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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4일 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 요나 1,1―2,1.11
복 음 :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등학교 친구 중에 수학을 무척 잘하는 친구가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기억하는 이유는 보통 수학을 잘하면 다른 과목도 잘하는데,
이 친구는 딱 수학만 잘하는 경우였지요.
다른 과목의 성적은 아주 형편없는 특이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너는 왜 수학만 잘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중학생 때 수학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어.”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다 보니 수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래서 수학 공부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수학 성적도 올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과목의 선생님은 무조건 혼내고 몽둥이를 들어서 너무 싫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혼내는 선생님의 과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만듭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관심을 두게 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 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큰 가치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을 가장 강조하시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덧붙여
‘사랑’에 관한 가르침을 보충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모든 이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이웃’은 자기들 사이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뺀 모든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이란 이방인이건 이단자이건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모든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 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음은 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질문은 이렇게 되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랑해야 더 높은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이견이 없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특별한 이웃만을 나의 이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저의 사부이신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에 듣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과,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제가/ 레위인도 ...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인인 사제,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사뭇 다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머리가 먼저 반응한 것 같지요.
율법의 관점에서, 주검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되어
자기들 앞에 놓인 창창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별 고민 없이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의 내면에서 솟아난 '가엾은 마음'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살피고 돌봅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10,35)
여관에서 사마리아인은 피로도 잊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이로써 충분할 법한데도 떠날 때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두 데나리온은 일꾼의 이틀치 품삯이니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는 다친 이의 현재에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래를 계산해 현재를 모면하려 한 앞의 두 사람과 상당히 큰 차이가 보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피하여"(요나 1,3.10)
요나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그분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가 향한 곳은 주님 쪽도 아니고,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니네베 쪽도 물론 아닙니다.
정 반대쪽으로 작정한 듯 멀리멀리 떠나는 요나의 모습에서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의 냉정한 발걸음이 겹칩니다.
요나도 주님을 떠나면서 니네베의 미래에 손을 놓은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서도 손을 뗀 것입니다.
'나 아니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어도 그만이고...'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요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나는 니네베를, 그리고 니네베를 통해 하느님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나를 쫓아가십니다.
요나가 겪은 폭풍과 물고기 뱃속 이야기는
어린이들도 귀가 솔깃할 만큼 다이나믹하고 흥미지진하지요.
사실 그분께는 순종적이고 성실하며 잘 준비된 예언자들이 많이 있으시니,
도망간 사람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부르시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요나야, 너 말고도 니네베를 도울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는 꼭 너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싶단다. 너의 구원도 이 일에 포함되기 때문이란다." 하시는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의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하느님도 피한 것이고, 피함으로써 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강도를 만난 것도 통탄할 일인데
거기에 더해 외면당하고 버림받기까지 한 거지요.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강도당한 뒤 고통 속에 버려지기까지 한
그 사람의 존엄성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다가가서 치료하고 돌보며 미래까지 염려해 손을 내민 사마리아인을 통해
영육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이가 되살아납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도 회복하게 된 거지요.
듣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사마리아인은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였던 것입니다.
구원은 자비를 베푼 사람은 물론 자비를 입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어주는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니까요.
"누가 너의 이웃이냐?"
사랑하는 벗님!
이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덕분에 그가 구원을 체험하고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되니
이웃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요!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표같이 느껴집니다.
만민의 형제,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나,
결국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여기서는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알려 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며 벌을 주시듯이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묻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율법도 모른다.
율법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율법을 알겠는가?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 것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 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성과가 없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제방에 냉풍기가 있습니다.
에어컨은 아니지만 틀어놓으면 뜨거운 여름밤을 견딜 만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냉풍기를 틀어놓아도 시원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외부로 연결되는 관이 낡아서 연결부위가 떨어졌습니다.
테이프를 가지고 연결부위를 고정하니 다시 시원해졌습니다.
방에 있는 냉장고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2년 동안 사용하였습니다.
문득 냉풍기가 생각났습니다. 냉장고를 벽에서 조금 떨어트렸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냉장고 안에 있는 물이 훨씬 차가워졌습니다.
맞았습니다. 냉장고가 벽에 너무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에서 나오는 열기가 다시 냉장고를 따뜻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다리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때 ‘황제 다이어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체중을 조절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중 조절은 우리 몸에 커다란 부작용을 주게 됩니다.
탄수화물의 섭취가 적을수록 우리 몸의 인슐린 생산도 적어집니다.
그런데 혈중 인슐린이 적어지면 당뇨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황제다이어트는 자신의 몸을 당뇨병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비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소탐대실’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몸은 순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이 체중조절에 정도입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을 특별히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값싼 은총은 싸구려 상품 같은 은총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총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총입니다.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총, 십자가 없는 은총, 살아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총
이것이 값싼 은총입니다.
값비싼 은총은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이며, 기도해야 할 은사이며, 두드려야 할 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은총은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느님에게도 값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생각과 삶이 하나였고, 기도와 실천이 하나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10월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여물고, 다듬고, 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고통은 왜 신비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율법의 핵심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깨달았지만, 아직 실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면 모두가 다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분별하는 이유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사람을 분별하여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에게만 잘해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려야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두에게 자신에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리는 방식은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인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아를 위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생판 모르는 채로 태어나 만난 형제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분별이 사라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류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분에게서 왔으므로 그분과 별개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살 때 필연적으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려면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께 예배는 드리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을 믿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던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친형제였다면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생겨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가지는 않지만,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아를 죽이는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 안에 세상의 아픔이 포함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처럼 상대를 바라보니 아픈 사람을 그냥 놓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뜨렸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들었지만,
금 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엔 무너진 벽에서 굳은 회반죽 한 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머리를 다친 사람이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고통 받는 사람뿐이란 뜻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길을 잃고 남의 집에 들어가 부모 없이 사신 까닭에
버려지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집의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십니다. 물건들에 당신의 아픔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가출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처지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고통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고통이 타인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고통과 멸시를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은 물론 나를 상처 입힙니다.
그러나 상처받아 봐야 내 몸처럼 치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부러라도 단식도 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도 당해보는 등의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고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주님께 항상 고통과 멸시만을 청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도할 때, 위로와 고통에서의 해방만을 청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고통의 신비’를 바치며
실제로는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비는 곧 은총입니다. 고통이 은총이란 뜻입니다.
은총이라면 오히려 달라고 청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면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 약해지고 생명도 잃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습니다.
미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 당시 포로로 잡혀
기약 없는 잦은 고문을 당하며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삼성장군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은 왜 포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석방되리라 믿었던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나게 되면
그래도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는 석방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면
상실감이 반복되어 결국은 버티어내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낙관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되, 마침내 이기겠다는 믿음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물론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이 신비롭다고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보다는 지금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빨리 떨쳐버려야 할 원수처럼 여기기보다 나를 동반 성장시키는 친구처럼 여겨야 합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치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죽지는 않았으나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길을 가던 두 친구도 탈진 상태였습니다.
한 친구는 쓰러진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그러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먼저 떠났고 다른 한 친구는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업고 걸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먼저 갔던 친구가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업은 친구는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칼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했고,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이 쓸수록 열매가 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말고 친구로 대해봅시다.
내가 참아내는 고통이 이웃을 더 공감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그것이 나를 살리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기지 못할 고통은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낼 때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