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韓) 독립의 혼(魂), 토마스(多默) 청계(淸溪) 응칠(應七) 안중근(安重根 ) 의사(義士)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 안중근(安重根 ) 의사(義士) 사진 1879. 9. 2.(고종16년)~1910. 3. 26.
조선 말기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義士). 동의회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담당했으며,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 했다. 1910년 여순감옥형장에서 순국하셨다. 한국인이 알아야 할 인물 이야기 No. 1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안분도, 안준생)
▲ 안중근 의사가 쓴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거 후 1910년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글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미완성의 책이다. 여순 감옥에서 담담히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필체가 좋아 많은 이에게 글씨도 남겼지만 감옥에서 의연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일본 간수마저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원래 집필 계획은 ① 서(序) ② 전감(前鑑) ③ 현상 ④ 복선(伏線) ⑤ 문답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논책 완성에는 약 1개월이 소요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는 공소권을 청구해 그 기간에 집필을 마치려 하였다. 이를 안 일제 고등법원장이 논책이 완성될 때까지 수개월이라도 사형집행 일자를 연기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안중근 의사가 ① 서(序) ② 전감(前鑑)을 쓴 직후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경에 사형을 집행해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 체포 후 얼마 되지 않아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 가슴에 수형 번호가 적힌 리본을 달고 있고, 왼손 약지의 단지 흔적이 보인다. ▲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 재기를 도모하며 맺은 단지(斷指會)동맹
안중근 의사가 김기룡, 강기순, 박봉석 등의 결사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이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만세를 세 번 부른'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가락을 끊었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 (趙氏, 조성녀, 조 마리아)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초호는 청계(淸溪).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시 화면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되는 모습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도 짧고 단호한 편지를 남기셨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도 어머니께 사형판결 후 유서를 겸한 편지를 보냈는데 유서 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아들 도마 (안중근 의사 천주교 세례명) 올림
▲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여순감옥 수감 중 면회 및 유언 사진 (면회 온 프랑스인 신부와 친아우에게 유언하고 있는 모습이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 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 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의 순국직후 유해를 감옥묘지로 발인하는 모습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10시 04분 사형집행, 10시 15분 순국),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사형 집행인이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사형 집행 전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술을 마시게 해 달라거나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5분 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31세 뜨거운 삶을 마감한 안중근(安重根 ) 의사(義士)! 죽기 직전 그는 동생들에게 자신을 꼭 고국 땅에 묻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하지만 안 의사의 묘역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은밀하게 처리된 유해는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 아닌가?
▲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효창원(효창공원)
매년 2월 14일 하면 대부분의 젊은층들은 "발렌타인데이"로만 많이 알고 있다.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후손으로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아닌가... 우리 역사의 중요한 날, 2월 14일을 기억하여야 한다.
일본인들도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 (일본 다큐먼트리 영화)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안중근1995 - YouTube
옮겨 온 글 편집 |
첫댓글 이 귀한 자룔를 어떻게 발굴해서 옮겼는지 노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