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처음부터 마개가 없이 만들어진 구멍들도 있다. 나는 그런
불량품이었다. 그렇기에 빈 속을 꽉 채우고 싶은 삶의 의욕도,
누군가에게 나를 쏟아부어주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그저
안에 담긴 약간의 희망마저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마개가 될 만한 것이 필요했다. 일단은
무엇으로든 구멍을 막아야 했으므로. 처음에는 책을 쑤셔 넣었다.
조금 지나니 다시 빈틈이 생겼다. 다시, 우정으로 틈을 막았다.
그 틈은 자주 갈라져 위험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는
사랑이라는 마개를 찾았다. 크기는 충분했다. 마침내 만족스러웠다.
나는 몰랐었다, 실은 그 마개가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내 기억 속에 찍힌 화인(火印)처럼 지워질 수 없듯이
사랑도 그러했다. 영영 뽑힐 수 없는 견고한 마개였던 것이었다.
내가 다시 生의 수레바퀴에서 내려서려면 영혼의 병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이 두려운 결론. 딱 맞는 마개를 갖게 된 순간부터
병은, 구멍은 오로지 혼자가 아니다. 마개까지 해서 한 몸이 된다.
내가 병을 결코 깨뜨리지 못할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차마
쏟아버리지도 못하게끔 단단한 마개로 남아, 기어코 참담한
내면을 끌어안고 끝끝내 살아가게 만드는, 잔인한 당신.
마개/최승호
포도주병의 코르크 마개들,
맨홀 뚜껑들,
저수지의 수문(水門)들,
나는 내면의 비밀스런 한 구멍을 뚫음으로써 온 우주가 쏟아져 들어오는 문열림의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그 구멍은 늘 고집스런 마개로 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집중의 힘으로 마개를 볼 수는 있었으나 뽑을 수는 없었다. 마개는 다름아닌 고집스런 나였던 것이다. 「마개를 뽑지 마라!」 그 소리는 겁 먹은 나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마왕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마개를 뽑지 않아도 결국 죽음이 마개를 뽑아버릴 것이다. 문열림의 시간, 마왕도 물러나고, 포도주처럼 열린 저수지처럼 나는 쏟아질 것이다. 그때는 웅크렸던 내면이 한없이 펼쳐져서 모든 별을 싸안는 어두운 보자기가 될까. 찢어진 보자기, 밑빠진 보자기, 구멍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보자기, 내면이라고 하기엔 면도 없고 안도 없고 바닥도 없는……
그러나 죽음이 올 때까지 내면의 마개는 여전히 박혀 있을 것이다. 동양인은 장이 길다. 입에서 항문까지의 길, 그 길이 얼마나 길고 질긴 지는 모르겠으나 입에는 마개가 없고 똥구멍에도 마개는 없다. 콧구멍도 마찬가지다. 마개는 없다. 눈, 귀, 정수리, 그 어디에도 마개가 없는데 어떻게 나의 내면엔 뽑아버릴 수 없는 배꼽처럼 마개가 콱 박혀버린 것일까.
...第27夜
내 삶은 여전히 불량하다. 그래서 나는, 이쯤, 깨어지고 싶다. 나여, 부디 날 버려다오.
첫댓글 마개의 화두, 잘 읽었습니다. 시도 시이지만 덧말이 더 인상적이네요. 좋은 덧말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황사님이 다시 슬픔의 바다님으로 돌아오셨나요? 머리색도 바뀌시고 길어지시고.. 늘 인상적인 시들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