치졸한 탐욕 때문에 별 개트집을 다 잡고 별 개중상모략을 다 해댄다. 불교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그런 인간들에게 배운 신도들은 어떤 태도를 지향하겠는가 ? 너무나 뻔하다. 속인보다도 더 속된 그런 인간들에게 배운 신도들은 개가 사람을 가르친 꼴로 사는 것이다.
6. 현재 필요한 개혁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
그렇게 관법을 훈련했는데도 이에 대한 뚜렷한 기미조차 잡지 못한 느낌이 든다. 서로 토론을 해 보면 누가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육을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 ? 이것을 알아내려면 우리가 지금 하기는 해야 하는 데 막히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내야 한다. 그 막히고 있는 부분을 뚫기 위해 개혁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까 ? 그 것은 그 부분을 뚫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체계를 갖추어 주고 대안을 짜낼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데 역점을 두고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런 감각이 있는 사람은 수두룩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감각있는 사람을 온전히 문제의식을 갖고 문제를 바라보는 데서 그 감별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막연한 기준이 불안의 요소다. 그 것을 극복하려면 논리적 검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문자에 얽매여( 이 인간들은 책이 문자로만 된 줄 안다.) 책을 읽지 말고 놀음을 하라는 간화선 지침에 의해 화투장 두들기지 말고(다 그런 것은 아니니 아닌 쪽에서 발끈할 것이다.) 토론을 하고 또 토론을 해서 찾아내야 한다. 무지는 아무리 뛰고 날고 해도 무지로 그친다. 그래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배운 것을 수단과 방법으로 하여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운 안목으로 토론을 하고 또 하다보면 확실한 답이 나온다. 내가 보는 관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라이다. 답, 지가 어디로 가겠는가 ? 문제 속에 있을 뿐이다. 답을 얻으려 하면 먼저 문제를 보라이다. 그리고 토론하라는 것이다. 붓다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안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었다. 토론은 굉장히 큰 수행이다. 거기에 토론하는 법까지 개발하여 효과를 준다면 그 것은 엄청난 실력향상을 가져 올 것이다. 이 까페에서 답글을 달고 토론을 하는 것을 보면 심리들이 삐뚤어져 있다. 토론에 임하는 자세들이 깽판부리겠다는 자세다. 이 것은 불교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로서 매우 치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에 느낌들이 없는 모양이다. 이제 상관안겠다로 돌아선 것 같기도 하다. 불교에 대중공사는 매우 중요한 불교내적 토론 문화였다. 그러나 까페에 올려진 글에 답글을 달아가며 하는 토론이 잘 진행되지 않고 감정 싸움에 깨지기 일수인 것을 본다. 그 것은 불교수행자들이 불교에 미치는 태도가 어떤가를 극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고대로마 민주주의 체제는 자생적이었을지 몰라도 현대민주주의는 불교에서 착상된 것이다. 불교를 깊이 연구하면 그 모든 답이 나온다. 미래 문제에 대한 해답도 나온다. 불교의 정신적 아이템들을 사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학적체계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불교 개혁의 출발점이고 종점이 될 것이다.
7. 현실을 똑 바로 보고 똑 바로 생각하자
이제 위선의 탈을 벗고 과감하게 개혁의 진로를 잡아야 한다. 돈 보고 출가한 양아치들은옷을 벗든지 진정한 출가를 해야 한다. 옛 날에 정이 뭍어나던 시절에는 탁발을 해다가 대중선원에서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면서 정진을 했다. 그 것을 보았던 현재 노보살들에게 그 스님들은 그대로 우리의 훌륭한 스님들이었고 너무나 소중한 스님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스님들이 지금은 불교가 고사 되고 있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보고만 있는 형편이다. 아니라고 외친들 누구의 귀에 그 말이 들리겠는가 ? 독재는 했지만 정치를 그런대로 잘해서 나라가 잘 살게 되자 우리 스님 하던 보살들이 돈좀 만지게 되니 절에 시주하여 불사도 하고 그 우리 스님에게 돈도 뭉텅 뭉텅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참선을 잘 하던 중에 돈을 모은 스님은 내 참선법이 잘되어 돈을 모았다고 착각하고 그러니 그 것 밖에 없다 하고 염불을 해서 돈을 모은 스님은 할 일은 염불밖에 없다고 여기어 그 것만을 강조하고 그리고 요행히 스승을 잘 만나 덤으로 돈을 얻게 된 넘은 복이 많아야 된다고 하며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며 신도들로 부터 돈을 긁어 모으며 허튼 소리를 하고 있다. 그리되어 돈맛을 보니 도보다 돈이 더 좋게 되었다. 돈 좀 만졌다고 무식해도 돈은 들어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며 교육은 뒷전이고 참선하면서 염불하면서 오로지 그 것만 생각하던 버릇이 오로지 돈만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불교돌아가는 꼴을 보아 돈이 웬수처럼 보이는 스님은 문화재 관람료 다 폐지하자고까지 말한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불교발전을 전제로 볼 때 주접 떠는 소리에 불과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심도있는 파악도 깊은 통찰이나 고민도 없이 그냥 현상을 놓고 자평을 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 그럼에도 그 때 젊고 잘 나간 오십대 중반의 가정 살림을 거머쥔 보살들 (현재 노보살들) 우리 스님 우리 스님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보태 주어야지 했다.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하면 효과도 높고 불교인다운 살림을 살 수 있을까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교육을 심어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랬다. 그에 겉만 번드르한 고급스런 양아치 거러지가 된 것이다. 그런 미담들이 가만히 있어도 뭉칫돈 (실상 떼돈도 아니다. 양아치들 특성이 천원짜리 한 장 생기면 쓰기 바쁘다. 자신의 입장을 극복해 보겠다고 하지 않고 사명도 없고 목표도 없이 개똥철학 읊조리며 소주 한 잔 캑 들이키는 게 특성이다 )을 만지게 하니까 돈에 눈깔이돌아가서 제자리를 잡을 줄 모른다.
그 작은 돈 중에서도 내 호주머니에 많이 챙겨야 되어 ! 늙어서 노후 대책을 해야 하니까 ? 포교당 네가 알아서 혀 신도 잘 꼬셔 가지고 ! 이 것이 오늘 날 불교행정의 시작과 끝이다. 배운 것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불상을 갖춰 놓고 목탁만 두들긴다. 그런 현실에서 종단의 지원은 무가치 하겠지만 종단에서는 재원의 비효율적 창출과 운영관리 때문에 그 것을 지원하기 위한 총제적 교육 및 운영관리 기반을 구축할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종단 역시 네 알아서 해보라는 투다. 그러니 십중 팔구는 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조그만 포교당은 신도들의 눈에는 눈에도 안찮다. 온갖 곡예를 다해야 된다. 성공하려면 잠 안자고 죽치고 앉아있기, 물만 먹고 살기, 점이라도 잘 쳐서 신도들 생활을 이끌어 주기(강원 나온 스님도 그렇고 참선을 몇 년씩 하다 나온 스님들도 그렇다.) 등등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 순수하게 신도들에게 그런 쇼를 해 보이기가 쉽지 않다. 육사외도들은 신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불위에서 고통을 참는 것 가시덤불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수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조계종 스님이 그렇게 했다가는 경전에 근거해서 대번 구설수에 오른다. 그렇다고 물만먹고 지낸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 적어도 신도들에게 우리 스님은 똥도 안싸고 사는 스님이야를 심어주기 위해 그래야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 그러나 신도들의 눈에는 그 것만이 스님으로 보인다. 그런 스님이 아닌 포교당 스님은 망할 수밖에 없다. 같이 일구어 절 포교를 해야 한다는 사명 보다는 원숭이처럼 무슨 특기가 있어야 스님으로 보이고 믿고 따를 수 있다는 풍조다. 스님들 쪽에서도 대책이 없고 신도들 쪽에서도 대책이 없다. 양쪽이 다 성이 안차고 서로 눈치 보다 끝난다. 대책을 숙의할 여건도 방법도 배운바 없고 가치도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 신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가족들에게 절에 나온다는 명분을 댈려면 그런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문을 제대로 익혔는가 아니면 요가라도 제대로 익혔는가 ? 선방에서는 화두 하나 쳐들어로 살았고 암자에 머물라 치면 염불밖에 익히지 않았는데 염불만 죽치고 하자니 목이 상해 버린다. 그러니 그에 괴기좀 먹어야 하는데 무슨 포살인가 한다고 하여 고기 먹지 않는 것이라고 말뚝을 박아 외도들의 손가락질 비불교인의 온갖 손가락질이란 손가락질을 다 당하게 만든다. 웃대가리스님은 염불할 일도 없고 화두들고 죽치고 앉아야 할 일도 없다. (먹는 것도 눈꼽만큼씩만 먹을수밖에 없다. 여기 저기 귀한 스님이라고 초대하여 잘 먹는 경우많이 먹었다가는 운동양이 적기 때문에 당뇨에 걸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스님은 작게 먹고 작게 싸는 줄 안다. 그래서 많이 먹으면 엄청 눈치 준다.) 대가리 스님들은 나 밥먹을 만큼 뭔가 해놓았다는 것이다. 제가 잘되면 천하가 잘된양한다. 옛 날 우리들이 수행할 때는 어떻게 했다고 하면서 지랄교훈 펼치면서 그러니 그 앞에서 듣는 스님은 버럭 성깔부려 해댈 수도 없고 울수도 없고 웃을수도 없다. 그러다 한 번 터지면 도반이나 동료 스님들을 붙잡고 한 바탕 해 부쳐 박터지거나 박터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에 잘 참는 공부로 그야말로 화두 공부하듯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것이 간화선이 들여놓은 현실적 습태다.
관찰도 없고 현재에 대한 생각이란 조금도 없고 옛 선배스님이 예 스승이 가르친대로 하자는 것이다. 서로간에 문제가 되는 것을 문제로 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도 없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노보살이 그 일을 보고 들어도 하자가 없는듯이 보인다. 아는 게 그 거 뿐이니 하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런 의욕자체를 갖지 못하도록 염불과 화두란 것으로 뜻이란 뜻을 다 뭉개버린다. 그러니 그런 뜻이라도 가진 사람은 노예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멍청이가 된다. 그런데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가 ? 말이 안 통하면 지 부모하고도 안 노는 세상에 말 안 통하는 스님들하고 놀겠는가 ? 그러니 젊은 세대를 포교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신도들은 이 절에서 법문 좀 한다면 저 절에서 이 절로 우르르 간다. 새로운 신도들이 몰려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 ? 도통이라도 해서 한 번 행세께나 해보고 싶고 세상에 큰 소리 한 번 쳐보며 살고 싶어서. 그리고 죽을 때 자유롭다고 하지 않는가 ? 잘 한다는 것이 제대로 알지도 못한 것 계행을 청정하게 지킨 다는 것으로 홀려 다른 절 신도 우르르 몰려 오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 것이 불교의 목표지점이냐 !) 그러니 이 중은 저 중이 잘 되는 것이 뭔나게 싫어질 뿐이다. 왜 서로 다르게 배운게 없으니 어떻게 해야 서로가 잘 되게 하는 법인줄을 모른다. 그러니 뭔가 해보려고 함에 세가 없이 좀 불거지게 시작했다가는 완전히 땡초, 사이비, 신도 떼어가려고 곤고 사는 넘 악마로 만들어져 버린다.
신도들이 스님을 중심으로 저 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귀의하여 이익을 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서로 토론하는 법이 없다. (하고 싶어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법이라고는 염불과 화두 드는거 빈둥거리면서 노는거 밖에 익히지 않았고 책을 읽었다손 치더라도 지 좋아하는 책만 읽었으니 전문분야의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농부가 밭에가서 일하는 게 아니라 몽순이 생각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격이다. 사명감이란 없다. 그러니 화합할 필요가 없다. 싫으면 떠난다는 것이다. 화합해야 할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다다. 서로 다퉈도 아쉬울게 없다. 서로 소중한 사람이 되기는 커녕 공동의 목표가 없이 푹퍼져 사니 맘에 안들면 쏴 붙이고 만다. 절대로 자신은 잘 못이 없다. 거기다 출신 지역이 다르다 하면 세가 없으면 왕따일번지가 된다. 천하 없는 어떤 사람이라도 안 된다로 결정 나 버리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 그 것도 불화할 이유가 된다. 한 마디로 개판 오분전이 된다. 열거하면 한량이 없을 것이다.
8. 결론
전반적 교육 개혁으로 막힌 곳을 뚫고 새는 곳을 막자. 재정 이제 풀어 놔주자. 꼭 쥐고 호주머니 속에 처 박아 놓고 있으면 뭐하는가 ? 재정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모이게하고 기획하여 제대로 쓰자. 옛날에 돈이 없어 탁발할 때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문제를 해쳐 나갈까 의논했다. 여유 있는 데 왜 머리 맞대고 불교가 진정한 사회가치를 갖도록 의논하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 그 어려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 인재 기르는 데 쓰고 여법한 포교당 만들어 능력 있는 모든 스님들이 신도들과 함께 기발한 착상들로 한 가닥하면서 펼쳐 보일 수 있는 수행공간 만드는데 쓰자. 서로에게 필요한 학문적 전문성을 부여하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여 알아서 챙겨 주는 서로가 서로의 복지가 되게 하자. 노후 대책 확실하게 세워서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을 앞세워서 서로 보완자가 되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진출해서 신도들이 얻는 이익을 극대화 하자. 자성이 청정한데 그리 못할 것이 무엇인가 ? 너 주인공 하고 나 조연하자하면 그만이다. 그에 누가 잘난 것이 누가 못난 것이 허물이 되지 않게 조화하며 조화시키며 살자 어떤 사람도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는 법이다.
첫댓글 상품화 하라고 하면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이 승속간에부지기 수일 것이다. 점잖은 양반체면 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더욱 그렇고 감상주의에 젖어서 무슨 절간을 물레방앗간 처럼 향수 어린 곳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다.
생긴대로 살자 그 것 까지는 좋은데 상품화가 무슨 성형수술 쯤으로 이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눈쌀을 찌프리게 할 것이다.
생각좀 하면서 살자고 했는데 선지식 문화 노예문화가 일반화 되고 점쟁이 문화란 직감 문화가 일반화 되어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참선을 했다면 온갖 은유방식을 다 꽬 것인데 제대로 참선하는 사람도 없는 모양이다.
염불을 많이 해서 필이 꽂히는 것이 쉬운 사람도 상품화란 말이 뜻하는 말에 대하여 느낌이 올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상품화 ? 과연 그 것이 불교를 살리는 길이라니 뭔말여 ?
소비자 중심 사고방식이라고 하면 될까 ?
참선이란 방식을 제공자 중심에서 하지 말고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 것도 몇 날 며칠 머리 싸매고 말이다.( 어이그 번뇌 무서워서 어떻게 생각을 햐 죽어라고 가라 앉혀 놓았는데 ?) 그러면서 지랄 불교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를 해야 하는가 하고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상품화 운운했더니 무슨 돈벌이로 팔걷어 붙이자로 이해한다. 그러니 골통들이란 것이다. 무우 뽑아다 쳐 먹어 하는 것보다 김치 맛있게 담아서 주면 훨씬 더 먹기좋지 않는가 ? 그 것이 바로 상품화라는 것이다. 그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왜 ?
무우를 뽑아 그냥 먹으면 한 두번은 먹을 만 하다. 그러나 세 번 네 번 먹으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 온다. 기운이치우쳐져 허해지고 먹은 것 같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니 그냥 무우로 먹는 것 보다 김치가 맛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밥을 곁들이면 더 맛이 있지 않는가 ? 양념을 해서 부족한 부분을 매꿔줬거든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수상행식 ...... 생각과 나무아미타불 ......
불교걱정 혼자 다 하시니 속꽤나 상하시겠습니다.^^ 대체로 물(物)이 나를 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얽히는 것이며, 환경(環境)이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속박되는 것입니다. 불법에도 집착하지 않는것이 참으로 불법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비우시고...묵묵히 보시와 봉사를 행하심이 어떠실지요? ()()()
묵묵히 그냥 보시와 봉사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비꼬시니 속이 풀리시겠습니다 그려 이 일좀 해야 겠습니다. 밭을 일구는 데 어찌 고통이 없겠으며 나만 그런다고 생각할 때 어찌 속인들 성할 수 있겠습니까 ? 염려는 고맙게 받아 들이겠습니다. 나는 우주를 일가로 삼은 사람인데 우리나라 불교 쯤이야 손바닥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生知生死知死님 정체가 의심스럽네. 불교신자인지? 사회에 불만있는 사람인지? 조용히 예기해도 다알아듣거든요
왜 내 말에 불만이 있으신 것 보니 정체가 의심스럽네. 불교신자인지 이 까페에 불만이 있는 사람인지 ?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거든요 나의 글에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으로 지적 해 보세요. 트집 그만 잡으시고.시비 거는 것 사양하겠습니다.
여기에 두 분이 답글을 자극적으로 달았다. 이 분들도 불자들이라면 불교가 걱정되어서 일 것이다. 그렇게 알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불교에 대하여 걱정이 되고 이렇게 말하면 그나마 유지되는 불교세가 급격히 떨어져 실로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자극이 필요한 때다. 이런 자극이 여론화 되고 불교가 참 다운 길을 찾아 갈 때인 것이다. 누가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겠는가 ? 이런 진솔한 고백이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좋은 쪽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은연 중 드러나는 나쁜 점은 그 사람에게 환멸을 불러 일으킨다.
지금현재 잘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스님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스님들이 현실에서 부딛히는 어려움과 괴로움은 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다 챙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글 읽는다고 눈만 버렸네
그렇습니까 ? 어떻게 마음을 챙기시길래 하하하하하....... 하하하 그 눈 한 번 꽤나 부실하구먼요 요까짓 글에 눈을 버리다니 .......눈 관리를 잘 하셔야 겠습니다그려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