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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7일 목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말라 3,13-20ㄴ
복 음 : 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수영을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특히 주요 영법 중에서 ‘배영’을 배울 때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몸의 힘을 빼고 물 위에 가볍게 누우라고 강사는 말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물 위에 누우면 가라앉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수영 초보였던 저는 계속해서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제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할 정도로
힘차게 발차기를 해도 점점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강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고개 들지 마요. 이 물에 빠져도 안 죽어요.”
물에 빠질까 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다 보니 몸이 계속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잠기도록 해야 저절로 물 위에 뜰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전문 강사가 도움을 줄 것이고,
그리 깊지 않은 수영장이니 빠져 죽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힘 빼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면서 힘 꽉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1세기의 손님 환대법에 따르면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때
공동체가 모두 돕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친구에게 가서 빵 세 개만 꾸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귀찮음으로 손님 환대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도 줄곧 졸라 대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냐는 질문이었지요.
사람에게 하는 정성의 반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힘을 쫙 빼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게 됩니다.
하느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 이야기입니다.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 8)
예수님께서 기도를 두 벗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십니다.
인간적인 친분만으로는 선뜻 들어 주기 어려운 일도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졸라 대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
하늘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지치지 않고 청할 때 아버지는 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단,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우리 갈망 안에 심어 주신 바로 그것일 때 그렇지요.
그분은 주시려는 것을 우리 편에서 먼저 바라게 하시고,
언젠가 때가 되면 채워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기도를 드린다는 건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럼없이 무언가 청하기도 하고 두려움 없이 속내를 드러내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증여하는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오가는 모든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그런 관계라면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찾고 청하는지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시지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사랑의 유대입니다.
주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이어주고 하나가 되게 해 주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지요.
성령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주신 아버지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실 가장 귀한 선물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과 진실되이 엮인 이들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말라 3,14)
현세적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는 솔직히 악인들이 득세하고
재물을 누리며 번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길을 헛되다 조롱하는 무도하고 거만한 이들이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요.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 ...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말라 3,16-17)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신기루임을 우리가 깨닫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근원으로 하는 모든 피조물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누구보다 주님과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그래서 그는 늘 기도합니다.
머무름이건 침묵이선 청원이건 눈물이건 선행이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이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성령을 충만히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의로움의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경외하는 이에게
회복과 재생,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성삼위 하느님과의 뜨겁고 진실한 일치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화답송)
이 축복의 노래가 단순히 현세적 재물이나 번성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짓밟고 쓰러뜨려야 쌓는 맘몬의 바벨탑과
주님 날개 밑에서 누리는 행복 사이의 간극은 무척 크니까요.
주님과 늘 긴밀히 연결된 이, 그분을 경외하는 이의 기도는
성령의 은총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더 행복해지고, 더 행복해서 더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깊이 심어주신 갈망을 찾아내어
그분께 그것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이니, 성령을 소유한 여러분은 복됩니다. 아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야구경기를 보았습니다.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선발투수는 한국의 유현진 선수였습니다.
유현진 선수가 잘 던졌고, 경기 결과는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승리였습니다.
특정한 팀을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선수가 선발로 나오는 팀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중은 뉴욕 양키스의 팬이었습니다.
안타깝게 그날은 뉴욕 양키스가 패하였지만
관중들은 경기의 결과보다는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고, 두발로 걷고, 언어를 사용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또 하나 말한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생각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결실을 얻으리라는 예측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은 미래를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서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의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묵주기도의 매 단이 좋지만 저는
환희의 신비 2단 ‘마리아 엘리사벳을 찾아가심을 묵상합시다.’를 좋아합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놀라운 표징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할 때 일어나는 일; 믿어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되고
자녀로서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을 받는 특권까지 누립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지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도 원할 때 무언가 더 주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언가 자신에게 꾸준히 청할 때 자녀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꾸준히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청하는 것은 약간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청할 수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굉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꾸준히 청한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하느님은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평생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조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 노트에는 기도 제목들이 3천 페이지나 넘게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우정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 문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한 사람씩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노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조지 뮬러의 안 믿던 한 친구가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친구는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지 뮬러는 마지막 기도 제목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그때까지 안 믿고 있었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죽은 바로 그해 그 소식을 들은 이 친구는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고 나서 그 친구는 전 영국 땅을 순회하면서
“조지 뮬러 목사의 기도는 다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는 다 응답합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약 두 아이가 무언가 청하는데 한 아이는
그저 ‘찔러보는 식으로’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고 하고,
또 한 아이는 하나가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청한다고 할 때
누구의 청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자신께 신뢰심을 보이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청하면 그분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심은 기도의 ‘꾸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한 번만 청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천 번 넘어지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를 느끼며 믿음이 함께 성장합니다.
아기들도 걸음마를 할 때 매번 똑같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발전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더해져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까지 괴팍하였습니다. 얼굴과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도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방탕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문제만 일으켰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부모의 학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학창 시절에 당한 왕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원래가 이렇게 못돼먹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엉터리 같은 남자의 마음에 사랑의 온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게 된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사랑의 말로 고백했고 청혼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온갖 진심을 보여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같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참 매몰찬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무도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비싼 값을 치른 후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가면을 쓰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고, 청혼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말과 가면의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것입니다.
남자는 결국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선량함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던 여인을 신부로 얻게 되자 그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가 잠든 사이 그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가면 속에 감춰진 남편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한 과거의 추한 모습들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가면을 슬그머니 벗겨보았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면 속의 얼굴은 과거 그가 보았던 험악하고 비열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미소 머금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표정은,
오히려 그가 쓴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있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그러면서 “믿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좋으신 분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내가 청하는 것을 꼭 들어주실 것이 믿어집니다.
그렇게 나 자신도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합니다.
저는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997년 신학교 입학하는 해 1월 1일부터 계속 바쳐오고 있습니다.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칠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조금씩 변화됨을 스스로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랬다면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자꾸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조금씩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면 못 할 게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실 것을 확고하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꾸준하게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젖을 줄 때까지 계속 ‘엄마!’를 외치지 않는 아기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칠 때마다 젖을 주는 엄마를 보면 아이는 그 대상이 엄마임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