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폐교 이야기] 23.홍천 영신초교-잣알마다 고소하게 아이들의 꿈이 영글다
강원도민일보 2021.03.12.
‘잣 팔아 노트라도 사게…’ 잣의 선물은 공책만이 아니었다
김영배·장신환씨 이름 딴 학교
땅·잣나무 심어진 산까지 기부
잣 팔아 학생들 연필·노트 구매
동창생 잣 관련 추억 유독 많아
벌목한 목재 톱으로 켜 짓고
개울 흙 퍼서 블록 찍어 지어
온 마을 사람 애정으로 건립
‘옛 춘성군’ 홍천군 화촌면 소재
졸업생 726명 배출 98년 폐교
▲ (사진 위 왼쪽부터) 운동회,마스게임,영신교실꾸미기,상장수여식,중간놀이
“얘들아, 오늘은 야외수업이다.”
“에이∼”
야외수업을 하면 대개 아이들이 환호성을 울려야 하는데,반응이 좋지 않다.아이들은 문밖에 놓인 깡통과 호미를 보고,잣나무벌레를 잡으러 가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산속 깊이 들어가서 잣나무벌레를 잡는 일은 아이들에게 고통이었다.일제강점기 때부터 심은 잣나무에 벌레가 생기자 학생들을 동원시켰다.각자 깡통 하나씩 들려서 산으로 올라가 호미로 잣나무 밑을 파게 했다.그러면 냄새가 매우 심한 빨간 벌레가 나왔다.그 벌레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나뭇잎을 갉아 먹고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을 났다.그걸 아이들에게 잡게 했다.이처럼 영신초등학교는 잣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그래서 지금 학교터에 잣공장이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한때 풍천리에서 생산한 잣으로 종자를 채취해 전국으로 종묘를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학생들은 잣송이 북대기에서 빼고 남은 잣알을 끄집어내었다.북대기마다 몇 개의 잣이 나왔다.학생들이 들고 있는 깡통에는 그렇게 모아진 잣이 담겼고,그걸 모아 팔았다.선생님은 학생들이 모은 잣을 팔아 연필을 사고 노트를 사서 나누어 주었다.
영신(永信)초등학교는 김영배(金永培) 씨와 장신환(張信煥) 씨가 땅을 기부해 지어졌다.그 때문에 학교 이름도 두 분의 이름자를 하나씩 따서 지었다.김영배 씨는 이장이었고,장신환 씨는 사친회장을 했다.두 사람의 학교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학교터 뿐 아니라,잣나무가 심어진 산도 기부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잣을 따서 노트라도 사서 쓰게 했다.지금도 잣공장 한 켠에 가면 두 분의 불망비(不忘碑)가 있다.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비석이다.이 비석은 영신초등학교에 있던 백학기 선생님이 세웠다.사과상자를 뜯어 틀을 만들고 시멘트를 이겨 넣어 비석을 만들었다.그리고 그곳에 글씨를 썼고,박시헌 학생이 글자를 파내 비석이 완성되었다.그 학생이 나중에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학교는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불망비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처음 춘성군 대룡초등학교 영신분교가 됐을 땐 학교 건물이 없었다.아이들은 밖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그걸 본 학부모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학교건물 짓는데 앞장을 섰다.벌목을 해서 나무판자를 톱으로 켜 학교를 만들었다.정말 감개무량했다.그러나 그렇게 지은 학교는 어느 해 장마철 수해를 만나 모두 쓸려갔다.그러자 마을사람들은 개울에 있는 흙을 퍼서 블록을 찍었다.또 다시 학교가 지어졌다.마을 사람이 만든 학교이다.흙벽돌 학교는 나중에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 바뀌었다.
학생들이 많을 때는 300명이 넘었으니 기부를 하면서도 꿈에 들떠 있었다.기부한 땅에 학교를 짓고,그 땅에서 난 잣을 팔아 공부를 하고,꿈을 실현할 일을 생각하니,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그 때문에 마을주민들도 학생들도 모두 꿈에 부풀어 있었다.그런데 어찌 학교가 없어질 줄 알았을까.
잣공장을 하는 영신 출신 이광배 사장은 잣을 따러 다니고,학교에서 공부했던 추억을 되뇌었다.반공교육을 많이 했는데,포스터를 그리면 김일성이 손톱이 길고 털이 난 모양으로 했다.그래서 정말 그렇게 생긴 줄 알았다.영신분교에는 백림분실이 또 있었다.백림과 영신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박시헌 선생님은 학교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학교 초기부터 없어질 때까지 추억이 된 일들을 머릿속에 모두 담고 있었다.처음 대룡초등학교 분교로 있을 때 학생들이 3학년까지 여기서 다니고 4학년부터는 북방면 대룡초등학교로 먼 길을 등교했단다.학교 가는 길이 전쟁이었다.그러다가 영신분교가 국민학교로 승격이 되어 6학년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학생 수가 많을 때는 300명이 되었고,마을의 가구 수도 300집이었다고 한다.
너무 시골이라 발령이 난 선생님이 오지 않기도 했다.사연은 이렇다.옛날 영월 마차국민학교에 있던 김 모 선생이 발령이 났는데 이쪽으로 안 왔다.난리가 나서 백림에 있는 박시헌 선생님이 영신에서 3개월 가량 학생들을 가르쳤다.백림에서 6개 반을 맡아 가르치고 또 여기 와서 가르쳤다.그때 학생이 많아서 3학년 30명 4학년이 40명이었다.학교에서 오전 오후반을 만들어 운영했다.하루에 오전 오후 4시간씩 8시간을 가르쳤다.그래서 학생들은 예능 과목을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아이를 둔 26살 아버지 학생도 있었다.6·25전쟁 직후였다.그 학생보다 선생님 나이가 적었다.선생님과 제자가 같이 담배를 피웠다.그 학생이 지금도 춘천에 살아있다.동문회를 하면 아직도 온다.
▲ 영세불망비
운동회 때에는 백림분실 학생들도 와서 같이 뛰었다.운동회는 하루 종일 마을 잔치가 되었다.학부형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함께 놀고,학부형 마라톤도 했다.마라톤 코스는 제법 길었다.영신학교에서 구성포 사거리까지 갔다가 오거나 지금 가락재터널 있는 데까지 뛰어 갔다가 왔다.상품이래야 양은솥이었지만,그래도 운동회라는 생각에 많이 참여했다.마라톤을 하고 돌아오면 개선문을 만들어서 환영했다.양쪽으로 큰 기둥을 세우고 새끼줄을 돌려 묶고,그곳에 소나무가지를 꺾어서 끼워 넣었다.솔문이라 했는데,솔문은 개선문이었다.마라톤이 끝나 들어올 때 이 솔문으로 들어왔다.
김유성 씨도 추억의 보따리를 풀었다.소풍 얘기가 정겹다.소풍은 개울가로 갔다.옻샘계곡에도 가고,지금 피암터널 있는 골안에도 갔다.소풍 때는 동네 사람들이 천렵을 했다.주민과 학교가 소통이 잘 됐다.학교에서 날을 잡아 소풍을 간다고 하면 주민들이 모두 동참했다.소풍을 가면 그 동네 사람들이 선생님들 점심을 모두 책임졌다.개도 잡고 돼지도 잡아 고기를 굽고 했다.
지금 홍천군 풍천리에는 초등학생이 3명이다.화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화성이 폐교되자,구성초등학교로 다니고 있다.자동차가 와서 아이들을 싣고 간다.
영신초등학교는 홍천군 화촌면 풍천리에 있었다.예전에는 홍천이 아니라 춘성군 소속이었다.1944년 대룡국민학교 영신분실로 인가를 받았고,1953년 영신국민학교로 승격했다.1978년 화성국민학교 영신분교로 격하되고,1996년 졸업생 2명을 배출한 후 1998년 9월 1일 폐교했다.45회 72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끝>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