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효성을 가르치십시오.
열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복음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살이와 복음말씀은 아주 똑 같습니다. 구원의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습니다. 학교에서도 똑 같이 공부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 한다면 속 썩을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부모는 속을 썩고,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달라는 것과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실 갖고 싶은 것은 많고, 요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받는 것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급이 많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잘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항상 부족하게 해 줘서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부족한 중에도 자녀에게 해주는 것만큼 자녀가 잘 해주지 못하는 것이 또 마음이 아픈 경우도 많습니다. 바라는 것만큼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감사할 줄 모르고 삽니다.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적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부모가 ‘무얼 해 줬느냐?’고 탓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부모는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몰라줘도 자식만은 알아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몰라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낳아만 줬지, 해 준 게 뭐 있느냐?’고 들이 대더랍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더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데 지쳐서 아마 해 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자식들이 어릴 적 IMF 맞고 힘들어서 학원도 못 보내고, 장난감도 제대로 사 주지 못하고 옷 한 벌도 제대로 사 입히지 못하고 학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그렇게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굶더라도 자식들은 잘 먹이고 입히려고 죽도록 애쓰고 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큰소리 한 번 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살기가 힘들어지면서 이제 점점 기가 죽어갔습니다. ‘너희도 이 나이 먹어봐라.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막말 하는 게 아니다.’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회의 모습은 감사를 모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감사하는 일은 특별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효성은 노력이 필요하고 효도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훈련이 없으면 효도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감사하는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냥 받기만 하는 줄 알게 가르치면 줄 줄을 모르고 나눌 줄을 모릅니다. 부모님을 위할 줄을 모르게 키우면 부모님을 위할 줄 모릅니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부모들이 어른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야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어른들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는 살해까지 하는 세상에서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효성을 다하는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 부모들이 먼저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본을 본다고 합니다. 본보기가 없으면 그 사회는 망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면서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돌아온 것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 안에서 효성과 감사를 배울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길에 빠졌으나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3,1-7
사랑하는 그대여, 1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2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
3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4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6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축일11월 13일 성 니콜라오 1세 (Nicholas I)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867년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로마(Roma)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로마의 사제로서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를 도와 교황청에서 일했고, 교황 성 레오 4세(Leo IV, 7월 17일)의 차부제, 교황 베네딕투스 3세(Benedictus III)의 고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858년 4월 17일 전임 교황 베네딕투스 3세가 선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시 교황좌에 앉았다. 그는 늘 문제시되어 왔던 결혼의 거룩함과 불가해소성을 역설하였고,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리우스 2세(Lotharius II)의 이혼과 재혼을 불법이라 규탄함으로써 수많은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의 오랜 분쟁, 라벤나(Ravenna)의 요한 대주교와의 대립, 랭스(Reims)의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의 야심 등으로 인해 그의 재임기간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정의감은 높은 존경을 받게 하였다. 성 니콜라우스는 ‘대’ 교황이란 칭호를 받는 3명의 교황 중 한 명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니콜라오 1세 (Nicholas I)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