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하면 통한다
한국서 음반으로 돈 못벌자 해외로 눈돌려 ‘대박’
최근 방송을 시작한 ‘토요일토요일은 가수다’. 대다수 3040세대 시청자들은 90년대 인기 가수들을 그대로 무대에 다시 부른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중문화가 꽃피웠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90년대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음반 제작사들에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테이프나 CD로 돈을 주고 음악을 사던 시절, 가수들이 히트를 치기만 하면 음반을 팔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끝났다. 2000년대 들어서 음원을 디지털로 소비할 수 있게 되자 음악을 팔아선 돈을 벌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법 다운로드가 만개했고 월 3000원에 무제한 스트리밍이 가능해지니 시장이 초토화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음악산업은 음반 제작사들엔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이 적대적이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아이돌 산업의 부흥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환경의 적대성이 역설적으로 기업의 혁신을 증대시킨 셈이다.
엔터테인먼트사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각자도생의 길은 해외 진출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식으로 얘기하자면 ‘음원 공짜경제’라는 환경의 도전에 엔터테인먼트사는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아이돌 육성’으로 응전했다.
해외시장의 첫 번째 무대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그 당시까지 음원 불법 다운로드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콘서트 시장이 발달해 음반사도 수익을 올리 수 있었다. 문제는 외국 가수들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 강한 일본 시장의 특성상 일본 아이돌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홍 교수는 “일본 시장의 진입 장벽을 뚫을 수 있는 기량을 보이는 데는 SM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훈련-기획제작-관리’로 이어지는 아이돌 육성 방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게 시장에서 통용되는 제작 표준이 되면서 다른 기획사들도 결국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엔터테인먼트사의 응전은 대표들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이수만이 이끄는 SM, 양현석이 이끄는 YG, 박진영의 JYP는 모두 대표들의 성향이 확연히 구분되고 이들이 내놓는 아이돌의 스타일, 그리고 해외 진출 전략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SM의 이수만 회장은 이른바 ‘삼성’식으로 아이돌을 키워 해외시장 진출을 준비했다. SM의 방식은 시장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가수들의 콘셉트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조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삼성이 시스템과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IT 시장을 주도하듯 SM 역시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한류를 선도하고 있다. 보아를 통해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 가수의 성공 가능성을 발견한 SM은 일본 시장을 개척할 목표로 동방신기를 키웠다.
그러다보니 SM에서 가장 선호하는 아이돌은 해외에서도 통할 만한 다양한 콘셉트를 소화할 수 있는 복합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관리의 SM’이라 할 정도로 체계적인 시스템과 신상필벌을 중시한다. 캐스팅이 되면 외부의 전문가들이 학교를 능가하는 빡빡한 시간표를 짜서 트레이닝시킨다.
시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리스크가 최소화되었다고 생각할 때 해외에 진출하거나 아예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콘셉트에 맞는 가수를 양산하는 SM과 달리 JYP는 박진영 대표의 의지와 감각에 따라 가수들의 해외 진출에 도전했다. 미국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은 그는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원더걸스를 미국에 진출시키고 JYP USA를 창립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 시장은 일본이나 동남아 시장과 달리 한국 가수들에겐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었다. 일단 제작사가 아닌 유통사가 주도권을 잡고 있고 가수들이 오디션을 통해 픽업되는 시스템이어서 원더걸스는 미국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올리기 어려웠다.
JYP의 저돌적인 해외 진출이나 가수들의 스타일은 박진영 대표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다. 박진영 대표는 직접 뛰는 ‘행동대장’형이다. 소속 가수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무엇이든 앞장서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역할모델이 되는 일명 ‘형님 리더십’을 추구한다. 무모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음악 역시 JYP는 SM이나 YG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다. 흑인 복고풍의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JYP는 박진영 대표 개인의 감각에 캐스팅을 의존한다. 보컬 레슨 트레이닝이나 프로듀싱 역시 그의 색채가 그대로 묻어 있다. SM이나 YG가 제작사의 색채가 묻어나지 않는 시스템이나 가수의 역량이 우선시된다면 JYP는 철저히 박진영식 철학과 스타일에 기대고 있다.
여기에 비해 YG의 양현석 대표가 생각하는 이상적 엔터테인먼트사는 ‘패밀리’다. 그에게 가수는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따르는 삼성 직원이 아니다. 자기의 색채를 그대로 이식할 수 있는 아바타도 아니다. 가수는 그의 가족이자 파트너다. 양 대표가 추구하는 가수상은 자율과 개성이다. YG에서 아이돌로 통칭하기 어려운 개성파, 실력파 가수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YG는 아이돌을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흑인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YG는 아티스트끼리 모여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실력 있는 뮤지션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한다. 그러다보니 콘셉트를 잡기 쉬운 훈련생보다는 게으른 천재를 뽑아 원석의 특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훈련시켰다. 내부 커뮤니티를 중시하다보니 해외 진출도 보수적이었다. 빅뱅과 2NE1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해외시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홍 교수는 “3사의 전략을 보면 비슷한 환경의 압력에 처해도 전략적 선택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경영의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며 “전략적 선택이 환경에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는지에 따라 아이돌 그룹의 성패가 달라질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