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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의 형성
인간은 왜 물 속(羊水)에서 잉태되는가?
눈을 크게 뜨고 우주가 만물을 낳는 모습을 바라보면 미물인 동물들도 물 속에서 태아를 기르고 있으며, 날짐승들도 알(卵)속에서 새끼를 기르며, 초목의 새싹들마저 물을 흡수하듯 이것은 바로 ‘모든 생명력을 가진 형체는 반드시 물 속에서 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자의 임신은 남자의 정자 양핵(陽核)을 여자의 알(난자)로써 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자라는 양핵은 여자의 피(血)의 핵인 난자로써 정자를 감싸는 것이다.
임신이 되기 시작하기 이전에 양수로써 태아를 인신상화(寅申相火)의 상태에서 수렴,통일의 금수(金水)의 상태로 전환시키면서 형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가 양(陽)을 통일하는 모습과 통일한 것이다.
우주가 양陽을 포위할 때의 상태를 보면 토(土)와 상화相火가 합세해서 양陽을 포위하면 그 다음은 수렴통일의 금수지기(金水之氣)가 들어와서 재포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인체의 경우에 있어서도 제1단계로서 피가 포위를 시작하는 것이다. 피는 土와 相火가 합세하여 이루어놓은 것으로 피의 질량은 물보다 가볍다. 이것은 피보다 무거운 물(양수)로써 재포위를 하려는 준비인 것이니 바로 우주의 통일 운동과 꼭 같은 것이다.
사람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다. 인간의 형체(몸)란 것은 양핵인 생명과 정신을 포함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노자가 無形無患(무형무환)이라고 한 것은 形을 중시하고 한 말이다. 태아를 물 속에서 기름으로써 생명과 정신을 보존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건강과 총명도 역시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인간은 칠정육욕(七情六慾)의 화(火)를 항상 발하기 쉬운 인간적인 본질도 가지고 있어서 형체를 물(양수) 속에서 길러냈던 것이다.
1986년 영국의 뉴사이언스 과학잡지에 우주의 모든 별자리를 컴퓨터에 입력시키면 소우주인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즉 사람의 모습을 확대하면 우주의 모습이라고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고, 하늘에 해와 달이 있어 밝게 비추고, 사람은 두 눈이 있어 밝게 봅니다. 지구의 산맥은 큰 뼈대로서 지맥이 흐르고, 사람의 뼈대에는 기맥이 흐릅니다. 또한 태양계의 중심에 불(태양)이 있고, 사람의 인체 중심에 불(심장)이 있습니다.
땅은 사람이 피부와 같고, 산천초목은 피부의 털과 같습니다. 사람의 혈자리는 지구의 명당자리(혈)와 같고 지구의 3/2가 바다, 인체의 70%가 수분입니다. 지구에는 5대양 6대주, 사람은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사람의 기혈도 태양과 달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성의 월경(달거리)과 바다의 조수도 달의 영향을 받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정신병자를 “Lunatic”이라고 했는데 의미는 달의 영향으로 인해 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지금 영미(英美)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한 바로는 확실히 보름달 때 정신병 발작이 많다고 합니다.
인간이 소우주인즉 인간 정신은 대우주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타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정신과 인간 정신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 정신은 자유로운 것인데 인간 정신은 부자유하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오행법칙에서 찾아보면 木火金水는 다 한쪽으로 편향된 기운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土만은 편벽되지도 않는 중화성(中和性)을 가진 것이므로 자유로운 것이다. 우주의 운동이란 것은 이러한 편벽된 것들(木火金水)을 통솔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 것이니 그것이 바로 土인 것이다. 그렇다면 土라는 것은 과연 자유로울 수가 있는 존재일까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土의 성질은 너무 강한 것은 약하게 하고 너무 약한 것은 강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丑土가 坎水)의 과강(過强)을 연하게 하여 주고 未土가 離火의 과갱(過坑)을 통일하여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土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려면 그 성질이 중(中正)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완성된 土인 未土, 즉 十土만이 무소불위하는 자유의 본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土에 대한 자유의 개념이 설정되는 것이다. 그러즉 자유라는 것은 무사무욕한 공도(公道)로서의 소위를 마음대로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도의 운행은 이와 같은 자유를 주체로 하고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써 그의 본체를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선천은 지구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진 子午卯酉가 사정운동(四正運動)을 하는 우주는 우주 자체의 운동에 있어서 약간의 부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한 바의 인과율도 이러한 우주에서는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즉 기울어진 지구 자전축이 바로 잡혀 360도 진술축미의 사정 운동(四正運動)을 할 때라야만 인과율이 제대로 적용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선천 봄여름우주의 인간은 23.5도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진 환경속에서, 선천적인 조건에서 태어났으며
육체 형구(形軀)의 협착으로 인해서 토화(土化) 작용이 너무나 많은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인체에서 일어나는 木火金水의 상생과 상극을 조화시켜 낼 능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천 봄여름우주의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욕구적 대상인 것뿐이고 실현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태극기의 건곤감리(乾坤坎離, 天地日月)
天地無日月空殼이요 日月無至人虛影
천지무일월공각 일월무지인허영
하늘땅 천지는 태양과 달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태양과 달, 일월은 지극한 인간이 없으면 빈 그림자
形於天地하여 生人하나니 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也니라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不參於天地用人之時 何可曰人生乎아"
형어천지 생인 만물지중 유인 최귀야 천지생인 용인 불참어천지용인지시 하가왈인생호아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니나... 천지가 사람을 낳아... 천지에서 사람을...
事之當旺은 在於天地요 必不在於人이라
일이 흥왕하게 됨은 천지에 달려 있는 것이요, 반드시 사람에게...
然이나 無人이면 無天地故로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또한 없는 것과 같으므로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천지가 사람을 낳아...
以人生으로 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何可曰人生乎아
인간 정신도 그 본질이 우주 정신과 동일하므로 우주 정신의 생성원리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다른 점은 우주 정신은 건곤, 즉 천지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인간이나 만물의 정신은 건곤乾坤의 대행자인 일월의 정신, 즉 감리坎離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뿐인 것이다.
감리坎離 정신은 태극 운동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 바 최초에 음양이 서로 분리하여 응결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정신은 혼돈된 음양 속에서 갈라진 정(精)과 신(神)인즉 이러한 인간의 정신은 일월이 분리되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이 점점 응고하여서 달(月)이 된 때에 정精이 이루어졌고 양이 점점 응취되어서 태양(日)이 될 때에 神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달(月)과 태양(日)이 바로 만물 정신의 기원인 것이다.
그런데 천지 정신과 일월 정신이 서로 다른 점은 천지는 그 정신이 순음 순양, 乾坤이기 때문에 음양이 서로 견인하는 힘이 대국적이며 통일적이었지만 일월(日月)은 그 정신에 혼합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즉 감리坎離의 상으로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양의 견인력이 부분적이면서도 산합적(散合的)인 것이다.
그런즉 일월 정신의 이러한 성질은 분합 작용(分合作用)을 하는 과정에서 소우주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이 감(坎)의 통일로써 이루어진 것을 精이라고 하고 이(離)의 분열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을 神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인간 정신은 감정리신(坎精離神)이며, 또한 월정일신(月精日神)․수정화신(水精火神)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월 정신이 어떻게 인간 정신으로 되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여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전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일월이 감리坎離 운동을 할 때에 日月(水火)의 상극성을 조절하는 곤덕(坤德)에 의지하여서 통일됐던 것처럼 인간도 또한 곤덕坤德에 의해서 자기 정신을 배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태시에 천지가 갈라질 때에 건곤乾坤은 음양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건곤乾坤은 그 덕이 중中인데 중이라는 것은 水火金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순수음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월은 그 성질이 음양의 극단을 이루고 있으므로 항상 곤덕으로 생성된 지구의 조절에 의해서 그 성질을 조화해 가면서 만물을 생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운동하는 만물은 모두 이와 같은 태양과 달, 일월과 지구, 곤坤의 운동을 바탕으로 하고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만물에 있어서처럼 일월의 외부적인 영향으로써만 생을 영원히 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의 소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에서 일월이 운동하는 것처럼 인간 자체에서도 ‘心(심장,日)’․‘腎(신장, 月)’이 일월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주에서 일월日月이 건곤乾坤(天地)을 대행하는 것처럼 인체에서도 심장과 신장(心腎)이 일월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태양과 달, 일월이 음양을 교류하고 있는 것처럼 심신인 일월도 음양을 교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월이 곤덕坤德에 의해서 그 성질이 조화되는 것처럼 심장과 신장도 곤덕(脾土,비장)에 의해서 심장과 신장의 상극성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일월(日月)이 지구의 곤덕으로 인해서 土를 자화(自化)했던 것처럼 인체도 비장(脾臟)의 곤덕에 의해서 土를 자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와 소우주 인간의 몸은 그 기능과 작용이 동일하므로 인간은 독립된 우주로서 존재하는 것인즉 우주의 일월 정신은 바로 인간 정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일월이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이 있다.
일월은 건곤(天地)의 지배하에 운동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은 감리(坎離,日月)의 영향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곤이 만일 한순간만 휴식하여도 일월의 기능이 소멸되는 것과 같이 일월이 만약 잠깐 동안만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월 정신이 인간 정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 정신의 명수(命數)가 생기게 되는 것이거니와 이러한 조건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명수를 잘 보호하려면
그 심신(心腎)의 교류과정에서 일어나는 상극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자기 土를 잘 보호하며, 또한 土가 잘 자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최대 목적이 토화 기능의 화생과 그 작용의 만전에 있으므로 소우주의 유일한 목적도 또한 토화 기능을 자화하는 일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목적은 그 본질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인간 일대의 무수한 변화와 생사(生死)가 바로 인간의 본체인 정신의 생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산물인 것이다.
정신이란 본래 우주가 동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성하는 순수한 음양, 즉 율려(律呂)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우주의 운동은 一宇(늘어나는 것)一宙(줄어드는 것)하는 운동이므로 亥子丑寅卯辰의 변화 과정에서는 精이 활동하고 巳午未申酉戌의 과정에서는 神이 활동하는 것이다.
정 精의 활동이란 것은 만물이 수렴통일에서 다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계기를 형성하는 원인을 따져보면 우주의 일우․일주 운동이라는 것은 천지의 분합 작용에서 이어받은 것이므로 이것은 건곤이라는 우주의 본체에서 계승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건곤이 우주 운동의 계기를 창조한즉 무극 상태에서 태극의 상태로 변화하게 되어 여기에서 지구와 일월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는 양토(良土)의 덕으로써 생기게 되었고 日은 ‘離’를 상징하고 月은 ‘坎’을 상징하게 됨으로써 모든 변화의 기본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유독 ‘乾坤’만은 자체를 상징하는 아무런 물체도 형성하지 않고 다만 형상계를 창조할 때에 기본을 이루었던 건곤의 상태에서 이질적인 방향으로 파생한 일월을 창조하여 놓고 건곤 자체는 초연한 입장에서 그들의 운동을 관망하면서 그 운동의 소질에 원동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우주 운동의 근본을 따져보면 그 자체는 ‘건곤’인 것이다. 그런데 ‘건곤’이 상술한 바와 같이 지구와 일월을 창조함으로써 우주는 음양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은즉 여기에서 陰(坤)은 精을 생하고 陽(乾)은 神을 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즉 亥子丑․寅卯辰이라는 것은 陽이 精을 生하는 방위를 말하는 것이요, 巳午未申酉戌이라는 것은 陰이 神을 生하는 방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陰이 정精을 생한다는 말은 달(月)이 精을 生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陽이 신神을 생한다는 말은 태양(日)이 神을 生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즉 우주 정신은 최초에는 건곤 본연의 작용에 의해서 생성한 것이지만 건乾이 지구와 일월을 창조한 뒤에는 일월이 이것을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은 감리(坎離) 정신을 받아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태양과 달, 일월은 순수한 음양이 아니고 혼탁한 음양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월로서 이루어진 인간의 정신은 우주의 정신에 비하여 순수하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 정신은 이와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의 육체는 정욕(情慾)을 파생하게 되고 정신은 정욕의 포로가 되어 버리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 정신이 몽매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선천적인 조건을 엿볼 수 있거니와 그밖에 또한 후천적인 조건이 따르고 있으니 이것이 소위 인간의 기혈 운동(氣血運動)이다.
인간은 우주에서 일월이 발하는 精과 神을 받아서 자기 정신을 이루었지만 우주에서 받은 정신을 인간 자신이 어떻게 영위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양(養)하기 위하여서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음식물이란 것은 그 자체가 순수한 음양성(陰陽性)이 아닌 감리(水火) 정신의 부류인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은 후천적인 영양섭취는 또한 인간적인 정신의 특징을 전제로 하고 정신을 기를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인간은 기혈을 생성하게 되는 것인데 그 기혈이라는 것은 바로 음양의 비순수성을 노골적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즉 다음에 기혈의 생성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상술한 바를 다시 한번 고찰해 보면 건곤이란 것은 천지의 기능을 대표하는 부호이다. 그런데 우주의 운동은 건곤을 핵심으로 하고 태극 운동을 함으로써 음양이 갈라졌고, 음양이 갈라짐으로써 일월이 생겼고, 일월이 건곤을 대행하게 됨으로써 그의 ‘中(本中末 운동의 기본)’인 바의 지구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인간과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다.
인간은 이와 같이 하여서 우주 정신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바로 혼탁한 후천 정신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기혈 운동은 피할 수 없는 후천적 천부로서 정신 생성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은 亥子丑寅卯辰에서 氣를 생하는 바 이 氣는 정중지신(精中之神)을 생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巳午未申酉戌에서 血을 생하는 바, 이 혈은 신중지정(神中之精)을 생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혈이 음식물의 정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은 음식물로써는 직접 정신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기혈을 생성하고 그것으로써 다시 정신을 생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의 생리 작용에서 만일 기혈의 동정 운동이 선행하지 못한다고 하면 인간 정신이란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는 丑 중심의 발생권에서 神이 활동하고 未 중심의 수렴권에서 精이 활동하므로 소우주(人間)도 이와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다른 점은 인간 정신은 감리지정신(坎離之精神)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므로 기혈로써 정신 생성의 수단이 되고 우주는 건곤지정신(乾坤之精神)에 의해서 생성한 것이므로 일월로써 정신 생성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의 생성과 운동은 그 방향이 서로 다르다. 亥子丑․寅卯辰에서 생한 정은 巳午未․申酉戌에서 활동하고 巳午未․申酉戌에서 생한 신은 亥子丑․寅卯辰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오행의 교호 작용(交互作用)이며 음양의 대대 운동(對待運動)이다. 그러므로 우주 운동은 삼음은 陽方에서 생장하고 삼양은 陰方에서 수장하는 것인즉 우주가 만물을 생성하는 묘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제3장 1절 ‘六氣의 槪念’ 참조).
이와 같은 우주나 소우주(人間)의 운동 상태를 내경(內經)에서는 정기신 운동(精氣神運動)이라고 표시했고 역(易)은 정기형 운동(精氣形運動)이라고 하였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精이 丑土之氣(인체에서는 脾土之氣)를 상승함으로써 神으로 化하는 것을 정기신 운동이라고 하고 神이 未土之氣에 쌓여서(인체에서는 肺氣) 하강함으로써 精(물질)을 만드는 것을 기정형 운동(氣精形運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내경은 정이 화하여서 신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요, 역은 氣가 변하여서 다시 물질을 만드는 경로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기신 운동이란 것과 기정형 운동이란 것은 각각 조화과정의 일면씩을 설명한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인체라는 소우주는 기혈의 생성으로 인하여 정신을 창조하는 것이므로 그 때문에 인간 정신은 우주 정신에 비해서 정밀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인체에 만일 기혈의 동정 작용이 없다면 정신의 생성기반을 잃게 될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 기혈의 동정이란 것은 절대불가무의 존재지만 인간은 또한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여기에서 한마디 부연하여 둘 것은, 기혈의 운동으로 살고 있는 만물은 왜 인간보다 정신이 저열한가 하는 것은 ‘태아의 천품과 정신의 우열’을 참조하면서 연구하면 된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하면 亥子丑․寅卯辰이라는 정생과정(精生過程)에서 피(血)가 생하는 바 神은 바로 여기서 활동하는 것인즉 장차 神을 생하려는 巳午未․申酉戌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다. 신은 이와 같은 조건을 경유한 후에 생하여지는 것, 즉 핏속에서 활동하다가 사오미․신유술에서 생하여야만 하는 운명의 소생이므로 그 신을 가리켜서 기혈소생(氣血所生)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정생과정(精生科程)에서 血이 선행하고 신생과정(神生科程)에서 氣가 선행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정신은 기혈소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혈이 수곡(水穀)에 의해서 생하는 것인즉 그 정신은 바로 수곡지정기(水穀之精氣)로서 생성한 정신일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 정신에는 인간 정신적인 운명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가리켜서 기혈소생이라고 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주 정신과의 우열도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연은 용의주도하게도 인간을 물 속에서 길러내었지만, 부모의 선천적인 바탕과 후천적인 생활환경 때문에 태아 때에 벌써 자체의 안위와 정신의 우열이 결정되게 마련인 것이다. 첫째로, 인간은 본래 선천적으로 천품에 후박(厚薄)이 있다.
인간은 최초에 부정(父精)과 모혈(母血)로써 출생하는 것이므로 부모의 선천적 제조건은 태아의 건강과 정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정자는 바로 아버지의 청사진인 것이다. 아버지는 본래 자기의 생리적 활동으로 인하여 인간적인(오행의 어느 일방에 치우친) 특수한 조건 아래에서 자기 정신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정자란 것도 그러한 선천적 조건에서 길러진 것인즉 아버지의 정자는 바로 아버지 자체의 청사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정자를 씨(核)로 하고 태어난 태아는 아버지의 복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아가 반드시 아버지만 닮고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런즉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는 것이 문제된다.
그것은 아버지의 정자가 어머니의 난자에 의하여 포위당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부정모혈(父精母血)의 교호 작용으로 인하여 이질적인 변화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잉태하게 되면 태중(胎中)에서는 인신상화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바 그 때에 태아는 부모라는 이성(二性)의 변화 작용으로 인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과정에 있어서 어머니의 체질이 음양의 균형을 얻은 토화 작용을 철저히 하여 준다면 모덕(母德)이 곤순(坤順)하여서 정자를 잘 보호육성할 것이지만 만일 모혈이 木火金水의 어느 일방에 편벽되었을 경우에는 정자와 모혈 사이에서는 모순이 야기된다.
예를 들면 모체의 음혈(陰血)에 너무 음기(陰氣)가 많으면 정자를 무리하게 압축하게 되고 너무 陽氣가 많으면 정자의 통일성이 해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중도(中道)를 얻지 못한 정자는 아버지의 면모를 점점 잃어가게 되는 동시에 어머니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체의 생리 작용 여하는 태아로 하여금 부모의 어느 쪽을 닮느냐 하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리켜서 선천적인 유전이라고 한다.
그런즉 위에서 말한 바는 부모의 선천적 조건 때문에 태아가 받는 제1의 천품이 변질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부모의 후천적인 섭생 때문에 태아의 정신과 체질이 변화하는 제2의 천품이 있다. 가령 임신중에 방사(房事)가 너무 심하면(방사란 모체로 볼 때에 陽氣의 배설이므로) 陽氣를 종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임신 작용이 부정(父精)을 응취(凝聚)할 수 없게 됨으로써 태아의 성질은 점점 陽化하는 방향으로 변하여 가게 된다.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임신 중에 어머니가 만일 칠정(七情)이 잘 동한다고 하면 이것도 태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가령 임신 중에 희노(喜怒)가 망동(妄動)하게 되면 태아는 陽化하게 되고 비우(悲憂)가 심하면 음혈이 방종적 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태아의 성질은 陰化하여 가게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희노라는 것은 목화지기요, 비우(悲憂)라는 것은 금수지기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음양질서를 문란(紊亂)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의 두 가지 예는 부모의 선천적인 자초지화(自招之禍) 때문에 태아의 본질과 정신을 변혁시키는 요인을 이루는 제2의 천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부모의 선천적인 제조건은 태아로 하여금 자기 천품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정신의 우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우열은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 보기로 하자.
인간 정신은 우주의 정신을 복사한 것이므로 우주가 일월의 정신으로써 만물의 정신을 이루었다면 인간은 물론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월정신으로써 만물의 정신을 이루게 한 것은 土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즉, 十土와 五土의 소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술토(戌土)에서 생하기 시작한 精은 ‘辰’에 이르러서 완결되고 辰土에서 생한 神은 술‘戌’에 이르러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정은 신을 생하고 신은 정을 생하는 바 이와 같이 정과 신이 융합하여서 새로운 개념을 이룰 때에 이것을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을 좀더 부연하면 己土에서부터 시작되는 ‘呂(陰)’작용의 과정은 표면으로 보면 精을 창조하지만 이것을 내용으로 보면 神을 봉양하는 것이요, 甲土에서 시작하는 ‘律(陽)’의 과정은 표면으로 보면 神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것을 내용으로 보면 精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운동에 있어서 삼음삼양이 표리부동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정신도 그 법칙대로 변화하는 것이다(제3장 ‘육기론’을 참조).
이와 같은 정신의 생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토화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바 토화 작용은 태중에서부터 木火金水의 상승 작용을 견제 조절함으로써 평화적인 변화가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태아가 발육과정에 있어서 토화 작용의 중용적인 권위하에서 길러진다면 건전한 정신으로 탄생하게 되지만 만일에 태중에서 토화 작용이 木火金水의 승부를 견제해 내지 못함으로써 편파적인 조건하에서 발육된다면 그 정신은 열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토화 작용의 정상적 조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우수한 정신을 배양하지만 이것이 과항(過亢)할 때나 불급할 때는 도리어 백치가 탄생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정신을 창조하는 土가 음양을 적당하게 신축(伸縮)하리만큼 조절할 때에 한하여 최우수한 것이 생성되는 것이므로 土(다른 木火金水도 그렇다)의 태과불급은 모두 정신을 열등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체의 건부(健否)도 그러하고 만물의 변화도 그러한 것인즉 모든 조화과정에서 土처럼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 정신은 이미 태중에서 유전되는 것인 바 태중에서 좋은 천품을 받으면 그 정신은 우수할 것이고 만일 태중에서 나쁜 천품을 받고 탄생하면 그 정신은 열등할 것이다. 그런즉 좋은 천품이란 것은 적절한 토화 작용이 행해지는 천품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첨부하여 둘 것은 상술한 바의 우수한 정신이란 것은 기억력이나 사고력의 우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초인간적인 정신적 자세까지를 겸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총명은 木火金水의 투쟁적인 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절대 이성적인 총명은 土를 주체로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는 사람은 태중에서 선천적인 부모의 천품을 바탕으로 하고 탄생하는 것이므로 정신이 유전된다는 것을 논했다. 그런데 부모의 천품을 유전하는 것은 정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정신의 그릇(器)인 육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즉 그의 유전 요인과 경로는 정신의 경우와 똑같으므로 약하거니와 그러나 인간을 알려면 정신과 육체의 종합적인 변화를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란 것은 정신과 육체의 공동작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특징도 정신과 육체가 공동작업을 시작할 만한 조건이 구비되었을 때, 즉 인간으로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는 이러한 인간(정신과 육체의 합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특징부터 논해 나가기로 하겠다.
인간은 본래 토화 작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충류(裸蟲類)의 일종이다. 그런데 사람은 태중에서 부모의 선후천적인 천품에 의해서 탄생했기 때문에 날 때부터 토성(土性)이 결여된 木火金水의 편파적인 우열권의 투쟁적 경향을 따라서 발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토성土性을 바탕으로 타고나기는 하였지만) 四臟, 즉 木(肺)․火(脾)․金(肝)․水(腎)가 발하는 투쟁의식의 과항(過亢) 때문에 土(心)가 이것을 완전히 조절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정신의 정화(淨化)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것은 이러한 현실 사회적인 인간, 즉 특징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결코 토화 작용에서 시작하던 그 때의 인간, 즉 선남선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사성(四性; 木火金水)의 어느 일방에 치우친 유전적인 인간은 탄생하여서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본질(善)은 차차 변화하면서 악한 性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를 내경에서는 25인론(人論)으로 세분하였지만 동무(東武)는 사상론(四象論)으로 간소화시켰던 것이다.
四象이라고 하는 것은 특징적인 인간, 즉 사형(四型)으로 편경(偏傾)된 작용을 함으로써 항상 토화 작용의 조절을 위배하려고 하는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무는 인간의 오행 주체가 폐기(肺氣)쪽에 기울어진 사람을 태양인이라고 하고 간기(肝氣) 쪽에 기울어진 사람을 태음인, 비기(脾氣) 쪽에 기울어진 것을 소양인, 신기(腎氣) 쪽에 기울어진 것을 소음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四行(四臟) 기운이 어느 일방에 치우치고 있기 때문에 土性인 심(心)이 이것을 조절할 수 없게 됨으로써 心(精神)이 할 수 없이 사장의 부정성(不正性)에 끌려 버리고 마는 것이므로 동무는 이와 같이 인간의 체질을 구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일 탄생할 때에 부모의 좋은 천품, 즉 토성이 완전한 천품을 타고 났다고 하면 그것은 순수 중덕(純粹中德 ; 純粹土性)으로서의 사람일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죄악 의식도 발할 수 없으며 병마의 변고도 없을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음양(木火金水의 작용)이 균형된 작용을 하는 사람일 것인즉 바로 우주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무는 사상으로써 체질을 구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心(土)은 중덕(中德)이므로 변화(승부)에 가담하지 않는 존재인즉 체질적(인간의 본체가 승부를 하는 것이 체질이다) 구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외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즉 사상 형태란 것은 우주의 현실 조건(제5장을 참조)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장부(臟腑)에서 일어나는 오운육기 운동이 우주와 동일하므로 소우주라고 하거니와 인간은 협착한 形과 기혈 운동과 후천적인 칠정육욕을 천품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징을 이루게 된 것이다(제2장 1절 3. ‘동무의 오행론’ 참조).
그 다음은 인간의 수요(壽夭)문제에 대해서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인간의 수(壽)는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것일까 혹은 후천적으로 좌우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대답한다면 그것은 후천적인 숙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후천적으로는 부모가 지닌 천품 그대로 길러지고 거기다가 인위적인 태중지화(胎中之禍)가 첨부되어서 탄생되는 것이므로 수요는 바로 그 때에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壽)한 유전을 받은 인간이 만일 불의의 질병 때문에 요절한다고 하면 이것은 선천적인 수명과 관계가 없는 요사(夭死)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아무리 수한 유전을 받고 났다고 할지라도 후천적인 불섭생 때문에 죽은 것은 수와는 별도일 것이다.
반면에 선천적으로 불량한 천품을 타고 탄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후천적으로 잘 섭생하였기 때문에 수가 연장됐다고 하면 이것도 역시 숙명적인 수요와는 별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속한 천부(天賦)를 타고난 사람은 율려수를 부족하게 타고났을 것인즉 이것은 음양의 투쟁이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항상 고통속에서 시달려야 하므로 그와 같은 形은 일찍이 붕괴되고 말 것이지만 만일에 양호한 섭양(攝養)을 가한다면 육체의 붕괴를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에 좋은 천부를 받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섭생의 불량 때문에 미치는 禍는 수요와 관계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런즉 이와 같은 것은 수요 관계는 인간이 지닌 바의 토화 작용, 즉 정신의 본체가 인간의 형체라는 협소한 악조건을 받았고, 게다가 인간적인 정욕 때문에 화중주유격(火中注油格)인 화(禍)를 가하고 있으므로 천운(天運)에 의해서 율려수를 제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는 불과 70년의 일생으로 마치게 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우주의 운동은 36/1440의 율려를 창조하고 있지만 인간은 최고 30/1440의 율려밖에 창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우주의 360도 운동(지구의 자전 운동)은 1세간(一歲間)에 12,960분의 율려를 창조하고 있는데 인간은 1세 동안에 최고 18,800분의 율려밖에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인간이 1세 동안에 생산하는 율려수를 평균으로 보면 28×360=10,080밖에 안됨).
그러므로 우주의 數와 인간의 數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인간의 자초지화(自招之禍)와 선천적인 숙명, 즉 형구(形軀)의 제한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고난 숙명, 즉 유전적인 수요를 어떻게 개량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자기 자신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즉, 자기가 받은 천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적당하게 음양조절을 하는 일이다. 가령 양성을 너무 많이 타고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외향성을 경계하고 육체적인 안정에 유의하며, 음성적인 영양물을 취하는 일에 주의함으로써 음기의 부족을 충당하는 일이다.
둘째로는, 자기 자신의 명령에 잘 부응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면에는 하등동물만도 못한 것이다. 예를 들면 3일에 한번씩 범방(犯房)한 결과 피로가 심했다고 하면 5일이나 7일로 연장하여야 할 것이고 또는 저육(猪肉)을 먹으면 소화가 불량하거나 설사가 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장의 명령인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은 것은 자기자신의 명령이거나 요구인 것인즉 여기에 잘 복종하는 것이 또한 후천적인 연수방법(延壽方法)인 것이다.
셋째로는 욕정을 남발하지 않는 수양을 쌓는 일이다. 희노(喜怒)의 情이나 육체의 사욕(私慾)은 자기의 묘혈(墓穴)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3대 요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큼 수요와도 관계가 깊은 것인즉 더욱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인간의 정신은 생명과 함께 숙명적인 유전(遺傳)에 의한 것인 바 이것은 우주의 정신과 수명의 축소인즉 역천도(逆天道)하면 열요(劣夭)할 것이고 순천도(順天道)하면 우수(優壽)할 것이다. 그런즉 그 요제(要蹄)는 천운(天運)이 토화 작용에 만전을 기하듯이 인간도 여기에 전역량(全力量)을 경주함으로써만이 수(壽)하고 총명할 것이다.
정신의 통일이 요구되는 것은 정신을 완성시키기 위함이요, 따라서 인간 정신의 완성을 욕구(慾求)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우주적인 明을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만일 우주와 같은 明을 가진다면 인간의 인식과 판단이 정확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정확하게 되면 우주의 비밀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철학자의 자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도 필요한 문제이거니와 또한 인간의 존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류 문화가 요구하는 문제는 인식의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의 기본능력이 이성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경험에 있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에 의해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서 우리들이 상수학적 지식으로써 이야기한다면 인식의 성립은 정 작용(精作用)과 신 작용(神作用)이 교호감응(交互感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 작용이 발현할 때에는 인식의 객관적 대상인 사물(경험대상)이 발전하고 정 작용이 수장(收藏)할 때에는 인식의 주관적 대상인 我(정신의 주체)가 明化(순수이성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명화된 ‘我’는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의 주체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발전과 통일의 주체이기도 하므로 여기에서 생겨난 神의 발원 작용인 사물의 형태는 참되고 정확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은 인식의 주체인 我의 明과 객체인 사물의 감성적 형태와의 감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로크가 말한 바 외물적(外物的) 감각과 심적 반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나, 칸트가 말한 바 형식적 요소와 질료적(質料的) 요소의 두 계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과 흡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논하려는 바는 이와 같은 형식적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논하려는 바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의 총명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하는 문제를 본다면 자기 총명에 대해서 자신있는 대답을 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개미[의(蟻)]나 돼지(豚)도 징후를 미연에 알 수 있는데 인간은 알지 못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영리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을 가지고 총명한 것으로 자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명한 것과 영리한 것은 개념적으로 구별되어야 할 문제다. 총명이라는 개념은 본래 귀(耳)와 눈(眼)이 밝다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목이 지니는 바의 시청(視聽)은 지척지간(咫尺之間)을 경계로 하고 있다. 그런즉 이것은 영리(영리란 것은 비판단적인 우연성의 재능)한 것과 비교할 때에 호리지차(毫厘之差)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총명한 것이란 어떠한 것일까?아마도 천지 일월의 정신(우주 정신)과 같은 총명(聰明)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본래 천지를 본받은 소우주이기 때문에 우주와 같이 총명하여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육체의 협착(狹窄)과 그의 정욕 때문에 우주 정신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귀는 감수지규(坎水之竅)요, 눈은 이화지창(離火之窓)이란 것은 옛 성인들의 가르침이다.
다시 말하면 감수(坎水)가 잘 상승하면 귀가 밝고(聰) 離火가 적당하게 발하면 눈이 밝(明)게 되는 것인 바 인간인 경우는 상술한 바와 같은 후천적 조건과 육체적 결점 때문에 坎土의 총생 작용(聰生作用)과 氣土의 명생 작용(明生作用)에서 우주와 같은 율려수(律呂數)를 발하지 못하므로 우주 본연의 총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총명을 해치는 육체적 조건은 천품소생(天稟所生)이므로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후천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정욕 같은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정신이 이성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정욕은 없어질 것이며 따라서 육체내에서는 토화 작용을 잘하게 될 것인즉 신수(腎水)는 순조롭게 상승할 것이고 ‘心氣(火)’는 불평 없이 통일될 것이므로 相火의 거울(鏡)은 聰을 明으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만일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총명 작용은 소모일로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火가 나면 눈이 캄캄하고 기분만 나빠도 머리가 아픈 것은 바로 정신 상태에 이상을 초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즉 이것은 바로 이성의 안정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성적 생활은 총명의 모체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머릿속에 달(月)이 떠 있으리만큼 한 이성 능력을 기르게 되면 감성적인 경험과 이성적인 통각(統覺)에 의하여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정신의 몽매는 과연 누구의 허물일까 하면 이것은 ‘나’ 자신의 허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걸음만 잘못 걸으면 총명은 이성의 통곡성과 함께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식론의 시비도 사실상 이와 같은 총명 때문에 일어나게 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인류 지도자들은 明의 본질과 소재를 찾는 일에 전심전력(專心專力)하였던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神明의 所存과 所在만 명확하게 하면 인식은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의 통일도 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道)’라는 것은 우주 운행의 법칙적인 길(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 법칙이란 것은 천지 일월의 운행 법칙이며 木火金水와 율려의 법칙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칙이 운행하는 길에서 일어나는 오묘불측(奧妙不測)한 변화는 만물의 생장성수(生長成遂)의 과정과 人事의 길흉화복의 과정에서 출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도학(道學)이라고 하며, 그 변화 자체를 ‘道’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道는 지고지명(至高至明)한 정신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지경이므로 이것을 가리켜서 종교, 즉 최고 정점(最高頂點)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道와 종교는 동일원리의 체용적(體用的) 표현인 것뿐인즉 모든 종교 정신은 천변만화하는 ‘道’의 정신이며, 도의 정신은 율려 작용의 항존성(恒存性)의 완성이며 항존성의 완성은 ‘明’, 즉 日月이 합명(合明)하는 변화의 귀결점이며 출발점인 바의 술오점(戌五點)이며 공점(空點)이며 건점(乾點)인 것이다(제8장 ‘本體論’ 참조).
그런즉 道의 목적, 즉 종교의 목적은 우주와 인간의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대자연의 신비의 문을 개방하여 보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범위를 좀더 축소시킨다면, 즉 인간 정신 문제까지로 압축하면 그것은 바로 생사와 선악 문제로 귀결될 것이고 이것을 다시 궁극일점(窮極一點)까지 통일시킨다면 신명의 귀결점, 즉 일월합명(日月合明)의 명점(明點)까지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신의 통일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론은 종교 정신을 일별함으로써 대자연의 통일 목적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첫째로, 불교의 목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空의 항존처(恒存處)를 찾고 空에서 항존할 수 있는 지고지명(至高至明)한 인간을 창조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空’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지신지무(至神至無)한 존재이므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적멸(寂滅)의 진경(眞境)인 것이다.
그런즉 이 경지는 유일한 神이 명화(明化)하고 있는 충화(充和)의 경지이므로 세속적 색채가 감히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속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정욕으로 인한 형신(形神)의 勞를 안정시키기만 한다면 법신(法身)으로 化하게 되므로 진리의 본원인 ‘空’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空은 이러한 진경이므로 거기에서 발하는 ‘사리(舍利)’의 광채는 우주와 같이 흐르고 있으므로 만물은 이 길(道)에서 도망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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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사리(舍利)란 것은 佛의 정신을 상징하기 위하여 佛의 신체(神體)의 일부를 탑중(塔中)에 보존하는 것인즉 그것은, 즉 佛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에 달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佛이라는 개념은 이문(貳門)과 동장(動場)의 세속적 문화나 방종적 혼란을 막는다는 뜻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이문이라는 말은 금화가 교역을 시작하는 문, 즉 二火의 문을 말하는 것이요, 동장이란 것은 금화교역을 위하여 약동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세속적 문화와 방종적 혼란의 거점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다음 ‘佛’이라고 하는 것은 佛字의 막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舍利’의 광채가 만고금을 통하여 邪를 추방하고 자비지심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정토진경(淨土眞境)인 空에서 공존공영(共存共榮)하려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다시 불교의 목적을 종합하여 보면 세속적인 육체생활을 초월하고 대각에 이름으로써 空으로 돌아가서 明을 찾으려는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세를 도피하고 空에 한거(閑居)하면서 숭덕(崇德)하려는 것이다.
둘째, 선교(仙敎)는 無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 바 ‘無’라는 것은 영원불멸하는 진기(眞氣)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기는 변화 작용을 단속하는 본원이므로 만물의 생명정신의 발현 능부(能否)는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즉 진기를 보호할 필요가 절실하므로 ‘포신묵좌(抱神黙坐)’함으로써 도망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기는 神으로 하여금 방종할 행동을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기는 목화금수와 같은 편기(偏氣)가 아니므로 神을 보호했다가 다시 새로운 性을 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神이 성화(性化)하게 되면 性은 만물로 발전하였다가 또다시 무화(無化)하게 됨으로써 유무합도(有無合道; 戊己合道)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생명과 정신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은 易의 천산둔괘(天山遯卦)의 상과 같으므로 이것을 선도(仙道)라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물의 생장이란 바로 인물의 노사(老死)란 말과 상통되는 것인 바 그것은, 즉 形의 死는 神의 生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인물(人物)의 死는 새로운 神을 창조하려는 우주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창생으로 하여금 삼청별계(三淸別界)로 들어가게 하는 과정인 것이다. 선교는 이것을 가리켜서 ‘無’라고도 하며, 또는 ‘中’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선교는 ‘中’을 지킴으로써 ‘一’을 포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이것을 ‘수중포일(守中抱一)’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찰해 보면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바의 空에 도달하려는 ‘中’점, 즉 ‘無’의 작용을 중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이와 같은 無의 중점(中點)이 없다고 하면 空도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불교와 선교의 차이점은 다만 하나는 창조의 완결점을 중시하고 하나는 창조의 시발점을 중시한 것뿐인즉 도통의 연원은 모두 ‘一’의 理에 있는 것이다.
셋째로, 유교의 목적은 인(仁)을 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精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精이란 것은 神을 一의 位에 통일시키려는 것인 바 그것은 유위(維位)에 얽어매어 줌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유정유일(惟精惟一)’이라고 하는데 仁은 이러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므로 유교는 그 목적을 仁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주의 仁은 이렇게 이루어졌으므로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또한 자기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사람을 위하는 것을 ‘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바로 우주가 사물을 생하기 위하여, 즉 인(仁)하기 위하여 자기 이해를 초월한 공도(公道)만을 행하는 법칙을 그냥 본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를 정의하기를,
精義入神 利用安身 故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의입신 이용안신 고 유정유일 윤집궐중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토금수지기(土金水之氣)로 神을 감(坎) 속에 축장(縮藏)하게 함으로써 안신(安身)의 바탕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거기에서 精과 一이 합일되었다가 다시 축장한 것을 뚫고 中에서 움트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유교라고 한 것이니 (유(儒)자는 수(需)자와 통한다) 바로 수천수괘(水天需卦)의 상을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집궐중하는 장소, 즉 만물이 생의(生意)를 나타내는 방위의 상이 수(需)의 상과 같은 것을 취상(取象)의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유교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그 목적이 ‘윤집궐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궐중하게 되면 거기에서 仁(生意)이 발하므로 유교의 목적은 仁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河心夫의 ‘正易註解’ 참조).
이상에서 三敎정신을 略한 바 그것을 재고하여 보면 불교는 정신의 완전 통일점인 空에 기본을 두었고, 선교는 통일의 출발점인 無에 기본을 두었고, 유교는 통일에서 다시 生意를 발하는 곳에 기본을 두었다고 하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런즉 이것은 동일한 원리와 동일한 법칙이 운행하는 本中末 운동의 한 점씩을 각각 대표한 것뿐이요, 결코 변화원리 자체가 상수(相殊)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종합하여 동양철학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니 그 원리는 모두 ‘집중관일(執中貫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적(足跡)이 상이하고 문호가 각수(各殊)하였던 것은 동양에 있어서도 전국(戰國) 이후에 도통지전(道統之傳)이 암흑기에서 헤맸기 때문에 마치 서로 이단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道라는 것은 변화의 길이고 변화의 길(법칙)은 하나뿐인즉 그 길에 서로 상이한 원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종교가 불원한 장래에 통일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지(人智)가 이 정도까지 보편화될 때면 인간이 철학의 최고 목표인 ‘明’을 가지는 것도 용이할 것이며 또한 신비의 문호도 개방될 것이다.
우주간에서 살고 있는 만물은 반드시 생사가 있다. 만물은 形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즉, 木氣가 주동할 때에는 生이 시작되고 金氣가 주동할 때는 死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만 생사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과 같은 신기 작용(神機作用)을 하는 것과 초목과 같은 기립 작용(氣立作用)을 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같은 신기(神機)는 자기의 운동 요인인 율려(律呂)를 자기 자신이 창조하지만 식물과 같이 대기의 지배하에서만 사는 기립지물은 다만 우주에서 생하는 율려에 의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즉 인간과 같은 신기는 자기 우주의 율려 작용에 의해서 생하므로 자기 우주의 율려수가 다함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지만 식물과 같은 것은 우주인 자연이 배급하는 율려수에 의해서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우주인 신기에서는 정과 신이 합일함으로써 정신 운동이 일어날 수 있지만 식물과 같은 기립지물에서는 정신 운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논하려는 바는 생사의 대상은 오직 神機인 인간에 있다.
그런데 만물의 생사에 대한 것은 제6장에서 논한 바이므로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본고에서 좀더 부연 논술하려는 바는 인간의 생사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생사란 것은 육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고찰해 보면 만물(인간이나 식물)은 그 형체가 율려 작용, 즉 생명력을 얻으면 생하게 되고 형체가 생명력을 잃으면 사하게 된다. 그런즉 생사란 것은 形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물은 율려 작용을 잃게 되면 그 형체가 썩어버리지만 반대로 율려 작용을 얻으면 형체가 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를 들면 육체의 한 국소가 썩어지는 병에 있어서 그 썩는다는 것은 그 국소에서 율려 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서는 그 국소에서 율려 작용을 하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율려가 운동을 정지하게 되는 원인은 율려의 주동체인 律, 즉 陽의 기능불급에 있으므로 보양(補陽)을 하면 그것은 바로 율려의 주동력인 律을 도와주는 것이 되므로 금방 새 살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종창이 농화(濃化)한 후에 새 살이 나지 못하거나, 혹은 수술 후에 새 살이 나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은 모두 동일한 예인 것이다.
이것은 한 국소가 썩는 것, 즉 죽어가는 것에 대한 예이지만 인체나 물체가 전부가 썩는다는 것은 바로 사(死)다.
그런즉 우리는 위에서 말한 적은 예에서 능히 만물의 死라는 것은 形의 死인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육체가 소멸할 때에 정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는 진실로 수천 년 간에 동원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성으로써 해결하기 어려웠던 신비인 것이다.
그런즉 본고가 이것을 논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대의 성철들이 유의이불언(有意而不言)하고 유술이불발(有述而不發)한 골격들이 전해 왔으므로 감히 붓을 드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각해 볼 때에 율려의 본원인 정신은 육체가 소멸한 후에도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정신이란 것은 바로 우주 정신인 바 만물이 몇 억 회씩 자기 주기(死)가 끝나는 동안 우주의 율려 운동은 의연히 단속하고 있은즉, 이것은 우주 정신의 무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가 죽는다는 말은 곧 우주에서 받은 정신을 우주에 환원시킨다는 말인즉, 인간에게 있었던 정신은 다시 우주 정신과 합일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간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만일 인간 정신이 우주 정신과 합일할 수가 없다고 하면 이것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 죽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만일 우주 정신과 합일된다고 하면 육체만 죽고 정신은 항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런즉 본고에서는 잠깐 인간 정신이 우주 정신과 합일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정해 놓고 생사 문제를 논술하기로 하겠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관능(官能)으로 활동하는 정신과 우주의 본능 작용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이 어떻게 합일하는가 하는 것을 논함으로써 그 결론을 귀납하려는 것이다.
즉, 감각이나 지각이나 기억이나 사고력이나 이해력이나 明과 같은 각력(覺力)을 가진 인간의 관능 작용(官能作用)을 토대로 하는 정신과, 이와 같은 관능 작용을 가지지 아니한 소천지(素天地)의 정신과를 비교 연구하면서 결론 지으려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생리 작용은 心(土)을 주체로 하고 ‘肺(木)’․‘脾(火)’․‘肝(金)’․‘腎(水)’으로써 보좌하면서 모든 변화를 일으키므로 그 보좌하는 바의 肺脾肝腎의 기능을 관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의 활동주체인 心(土)은 이와 같은 모든 관능의 도움을 얻음으로써 감각․지각․기억․사고의 순서를 거쳐서 이해, 즉 지(智)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바로 정신은 그의 활동 주체인 心(土)이 木(肺)․火(脾)․金(肝)․水(腎)와 공동 작용을 하면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 위에 논술한 바의 五行配屬은 동무(東武)가 밝힌 것인 바, 첫째로 이것은 만물생성의 이면을 논한 것이요, 둘째 그는 우주나 인간은 통일을 주체로 한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경(內經)에 오행을 木(肝).火(心).土(脾).金(肺).水(腎)로 논한 것은 만물 생성의 표면, 즉 현상을 논한 것인즉 이것은 생장면에 중점을 둔 것이요,
東武가 土(心).金(肝).水(腎).木(肺).火(脾)로 배정한 것은 만물의 이면, 즉 통일면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를 오행의 일반적 원리라고 하고 후자를 그의 이면(裏面)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여기에 의해서 오관(五官)의 관능 작용(官能作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하겠다. 木의 작용은 표면에 있는 金의 제압을 받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火의 작용은 표면에 있는 土의 작용이 가장 왕성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木이나 火라고 하는 일반적 개념은 그것을 본질면에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관찰로 작용하는 면에서 보면 木이 작용할 때는 金이 확장하기 위한 율동으로 나타나고 火가 작용할 때는 土가 수렴하기 위한 왕기(旺氣)를 띨 때가 절정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즉 이 때에는 감각과 지각과 기억력이 발전되는 것이니 청소년기의 인간이 감정과 기억이 풍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金의 작용은 표면의 木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폐의 비기(脾氣)에 의해서 상승한 水氣를 사장(四藏)에 파부(播敷)하면서 형체의 모든 조직을 포괄하는 것은 실로 체내의 木氣를 통일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水만은 표리 작용이 없다. 그것은 그 자체가 응고성과 유동성과 조화성을 가진 불변의 ‘一’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金水의 과정에서는 사고력과 이해력과 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력이나 이해력이나 明도 心(土)의 사고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心(土), 즉 정신활동이 통일과정으로 들어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고 작용이란 것은 木火와 같은 적극성과 金水와 같은 소극성의 중간점인 土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므로 인간 30~40세가 바로 사고의 시발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30~40세 이후부터 이해력과 明이 왕성하게 되는 것은 바로 金水가 자기의 관능을 발한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고증한 바에 의해서 보면 인간의 관능이 모든 정신 작용을 반응하는 것은 그 원인은 木火金水의 표리 작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만일 인간 정신이 육체라는 물질, 즉 정신의 반응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신 작용이 감각이나 지각을 각득(覺得)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각능(覺能)은 체내에서 야기되는 득려 작용(得呂作用)이 육체와 교회(交會)되는 데서 일어나는 반응인즉 육체가 없는 곳에서는 감각이 생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기억력이나 사고력이나 이해력과 같은 것은 생기지 못한다.
왜 그런가 하면 기억력은 형체내에서 일어나는 율려 작용이 양생과정(陽生過程)에서 약간의 수렴을 받을 때에 왕성하여지는 것인즉 육체변화의 1, 2단계, 즉 木火의 단계(감각과 지각의 단계)에서 그 이상의 단계인 기억 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 다음에는 사고력이 생기게 되는 바 사고 작용은 지각이 기억으로 化할 때에 이것이 자기판단을 가하려는 작용으로서 일어나게 되는 것인즉 그것이 바로 지능이 통일되기 시작하는 시초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라는 陰이 陽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 다음은 이해 작용이 생기게 되는 바 이해란 것은 칸트가 말한 바의 통각(統覺)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사고한 결과, 정확한 해명을 얻을 수 있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라는 음형(陰形)이 陽을 통일하는 제2의 단계로서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5단계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明’이 생기게 되는 것인즉 여기에서 인간 정신은 완성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는 인간 정신이 생성하는 과정을 논한 것인 바 이것은 육체라는 形 때문에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한 감각이나 지각이 차츰 발전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반면으로 우주 정신을 고찰해 보면 우주는 인간에 있어서처럼 협소한 形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각능(覺能)의 대상이 없는 것이다.그런즉 우주 운동은 기억․사고․이해와 같은 관능 작용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우주에 정신이 엄존하는 한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능 작용도 그 神明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간 정신의 모체는 우주 정신인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육체가 소멸된 뒤에 해방된 인간 정신은 우주 정신으로 환원함으로써 최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주 정신이 육체와 결합될 때 인간의 관능이 생기고 그 관능은 각수기직(各守其職)하면서 자기정신을 발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써 설명한다면 영아의 관능은 감각과 지각에서부터 시작하여서 그 다음에 기억력이나 사고력․이해력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천부(天賦)로서 받은 우주 정신이 육체의 발전과 함께 발전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우리가 인식하는 바와 같은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정신과 인간 정신은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지만 그 상과 작용은 다르다.
즉, 우리의 육체적인 정신과 우주 정신은 그 생성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관능(官能) 작용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 정신은 혼탁하지만 우주의 본능 작용으로써 이루어지는 우주 정신은 순수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주 정신과 인간 정신은 그 본질이 동일한 것이므로, 즉 인간 정신은 최초에 우주 정신에서 받은 것이므로 인간이 죽으면 우주 정신과 합일되어야 할 것이며, 또는 합일됨으로써 자기정신과 우주에 대한 봉공(奉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악과 情慾에 얽매여서 정신을 통일하지 못하고 이산(離散)만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이 존귀한 것으로 보고 있는 관능 작용의 소산인 것이지만 사실상 인간적인 관능은 죄악과 정욕의 관능이며, 또한 정신의 통일을 방해하는 본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은 우주 정신과 합일될 자격이 없다. 다시 말하면 우주 정신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통일 작용을 계계승승하고 있는데, 즉 明의 창조에 여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정신이 타락과 멸망(분산하면 멸망함)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육체를 떠나기만 하면 분산되어 버리므로 진정한 의미의 死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런즉 상술한 바와 같이 死란 것은 육체만의 死라야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인간은 육체와 함께 정신마저 멸망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의 정신은 영원히 죽어버릴 것은 물론이다.
그대로 우주의 道를 따라서 죄악과 정욕을 버리고 자기정신을 통일하는 데만 전력한다면 인간 정신은 통일되어서 우주 정신과 합일되었다가 또다시 새로운 形을 타고 본연의 자기로서 소생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생명과 정신의 영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道는 선애(善愛)와 자비를 이행하는 것으로써 神明을 통일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道나 종교는 사회의 정화나 정치의 광정(匡正)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인간 정신은 우주 정신과 합일한다는 것을 우선 전제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결론 지으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인간 정신의 종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사람은 본래 우주에서 통일된 정신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정신을 다시 우주에 바칠 때는 분산된 정신을 바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주에 대한 忠일까, 그렇지 않으면 孝일까. 이것은 물론 불충불효(不忠不孝)다.
충효 사상은 바로 이러한 천지지도(天地之道)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무소도야(無所禱也)’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득도자(得道者)의 원려(遠慮)임을 느끼게 하는 우리 동양의 철학인 것이다.
정신(精神)이란 무엇이며 또한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
조물주란 과연 인격적인 존재일까, 그렇지 않으면 우주를 움직이는 자연 자체일까 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인류 문화에 있어서 최대 최고의 숙제인 것이다. 그런데 문화의 추축(樞軸)을 이루는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마치 이 문제는 神의 분야로 양도하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유일한 신(즉, 하나님과 같은 것)만이 알 수 있으며, 또한 주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연구 분야에서 분리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전제로 하고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의 경향이다. 물론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않고 지나간 철인은 아마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매력의 문을 열어낸 사람은 아주 적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역대의 성철들이 유의이불언(有意而不言)하였거나 또는 유술이요간(有術而要簡)하였던 곳이므로 다만 우주의 신비로서 전해졌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감히 이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실로 당돌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주에는 일월과 지구가 있고 음양과 오행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만물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나(自我)다. 그러므로 나‘我’는 나를 믿고 있으며, 또한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즉 인간인 나(정신)는 내(정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하며 또 알아야만 할 것이다. 지금 신비의 문고리를 어루만지기만 하고 있는 내(필자)가 나(정신)를 찾고 또 그의 정체를 논해 보려는 것은 다만 이와 같은 나로서의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구름 속에서 튀어나오는 번개를 붙잡으려는 우도(愚圖)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번개가 엄연히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우도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찾으려는 것이 분수에 넘는 우도인 줄을 알면서도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주 정신은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또는 어떻게 운동할까 하는 것을 연구하려면 우선 우주의 창조 모습부터 대략 고찰하여야만 한다. 우주가 태양(太陽).태초(太初).태시(太始)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음양 운동을 할 수 있는 상을 나타내던 때를 태소(太素)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태소라는 것은 혼돈 상태(混沌狀態)에서 음양 운동이 분리되기 시작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음양의 분리란 것은 바로 천지일월이 이루어지는 상이다. 그렇다면 천지 일월이 어떻게 발생했는가 하는 것부터 고찰하여야 한다.
생각컨대 우주 정신은 일월로써 대행하고 일월 정신은 水火를 변화시킴으로써 감리 운동(坎離運動)을 하며, 또한 만물을 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일월 정신이 어떻게 水火 정신을 형성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만 우주 정신의 발생 연혁을 고찰하는 데에 편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일월 정신에서 水火 정신으로 변화하는 운동 과정부터 연구하여 보기로 하겠다. 태소에 음양이 갈라져서 일월을 형성한 후에 일월은 차츰 자기 운동, 즉 一陰一陽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해(日)는 양광(陽光)을 발할 수 있게 되고 달은 음광(陰光)을 발할 수 있으리 만큼 정비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 중심의 태양계에서는 이 때부터 음양 운동이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월이 제 모습을 나타내게 되면서부터 지구는 그들의 빛(光)을 받으면서 화생 작용(化生作用)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태양은 지구에 열을 퍼부었고 달은 이것을 냉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구에서는 냉열(冷熱)의 이대 작용(二大作用)이 교호 운동(交互運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음양의 교호 운동이 반복하는 동안에 지구에서는 三陰三陽의 氣가 발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풍‘風(木)’.화‘火(君火)’.습‘濕(土)’.열‘熱(相火)’.조‘燥(金)’.한‘寒(水)’의 六氣인 것이다.
이와 같은 氣들은 서로 반복교류하는 동안에 풍화습(風火濕)은 열(熱)로 발전하고 열(熱)과 조(燥)는 한(寒)으로 퇴장하면서 열기는 물을 만들고 한기는 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용은 일월의 광선에 의한 결과인즉 물과 불은 일월이 만든 것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水火의 형질은 일월의 형질 그대로일 것도 물론이다.
그렇다면 일월이 던진 한열(寒熱)의 기운이 어떻게 水火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 보기로 하자. 지구에 일월의 한열이 교류하게 된즉 여기서는 습기가 발생하게 된다. 습기가 발생한 후에도 일월은 계속하여서 한열지기(寒熱之氣)를 퍼붓게 되므로‘습기는 形이 성립되는 최초의 응결체인 만큼’ 한열의 교류를 받으면서 차츰 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물은 드디어 하해(河海)를 이루기까지에 이르렀다.
따라서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습기가 그 비례로 불어나게 되고 습기는 다시 구름을 만드는데 이것이 공중에서 한냉지기(寒冷之氣)와 충돌함으로써 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습기가 공중에서 엉키면서 태양광선이 지구에 복사(輻射)한 열을 압축하게 되므로 지구에는 장하(長夏)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소위 5,6월 염천(炎天)이란 것은 이렇게 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일월의 음양교류는 지축의 경사 때문에 한열의 차를 심하게 하는 것인즉 여기에서 사시(四時)가 생기게 된다. 일월이 던지는 한열지기(寒熱之氣)는 이와 같이 하여 水火를 형성하는 바 이것은 다만 한열지기로써 水火를 이루었다는 것뿐이고 그것이 바로 정신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水火 자체 속에서 만물의 정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없다.
생각컨대 만일에 일월의 교류 작용에 의하여 던져진 냉열 작용이 서로 교류되지 못하고 각각 유리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주는 만물도 변화도 없는 공허한 우주가 되고 말 것은 물론이며, 따라서 우주 정신도 형성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주는 위에서 말한 바 한열(寒熱)의 교류과정에서 그 최초의 현상으로 토화 작용(습기의 발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화 작용은 물질적인 교류로서 보면 습기를 발하여 구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氣化하는 상으로 보면 陽을 포위하여서 물을 만드는 己土의 작용과 陰을 확장하여서 불을 만드는 甲土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런즉 토화 작용이 甲己土 운동을 한다는 말은 음양을 교류시켜서 우주의 변화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土는 또한 우주 운동의 영원성을 창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영원성이란 것은 우주 운동의 연면불갈(連綿不竭)을 의미하는 것인즉 그것은 바로 자동적이며 규범적인 운동체에만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춘 운동체의 영원성인 바의 요인을 가리켜서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대 우주 운동은 일월의 운동으로서 표시되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의 영원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곤토(坤土)의 작용이 지구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요약하여 한 마디로 말하면 우주 정신은 일월이 발한 精과 神이 土를 발생함으로 인하여 그것과 합덕(合德)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坤(土)’이 일월과 합덕하여 정신을 생성하는 모습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土가 통일을 매개함으로써 만물의 정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위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생식(生息)하는 만물은 土의 통일 작용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즉 만물은 금수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신이 있어야만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주와 인간 이외에는 정신이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자기 자신으로 감리 운동(坎離運動)을 할 수 있는 것은, 즉 우주나 인간과 같은 것은 그 운동 과정에서 土를 자화(自化)시킬 수가 있지만 금수초목과 같은 것은 그 자기토(自己土)를 생산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외기(外氣)의 작용에 의하여 수렴하고 생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봄에 대기가 축토기운(丑土氣運)을 발하면 싹(芽)이 틀 수가 있고 여름철에 未土 기운을 발하면 성숙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립(氣立)이라고 하거니와 이것들은 水火에서 일어나는 精과 神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내부로부터 받지 못하고 다만 외부로부터 받기 때문에 자화력(自化力)을 배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나 인간은 일월의 精과 神을 자기 내부에서 받아들임으로써 거기서 土를 자화하는 신기(神機)를 이루는 것인즉 이것이 바로 정신을 생성할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 ‘日月이 발한 精과 神이 자기토(自己土)를 자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만물의 정신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土가 자기의 내부에서 자화할 때에 한하여 정신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신이란 것은 자동적이며 규범적인 운동체에서 일어나는 영원성의 요인을 말하는 것인즉 이러한 요인은 土化 작용이 土의 자화를 바탕으로 하고 감리 운동(坎離運動)을 조화하는 데서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만물의 정신은 이와 같이 하여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급하여서 인간의 정신을 화생(化生)하게 한 본원을 구명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주 정신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정신은 일월이 곤덕(坤德; 곤덕은 土에 의해서 행해진다)의 조절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인데 그 바탕이 바로 우주 정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의 본체는 일월이지만 우주 정신의 본체는 건곤인 것이다. 일월은 형체를 상징할 수 있지만 건곤은 형체 이전을 상징하는 관념적인 존재이다. 그런즉 우주 정신은 건곤의 상에서는 만물 정신과 같은 구체적인 표상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정신은 아직 음양이 분리 운동을 시작하기 이전의 상인 무극을 바탕으로 한 정적 상태이지만 인간 정신은 음양 운동을 시작한 형상인 태극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우주 정신과 인간 정신은 이와 같은 본질적인 구별이 있는 것이나 그 근원을 찾아보면 인간 정신의 본체인 바의 태극도 우주 정신의 본체인 무극에 기인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정신의 본원인 일월과 지구도 우주 정신의 본원인 무극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극을 乾(天)․坤(地)의 본체라고 하고 태극을 일월의 본체라고 하거니와 이것을 더욱 요약해서 말하면 무극은 우주와 만물의 본체이며, 또한 우주 정신과 인간 정신의 본체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는 우주 정신의 생성은 무극인 건곤에서 이루어지고 인간 정신은 태극인 일월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논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본체는 아니다. 모든 만물은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이 있는 것인즉 그것은 또한 본말과 시종의 의존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의존처를 中이라고 하는 바 그 중은 바로 우주 정신의 본체이다.
그런즉 정신은 우주나 인간에 있어서의 中인 것이다. 그런데 宇宙의 中인 바의 정신은 본체면에서 보면 中이지만 작용면에서 보면 이것을 율려 작용(律呂作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율려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먼저 연구하여야 한다.
율려(律呂)란 것은 만일 한마디로 말한다면 운동하는 음양의 순수핵심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의 음양이란 것은 음양의 혼성체(混成體)로 이루어진 음양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주의 운동은 이러한 혼성체로 이루어졌으므로 변화를 조성할 수 있는 것인즉 이것은 우주 운동을 위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그 근저에는 반드시 어떠한 본체가 있는 것인즉 바로 율려가 그의 혼성체인 음양 운동의 본체로서 군림하고 있는 바 이것이야말로 음양의 본체인 동시에 또한 정신 운동의 순수본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율려란 것은 어떠한 것이며, 또는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하자.
지구가 하루에 360도의 자전 운동을 하는 것을 분으로 따지면 1,440분이다. 그런데 지구가 1,440분 동안 자전 운동을 하는 것을 다시 따져본다면 1,440분 동안은 혼성음양의 운동, 즉 변화의 현상을 나타내는 바 그 중에서 36분 동안은 변화의 본체, 즉 순수음양인 율려(律呂)의 분수(分數)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그 36분의 작용이 음양 운동의 본체이며 또한 순수 정신인 것이다.
우주에 이러한 정신이 있는 이상 소우주를 이루는 형체들도 또한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그러나 소우주의 율려 작용은 이와 똑같은 작용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주가 운동하는 상을 살펴보면 36도 운동을 하는 우주는 구궁팔풍 운동(九宮八風運動)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궁(宮)은 구궁(九宮)인데도 불구하고 그 운동은 팔위(八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주가 이와 같은 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부터 연구하여야 한다. 모든 자율 운동체들은 율려를 순수 정신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율려라는 것은 六陽의 운동 본질을 율(律)이라고 하고 六陰의 운동 본체를 여(呂)라고 하는 바 그것을 합하여서 율려(律呂)라고 하는 것이다.
후일 이것으로써 악기의 기본을 삼았거니와 그의 본원을 캐어보면 우주의 운동 정신에서 취상작악(取象作樂)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율려의 구궁팔풍 운동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모든 사물의 운동이란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율려의 운동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을 動하게 하는 것은 율(律)이고 靜하게 하는 것은 려(呂)다.
그런데 율려의 운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四正位에 운동의 位를 두고 있으니 이것은 율려(精神)라는 운동 본질이 가장 正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사유(四維)에 율려 운동의 사정위를 보좌할 유위(維位)를 두어서 율려의 음양 작용을 매개 보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八位, 즉 팔풍지위(八風之位)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팔풍지위라는 것은 다만 율려가 운동하는 방위, 즉 방향의 位인 것이고 결코 여기에 자율성(自律性)이나 자려성(自呂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팔위에서 운동하는 율려는 자기 운동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十’자의 중심점인 것이다(제4장 ‘數’를 참조). 위에서 말한 바의 율려의 4본질(木火金水)이 四正之位에 位한다고 한 것도 또한 ‘十’자의 四正方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十’의 중심 교차점이 율려 운동의 中, 즉 팔풍의 주재처(主宰處)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계사(易繫辭)에 ‘역유태극 태극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易有太極 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였던 것이니 팔괘라는 것은 팔풍지위의 운동을 하는 상을 표시한 것이고, 사상(四象)이란 것은 사정위의 상을 계시한 것이며, 양의(兩儀)란 것은 팔풍의 상들이 각각 율과 려의 범주, 즉 ‘음양의’ 범주에 계류(繫留)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태극이란 것은 양의의 통일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공자가 한편으로는 극(極)의 조생(肇生)한 바를 귀납법으로 밝힌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궁팔풍과 태극의 핵심처가 ‘十’자의 中인 것을 밝혀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九宮의 中인 ‘十’자의 중심점은 태극의 정신이므로 이것이 팔방에서 운동하는 율려의 주재지위(主宰之位)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좀더 부연하여 보면 주재지위인 ‘十’자의 중심일점(中心一點), 즉 율려의 운동 본체인 태극의 핵심처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을 계고(稽考)해 보면 그것이 바로 무극인 것이다.
무극이란 것은 태극이 음양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상을 말하는 것인 바 그것은 바로 승부와 모순이 없는 십일합덕지토성(十一合德之土性)인 곤덕(坤德)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극의 핵심을 이룬 ‘十’자의 中도 그 기원을 여기서 얻음으로써 율려의 핵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왕괘도의 坤의 位가 바로 무극의 位인즉 이것이 노자가 말한 바의 無인 것이다.
또한 乾의 위가 바로 태극이니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바의 空인 것이며, 또한 ‘十’자의 中이다. 그런즉 이러한 태극은 어떻게 율려 운동을 하는가?1일의 360도 운동을 분으로 따지면 1440분이다. 율려는 그 중에서 36분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河心夫의 ‘正易’을 참조). 그런즉 이것은36/1440=1/40, 즉 1일의 운동분수의 1/40만큼 율려가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희괘도나 문왕괘도에 표시된 우주의 운동수는 40수를 지나지 못하고 팔풍의 水火金木의 작용수도 40을 지나지 못하는 것인즉 율려의 수가 그의 1/40이라는 말은 곧 1이 우주운동의 본질이며, 또한 그것이 곧 율려라는 말이 된다. 그런즉 율려는 그의 창조적 기본에서 보면 1이지만 운동하는 현상에서 보면 36인 것뿐이므로 그 기본을 태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1이라는 우주의 창조적인 본원은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소우주를 창조할 때에 1이 水土동덕을 하면 36이 되고 수토합덕을 하면 1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극은 무극으로 변하고 무극은 다시 태극으로 化하는 작용의 반복인 것이다.
그런즉 36은 운동하는 음양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1은 36의 귀장, 즉 순수음양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一夫)는 이것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즉 ‘이회본원 원시성 건곤천지 뇌풍중(理會本源 原是性 乾坤天地 雷風中)’이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이것을 해석해 보면 ‘理가 회동(會同)하는 본원을 是性에서 찾아보니 건곤천지(乾坤天地) 뇌풍궁(雷風宮)에 있었던 것을’ 이와 같이 자기의 득도과정을 회고(回顧)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是性이라는 것은 불교의 ‘如是’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율려 36분의 시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理가 회동하는 것은 水土가 동덕(同德)하여 坤土를 환원하는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건곤이 일월에게 대행시키지 않고 직접 천지운동을 하는 상을 뇌풍궁중(雷風宮中)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즉 그러한 상은 바로 복희괘도의 상으로써 선천 기본을 이루었고 정역금화도(正易金火圖)로써 후천 기본을 이루어 놓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이상을 요약해 보면 우주 정신이라는 것은 순수음양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창조의 본원인 무극과 작용의 본체인 태극 사이에서 왕래하는 율려 작용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율려 36이 1로 환원될 때는 정신이 완성되는 때이며 1이 36으로 분화(分化)하는 때는 정신이 발전하는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신의 운동본체(運動本體)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원자란 한 개의 ‘宇宙의 최저단위’라고 말한 바 만일 그렇다면 원자에도 우주와 같이 정신이 있어야 할 것인즉 원자의 정신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있는 문제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얼른 생각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에너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이것을 검토하면서 정신과 대조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과학자는 태양이 내부에서 그의 최고열 상태(最高熱狀態)가 부단히 원자핵 전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태양이 그의 에너지를 우주에 방사하고 있는 바의 과정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 뒤에 과학자들은 수소원자의 핵이 모여서 헬륨 원자로 전환할 때에 거기서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네 개의 수소원자의 핵이 헬륨 원자로 전환할 때에 6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바 이 때에 수소원자의 핵은 연료의 작용을 하게 되고 헬륨 원자핵은 재(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원자핵이 일단 전환한 뒤에는 탄소원자는 다시 자기 본래의 자태로 환원되어서 그 다음의 반응을 매개하는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탄소가 전체 순환의 기본이 되는 바 이것이 헬륨의 핵 전환 후에 탄소가 본래의 질량이던 12의 질량으로 환원하게 되면 또다시 양자(陽子)를 흡수하여 가지고 새로운 전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탄소(炭素)는 이와 같이 화학반응의 매개를 하는 바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원자의 이와 같은 화학반응은 따지고 보면 태양에서 일어나는 핵의 물리적 반응에 불과한 것이다. 에너지란 것은 수소원자가 헬륨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방출한다는 사실은 과학적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그러한 면에서 에너지를 발견하였다는 것뿐인 것이다. 에너지의 발견은 그밖에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이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태양에서 발사하는 에너지나 만물의 기본단위인 원자의 에너지는 바로 우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그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로, 위에서 말한 바 핵반응에 참가했던 네 개의 수소원자가 핵반응을 일으킨 후에 그의 중량을 조사해 보면 에너지를 방출하기 이전의 질량과 비교해서 그 중량에 극소의 차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런즉 그 소량의 차가 바로 에너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의 음양운동 과정에서 생성되는 율려의 순수성과 극소성(極少性)을 말하는 것인 바 이것은 원자물리학의 술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에너지에 해당된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헬륨 핵의 전환반응이 부단히 반복되는 점만을 포착한 것이므로 무반응 상태에서 일어나는 원자의 융합, 즉 에너지의 통일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분석면에만 너무 치중한 결점이거니와 과학자들이 만일 눈을 크게 떠서 무수한 원자운동의 집단 작용인 우주의 임관 작용(臨觀作用)을 관찰한다고 하면 핵반응의 무수한 반복은 결과적으로 무반응의 통일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말하는 인신상화(寅申相火)라는 과정은 부분적으로 보면 핵의 융합반응(핵융합이 실패한 현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핵의 융합을 성공하는 상인 것이다. 천도는 이 원리의 반복으로 인하여 율려와 정신을 창조하고 있는 것인즉 소우주인 원자가 이 원리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원자에서 방출된 에너지는 극소량 인데 비하여 율려는 36/1440이라는 큰 양인즉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점이다.
율려(律呂)는 우주 정신이다. 더욱이 36/1440이란 수는 丑未辰戌을 四正位로 한 우주 정신을 표시한 수이므로 오늘의 우주 정신에 비하면 더욱 큰 것이다.
그런데 원자핵의 실험반응에서 얻은 에너지(律呂)는 소우주가 못 되는 물질(원자)에서 얻은 것이므로 그와 같은 극소의 양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우주, 즉 신기(神機)가 아닌 기립지물(氣立之物)에는 정신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율려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자존활동(自存活動)을 할 수 없는 점을 한계로 하고 그 유무를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한다면 만물에는 모두 율려가 작용하고 있지만 그 율려량의 다소에 의하여 정신의 유무를 표시하는 것뿐이다. 그런즉 원자 에너지와 율려수의 차는 역시 클 수밖에 없다.
둘째로는, 수소원자핵이 전환반응을 일으킬 때에 6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음양의 모든 작용은 반드시 寅卯辰巳午未의 6단계를 거쳐서 한 번씩 분합반응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인즉 원자핵의 융합반응과 천도의 통일반응은 우주의 운행법칙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셋째로, 탄소가 헬륨 원자핵 전환반응의 기본을 이루는 중매적인 결합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十土가 통일 작용의 기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十土가 陽을 결합시키는 것처럼 탄소도 양자핵(陽子核)을 결합하고 있으며 土의 중화 작용(中化作用)이 끝나면 자기 본체로 환원하는 것처럼 탄소도 또한 자기의 임무가 끝나면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十土의 작용과 전혀 동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탄소가 에너지를 만드는 최초의 결합 작용을 하는 것과 未土의 결합에 의해서 정신을 창조하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핵융합 반응에서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실험해 낸 과학적인 결론에 대해서 필자가 에너지를 만든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다.
즉,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相火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은데 과학은 이것을 부분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핵융합의 반응, 즉 융합이 이루어지면 폭발하여 버리는 면만을 발견했지만 사실은 이것이 완전 융합을 하기 위한 과도적인 상화의 현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핵융합 작용이 에너지를 만든다고 말한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원자 세계의 운동에서 에너지를 창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주가 정신을 창조하는 과정과 아주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원자가 우주의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그의 운동 전모가 우주와 꼭같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천도운행의 원리를 ‘近取諸身’하라고 했지만 오늘에 와서는 ‘近取原子’하라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할 만도 한 것이다.
논지 외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한마디 첨부하여 두고 싶은 것은 원자핵을 분열시킬 때에는 중성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니 이것을 상수학으로 보면 陽土의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핵융합 반응은 탄소에 의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상수원리에서 보면 陰土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중성자와 탄소는 陰陽二土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헬륨 핵의 융합이 相火와 동일한 것인즉 만일 이후로 원자물리학이 이 방면에 대한 실험과 아울러 동양 철학의 상수원리에서 그의 철학적인 발판을 얻으면서 발전한다고 하면 수소핵의 융합 반응에 의해서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완전 융합시키게 됨으로써 수명의 연장이나 무한동력(無限動力)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헤겔은 그의 독특한 변증법으로 모든 사물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대립관계를 설명했고 정신의 발전 양상도 또한 그것으로써 설명했다. 그러므로 다음에 그의 논지를 열거하면서 이것을 변화원리와 비교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그는 말하기를 여하한 개념이든지 반드시 대립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념(Thege)은 대립개념(Antithes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순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모순이나 대립은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종합(調和) 개념(Synthesis)에 의하여서 조화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개념과 대립개념간에 야기되는 모순은 종합개념에 의하여 지양되면서 사물이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복은 전개념(前槪念)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개념을 보호하면서 다시 더 고차적인 개념을 향해서 변증법적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동일성과 전체적인 보편성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理念’이라고 말했다.
개념은 이와 같이 하여 이념의 성립을 보게 됨으로써 완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절대 정신인즉 이른바 절대 정신도 또한 개념의 자기발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자기 발현도 또한 순수한 상태에서 상대적인 상태로 변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주관적(主觀的)이며 실현적(實現的)인 상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추상적이던 정신은 구체적이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절대 정신인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그의 변증법을 검토해 보면 물질의 발전이나 인간의 정신적 발전은 동일한 원리에 속한다고 한 점이다.
그것이 비록 정신을 발전하는 면에서만 볼 뿐이고 통일하는 면에 대한 언급이 없는 논지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서양 철학 사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대사실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사물의 발전을 모순대립(변증법적인)의 과정으로 본 것은 더욱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을 만일 발전하는 면에서만 본다면 상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음의 ‘오운육기도(五運六氣圖)’에 의해 연구하기로 하자.
‘오운육기도五運六氣圖’는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변증법 발전도’로도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그림을 자세히 봄으로써 알 수 있다. 도(圖)의 북방에 ‘亥(木)’.‘子(火)’.‘丑(土)’이 있는 바 이것은 水가 木을 生하는 상인데(방위로 보면 亥子水가 五土로서 조화되면서) 그것은 바로 亥子의 木火가 水에 항거하면서 투쟁하다가 丑土의 조화를 얻음으로써 투쟁을 지양하고 종합 개념으로 발전하는 상이다.
그 다음은 ‘寅(相火)’.‘卯(金)’.‘辰(水)’이 木을 형성하는 과정인데 여기에는 相火와 金水가 들어와서 방해하기 때문에 木과 투쟁이 일어난다(제2장 제3장 ‘五運과 六氣’를 참조). 그러나 辰土의 조화를 얻음으로써 투쟁은 지양되고 또한 새로운 종합 개념을 이루면서 발전하는 것이니 이것은 그가 ‘구개념(舊槪念)으로의 환원이 아니고 오히려 구개념을 보호하면서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한다’고 말한 바와 동일한 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巳(木)’.‘午(火)’.‘未(土)’가 들어옴으로써 火로 발전하게 되는 바 위에서 본 바의 水와 木이 발전하던 때에 비하면 모순이 거의 없다(主氣와 客氣간에). 다만 객기(客氣)의 木이 사소한 방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위에 또 未土라는 土中之王이 이것을 조절하고 있은즉 여기서 모순이 완전히 지양되고 가장 고차적인 발전의 매개 작용을 하는 단계다.
우주 만물은 이와 같은 3단계를 거쳐서 모순대립은 지양되고 다시 새로운 전체적 통일을 이루게 됨으로써 또다시 차대의 발전요인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과정이 무수히 반복한 다음에 절대적인 동일성과 전체적인 보편성인 이념의 종결을 실현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헤겔의 변증법과 대조하기 위해서 상수원리의 발전 부분만을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변증법적 발전이 어떻게 통일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상수원리의 임무다.
우주 만물은 火의 과정에서 모순이 끝나게 되면 그 다음은 ‘申(相火)’.‘酉(金)’.‘戌(水)’이 들어와서 통일을 이루게 되는 바 이것을 방위로 보면 西方金이 작용하는 방위인데 여기에 상화(申은 완성된 相火)와 金水(酉戌은 완성된 金水)가 들어오게 되므로 통일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대 木이 生하던 때에도 寅卯辰이라는 상화와 金水가 들어와 투쟁을 일으켰지만 寅卯辰은 申酉戌의 시초, 즉 申酉戌의 미완성품이었기 때문에 木이 生하는 과정에서 모순을 일으킬 뿐이고 결국은 동화하면서 지양되고 말았지만 신유술은 金의 통일 과정인 데다가 또한 완성된 상화와 金水가 가세하게 되는 것인즉 여기에서는 모순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헤겔이 말한 바의 ‘理念의 완결처’란 것은 바로 여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 정신은 여기서 완성되며 절대적인 동일성과 전체적인 보편성도 또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亥子丑․寅卯辰에서 이루어졌던 모순을 巳午未에서 매개하여 가지고 申酉戌에서 완성하는 것인즉 우주는 여기에서 통일되어 가지고 또다시 亥子丑의 모순대립이 반복되는 것이다.
주) 방위로 보면 寅卯辰.巳午未는 모순의 기간이고 申酉戌․亥子丑은 통일의 기간이지만 변화로 보면 위와 같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주객의 체용적(體用的) 관점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만일 이와 같은 체용적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원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즉 이 점에 유의 숙고하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림의 내부에 표시한 바의 오운의 경우도 또한 동일한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요약하여 말하면 木火의 모순은 甲土의 조화로 인하여 조화 발전하고 金水의 통일은 己土의 조화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약(略)한다(제2장 2절 ‘오운의 변화’ 참조).
우주 정신이나 인간 정신은 상술한 바와 같이 本中末의 운동을 하면서, 즉 모순대립을 지양하면서 발전하였다가는 퇴장(退藏)하는 것인 바 여기에서 말하는 바의 퇴장은 발전을 위한 퇴장이며, 발전은 퇴장(完成)을 위한 발전인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1년을 주기로 하고 일어나는 바 四時의 交易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은 최저단위의 본중말 운동, 즉 개념․대립개념․종합개념의 운동은 우주 운동의 명수(命數)에 의하여 진퇴의 대주기가 결정되는 것이다(‘황극경세(皇極經世)’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정신을 무한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도 발전만을 거듭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문화의 조류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2대조류로서 흐르고 있는 바, 즉 정신 문명이 발달할 때에는 물질문명이 쇠퇴했고 물질문명이 발전할 때에는 정신 문명이 쇠퇴했던 것이다.
그런즉 정신이 발달하는 때와 육체가 발전하는 때가 서로 교대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흐르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오늘의 역사를 살펴 보면 물질 문명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 문명은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 년 전만 하더라도 모든 문화는 윤리나 도의 정신(道義精神)만이 문명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문화를 재는 척도를 물질에만 둔다면 오늘 문명이 역사최대의 문명일지 모르지만 그 척도를 반대로 정신에만 둔다고 하면 오늘의 인류는 암흑세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인간 정신은 발전만을 계속한다’고 한 것은 대저 인간 정신의 발전을 재는 표준을 어디에다 두고 하는 말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의 활동이 무사무악(無邪無惡)한 公道를 행할 때를 가리켜서 최고도로 발전된 정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즉 그것이 바로 ‘이념의 완결처’이며, 또한 절대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인간 정신을 그러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만일 헤겔이 생존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그의 역사철학은 고쳐 쓰거나 혹은 불에 태워 버리거나 하였을 것이다.
우주에는 청년과 노년이 있으며 건강과 지병이 있으며 부귀와 빈천이 있고 선악과 생사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서 일월의 진퇴와 음양의 굴신(屈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수원리는 모든 만물의 무한 발전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없고 다만 이것을 일진일퇴하는 물의 파동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즉 그가 만일 우주의 모든 이상을 관찰함에 있어서 사물을 발전하는 면에서만 고찰할 것이 아니라 통일하는 면에도 눈을 돌렸다면 그의 철학은 진리의 새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됐다면 그의 변증법과 동양의 상수원리는 표리상응(表裏相應)하면서 인류 문화의 차원을 높여 놓았을 것이다.
우주의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정신의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같이 신비경 속에서도 가장 유현(幽玄)한 곳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이것을 불가침의 신비 세계, 즉 천당이나 극락의 권부(權府)와 같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히 이것을 계발하려고 생각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설혹 착상하려는 학자가 나왔다고 할지라도 공상(空想)으로 시종(始終)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시천원책문(太始天元冊文)에 천체에서 오운이 변화하는 상을 수상(垂象)했고 그 후에 하도와 낙서로써 오행 원리와 그의 운동 법칙을 계시한 것은 분명히 조물주가 인간에게 우주 원리를 개발하라는 암시거나 또한 명령이라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어시(於是)에 복희(伏羲)가 팔괘를 그려서 상을 표시하는 기본을 만들었고 황제(黃帝)가 갑자성두(甲子星斗)의 원리를 밝혔고 문왕 주공이 작사해명(作辭解明)함으로써 ‘易’이 완성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변화의 象과 數가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부자(孔夫子)의 탄생으로써 易에 십익(十翼)을 가하게 된 것은 역의 상수 원리를 보편화하려는 대성(大聖)의 유지(遺志)로서 또는 만세지사(萬歲之師)로서 지구 위에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공부자가 우주의 본체가 太極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고 그 후 주자가 무극설을 제창했고 김일부가 삼극 원리를 밝혀 놓음으로써 우주의 본체와 그의 운동하는 상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선성(先聖)의 유지에 따라 천고의 신비경을 헤쳐보려는 것인 바 혹시 성지(聖志)의 오의(奧義)를 그르치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 금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문화의 사조는 진리의 개발을 요구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우주 변화의 기본 원리인 우리 동양의 성지(聖旨)를 언제까지나 보호잠장(保護潛藏)하는 것만으로써는 후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감히 당돌함을 무릅쓰고 천고의 신비인 우주의 본체를 더듬음으로써 후일 정비(精秘)의 정체와 대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 보려는 것이다. 그런즉 추론이 비록 가교(假橋)일망정 이것으로 인하여 사도개발(斯道開發)에 대한 호모(毫毛)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으로써 만족을 느끼려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本體)와 상(象)
태극도설(太極圖說)
태극(太極)이란 개념은 한 마디로 말하면 극히 클 수 있는 바탕을 지니면서도 극히 작은 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가 음양을 생성하는 상은 陽이 생하려고 할 때에는 그 상은 극히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장차 큰 陽을 나타낼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陰이 成하려 할 때에는 그 상은 극히 작으면서도 장차 큰 陰을 형성할 수 있는 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陽의 극단(極端)과 陰의 극단은 각각 그 태극의 운동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작용은 반드시 본체가 있을 것인 바 그 본체를 가리켜서 태극이라고 한다.
위 그림은 본래 도가(道家)에 의해서 전래한 것인 바 그것은 조중전(趙仲全)에 의하여 전해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또한 팔괘가 생성하는 상이 유루없이 정확히 나타나고 있은즉 가히 태극의 정체를 상징하는 데 만족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세상에 전한 지 천 여 재(載)에 명가(名家)의 횡설수설도 많았지만 상고하여 보면 이것이야말로 우주의 본체인 태극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시 없는 지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태극을 논하기로 하겠다.
고(古) 태극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북방의 丑에서 백권(白圈)이 시작하여서 未에 이르게 되면 동남의 표면으로 발전하던 陽은 이면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여서 戌의 부위에 이르게 되면 통일이 완성되고 동시에 丑에서 일어날 陰을 養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서남방의 未에서 흑권(黑圈)이 시작하여서 丑에 이르게 되면 서북의 표면에서 포위하던 陰은 이면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여서 辰의 부위에 이르게 되면 陰은 세력을 잃고 다시 이면에서 장차 未에서 기시(起始)할 바의 陰을 養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 표시한 丑未는 각각 丑未土의 말미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즉, 축종(丑終)은 축시(丑始)에서 시작되고 미종(未終)은 미시(未始)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즉 丑의 부위 전면은 그림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순음(純陰)이고 未의 부위 전면은 순양(純陽)인 것이다.
그런데 복희가 팔괘도를 획(劃)함에 있어서 정남에 건을 놓고 정북에 곤을 놓은 것은 건곤이라는 순양과 순음은 만물생성의 기시(起始)이며 음양 운동의 본원이기 때문에 우주 운동의 본원인 남북극을 표준으로 하고 배정한 것이거니와 후에 도가(道家)에 의해서 (古) 태극도를 그릴 때에 순음순양(純陰純陽)인 음양을 건곤의 다음에 놓은 것은 진실로 복희가 건곤을 배치한 뜻과도 동일하거니와 우주 운동의 正道(지축이 경사되지 않은 것)와 부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곤은 우주 작용의 본체인즉 그것은 또한 태극의 본체이기도 하다. 그런즉 음양이라는 후천적 작용은, 즉 건곤의 가음가양 작용(假陰假陽作用)에 불과한 것인 바 이것이(후천음양) 바로 (古)태극도가 상징한 바의 순음순양(중앙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도의 건곤은 마땅히 중앙에 位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진괘(震卦)와 손괘(巽卦)의 부위에서 음양의 상을 살펴보면 震의 부위에서 보면 밑에 陽(日)이 1/3 정도 만큼 있고 그 위에 陰이 2/3 정도 만큼 두텁게 있으니 이것은 바로 震卦의 상이 이음지하(二陰之下)에 일양(一陽)이 깔려 있는 것을 표시한 것이고 巽의 부위에서 보면 밑에 陰이 1/3 정도 만큼 있고 그 위에 陽이 2/3 정도 만큼 두텁게 있으니 이것은 바로 巽卦의 상이 이양지하(二陽之下)에 일음(一陰)이 깔려 있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도 역시 복희괘도(伏羲卦圖)의 의미를 태극도로써 여실히 표시하여 놓은 것이다.
그 다음은 艮의 부위에서 음양의 상을 살펴보면 밑에는 陰이 2/3 만큼 있고 그 위에는 陽이 1/3 정도 만큼 덮여 있으니 이것은 바로 艮卦의 상이 일양지하(一陽之下)에 二陰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고,
兌의 부위에서 보면 밑에는 陽이 2/3 만큼 있고 그 위에 陰이 1/3 만큼 덮여 있으니 이것은 바로 兌卦의 상이 일음지하(一陰之下)에 二陽이 있는 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도 역시 복희도의 의미를 여실히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찰해 보면 이 그림은 태극도로서는 이 이상 더 팔괘의 생성이치를 표시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태극도가 배회하고 있지만 이 그림처럼 원천태극(原天太極)을 팔괘생성(八卦生成)의 象대로 표시한 것은 없으며, 또 표시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문왕도의 상에 맞추어 그린다면 또 한 개의 태극의 상이 나올 수도 있으나 이것은 병든 태극의 현상이 될 것이므로 원천태극(原天太極), 즉 태극의 자연적인 상태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왜 태극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여야 한다.
태극의 운동이란 것은 丑과 未의 기두에서 호상교체(互相交替)하면서 음양이 기복(起伏)하는 운동을 말하는 것인 바 이것은 오행 원리(五行原理)로서 보면 오륙(五六)의 소장 운동(消長運動)이고 팔괘의 상으로서 보면 건태이진(乾兌離震)과 손감간곤(巽坎艮坤)이 기복(起伏)하는 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이 있은즉 반드시 그 상을 나타내게 하는 중심점, 즉 본체가 있을 것이다. 그런즉 그 본체란 것은 바로 위의 그림의 중앙의 점, 즉 팔괘의 핵심점인즉 태극도의 정중앙 백점(白點)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태극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이 한 점은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큰 작용을 하려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중앙 흑백권(黑白圈) 中에다가 표와 표를 한 것이니 이것은 음양이 이 점에 이르러서 다시 기복 작용(起伏作用)을 하려는 뜻을 머금은 것을 표시한 것이다.
태극도가 이와 같이 정밀무비(精密無比)한 상을 나타낼 수 있도록 그려진 것은 도가에 의한 공로거니와 이러한 완전한 圖가 있음으로써 필자가 위에서 말한 바 土의 중심점, 즉 十字形의 ‘十’자의 중심교차점이 바로 우주의 본체라고 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거니와 이것만 보아도 우주의 본체는 태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이와 같은 태극이 어떻게 운동하는가 하는 것을 논해 보기로 하겠다.
주) 위에서 (古) 태극도는 그의 발전과정에서 팔괘(八卦)의 생성하는 상을 어김없이 나타냈다는 것을 약술하였으나,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려면 복희도와 문왕도가 팔괘를 표시한 원리를 논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학의 전문분야이므로 여기에서는 略한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태극이 우주의 본체가 된다는 것은 (古) 태극도를 연구했고 또 이것이 복희도의 상과 꼭 부합(符合)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복희괘도와 태극도가 이론적으로 상부상합(相符相合)된다는 추상적인 논거인 것 뿐이고 구체적인 논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周子)가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서 논한 것이 ‘주자의 太極圖說’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가 (古)태극도의 진리를 알고 이것이 어떻게 운동하는가 하는 것을 밝혀 놓은 것이 바로 그의 태극도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그의 태극도설을 그려놓고 태극이 動靜하는 상, 즉 우주 본체의 운동 모습을 고찰하려 한다.
‘한상역도(漢上易圖)’는 주자에 의하면 진박(陳搏)이 충방(禾中放)에게 가르침으로써 시작하여 충방이 목수(穆修)에게 목수가 주자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한상역도(漢上易圖)’는 이와 같이 전래된 것이거니와 주자는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 소위 ‘주자의 태극도설’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圖는 주자가 사실상 (古)태극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圖로써 작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그 내용을 논하겠거니와 잠깐 여기에서 논급할 것은 태극도설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태극도설이란 것은 주자의 태극도와 그 說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의 태극도는 어느 모로 보나 단순한 태극도만은 아니다. 이것은 주자가 태극의 운동하는 상을 해설하기 위한 그림인 것이다.
‘說’자의 뜻에는 ‘까닭’이라는 의미가 있은즉 태극도설(太極圖說)이란 개념은 태극도의 까닭, 즉 태극도의 운동 내용을 표시한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그림 자체가 바로 ‘태극도설’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한상역도’부터 먼저 논하기로 하겠다.
‘한상역도’의 상부에 표시한 흰(白) 空에는 음정(陰精)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바 이것은 바로 우주 운동의 본원을 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음양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즉 그의 운동하는 상이 표시되려면 반드시 음양의 상태가 나타나야 할 것인데 이 그림은 단순히 소지(素地)에 空을 표시한 것은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精이라고 하거니와 더욱이 음정이라고 한 것은 土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土의 상은 陰의 시초이며, 또한 적막무짐(寂寞無朕)한 것이다. 그런즉 팔괘 중에서 음정지체(陰精之體)는 坤(즉, 土 상태)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창조의 시초이며, 또한 만물의 시원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시초인 것 뿐이고 아직 動하는 존재는 아니므로 이것을 무극이라고 한다. 그런즉 여기에 표시한 것은 만물이 동정하는 근원인 무극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음에 양동(陽動)이라고 표시한 위에 있는 그림의 중앙에 있는 작은 空은 음정 작용(陰精作用)에 의해서 수축된 무극, 즉 태극의 핵인 것이다.
이 핵의 좌측에는 離卦의 상이 성립되어 있고 우측에는 坎卦의 상이 성립되어 있다. 離卦는 火의 상이고 坎卦는 水의 상인데 이 두 개의 상은 중앙에 있는 태극의 핵을 기본으로 하고 水火 운동을 하게 되는데 그 動하는 기본이 태극의 핵, 즉 土가 金水와 합세하여서 陽을 수축한 바인 한 점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陽動이라고 표시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太極이다.
그 다음 바로 그 밑에 있는 그림은 오행 운동을 표시한 그림인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의 태극의 운동 내용이다. 그리고 오행의 기호 밑에 소백(素白)의 空은 무극의 표시이다. 이제 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면 오행 운동은 生할 때에는 甲土에서 시작하고 成한 때에는 己土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生하는 상을 관찰하여 보면 土(己)金水로써 핵의 본을 이루고 土(甲)木火로써 생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으로 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이 생장한 火는 반드시 무극의 소양(素養)을 받아서 水를 만들어 가지고 火를 포위하면서 생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에 표시된 바와 같이 火에서 土를 거치지 않고 직선으로 무극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직선으로 水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土木火로 생장한 火는 반드시 水의 포위를 당하면서 생장하기 위하여 무극을 생명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으로 이것을 수장(收藏)하는 상에서 살펴보면 생장하는 상의 반대 작용을 한다. 즉, 土木火.土金水의 작용이 水에까지 이르게 되면 반드시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성된 水는 무극의 소양을 받아서 火로 발전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다시 水中에 들어감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水에서 직선이 무극에까지 이르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火로 연락되는 상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 다음은 空의 좌우에 건도성남(乾道成南).곤도성녀(坤道成女)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행 운동에 의해서 동정하는 태극의 바탕, 즉 무극이 없다면 태극에 영속성이 있을 수 없은즉 사실상 건곤의 남녀생성 작용, 즉 음양생성 작용은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건곤이 남녀를 생성한 것은 그 근원을 따져보면 무극이 생성한 것이다.
그 다음 소백(素白)의 空에다가 만물이 化生이라고 표시한 것도 역시 만물은 음양과 오행 작용에 의해서 생성하는 것이나 사실상 무극이 없으면 생성의 기본이 없으므로 만물을 생성하여 내지 못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한상역도(漢上易圖)’는 이와 같이 무극이 태극으로 발전하고 태극이 오행 운동을 함으로써 만물이 화생한다는 것을 표상하였지만 이것만으로써는 연결성이 없기 때문에 주자가 태극도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주자의 도설(圖說)을 연구하기로 하겠다.
이 그림에 있는 소백(素白)의 空은 물론 무극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밑에 있는 태극과 오행 운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한상역도’와 다른 점이다. 우주 운동의 본질인 무극을 설명하는 圖로서는 이렇게 구성됨으로써만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태극의 좌우에 음동양정(陰動陽精)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바 이것은 左의 離卦의 상과 右의 坎卦의 상이 중앙에 있는 무극으로 인하여 태극의 핵을 이루면서 동정을 반복하는 상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 자체만을 살펴볼 때 陽방위를 중심으로 하고 보면 중앙의 土에서부터 시작하여서 土木火.土金水 운동을 함으로써 오행은 수장주기(收藏周期)를 끝내게 되는 것이며, 陰方을 중심으로 하고 살펴보면 중앙의 土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지고 土金水.土木火의 운동을 함으로써 발전의 주기를 끝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보면 다만 태극이 오행 운동을 반복하는 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반복하는 만물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태극체가 아닌 것은 없다. 物의 최저단위인 원자에 있어서마저 태극을 이루고 있는데 만물에 있어서랴!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태극과 우주의 연결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정신이나 생명력이 매개(每個)의 태극에 연결되어서 소양(素養)의 역할을 하여 주지 못한다고 하면 소위 태극 운동의 에너지는 공결(供結)이 두절(杜絶)되고 말 것이다. 그런즉 태극의 오행 운동은 반드시 어떠한 소양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극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金木 밑에 소백의 공은 태극을 養하는 우주의 본원으로서의 무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태극의 핵인 무극과 목화토금수의 中으로 표시된 무극은 엄연히 구별하고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에서 태극의 운동이 무극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고찰해 보면 위에서 말한 바의 土木火.土金水는 水에서 주기를 끝내게 되면 다시 무극에서 바탕을 養하여 가지고 또다시 통일의 목적인 火를 養하게 되는 것이다.
태극도설은 이것을 표시하기 위하여서 일면으로는 土木火.土金水의 통일 운동이 끝나면 水에서부터 곡선을 따라서 離(火)卦를 포위하기 위하여 離괘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하여 놓았고 또 다른 면으로서는 통일 작용이 土木火 土金水의 水까지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水) 무극의 소양을 받아 가지고 火로 발전하였다가는 또다시 감(坎)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다가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상을 표시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土木火.土金水의 운동이 水를 완성하여 가지고 離火를 포위하는 상에는 다만 개개의 태극 완성, 즉 만물이 이와 같이 통일 운동을 한다는 것을 표시한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면으로는 또 통일을 완성한 水가 무극에 이르러서 우주생명을 받아가지고 火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감(坎) 속에 들어가는 상을 표시한 것인즉 이 두 개의 면은 그 결과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다.
그 다음에 만물이 생장하는 상을 살펴 보면 이것은 바로 통일 과정의 변화와 정반대다. 즉, 土金水.土木火의 생장과정은 火에 이르는 것인데 이것은 坎中에서 水를 뒤집어 쓰고 생장하는 상을 표시하기 위하여 火에서 곡선을 통하여 坎에 접속되는 상을 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土金水.土木火의 과정은 통일 과정에서 전에 水로써 離火를 통일하였던 것이 坎中에서 다시 곡선을 통하여서 火土金.火水木의 순서로써 발전하는 것을 표시한 것이니, 이것이 癸(火).甲(土).乙(金).丙(水).丁(木).戊(火)의 발전 순서이며, 또한 子(火).丑(土).(寅은 無根之火 故不用).卯(金).辰(水와 土).巳(木)午(火)의 발전순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운동은 다른 면으로 보면 火에서 직선으로 무극에 이르러서 다시 水로 연결됨으로써 離火에 水를 뒤집어 씌우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주자는 이와 같이 ‘한상역도’를 곡선으로써 연결시켜서 양핵의 통일 원리를 규정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우주의 본체와 본원을 소명(昭明)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우주 운동의 본체는 태극이요, 그 본원을 무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이 구별하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태극 운동을 하고 있은즉 만물이라는 매개의 우주는 태극의 운동에 의해서 생성하는 것이므로 그 본체는 태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매개의 우주 운동은 일괄된 전체 우주인 대우주의 정신, 즉 에너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본원이 바로 적막무짐(寂寞無朕)한 무극에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이와 같이 무극과 태극을 구별하기 위하여서 무극설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說에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극에서 태극으로 계승한다는 의미인 것이다(而자에는 계승의 뜻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말한 바 ‘五行은 一陰陽也요 陰陽은 一太極也니 太極은 本無極也’라고 한 것으로써 반증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이무극’이라는 것을 단순히 태극이 바로 무극이라고 해석하고 또 ‘太極은 本無極’이라고 한 것을 태극은 무극에다 근본을 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주자가 태극과 무극을 동일하게 논하였다고만 주장하는 학자가 고금을 통해서 없지 않았던 것은 실로 유감이다.
무극설을 처음으로 제창한 것이 주자인데 만일에 무극과 태극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가 무극설을 입론(立論)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즉 ‘태극’이라는 의미의 이면성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위에서 논한 바에 의하여, 즉 (古)태극도에서 우주 운동의 본체가 태극이라는 것을 고찰하여 보았고 주자의 태극도설에 의해서 그 본원이 무극에 있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런즉 다음에는 삼극설(三極說)을 인용하여서 우주의 본체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삼극설(三極說)
(古)태극도는 태극의 자세를 밝혔고 주자는 무극이 태극을 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즉 남는 문제는 첫째로, 무극과 태극에 대한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둘째로, 무극과 태극의 운동 실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일부(一夫)다. 일부가 삼극설을 제창한 것은 물론 우주 본체와 우주 운동의 실상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면으로 상수 원리를 발전적 입장에서 보면 무극과 태극에 대한 최종 결정을 지은 것이 바로 일부였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일부는 삼극설을 제창함에 있어서(일부는 삼극설이라는 개념을 붙인 바 없지만 그 내용이 삼극설이기 때문에 필자가 삼극설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嗚呼라! 今日今日에 63, 72, 81하니 一乎 一夫로다’라고 하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今日今日’이란 것은 선천태극의 운동이 끝나고 후천무극의 운동이 시작하는 시공간 작용의 時運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천의 말과 후천의 시초는 단순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있어서는 실제로는 선후천을 구별할 수 없으나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반드시 구별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一夫는 이것을 가리켜서 ‘今日今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時空의 間’인 선후천의 경계점에 있어서는 만물이 최대 분열을 하는 것인즉 그 상의 數는 63, 72, 81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7×9=63, 8×9=72, 9×9=81이라는 말이니, 그것은 만물이 구자승으로써 최종분열을 하는 것인 바 그 시초는 ‘7×9’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지고 ‘9×9’에 이르러서 완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분열하는 과정의 수인 바 63.72.81은 합 216이 되는데 이것이 소위 건지책(乾之策)이다.
그런즉 건지책의 작용이 끝나고 곤지책(坤之策)의 144수가 작용을 시작하려는 그 ‘時空의 間’을 지칭하기 위하여서 ‘今日今日’이라고 하고 또한 63.72.81이라고 한 것이니 그 상을 수리(數理)로써 따지면 총계 건지책 216수의 과정이란 것을 논한 것이다.
일부 선생은 다음에 계속하여서 ‘거편무극(擧便無極)이니 십(十)이요, 십(十)은 편시태극(便是太極)이니 일(一)이니라.’ 이와 같이 논하였다.
이제 이것을 자세히 말하면 다 들(擧)었을 때는 그것이 바로 무극의 상이요, 다 합(合)하였을 때는 그것이 곧 태극의 상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면 선생은 항상 손[手]을 신축(伸縮)하면서 그것이 무극과 태극의 상인 것을 보고 즐기었던 것이다. 즉, 십지(十指)를 다 펴고 보면 그것은 만물이 극한분열을 한 상이니 이것이 바로 십무극의 상이요,
十指를 縮하면 十이 통일하여서 한덩어리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一太極의 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擧便無極十 十便是太極 一’이라고 논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문장이지만 무극과 태극의 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유루없는 논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과 태극의 상은 양수(兩手)를 펴면 인체 중의 陽으로서는 더 펼 것이 없으므로 무극의 상이 되고(兩手는 陽中之陽이다)
兩手를 축(縮)하여 가지고 합하고서 관찰하면 한덩어리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태극의 상이다. 그런즉 무극과 태극의 반복 운동이란 것은 이것을 가장 간단하고 요령있게 관찰한다면 장중(掌中)에 있는 것이다. 일부는 이와 같이 우주 양극(兩極)의 상을 일장(一掌) 중에서 간파(看破)함으로써 주자의 태극도를 반증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음 절을 논함으로써 이것을 아주 구체화시켜 놓았다.
‘一이 無十이면 無體요, 十이 無一이면 無用’
일부가 이와 같이 논한 것은 一太極과 十無極의 관계를 더욱 소상하게 밝혀놓은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손이 축합(縮合)하여 한 덩어리가 된 것이 바로 태극의 상이기는 하지만 만일에 십지(十指)를 편 상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일태극의 體가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주가 氣를 분산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요,
반대로 十指를 펴면 십무극의 상이 되지만 만일에 축합한 주먹(拳)의 상인 일태극이 없다고 한다면 십무극의 작용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지신축(手指伸縮)의 상인 일태극과 십무극을 신축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리켜서 ‘合하면 土라 居中이 五니 皇極’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면 태극도설에 표현된 바와 같이 土木火.土金水의 통일 작용에 있어서나 土金水.土木火의 분열 작용에 있어서나 다 중앙에 있는 土의 매개 작용으로 인하여 무극과 태극이 연결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에 중앙의 五土가 없다고 한다면 태극의 운동은 소양(素養)의 자료인 무극과 연결할 수 있는 자기 바탕을 얻을 수가 없게 되므로 우주 운동은 정지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의 태극도설은 태극의 운동이 무극의 소질적(素質的)인 봉양을 받는다는 것을 논함으로써 태극이 무극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통일시켜 놓았지만 이와 같은 우주의 일환으로서의 태극은 또한 어떠한 운동 본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가 황극(皇極)을 무극의 본체로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의 운동 원리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황극인 태극의 본체도 사실상 무극의 정신, 즉 무극의 소양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즉 이것은 주자의 태극도설에 그 의미가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이와 같은 오의(奧義)를 개발한 일부 선생의 功이 지대한 것을 밝히는 바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부는 주자가 미발(未發)한 兩極의 운동 원리와 그 오의를 밝혀 놓음으로써 우주의 본체인 태극에 있는 영원성과 통일성의 소자출(所自出)과 그 운동 관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계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자의 태극도설도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소명하게 되는 것인즉 삼극설은 사도발전(斯道發展)에 있어서 그 공헌이 지대한 것이다.
우주 본체(宇宙本體)의 양면성(兩面性)
창조 본체(創造本體)와 운동 본체(運動本體)
위에서 논한 바는 우주의 본체는 태극인데 그 본원은 무극이며 그것을 운동할 수 있게 한 요인은 황극에 있다는 것을 논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논하려는 바는 태극인 본체가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창조란 것은 太極의 창조인 것이요,
우주의 운동이란 것은 바로 태극의 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에는 양면성이 없을 수가 없는 바 그 양면성이란 것은 一面土 一面水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말하려는 바는 우선 창조하는 면에서 본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創造)’라는 말은 만물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造’자에는 종합(綜合)의 의미가 있고 ‘作’자에는 발전의 뜻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창작(발전)과 창조의 개념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본체의 창조라는 개념은 만물이 극점까지 분열하였다가 다시 통일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통일을 하는 바의 기본을 가리켜서 창조적 본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창조적 본체는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우주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통일 운동을 태극 원리로서 보면 무극이 태극으로 통일을 완성한 곳이 바로 본체이다. 그런즉 무극이 태극으로 통일되는 상을 관찰하여 보면 이것이 바로 태극도설에 나타난 바의 土木火가 土金水로 귀결하여 가지고 離火를 포위하는 상인 것이요,
또 이것을 오행의 변화로서 보면 巳午未․申酉戌의 상인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巳(木)․午(火)․未(土)․申(相火; 상화는 無根而不用)․酉(金)․戌(水)의 순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바로 巳午에서 未土와 교합하여 가지고 申酉戌에 와서 태극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戌을 태극(창조면에서 본)이라고 하는 것인 바 이와 같이 완성된 태극은 그의 창조 과정을 살펴보면 일면으로는 木火의 분열을 조화하고 다른 面으로는 金水로 통일하는 역할의 중심이 되었던 未土가 本中末의 中이 됨으로써 이루어 놓은 것이다.
주자가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오행 운동을 변화에서 추출한 것이며, 또한 태극도설을 그린 것은 이와 같은 내용을 명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본체인 戌은 본래의 水와 土의 이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 바 이것을 水로써 보는 경우는 水位의 시초(戌亥子는 水位)이며 土로써 보면 土位의 末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申酉戌亥子丑의 중심점이기도 한즉 이것은 土로 보면 土 같기도 하고 水로 보면 水 같기도 한 곳이다. 물론 이와 같은 상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진술축미 시공간에서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지만 戌은 만물이 최소한으로 공약되는 곳이므로 여기에서 생기는 空의 間은 진공(眞空)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空이라고 하는 바 그 空이 바로 태극의 창조적 본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空’자를 취상(取象)할 때에 ㅆ穴ㅆ工한 것은 ‘工’이라는 기술자가 穴 속에 숨어 있는 상을 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진실로 우주 변화의 위대한 기공(技工)인데 그것이 아직 공중에서 휴식하고 있는 상이니 그 상이 바로 一面土 一面水의 양면성을 가진 戌의 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水를 창조하는 시초의 상인 것뿐이고 아직까지 이것만으로서는 水는 아니다.
우주만물은 물로써 형성될 때에 動하기 시작하는 것이나 여기에는 아직까지 動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이곳이 바로 낡은 動이 끝나고 또 새로운 動이 시작하려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적인 水다. 이것이 바로 태극을 이룬 바의 一點 空인즉 우주의 본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空을 종극(終極)의 목표로 하는 것이나 주자가 무극지진(無極之眞)을 제창한 것은 모두 이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주자가 제창하는 바의 眞은 무극이 완전통일을 하게 되면 그 무극의 眞으로써 태극의 眞(核)이 이루어져서 만물이 자기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무극지진이라고 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태극의 핵인 술위(戌位)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제창한 것이다.
우주의 본체인 태극은 이와 같이 戌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즉 戌은 태극의 정신이며, 또한 무극의 眞, 즉 空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창조의 본체를 태극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태극의 핵심을 이룬 술오공(戌五空) 때문이다. 물론 태극의 핵인 空은 무극의 十이 공화(空化)한 것이지만 만일 무극이 이와 같이 공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주의 본체가 될 수 없으므로 필자는 무극을 가리켜서 우주의 본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런즉 다음은 운동하는 면에서 본 우주의 본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하자. 우주의 운동 현상을 살펴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水가 이루어짐으로써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戌이 亥子水를 완성하게 된다는 말은 곧 木火가 水中에서 動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오행의 해자(亥子)는 水인데 오운의 亥子는 水中之木火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저간의 소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戌이 空의 자격으로서 또는 우주 본체의 자격으로서 水를 창조하여 놓게 되면 여기에서 만물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창조과정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것은 태극이 무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태극도설에 표시된 土金水土木火의 순환과정이 바로 우주의 운동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을 또 다시 오운의 변화하는 면에서 보면 丑寅卯辰巳午의 발전 과정인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이상을 요약하면서 고찰해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의 운동 본체는 물인 것이다. 그런데 자연은 우주를 창조할 때에는 ‘물’을 창조할 수 있는 기본을 창조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운동의 본체인 ‘水’를 창조하는 戌인즉 그것은 곧 운동 본체를 창조하는 空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만물을 창조하는 것은 ‘水’에서 시작하는 것인즉 운동하는 만물의 본체도 또한 水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본체는 반드시 이면성을 나타내는 바 그렇다면 끝내 본체를 두 개로써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나 본체를 두 개로 규정한다는 것은 실제로서도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도 타당하지 못하다. 그런즉 우주의 본체는 우주를 창조한 바의 空이 본체인 것이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태극의 핵인 空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만물 생성의 근원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뿐만 아니라 운동의 요인도 바로 거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즉 水와 태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戌은 戌亥子로써 水를 이루는 기본이 되고 丑은 亥子丑으로써 水를 발동시키는 기본을 이루는 것인즉 어느 면으로 보나, 즉 창조면에서 보나 운동면에서 보나 亥子水가 戌과 丑의 중심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본체는 어느 면에서 보나 물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주의 본체를 ‘물’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태극을 一太極이라고 함으로써 水의 數와 같이 규정하는 것은 태극이 바로 물이며, 물이 또한 태극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易은 달(月)을 감(坎)이라고 하며, 또한 북극도 坎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두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본체(本體)와 그의 작용 변화(作用變化)
위에서는 우주의 본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물’이라는 것을 논한 바 있다. 이와 같이 ‘水’가 우주의 본체인 한 그것은 영원한 본체로서의 불변성과 항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운동 상태인 태극의 작용은 가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는 개벽 작용(開闢作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개벽이란 것은 어떠한 것일까?
천지(天地)의 개벽(開闢)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말은 상고부터 전해 오는 전설이며 신화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율과 공포의 대상으로서 엄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근년에 이르러서 개벽설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화와 전설로서 경홀히 생각할 수만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신화나 전설은 신비 세계의 내용이다. 만일 우주의 변화가 계발되지 못하면 신비는 영속될 것이고 신비가 엄존할 때에는 비록 위대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무가치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천지개벽설이 전설이나 신화의 취급을 받고 있지만 거기에는 미신이 아닌 진리가 있는 것이다.
개벽이란 개념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 운동의 상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운동이 비록 천변만화하는 상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것은 무엇 하나 할 것이 없이 일음일양하는 운동, 즉 우주가 일개일벽(一開一闢)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개벽 운동은 일순간의 휴식도 없이 어떠한 곳에서나 어떠한 사물에서나 행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인간의 호흡도 개벽 운동이요,
1일의 주야나 1년의 춘하추동이나 척확(尺확)의 굴신(屈伸)이나 용사(龍蛇)의 비칩(飛蟄)도 모두 개벽 운동의 일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것을 개벽 운동인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소강절(邵康節)이 원회운세(元會運世)의 법칙을 밝힌 것은 진실로 저간의 소식을 밝히려는 데에 그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一世를 30년, 一運을 360년, 一會를 10,800년, 一元을 129,600년이라 하고 원회운세의 법칙을 세웠는데 이것은 우주 변화의 대소절(大小節)을 규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30년에 한 번씩 小變化가 일어나고, 360년에 한 번씩 中變化가 일어나고 10,800년에 한 번씩 大變化가 일어나고 129,600년은 우주 개벽 작용이 완전히 상태를 바꾸게 되는 변화, 즉 천지가 개벽 작용을 완료하고 다시 새로운 개벽 작용을 시작하게 되는 1주기를 끝낸다는 것이다.
소자(邵子)가 이와 같은 법칙을 세우게 된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그는 처음부터 이와 같이 먼 곳에서 본 것이 아니고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총명(聰明)에 나타나는 변화는 시간에서부터 나타난다. 즉, 하루가 12시라는 말은 1일 동안에 12回의 변화가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는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 1시간은 30분으로 요약되는 것이다(즉, 12×30=360이기 때문에). 그런즉 이것은 小變化가 30분에 한 번, 즉 1시간에 한 번씩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1일은 12시간인즉 360분(30×12=360), 즉 1일에 한 번씩 中變化가 일어나게 되는 것인 바 1일의 변화는 주야가 교역하는 변화인즉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변화인 것이다.
그 다음 1월은 30일인즉 360분×30일=10,800분, 즉 1개월에는 10,800數의 大變化가 일어나게 되는 것인바 이것은 바로 춘하추동이 四時를 형성하는 변화인즉 변화의 極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129,600년은 1년을 1元으로 하는 변화인즉 이것이 바로 129,600년을 1元으로 하는 천지 개벽의 기본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 30분, 즉 1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는 변화에서 우리가 그 변화를 인식하기 어려웠다면 30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1世의 변화는 극히 미미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360분~1일의 변화를 인식하기 용이하였다면 360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1運의 변화는 우주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다음에 10,800분의 변화에서 회삭현망(晦朔弦望)이 나타날 정도로 그 변화가 뚜렷하였다면 10,800년의 1會의 변화는 大變化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 1년의 변화가 四時를 이루었다는 말은 바로 오행 운동이 일주기를 告했다는 말인즉 129,600년의 변화는 우주본체의 오행 작용이 완전히 종결하는 數라고 본 것이 소자(邵子)의 천지개벽수(天地開闢數)인 것이다.
그런즉 이상은 1年을 1元으로 하는 원회운세수(元會運世數)를 고찰함으로써 개벽을 완결하는 129,600년의 기본을 논하였지만 만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미세한 곳까지 추리한다고 하면 그 기본점인 1元은 1日에도 있을 것이요, 1時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개벽 운동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행해지고 있는 것인데 인간은 천지개벽이라고 하면 우주의 종극(終極)만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종국적(終局的)인 개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129,600년의 수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본체가 작용 위치를 변동하게 됨으로써 그 운동 상태가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것은 우주의 수명과는 다르다. 천지 개벽이라는 개념은 천지가 일개일벽(一開一闢)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종국에 이르게 되면 개벽 조건이 변동하게 됨으로써, 즉 개벽의 운동 기능에 이상이 생기게 되므로 자연적으로 개벽 운동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운동은 일월과 성신이 발하는 오운 운동의 소산인 바 일월성신이 발하는 바의 음양관계는 천축(天軸)을 어느 일방에 경사되게 할 수도 있고, 또는 정립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우주 운동의 개벽 기능은 이 때문에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본체에 양면성이 있는 까닭에 우주의 대개벽인 바의 129,600수의 천체이동설(天體移動說)이 유래하게 된 것인즉 그것은 바로 일월성신이 발하는 음양의 증감관계(增減關係)를 주기율(週期律)로써 산정(算定)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천체의 이동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천체(天體)의 이동과 지축(地軸)의 경사
천체의 기본은 북극(北極)이다. 북극은 ‘물’로써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坎’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북극은 서북으로 경사져 있다. 북극이 서북으로 경사졌다는 말은 바로 인력의 과강(過强), 즉 태과(太過)를 의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극은 정상적인 坎의 작용을 하여야만 하는 것인데 북극이 경사졌기 때문에 태과, 즉 비정상적인 과강 형상(過强形象)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체는 북극을 중심으로 하고 28수(宿)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6宿는 북극에 모여 있고 12宿만이 남극에 배열되어 있다. 그런즉 이것은 북극의 인력 상태가 태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坎의 태과는, 즉 이(離)의 과항(過亢)을 의미하는 것이다(‘五運啓示圖 참조).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결과는 모든 우주 운동으로 하여금 삼천양지 작용(三天兩地作用)을 하게 하는 것이다(삼천양지란 것은 陽 작용이 3/5이고 陰 작용이 2/5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극이 경사져 있기 때문에 일월성신은 그와 같이 경사지고 지구를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도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金木水火土의 五星도 오운 변화를 함에 있어서 水太過 火過亢의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수상(天垂象)할 때에 만물로 하여금 삼천양지 운동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본체를 상징적으로는 태극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실질적으로 말하면 북극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태극 운동이 삼천양지 운동을 한다는 말은 바로 북극이 삼천양지 운동을 할 요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북극의 경사(서북으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북극이 경사졌다는 말은 북극이 우주의 본체이기 때문에 일월성신 이하의 만물이 모두 북극의 영향에 의해서 경사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북극 자체가 이와 같은 조건 때문에 삼천양지 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오성(五星)의 변화 작용도 또한 그와 같은 기운을 지구에 수상(垂象)하는 것이므로 지구에 있는 만물들도 다 각각 그와 같은 소우주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체가 한번 변동하면 만물은 물론 28宿의 배치나 五星의 작용도 변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천체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천지개벽이며, 또는 그것을 예견하는 상수(象數)법칙이 바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즉 다음에는 우주가 삼천양지 운동과 삼지양천 운동을 하는 것을 고찰하기로 하자.
선천.후천.후천말 지축도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선천은 선천의 천체처럼 지축이 丑未 방향으로 경사져 있는 것이다. 지축이 만일 정위(正立)했다고 한다면(先天末 後天初의 地軸圖와 같이) 적도는 辰戌방위가 될 것인데 선천은 지축의 경사 때문에 卯酉 방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陽氣가 丑寅卯․辰巳午未의 7방위에서 작용하게 되고 陰氣는 申酉戌亥子의 5방위에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陽氣는 3/5 만큼 받게 되고 陰氣는 2/5 만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삼천양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다음 후천지축도를 살펴보면 지축이 동남으로 경사져 있다. 그러므로 陽氣가 활동하여야 할 방위인 동남방에서는 卯辰巳午未의 5방위밖에 陽作用을 못하게 된다. 그리고 陰이 작용하는 방위인 申酉戌亥子丑寅까지는 陰氣를 받게 된다.
그런즉 이것은 陽氣는 2/5 만큼 받게 되고 陰氣는 3/5 만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후천의 삼지양천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때에 陽氣를 받는 방위가 卯辰巳午未뿐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申酉가 비록 南에 位하고 있지만 申酉는 金이므로 陽을 받더라도 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또 하나 살펴보면 ‘先天末 後天初의 地軸圖’와 같이 丑未辰戌이 4방위를 이룬다고 한다면 寅卯辰巳午未의 6방위에서는 陽氣를 받게 되고 申酉戌亥子丑의 6방위에서는 陰氣를 받게 되는 것인즉 이 때에는 陰과 陽을 각각 절반씩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우주가 가장 정상 운동을 하는 때가 된다.
그러므로 일부(一夫)는 이것을 가리켜서 호호무량(好好無量)이라고 하였거니와 사실상 이 때부터가 후천이 시작되는 때이므로 이것을 가리켜서 현실적인 후천이라고 하며 또 이 그림(선천말 후천초의 지축도)을 후천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후천지축도를 이와 같이 그려놓은 것은 선천과 후천의 지축관계를 명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과 같은 후천지축도가 현실화하게 될 날은 아직 요원하다 할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예로써 논한 바는 천체의 축이 변경되면 그만큼 모든 우주의 축도 변경하게 되므로 지축도 따라서 변경하게 된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천은 천체의 축이나 또는 지축이 서북으로 경사졌지만 후천의 종말에는 그와는 반대로 동남으로 경사지게 될 것이다. 그런즉 선천말이 끝나고 후천초가 들어오게 되면 지축이나 천축도 정립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의 정역에는 ‘先天은 三天兩地요 後天은 三地兩天’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 子寅午申은 先天之先後天이요, 丑卯未酉는 後天之先後天‘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축이 경사질 때와(서북으로) 정립할 때에 있어서의 천문지호(天門地戶) 관계를 명시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선천은 선천지축도와 같이 지축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子寅午申 운동, 즉 지축이 축을 중심으로 하고 그 양방(兩傍)에서 子와 寅이 운동하고 있으며, 未를 중심으로 하고는 午와 申이 운동하고 있으므로 전체의 中은 자연히 진술(辰戌)로써 이루어져서 천지문호를 구성하게 되고 후천의 초는 선천말 후천초의 지축과 같이 지축이 정남북에 정립되어 있으므로 丑卯未酉 운동, 즉 丑未를 음양의 출발점으로 하는 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즉 전체의 中은 자연히 巳亥가 되므로 여기에서 천문(天門)과 지호(地戶)의 작용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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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문(天門)이라는 것은 발양(陽發)의 방위를 말하는 것이요, 지호(地戶)라는 것은 음장(陰藏)의 방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서북을 천문이라고 하고 동남을 지호로서 규정할 수도 있으니 이것은 다만 體用을 달리하는 것뿐이다.
또 한 가지는 선천의 子寅午申運動이 子에서부터 시작하고 후천의 丑卯未酉運動이 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陽氣는 반드시 正北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위에서 삼천양지 운동이나 삼지양천 운동을 논할 때에 正北의 감위(坎位)에서부터 계수(計水)한 것은 正北에서부터 次位까지가 滿一位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가 삼천양지 운동이나 혹은 삼지양천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 우주의 본체인 북극의 이동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바 이것은 북극이 그와 같은 이동요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천지 개벽과 같은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본체가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을 크게 뜨고 일월 세계(日月世界)의 운동 상태를 살펴보면 1개월 간에 태양은 약 30.5도나 운행하는데 달은 약 29.5도밖에 운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천의 삼천양지 운동 때문에 ‘양상유여 음상부족(陽尙有餘 陰尙不足)’하는 상을 日月이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후천초가 들어오게 되면 천체가 發하는 음양은 균등하게 되어서 일월의 운동은 동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선생은 ‘감장다사고인월(敢將多辭古人月)이 기도복상당천심(幾度復上當天心)가’ 하고 노래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감히 말썽 많던 옛적 달(月)이 몇 번이나 天心에서 일어났더냐 하는 말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선천이 삼천양지 운동을 하던 때의 달은 항상 陽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그 때문에 우주에는 수많은 말썽이 생겼는데 그와 같은 선천 달(古人月)이 坎(天心)을 기본으로 하고 일어난 것이 몇 번이나 됐느냐 하면서 멀지 않아 후천의 병들지 않은 달이 나올 것으로 예고한 詩인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니 ‘보화일천화옹심(普化一天化翁心)이 정영분촌황중월(丁寧分付皇中月)’이 바로 그 詩이다. 다시 말하면 화옹(化翁)은 반드시 황극월(皇極月), 즉 5土를 기본으로 하는 달이 나오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음양의 균등을 유지할 수 있는 달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선천이 ‘대명일월건곤택(大明日月乾坤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더욱 소명한 것이다.
일월 세계에 이와 같은 현상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곧 천축의 이동에 의한 변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축에 이동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영향은 적을 것이지만 천수상(天垂象)하는 상을 받은 지구가 어찌 독존(獨尊)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우주의 숙명(宿命)인 것이다. 출처: 월간개벽
첫댓글 와~~신비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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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 감사합니다.
봄향기 가득실어 봄바람에 날려 봅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가득란 한주 시작하세요 ^^
네, 말씀 감사합니다.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 입니다
즐거운마음으로 사랑과행복이
가득한 고운 한주되셔요~~꾸벅
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