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믿는 이들의 영광이시며 의로운 이들의 생명이신 하느님,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세상을 떠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활의 신비를 믿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옥을 믿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연옥은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성인들은 지옥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큰 자비의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연옥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연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완전해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서 느꼈습니다. 다만 양말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나왔을 뿐인데 잔칫상이 마치 지옥과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보다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더라도 양말을 기울 시간을 주어야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만약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잔칫상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이 없으면 감히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더라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르틴 루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옥이 두려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해도, 죄는 여전히 짓고 보속은 고통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행위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일단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성경에서 제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의 정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우리 믿음은 하느님 자녀, 곧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는 법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행위 또한 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해야만 해서 그 완전의 정도를 낮추기 일쑤입니다.
전에 전교 1등을 하는 고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하라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성적표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1등이 아닙니다. 아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적표를 위조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알까 봐 자기가 죽느니 어머니를 죽이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적표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줍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실천이 나오지 않으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의고사와 같은 성적표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또한 그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전국 1등을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지를 주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목표를 낮추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실천과 믿음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 것입니다.
한때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 코로나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였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으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어야지, 무작정 완전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식이라면 정말 사랑도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옥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연옥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진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요르단 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 체험이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런 권고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