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고 더럽고 맛있는 것이 뭐게?
귀신이 뒷간에 앉아 떡 먹는 것......
(송상옥 “흑색 그리스도”)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글이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청호 100km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청남대가 위치한 청원군 문의면으로 내려가면서 문득 소설 첫 부분의 그 글이 생각났다. 달도 없는 그믐에 비올 확률 80% 이상, 공동묘지를 통과해야 하는 100km 서바이벌 달리기와, 귀신이 뒷간에 앉아 떡먹는 그림의 연상.
“죽이네. 서바이벌 울트라마라톤의 참맛을 다 보여주려 하는군.” 나는 이 대회를 기획하고 추진한 조직위원회의 대담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 같으면 휘영청 달 밝은 보름날 밤에 대회를 연다고 했을텐데.
배번호를 받았다. 333번. 어라, 괜찮네. 지난 부산 비치울트라 참가 했을 때 배번호는 114번이었다. “길 모르면 114번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전화번호안내 숫자를 앞뒤로 달고 부산을 뛰었다.
서바이벌 울트라마라톤이라 하지만 나처럼 중간 그룹에 끼어 어중간하게 가는 치들은 사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나도 아무도 없는 선두를 달리다가 안내 해주는 사람 없는 코스에서 길 잘못 들어 헤매보는 것이 소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번호가 좋다고 해서 달리기가 결코 더 쉬워지거나, 수험번호가 좋다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아닌 법. 언젠가 무슨 시험에서 수험번호를 1472번을 받고 좋아 했었는데 나는 그 시험에서 실패를 했었다. 일사천리는 무슨.... 번호는 이제 단지 코드 혹은 식별번호일 뿐이다.
특히 오래달리기에는 요행이 없다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얻은 배움이다. 꾸준히 연습과 준비를 해 왔으면 그야말로 기분 좋고 즐겁게 달리기를 마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엄청 고생한다. 바로 전 부산에서 곧 그랬다. 막판에는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은 충분한가? 내 속에 있는 내가 물었다. 아니, 자신 없다. 겨우 월 200km를 소화한 정도이니 언감생심 무얼...... 그럼 왜 또 뛰러 왔어? 글쎄......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반복하는지를.
비가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을까? 아마 대청댐을 돌아나갈 무렵이 아니었을까. 내 배낭 속에는 곱게 접은 비닐 우의가 있었지만 일부러 나는 우의를 꺼내지 않았다. 소위 귀차니즘의 발로였는지, 비가 이렇게 오시다가 곧 말겠지 하는 낙과니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움직일 때 마다 나는 버석버석하는 그 소리와 살갗에 느껴지는 비닐의 습함과 눅눅함이 싫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대신 그에게 나의 믿음을 주었다. 비가 아무리 오더라도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는 못하겠지. 발 젖는 거 오십보 백보 마찬가지 일 거고, 넌 잘 해 낼 수 있을 거야. 계속 움직이면 몸에서 열이 나서 견딜만도 하겠지. 봐 벌써 다섯 시간째 계속 잘 달리고 있잖아.
작년에 한 번 참가했던 대회라서 길이 익숙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면 약간 긴 오르막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작년에는 여기에 벚꽃이 만개하여 바람에 꽃잎이 나부꼈는데 금년은 봄기운이 더디다. 지구온난화라지만 춘래불사춘의 옛말이 여전히 여기서는 유효하다. 벚나무 아래로는 초등학교 일학년 키 작은 아이들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낮은 관목들이 모여 서서 꽃을 피우고 있는데 어둠속이어서 그저 무슨 꽃일까 짐작만 하고 지나간다. 4개로 갈라진 꽃잎. 모여서 나고 흰색 꽃이면 미선나무, 1-3개씩 모여 나고 노란색이면 개나리인데. 미선나무를 이렇게 많이 모아 놓지는 않았겠지.....
슬슬 배가 고파졌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 배낭에는 먹을 것이 없다. 배낭 무게를 줄이려는 얕은 꾀를 쓰다가 그리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렸던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입고 뛸까만 궁리하느라 뭘 먹을까는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청남대에 도착해서야 간식거리를 챙기지 않았음을 알았는데 그 때는 뭘 어쩌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100km 울트라를 몇 번 했다고 벌써 매너리즘에 빠지는 모양이다. 다만 곧 도착할 1CP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신기할 정도로 머리 속에 넣어놓은 예상 시간에 예상 지점을 딱딱 통과하고 있다.
49.9km, 야식을 공급하는 휴식소에서 양말을 갈아 신었다. 비가 계속 내리기에 새로 갈아 신은 양말이 금방 젖어버리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달려 나가면서 배낭에 넣어온 얇은 바람막이 겉옷을 몸에 더 걸쳤다. 이 또한 줄기차게 나리는 비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겠지만 여기까지 잘 달려온 자신에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길은 많이 어두웠다. 준비해온 헤드랜턴은 어디가 말썽이 났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나는 앞뒤 깜빡이가 잘 동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동공을 최대한 확대시켜 내 앞의 어둠을 응시했다. 내 눈동자가 고양이의 그것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의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자 내 몸의 다른 기관들이 아주 예민하게 주위의 상황들을 잘 통제하고 잘 반응했다. 미처 눈이 발견하지 못한 물웅덩이도 발끝이 감지하는 순간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몸의 방향을 바꾸어 피해가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 허공으로 슬쩍 몸을 날리면서 물이 고인 곳을 통과했다. 까불지 마라, 임마. 아직 힘이 남아 있다는 거냐? 힘을 아껴야지 그냥 무시하고 지나 가. 나는 내게 타이르면서 그러한 상황을 잠시 즐겼다.
졸립다. 자정이 넘었겠다. 이렇게 찬비를 맞아 가면서 달리고 있는데도 졸음이라니. 나는 눈을 감고 몇 걸음을 뛰어 보았다. 영 어색하고 불안하다. 10미터쯤 전방에 두어 명이 발을 맞추어 뛰고 있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그 발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방향을 잡았다. 왼발을 내 딛으면서 하나, 둘 세어 열까지 세고 얼른 눈을 떴다. 다행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제대로 잘 가고 있다. 재미삼아 몇 번 이 놀이를 반복하다가 그러나 곧 그만 두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발을 헛딛기라도 하면 그 낭패를 어떻게 감당할 방법이 없다.
금강산수퍼가 있는 어부동과 작년 체크포인트가 있던 양지공원 팔각정을 지나고 피반령 초입에 해당하는 회북까지 가는 길은 멀고 고적하다. 이 구간에서는 무념무상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밤은 더욱 깊어 가고 길은 끝이 없는 듯싶다. 이쯤에서는 모두들 말도 아낀다. 말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달리기를 통한 명상의 극치를 경험한다. 그리고 명상은 졸음을 부른다......
아무래도 졸려서 안되겠다. 아주 졸릴 때는 잠시 눈을 감고 휴식하는 것 이상 좋은 처방이 없음을 나는 안다. 길옆에 있는 간이 정류소를 찾아 들어간다. 그 곳은 이미 먼저 온 손님이 두엇 자리를 선점하고 있지만 내 한 몸 끼어들 공간은 충분하다.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 잠시 까무룩 긴장이 풀어졌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있던 손님은 벌써 자리를 뜨고 없다. 나도 지체 없이 배낭을 메고 다시 비오시는 어두운 길로 나선다.
춥다. 젖은 그대로 잠시 방치했던 몸에 한기가 들어 오싹하다. 관절도 그 사이에 굳었는지 삐걱거린다. 잠시 당황한다. 실수였나?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지 않았나.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할 구실을 만들어 주고 젖은 무릎을 열심히 맛사지 해주었다.
숲이 수런수런 하더니 문득 소란해진다. 후두둑. 큰 빗방울이 떨어진다. 밭에 봄채소를 위해 멀칭해 놓은 비닐 위를 빗방울이 요란스럽게 두드리면서 마구 주위가 시끄러워 진다. 갑자기 딴 세상에 옮겨온 것 같다. 검은 숲과 나무의 실루엣과 어둡고 번질거리고 작은 폭죽이 터지고 구르는 듯한 아스팔트, 몸에 표창처럼 내려 꽂히는 자유의 물방울. 나는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환각 속에 빠진 것도 같고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있는 것도 같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을 탈출하여 드디어 자유를 찾은 주인공이 때 맞춰 내리는 비를 향하여 온 몸을 내던지는 장면의 감흥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73.5km 회북면 회인에서 처음 아는 사람을 만났다. 커피 자동판매기 앞에서였다. 서울에서 차를 가지고 내려오겠다면서 동승자를 모집하기에 대회 게시판을 통해 신청하고 그 날 처음 만나 인사한 사람인데, 거기서 다시 조우하였다. 다들 비를 흠뻑 맞고 있는데다가 여러 모양의 우의와 덧옷을 걸치고 있는 관계로 아는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뻔뻔스럽게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시고 먼저 피반령을 향했다.
피반령은 의외로 쉽게 올랐다. 걸으면서 앞에 가는 사람을 여럿 추월했다. 아직 내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언덕 훈련을 한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출발 후 10시간 50여분, 새벽 4시가 좀 안된 시간에 피반령 고개를 훌쩍 넘었다.
아직 힘은 충분히 남은 것 같았다. 안개낀 피반령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고 2CP와 공동묘지를 지나고, 적어도 이제 피니시까지 구점 몇 키로 남았다는 상장삼거리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내게는 새역사 창조의 길이었다. 팔십 키로를 밤새 달려온 사람답지 않게 싱싱하게 내달리면서 나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의아해 했다. 너, 그렇게 달려도 돼? 아무렴 걱정 마. 이대로 결승점까지 내달릴테야.
아뿔사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은 자만에 다름 아니었고 밑천은 아주 쉽게 바닥을 다 드러내었다. 힘차게 돌아가던 엔진은 어느 순간 멈추었고 에너지 공급도 끊겼다. 어느새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를 나는 가만히 응시하였다. 잘 했다. 까불더니
마라톤은 처음 다리힘으로 한다. 이 단계가 지나면 다음은 심장으로 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신력으로 간다고 했다. 정신력? 뭔 명분이 있어야 정신력이 받쳐 주기라도 하지..... 나는 이제 어둠이 조금씩 걷히는 대청호를 옆에 두고 멈추어 서서 밤새 나를 지켜준 바람막이 겉옷을 벗었다. 333이 찍힌 배번호표. 물에 품 담궈 놓았던 것처럼 그가 밖으로 나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제 버리면서 가자. 나는 이제 남은 거리를 천천히 뛰면서 먼저 집착을 버렸다. 이것 하나로도 많이 가벼워지는군. 욕망과 미움과 경쟁과 거기에서 생긴 찝질한 감정의 찌꺼기들. 의무까지도 날려 버릴까? 비가 참 줄기차게도 오는 군. 이렇게 비가 오는데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야. 그리고 다시는 이런 미친 100km울트라 마라톤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다.
저기 청남대가 보인다. 몇이 나를 앞질러 간다. 운동장으로 향하는데 그 곳을 지키고 있는 알지 못하는 가족들의 응원과 박수소리가 너무 고맙다. 빗물로 질퍽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피니시 라인을 향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겨우 끝났군.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完)
레옹 고생했다. 난 후반부 70km쯤부터 일요일날(4/16) 남산타워에서 또 뛸 생각을 하니 에너지를 조금씩 소비하자며 쉬어가며 뛰었다. 1시간 달리고 10분 쉬고 목표를 15시간으로 잡으니 릴리리 맘보지 뭐 ~ 청남대 입구에서는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며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울트라를 즐기면 재미 있던데 ~
첫댓글 어떻게 두 가지 마음이 너를 다룰 수 잇냐? 미친짓 안하리라, 동시에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울트라는 역시 미친 견들만이 하는 즐거운 프로그램
읽는 나도 힘겹고. 한 편에 인간승리 드라마 같다. 레옹아 그렇게도 힘들고 고생스러움에도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말 하는 너를 존경하고 싶다, 수고했다.
도데체 왜 뛰는가 아직은 몰라요.비 맞고 뛰느라 힘 들었겠다.몸조리 잘해.
레옹 고생했다. 난 후반부 70km쯤부터 일요일날(4/16) 남산타워에서 또 뛸 생각을 하니 에너지를 조금씩 소비하자며 쉬어가며 뛰었다. 1시간 달리고 10분 쉬고 목표를 15시간으로 잡으니 릴리리 맘보지 뭐 ~ 청남대 입구에서는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며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울트라를 즐기면 재미 있던데 ~
레옹아! 공동묘지 안무섭디? 내년에 한번 참가할까했는데, 무서워서 포기.어째든 수고혔다.건강챙기레이~~~~
레옹이 수고했다 흐흐흐 비오는날 울트라 직이주는 구먼 근데 올린 글이 더 직이주네
레옹, 얼굴 한번 보자~
레옹, 나탈리 포트만 잘있냐? 고생많았다. 속히 회복하고 5/8 함께 설렁설렁 뛰보자.
미처 연락을 못했구나 고생했다 내년에 또 갈거지
의식을 거스르지 않고 흐르고 흘~러 자연과 하나가 되고 ~~~~ 드디어 경지에 도달했나니...
고생했다. 서울서 함 보자. 눈감고 잠시 달려보았다니 내 입장이 조금은 이해 되었겠구먼.
안그래도 당시 더지(황금박쥐) 너를 잠시 생각했다. 피반령 넘어 공동묘지 신나게 달리면서는 허무가 떠올랐다. 이렇게 줄곧 달려야 언더텐이 되겠구나믄서.
내년에 함 도전 해보자..귀신도 잡고..또 미친짓인지 경험도 할겸
ㅎㅎㅎ 래옹아 수고 했구 다음에 갔지 해보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하고싶은데 다른 한쪽편의 마음은 아 나도 해낼수 있을까 내년에는 나도 뛰고 싶다. 큰일이구만. 레옹 수고 많았고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찬찬히 다시 읽어봤다~ 나도 그런 느낌을 갖고 달리고 싶다. 레옹, 빛고을 가냐?
고생했구나... 지난 bbu에도 왔었구나...주로에서 함 봤으면 좋겠구나...빛고을은 안가냐?
비 안오고 달 밝은 밤에 뛰어도 힘든데 ..비오는 축축한 밤에 에구 고개가 절로 흔들어 진다.. 수고했다 어서 몸 추스려서 또 도전하길........ㅎㅎ
달리기는 별롤 것 같은데 글쓰기는 거의 프로다. 잘 읽었다. 자주 니글 봤으면 좋겠다.
나는 30분 동안이지만 1cp에서 막걸리 공급했는데... 고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