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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집을 짓다 (슥2-6)
2026년 9월 7일 (월요일)
찬양 : 은혜로다
본문 : 스가랴 6:1-15절
☞ https://youtu.be/0_MuS4TdUJ0?si=BwMvSCYnF2NCl5nB
오늘 새벽에는 쌀쌀하여 여름옷이 맞지 않은 날씨가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의 옷이 내게는 거북한 옷이 되었기에 나를 바꾸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반전의 옷으로 후반전을 살아갈 수는 없기에 이제 새로운 옷을 준비하고 입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다.
이 한 주간 내가 바꾸어야 할 모든 것들을 점검하고 하나씩 전면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자. 내가 새롭게 입은 새 옷의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도록 말이다. 전반전의 옷이 더러운 옷이 아니라 소중한 옷이 되어 남으려면, 이제 바뀐 계절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주님, 인도하소서.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간의 첫날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본문 스가랴 6장에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환상의 마지막인 8번째 환상이 나오면서 이스라엘 '외부'의 대적들을 향한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을 보여준다. 이어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여호수아에게 관을 씌움)을 보여주는 장엄한 피날레가 기록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성전 재건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백성들의 두려움에 대한 확신을 위해 8번째 환상을 준비하셨다. 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네 병거 환상을 보여주시고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란 부분이 나를 멈추어 서게 한다.
바벨론에서 갓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페르시아 황제가 온 세상을 호령하는 주관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이 하늘의 군대를 상징하는 네 병거가 페르시아 황제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이신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명확히 선언한다.
우리를 억압하는 세상의 거대한 권력과 역사의 수레바퀴조차, 결국 온 우주의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발아래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웅장한 신앙 고백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페르시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세상을 심판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하늘의 병거들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튀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어전에 도열하여 '주인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철저히 대기하고 서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조차 스스로의 혈기나 계획으로 움직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타이밍과 명령에 완벽하게 복종하기 위해 주 앞에 서 있다는 이 말씀이 오늘 아침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히브리어 ‘아마드(עָמַד, Amad)’라는 단어의 뜻은 ‘서다, 머무르다, 견디다’란 뜻을 지닌 단어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견디고 서 있어야 한다. 내가 느끼는 타이밍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견디며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춘 이들의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8절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이 말씀은 바벨론을 향한 철저한 심판을 통해 "내 백성을 짓밟은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루아흐)가 마침내 시원하게 해소되었고 만족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맞출 때 거기에는 세상의 두려움을 맞서 완벽한 승리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능력과 지혜가 있음을 본다.
이 환상 이후에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이 가져온 금과 은으로 '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는 명령이다. 그리고는 놀라운 메시야 예언을 하신다. 12-13절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여기 '싹(히브리어: 쩨마흐, Branch)'이란 단어가 주목된다. 다윗의 무너진 그루터기에서 돋아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다. 그리고 <자기 곳에서>라는 의미는 화려한 왕궁이 아닌 마구간에서, 세상의 눈에는 연약한 싹처럼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싹은 장차 참된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지는 '교회'로 예수님은 친히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며, 그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구약 시대에는 '왕(통치권)'과 '제사장(종교권)'의 직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차 오실 메시아 안에서는 이 두 직분이 충돌하지 않고 <평화의 의논>이 있을 것이라 말씀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를 사하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사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심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제작된 면류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던 면류관을 벗겨서 성전에 두라 하신다. 14절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이것은 여호수아가 완전한 대제사장이 아니며, 영원한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면류관은 그가 계속 쓰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기념물'로 보관하라고 하시는데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댜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에 대해 주석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로 파송된 '공식 사절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록 고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성전의 재건을 열망하며 그곳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금과 은을 이들이 대표하여 무려 1500km를 달려온 이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소중한 마음을 기념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네 사람이 기념되었는데 한 사람은 바벨론에서 온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며, 그 이름이 <요시아>에서 <헨>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10절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분명 10절을 통해서 아는 것은 바벨론에서 온 이들은 헬대와 도비야와 여디야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받아들여준 요시야가 왜 기념해야 할 이름일까? 그리고 그 이름을 14절에서 왜 <헨>이란 이름으로 바꾼 것일까?
성경이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머문 집으로 스가랴를 바로 보내신 하나님을 통해 짐작한다면 이들이 그곳에 머문 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하심이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 요시아의 가정을 주목하셨고, 그를 거룩한 구속사의 통로이자 장차 오실 메시아의 면류관을 예비하는 관리자로 삼으신 것이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 '헨(은혜)'으로 바뀌어 기념되었다는 사실이다. 먼 길을 달려와 금과 은을 드린 수고도, 자기 집의 공간을 묵묵히 내어준 환대도, 결국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헨)'로만 성전에 영원히 기억된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친다.
나의 후반전, 라마나욧의 작은 책상이 바로 이런 요시아의 집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그동안 달려온 나의 이름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헨)'라는 이름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주님, 이 종이 여기까지 온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많은 후원자의 통로가 되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저의 이름은 은혜였다고 고백하며 주 앞에 서는 자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사역의 참된 능력은 내 혈기로 뛰어나가는 데 있지 않고, 온 세상의 주님 곁에 잠잠히 서서 그분의 은혜(헨)를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적용 질문 :
1. 지금 내가 내 타이밍으로 일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잠히 '서 있는' 훈련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2. 화려하고 큰 무대가 아닌, 낡은 구유나 잘린 그루터기 같은 가장 낮고 좁은 '나의 곳'에서 주님이 피워내실 거룩한 생명력(싹)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3. 오늘 하루, 먼 길을 달려온 사역자나 내 곁의 지친 지체를 위해 내 삶의 좁은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요시아의 환대(헨)'를 어떻게 실천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