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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

내가 존경하는 아줌마

어느 푹푹 찌는 늦여름 오후였습니다. 등산하다 접질린 다리 통증 치료를 위해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을 겸, 병원을 찾았습니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라 로비에는 쇼파는 물론이요 간이의자까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병원의 규칙에 따라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고 로비 구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마침 럭셔리한 옷차림에 고상한 인격과 품격이 묻어나는 5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자리가 비어 있더군요.

그 아주머니는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손녀 딸 아이의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서서 차례를 기다리겠지만 다리 통증 때문에 도저히 서있질 못해 염치 불구하고 아주머니 옆에 슬그머니 앉았습니다.

아줌마들 틈바구니에서 남자 홀로 앉자있자니 꽃밭에 진딧물처럼 눈치도 보이고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아픈 다리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끼여 있었습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갑자기 아랫배가 슬슬 아파 일단 참는 데까지 참아 보았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살며시 화장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손지갑이 없어진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곳저곳을 뒤졌습니다. 난리를 치는 걸보니 다소곳했던 고매한 인품은 어디가고 성깔 있는 여장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목소리 톤과 상기된 표정으로 짐작해서 지갑 속에는 분명 귀중품이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의 지갑이 보이질 않자 얼마 전에 화장실을 다녀온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는 겁니다.

난감 하더군요 옆자리에 앉았다가 화장실을 다녀 온 죄밖에 없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해를 받는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손녀딸과 같이 갔던 진료실에 놓고 왔을 수도 있으니 거기에 가보시라고 했습니다. 진료실에서도 지갑이 나오지 않자 이번엔 병원 입구에서 부터 간호사실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사람들 일일이 일어나게 해서 찾아보고, 심지어 몸이 불편한 노인들도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병원 로비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졸지에 범인이 된 듯 다들 난처한 표정들이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러는 가운데 내 차례가 되어 침과 물리치료를 받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뒤로한 채 병원을 나왔습니다.

주차장에서 차에 타려는데, 옆에 주차한 빨간색 승용차 지붕위에 여성용 지갑이 놓여 있는 게 보였습니다. 순간! 그토록 찾던 아주머니 손지갑이구나.

내리면서 손녀딸 아이를 챙기려다 지갑을 차 지붕위에 얹어 놓고 그냥 내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침 그 아주머니도 병원을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이 지갑이 빨간색 차 지붕위에 놓여 있던데 혹시 아주머니 꺼 아닌가요? 라고 하자, 어머머! 이런 내 정신 좀 봐!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더군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창피한 것을 아는지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가는 거였습니다. 뒷모습을 보니 왠지 걸음걸이가 이상했습니다. 고상한 분이 걸음을 왜 저렇게 걷나 싶어 자세히 보니, 글쎄 한쪽은 운동화, 한쪽은 슬리퍼.

아마 손지갑을 잃어버려 잠시 당황이 되어 그런가 싶어 신발이 짝짝 임을 알려주려는데, 휭하니 차를 몰고 그대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 저편에서 "할머니! 할머니!"하며 한아이가 울면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로! 좀 전에 아주머니와 함께 다녔던 다섯 살 난 손녀딸이었습니다.

손지갑을 차 지붕위에 얹어 놓은 채 내리고,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게다가 치료를 위해 데리고 온 소중한 손녀딸을 병원에 내버려 두고 혼자 가버린, 고상한 인품을 가진 아주머니, 한없이 존경합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