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매스컴에서도 중앙대를 "트윈타워"의 팀으로 자주 불렀지,"허재의 팀"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그만큼 당시 한기범-김유택의 두명의 2미터대 센터,더블포스트의 존재는 허재라는 플레이어의 존재감을 많이 깎아먹었지요.
그때까지의 한국농구에서 팀에 한명도 보유하기힘든 2미터대의 장신,그것도 외곽슛과 기본기까지 탄탄한 두명의 센터를 동시에 스타팅출장시키는 중앙대는 트윈타워,더블포스트의 팀이었지 허재의 팀이 아니었습니다.(김유택씨의 실제신장은 2미터가 넘는다고하죠.공식신장은 197센치지만...실제로 전희철보다 이마 하나는 더 높더군요)
또한 대학시절의 허재는 재능은 특출났지만 인성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많은 선수였지요.난투극도 많이 벌였고,트러블도 자주 일으키고..80년대의 이천수라고나 할까요.
허재가 본격적인 그의 시대를 맞은것은 중앙대를 졸업하고 기아에 입단한뒤부터였습니다.당시 신생실업팀 기아는 중대멤바들을 싹슬이해서 사기조합을 구축했지요.결과는 7연속 농대우승이었습니다.
한기범-김유택-허재-강정수-강동희라인의 기아는 국대팀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었지요.
188센치,85킬로의 그의 하드웨어는 당시 슈팅가드,또는 포워드로써는 이상적인 체격조건이었습니다.몸무게가 많이 나가는것은 순전히 근육때문이죠.지금도 허재의 팔근육은 탄탄합니다.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빠졌지요.나이 40이 다되어가는데도..
하드웨어적인 측면만 따져봐도 허재는 가드/포워드포지션에서는 국내최고였습니다.동급최강의 스피드.그리고 순발력.수직점프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젊었을때는 투핸드덩크도 가끔 찍었었습니다.수직점프만으로는 같은 나이대의 이상민이나 김병철보다 못했지요.
허나 허재는 떠있는 순간의 밸런스와 집중력만큼은 한국최고였습니다.마이클조던의 강점이 단순히 높이 뜬다는것보다 오래 떠있고,떠있는 동안에 별짓을 다할수있다는것이라는과 비교할수있겠지요.
지금도 허재의 돌파에 이은 레이업을 보면 높이 뜨지는않지만 아주 동작이 스무스하고 점프해서 떨어지기직전에 공을 사뿐히 올려놓는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왼손잡이지요.
85킬로의 단단한 몸으로 리바운드와 허슬플레이에도 능했습니다.그때에는 기록이 제대로 되지않던 시절이라 그랬지만 전성기시절의 기량으로 지금 케이비엘에서 뛴다면 일주일에 한번씩 트리플더블은 우습게 해줄겁니다.(그때당시에는 어시스트에 대한 기록이 참 허접했었죠,기록원들이 뭐가 어시스트이고 뭐가 그냥 패스인지 헷갈려했다는..)리바운드평균 6~7개씩 매시즌마다 해줬지요.
허재가 수비코트에서 볼을 받아서 공격코트로 공을 운반해옵니다.드리블을 계속하다가 돌파를 해서 골밑에 들어갔다가 삼성센터 이창수가 블럭을 뜨자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합니다.다시 그가 돌아나온 허재에게 패스를 하고 허재는 3점슛을 날립니다.슛을 날리자마자 그는 골밑으로 접근해서 높은 점프로 이창수외로 공격리바운드를 걷어냅니다.그리고 밖으로 볼을 끌고나와서 다시 3점슛.골인입니다.
이 모든 동작이 불과 20초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드웨어와 테크닉으로써 그는 한국최고의 선수였습니다.
허나 그것만이라면 제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있지않을겁니다.
그는 한국최고의 승부근성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어쩌면 최강팀인 기아에 속한것이,최강포인트가드인 강동희와 최강센터진인 한기범과 김유택과 함께 플레이한것이,
그의 재능과 성장을 거기에서 멈추게한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사실 허재가 선수중반기에 많은 방황(음주운전,폭력사태.국제대회중 태업등)을 한것도 더이상 그가 국내에선 도전할것이 없기때문에 그렇게된것이 아닐까하는...사실 허재가 없어도 기아는 한국최고의 팀이었습니다.한기범-김유택-강동희라인에 맞설만한 실업팀이 어디가 있었던가요.
케이비엘 원년,허재는 농구인생 최대의 수모를 당합니다.
클리프리드라는 좋은 용병과 김영만이라는 최고포워드를 영입하고 김유택과 강동희라는 최고의 센터와 포인트가드를 가진 기아는 케이비엘 원년에 허재를 줄곧 벤치에 앉혀놓고 쉽게 우승을 해버립니다.
첫댓글어느 정도는 맞는 말씀입니다만, 중앙대 시절 2학년 때도 이미 허재는 수퍼 대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학 운동팀의 선후배 관례는 상당한 것이었는데, 제가 학교 후배로써 저희 학교 교수님, 운동부 선배에 의하면 이미 2학년때부터는 팀 케미스트리의 중심을 허재로 잡아나갔을 저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허재가 오른손 뼈가 골절되었음에도 날아다녔던 플옵은 97~98이 아닌 98~99 시즌이었구요. 그 경기에서 35득점을 한 적은 있고 더블 더블도 기록했지만 40득점은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것보다 더 잘못된 얘기는 재키 존스는 그 다음 해에 왔고 당시에는 제이 웹이란 선수가 있었죠.
허재와 선동렬..동감합니다. 제가 살면서 거의 밤새술먹고 술냄새 풍기면서 경기에 나와 날라당겼다는 소리는 허재와 선동렬을제하고는 들어보지도 못했...(=_=),...차범근씨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전성기여서 잘모르는게 안타깝지만 나머지 두분은 제가 두눈으로 확인한 괴수..=_=
바위님(바클리는 위대했다를 멋대로 줄임..죄송..=_=) 말씀대로 김유택과 한기범으로도 충분히 괴력이었죠. 한기범 비실해보인다고 우습게 보시는 분들 간혹 계시는데 그 양반 블록슛을 경기장에서 바로 눈앞에서 본 저로서는 절대 수긍못할... 좀 삭아보이셔서 그렇지(95년영상이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_=;;
저기....ㅡㅡ; 8개가 기본은 아니었을 지언정 평균 5개를 집어넣었으니 8개 가량 넣은 경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허재는 농구대잔치 사상 첫 정규 시즌 평균 30 스코어러였죠. 8개인 적도... 수준이 아니라 8개 이상을 넣은 경기는 94년 한 해에만 제 기억으로 5경기나 되네요.
젤 엽기적인건 허재가 김유택 다음으로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낸 리바운더라는 거죠..농대시절 다합쳐서 그 쟁쟁했던 몸빵파들..심지어 한기범보다도 리바운드 갯수가 많았던 가~아드..였습니다. 순발력이 발군이니 머...그 심한 반칙성 플레이가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플레이어죠..
허재가 다치고 날았던 플옵은 97~98 시즌이 맞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그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득점은 2차전에서의 30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점슛을 평균 5개 넣은 적은 아마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통 3점슛 1위가 3.xx대에서 결정이 되는 데요.. 당시도 그랬던 걸로 기억 하구요..
제가 "3점슛 8개가 기본"이라고 쓴 의도는 평균3점슛성공횟수가 8개가 아니라,당시에는 허재가 3점슛 8개이상씩 꽂는 날이 부지기수로 있어서 스포츠신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다루진않았다는걸 의미하는겁니다.요즘 누가 3점슛 8개꽂으면 난리나잖아요.허재는 3점슛컨디션이 안좋을때는 아예 돌파만 하고.
당시 어시스트는 공격공헌도라는 용어로 보통 1위가 5개 정도 였고 허재는 보통 5위권 정도로 3개 정도를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어시스트를 짜게 먹였던건 사실이구요. 리바운드는 보통 게임당 6,7 개 정도를 기록하면서 15위권 정도에 랭크 되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직머쉰님, 허재가 다친 후의 파이널은 제가 확실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또한 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점이... 김병철이 4학년 시절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평균 4.2개의 3점슛으로 1위를 기록한 건 아시는지요? 3개대가 시작된 건 프로 출범 이후였지 농대 시절에는 거진 4개 이상에서 갈렸답니다.
정확히 경기당 다섯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4.8개 이상이었던 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당시에 제가 일일이 카운트를 셌었으니까요. 그리고 농구대잔치의 경기수를 생각해 보시면.. 2주일...이라면 가능할지도^^ 허재는 서른 중반을 넘긴 나래 시절에도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바 있으니까요.
예..뭐 3점슛에 관한 부분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 다고 했으니까요.. 김병철이 4개 넘겼던 것은 기억이 날듯하고 (성공률이 50프로 정도였던 걸로,,), 정인교가 득점왕 먹던 해에 5개를 넘겼던 것도 기억나긴 하는데.. 농대에서 3점슛 1위가 4개가 넘었던 것이 그 두번 이외에 기억이 안나서요..
대니얼님께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다면 맞는 거겠죠.. 근데 그게 몇년도 시즌이었는지.. 또 트리플 더블에 대한 부분은 분명히 본문에서 '지금 케비엘에서 뛴다면' 이라고 가정 하셨기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한것이구요. 허재가 그때 기량으로 케비엘에서 뛴다면 어시스트는 6,7 개 정도 기록 할수 있겠지만
기아가 8강에서(맞나?) 중앙대에게 무너졌던 해입니다. 제가 중 2때였는지 중 3때였는지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그해 농구대잔치 최초로 평균 득점 30을 찍으며 김현준의 아성을 무너뜨렸었죠. 당시 인사이드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뛰어나오다가 공을 받아 엄청난 속도로 솓구치던 이른 바 '돌고래' 3점슛이 ?
그리고 KBL에서 허재가 2주에 한번씩 트리플 더블을 할 수 있다는건... 저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농구대잔치를 말하는 거죠.^^ 농구대잔치는 정규리그와 플옵을 통틀어 많으면 한 스물 다섯 경기쯤 했던 것 같은데 맘만 먹으면 그 중 30% 정도는 트리플 더블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첫댓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씀입니다만, 중앙대 시절 2학년 때도 이미 허재는 수퍼 대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학 운동팀의 선후배 관례는 상당한 것이었는데, 제가 학교 후배로써 저희 학교 교수님, 운동부 선배에 의하면 이미 2학년때부터는 팀 케미스트리의 중심을 허재로 잡아나갔을 저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허재가 오른손 뼈가 골절되었음에도 날아다녔던 플옵은 97~98이 아닌 98~99 시즌이었구요. 그 경기에서 35득점을 한 적은 있고 더블 더블도 기록했지만 40득점은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것보다 더 잘못된 얘기는 재키 존스는 그 다음 해에 왔고 당시에는 제이 웹이란 선수가 있었죠.
한국에서 태어난게 신기한 사람 3명. 축구 - 차범근, 농구 - 허재, 야구 - 선동렬
전 축구는 차범근 선수시절을 거의 못봐서 모르겠고..^^;;..농구에 허재, 야구에 선동렬은 제 아버님과 함께 절대 동의합니다.
허재와 선동렬..동감합니다. 제가 살면서 거의 밤새술먹고 술냄새 풍기면서 경기에 나와 날라당겼다는 소리는 허재와 선동렬을제하고는 들어보지도 못했...(=_=),...차범근씨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전성기여서 잘모르는게 안타깝지만 나머지 두분은 제가 두눈으로 확인한 괴수..=_=
바위님(바클리는 위대했다를 멋대로 줄임..죄송..=_=) 말씀대로 김유택과 한기범으로도 충분히 괴력이었죠. 한기범 비실해보인다고 우습게 보시는 분들 간혹 계시는데 그 양반 블록슛을 경기장에서 바로 눈앞에서 본 저로서는 절대 수긍못할... 좀 삭아보이셔서 그렇지(95년영상이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_=;;
한경기 3점슛 8개는 과장이네요.
...한경기 8개인적도 분명히..있었지만 기본인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남의 동네 골밑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말 제눈으로 허재랑 조단의 플레이를 다는 아니지만 마니 보았다는게 행복합니다. 저보다 5살많고 농구를 무지 좋아하는 사촌형덕에 다 가능한 일이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행운인지^^
저기....ㅡㅡ; 8개가 기본은 아니었을 지언정 평균 5개를 집어넣었으니 8개 가량 넣은 경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허재는 농구대잔치 사상 첫 정규 시즌 평균 30 스코어러였죠. 8개인 적도... 수준이 아니라 8개 이상을 넣은 경기는 94년 한 해에만 제 기억으로 5경기나 되네요.
아무튼 조던과 허재가 있는 시대에 태어난게 행운이라는 생각만 드는군요...
젤 엽기적인건 허재가 김유택 다음으로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낸 리바운더라는 거죠..농대시절 다합쳐서 그 쟁쟁했던 몸빵파들..심지어 한기범보다도 리바운드 갯수가 많았던 가~아드..였습니다. 순발력이 발군이니 머...그 심한 반칙성 플레이가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플레이어죠..
허재가 다치고 날았던 플옵은 97~98 시즌이 맞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그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득점은 2차전에서의 30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점슛을 평균 5개 넣은 적은 아마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통 3점슛 1위가 3.xx대에서 결정이 되는 데요.. 당시도 그랬던 걸로 기억 하구요..
제가 "3점슛 8개가 기본"이라고 쓴 의도는 평균3점슛성공횟수가 8개가 아니라,당시에는 허재가 3점슛 8개이상씩 꽂는 날이 부지기수로 있어서 스포츠신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다루진않았다는걸 의미하는겁니다.요즘 누가 3점슛 8개꽂으면 난리나잖아요.허재는 3점슛컨디션이 안좋을때는 아예 돌파만 하고.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고 저도 허재팬입니다만 약간의 과장이 다소 섞여 있는거 같습니다. 지금 케비엘에서 1주일에 한번 트리플 더블을 한다면 3게임 마다 한번씩 트리플 더블을 한다는 얘기 인데요..
슛컨디션이 좋다싶으면 난사다싶을 정도로 쏴대서 다 성공시키고,그런 타입이였습니다.3점슛 평균이 3개라 치면 경기당 2개,4개,3개 요런식으로 넣는게 아니라 하나도 없는 날도 많고 여덟개이상씩 넣는 날도 많고 이런식이었죠.기복이 심한게 아니라 워낙에 공격옵션이 다양해서
3점슛이 안들어갈때는 아예 돌파위주로 플레이하고 3점슛잘터질땐 3점슛위주로 공격하고그래서 그런거죠.문경은의 3점슛은 전문수비수붙이면 틀어막을수도 있지만 허재의 3점슛은 던질거 알면서도 못막습니다.드리블하면서 돌파하려하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점프슛해버리니까요.슛타이밍은 문경은의 거의 2배정도 빨랐음.
허재가 전성기의 끝무렵이었던 93~94시즌 농구대잔치 평균스탯이 대략 30득점,7리바운드,5어시스트정도였습니다.어시스트갯수를 짜게 먹이던 그때의 관행으로 봐선 지금 허재가 그때의 기량으로 뛴다면(물론 용병이 있기때문에 하락했겠지만) 1주일은 몰라도 2주일에 한번씩 트리플더블하는건 문제가 없을거같은데요.
당시 어시스트는 공격공헌도라는 용어로 보통 1위가 5개 정도 였고 허재는 보통 5위권 정도로 3개 정도를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어시스트를 짜게 먹였던건 사실이구요. 리바운드는 보통 게임당 6,7 개 정도를 기록하면서 15위권 정도에 랭크 되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용병이 없을때라 문경은이나 우지원도 허재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5,6개 정도 리바운드를 기록했었구요.. 허재가 그 기량으로 케비엘에 온다면 어시스트는 늘것이고 리바운드는 꽤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트리플 더블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워서 설사 30점 5어시스트에 7리바를 한다해도 2주일에 한번 하는 것은 많이 무리일 것입니다. 엔베이로 치면 시즌동안 13,14번 정도의 트리플 더블을 하는 것일 텐데요..
매직머쉰님, 허재가 다친 후의 파이널은 제가 확실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또한 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점이... 김병철이 4학년 시절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평균 4.2개의 3점슛으로 1위를 기록한 건 아시는지요? 3개대가 시작된 건 프로 출범 이후였지 농대 시절에는 거진 4개 이상에서 갈렸답니다.
정확히 경기당 다섯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4.8개 이상이었던 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당시에 제가 일일이 카운트를 셌었으니까요. 그리고 농구대잔치의 경기수를 생각해 보시면.. 2주일...이라면 가능할지도^^ 허재는 서른 중반을 넘긴 나래 시절에도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바 있으니까요.
예..뭐 3점슛에 관한 부분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 다고 했으니까요.. 김병철이 4개 넘겼던 것은 기억이 날듯하고 (성공률이 50프로 정도였던 걸로,,), 정인교가 득점왕 먹던 해에 5개를 넘겼던 것도 기억나긴 하는데.. 농대에서 3점슛 1위가 4개가 넘었던 것이 그 두번 이외에 기억이 안나서요..
대니얼님께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다면 맞는 거겠죠.. 근데 그게 몇년도 시즌이었는지.. 또 트리플 더블에 대한 부분은 분명히 본문에서 '지금 케비엘에서 뛴다면' 이라고 가정 하셨기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한것이구요. 허재가 그때 기량으로 케비엘에서 뛴다면 어시스트는 6,7 개 정도 기록 할수 있겠지만
리바운드가 꽤 많이 줄어들 텐데 6게임에 한번씩 트리플 더블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거라는 것이 제 생각이구요..
기아가 8강에서(맞나?) 중앙대에게 무너졌던 해입니다. 제가 중 2때였는지 중 3때였는지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그해 농구대잔치 최초로 평균 득점 30을 찍으며 김현준의 아성을 무너뜨렸었죠. 당시 인사이드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뛰어나오다가 공을 받아 엄청난 속도로 솓구치던 이른 바 '돌고래' 3점슛이 ?
그리고 KBL에서 허재가 2주에 한번씩 트리플 더블을 할 수 있다는건... 저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농구대잔치를 말하는 거죠.^^ 농구대잔치는 정규리그와 플옵을 통틀어 많으면 한 스물 다섯 경기쯤 했던 것 같은데 맘만 먹으면 그 중 30% 정도는 트리플 더블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질문.. 농구대잔치 30+ 는 이충희가 먼저 아닌가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충희죠....
저도 당근 이충희 선수가 30+ 했었던 줄 알았는데, 아니라더군요.ㅡㅡ; 다른 실업대회에서는 30+ 너끈히 한 적도 있지만 농대는 허재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Magicmachine32 님~~정인교 득점왕먹었었어요???흠..흠..
이충희는 농구대잔치에서 평균 30+ 했던 해가 그렇지 않은 해보다 더 많은 걸로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