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고/중세 국가의 동원 능력은 근대 산업 국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주민을 상시 관리할 수 있는 행정 체계나 효율적인 동원을 위한 교통 통신망 등이 미비했기 때문이죠.
산업화 초기만 가더라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1812) 프랑스 제국군의 규모는 약 60만 명, 그중에 점령지 출신을 제외한 순수 프랑스인 병력은 3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적게 잡아도 2000만 명은 되는 듯하니 동원률은 2%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러시아 쪽은 더욱 심해서 3~4000만 명의 인구로 30만 군대도 꾸리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던 전장은 2차 세계 대전 중의 동부 전선, 즉 독-소 전역이었습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총 인구 약 7000만 명 가운데 800만 명을 병력으로 차출했고, 이에 맞서는 소련은 총 인구 약 1억 8000만 명 가운데 1200만 명을 군대에 징집할 수 있었습니다. 양국의 동원률은 각각 11% 6% 내외였던 셈입니다. 이렇듯 130년만에 근대 국가의 동원 능력은 다섯 배 이상 늘었습니다. 물론 산업화 덕분입니다.
아무래도 전근대 정주 농경 국가에서 나폴레옹 시대의 동원률을 크게 넘어서기는 힘들다고 봐야겠죠. 근대 산업 국가의 동원률에 맞먹는 기록이 나타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일단 해당 국가의 인구 집계부터 의심해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말기의 고구려를 분열기 국가의 군벌 집단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논의라고 보고요.
그렇다고 "강병이 30만이었다"는 대문예의 말만 가지고 고구려 인구가 최소 얼마는 되었을 것이다 단정짓는 것도 개운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전후 맥락을 고려해 볼 때 과장된 발언이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7세기 고구려가 과연 전형적인 농경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고, 특히 고-당 전쟁 당시 고구려에 부용된 말갈병 15만 명의 존재는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입니다.
첫댓글 고려가 30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대문예의 발언 때문만은 아닙니다. 1차 고당전쟁 때 고려가 동원한 병력이 30만을 상회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 합니다. 저는 1차 고당전쟁 때 고려가 동원한 병력과 대문예의 발언을 전후맥락을 고려하여 반전파인 대문예가 과장했을 가능성은 적으며 오히려 축소 내지 정확한 발언이라 생각하는데, 님께서는 어떠한 근거로 대문예의 발언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지 궁금합니다. 초기 고구려라면 몰라도 후기의 고려는 거의 농업경제국가로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초기에 비해 중, 후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약탈 비중이 점차 적어지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부여, 책성, 한반도 서북부, 요동일대의 농경지를 확보하여 더 이상 불안정한 약탈에 의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적인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양당서에 의하며 고려의 농경은 당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지요. 그리고 주필산 전투 때 참여한 말갈족은 북부 흑수말갈으로 수서에 의하면 흑수말갈의 정병은 3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필산 전투 때 참여한 흑수말갈족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6천 명 안팍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15만 대군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강병 30만" 운운이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유는 대문예가 무왕에게 당과의 화호를 건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저렇게 강했는데 결국은 당나라한테 망했다'는 취지로 한 말이었으니 고구려 병력을 과장하면 과장했지 축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핵심 지역인 요동, 압록강 유역, 서북한 지역 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농경화 정도를 가늠하기엔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동원 병력에 말갈은 물론 선비 거란 등의 유목 민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고요.
발해 대문예 발언을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이는 관점의 차이로 보겠습니다. 부여 지역은 사료에서도 나오 듯이 동이에서 제일 평탄한 지역으로 농경에 적합한 곳이며 책성이 있는 두만강 일대도 농경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당시 선비족은 거의 중원에 흡수된 상태이며 7세기 무렵의 거란의 인구를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1차 고당전쟁 때 동원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동원되었다 해도 흑수말갈의 예처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1차 고당전쟁에서 고려가 3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대문예의 발언은 단순한 과장이 아닌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발언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이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나라때와는 다르게 당나라의 경우는 서북방 유목민족을 장악해버리고 요서의 거란을 그들 세력권으로 끌어 들임으로서 후방 위협 및 장거리 보급 수송에 대한 수나라때보다 더욱 안정적인 루트를 확보할수 있었다는 점이고 이게 고당전쟁에서 고구려를 힘들게 한 중요 요소중 하나지요.
대문예의 발언은 고구려 군사 동원력에 대한 수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아래 전초 설명으로 말한 문단의 서론으로 보이군요. 대문예의 발언과 실제 당시 수당과의 전쟁동원력이나 각지의 성에 분포한 군사등 총 병력들을 감안해서 봐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30만 대군이라는 숫자의 과장보다 강병이라는 의미가 크다고 볼수 있는 문구로도 보이군요
그리고 고구려 농업에 대해서는 김용만님의 글도 참조<고구려의 경우 요동성에 비축된 군자곡만 50만석, 개모성과 같은 작은 성에도 10만석의 식량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당나라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나, 조선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의 변방에 위치한 성에서 축적된 군량의 규모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
물론 데우님의 말씀처럼 농업 생산력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데아타 연구와 확보를 갖춘다면 고구려의 농업력이나 인구에 대한 추정에 좀 더 설득력을 높일 것입니다.
고구려에 복속된 종족은 부여뿐만 아니라 읍루 말갈 등도 있죠. 고구려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지역 중 상당 부분은 후의 여진-만주족의 거주지로서 유목민은 아니더라도 목축 수렵 채취 등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 시대에도 경작화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저도 기본적으로 고구려가 정주 농경 사회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모습이 전 지역에 걸친 것일까 하는 데에는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당연히 전 지역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래도 말갈족들의 주거지인 연해주 근방은 목축, 수렵, 채취 등의 비중이 강했을 것이며 서요하쪽은 유목 등의 비중이 더 높았겠지요.^^
생산력 뿐 아니라 국가시스템도 동원력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겠지요. 수나라의 경우 2차 여수전쟁때 대략 5천만 안쪽의 인구로 전투병만 113만명을 동원했습니다. 보급부대 등 부수인원 합쳐 3~4백만이었다고 하죠. 주워듣기로 17세기 독일의 라이프니츠였던가요 근대유럽의 지식인들도 "중국의 국가시스템을 배워야한다"고 했을 정도임을 상기할 필요는 있겠지요. 동아시아 국가들의 동원체제는 타문명권에 비해 비교적 일찍 발전했던 듯 합니다. 고려 인구를 4~5백만쯤으로 잡고 중국과 대등한 동원력을 가졌다고 보면 30만의 군대를 유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공격이 아닌 방어 입장이라면 더더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