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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숨쉬는교회 5월 22일 (이야기체 설교)
성경: 마 20:1-16
제목: 나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론>
포도가 한참 먹기 좋게 익었을 때 포도원 주인은 일손이 많이 달렸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 들여보낼 사람을 구하러 이른 아침부터 인력 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아침 7시였는데 일찍부터 사람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생기가 있고 활기차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9시쯤에 같은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을 써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라고 하자 그들은 그 말을 듣고 주인의 포도밭에 일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오후 3시에도 같은 장소로 또 나갔습니다.
만약, 다른 포도밭의 주인이라면, 품꾼을 구할 때 처음부터 인원을 정해놓았을 것입니다. 이 주인은 그들이 볼 때 계획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데려다 쓰는 사람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3시에도 와보니 여전히 아직 일을 못 구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도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자 그들도 주인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제정신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일 끝나는 시간이 오후 6시인데, 불과 1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품꾼을 고용하는 주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일 기다려도 자기들을 일꾼으로 고용해 주는 주인이 없어서 죽만 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에 비하면, 덩치도 왜소하고 이런 험한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어떤 주인이 이 사람들을 데려다 쓰겠습니까? 그래서 종일 기다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 포도원 주인은 의아하게도 그들도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제 일 끝나기 1시간 전이기 때문에 주인은 인력 시장에 나가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마침내 품꾼들과 약속한 시각이 다 됐습니다. 오후 6시가 된 것입니다. 모두 주인에게서 받을 품삯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제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오후 5시에 와서 불과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얼마를 주던지 그저 써 준 것에 고마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돈은 온종일 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정확히 더 많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애를 썼습니다. 주인에게 몇 번이고 절을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바쁘게 걸음을 재촉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돌아간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품꾼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주인으로부터 더 받을 것을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오후 3시에 온 사람에도, 오전 9시에 온 사람에게도 오후 다섯 시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7시에 와서 온종일 더위를 견딘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쯤 대면, 먼저 온 품꾼들은 포도원 주인에 대해 불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을 보시면, 먼저 온 품꾼들이 주인을 원망하며 투덜거렸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도에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주인은 그중의 한 품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3, 14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 약속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그리고 주인은 냉정하고 엄하게 나중에 온 품꾼들을 꾸짖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러분, 노동의 대가는 임금입니다. 노동시간, 노동의 강도, 노동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임금을 똑같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종일 몇천 도가 넘는 용광로 옆에서 주물을 다루는 직원과 편의점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일하는 직원을 같은 임금으로 줄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주물공장 인사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쇳물이 쏟아져서 뜨거운 용해에 떨어져 죽거나 100킬로그램 철제 거푸집에 깔려 죽는 참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의 강도와 노동 환경이 다른데도 똑같은 임금을 준다면, 누가 위험한 주물공장에서 그 돈을 받고 일하겠습니까? 따라서 아침 일찍 7시에 나와서 또는 9시와 3시가 되면 제일 더운 시간인데, 그 시간에 나와서 포도밭에 들어가서 종일 더위를 견딘 품꾼과 불과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주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럴 것입니다. 주인이 참 심하다. 처음부터 제일 나중에 온 사람과 먼저 온 사람과 품삯을 똑같이 주려고 했다면, 나중에 온 사람부터 줄 것이 아니라 먼저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어서 빨리 집으로 돌려보냈으면, 나중에 온 사람이 품삯을 똑같이 받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라며, 주인의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며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제 적용을 놓고서 노사 간에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측은 업종에 따라 차등 적용하자고 하지만, 노동자 측은 그것은 최저임금제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온 품꾼들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김밥집에서 김밥을 싸는 일꾼과 생산직에서 일하는 일꾼과 최저임금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누가 시간당 5,000원 받고 김밥집에서 일하겠으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마 먼저 온 품꾼들이 오늘 우리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것 받고는 일 안 하려고 할 것입니다.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온종일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일한 사람을 똑같이 임금을 준다면, 차리라 자기도 오후 5시에 와서 일하고 똑같은 품삯을 받으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이 비유를 들은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여러분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되고 있어서 천국에는 이렇게 일꾼을 대우하는구나! 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어떻게 해서 말씀하셨는지를 그 배경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9장 13절부터 30절 말씀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13절부터 15절에 예수께서 어린아이에게 안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지만, 제자들은 꾸짖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시면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왜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나오는 것을 꾸짖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린아이들은 자격이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16절부터 22절 말씀의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자신은 이만하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계명들을 다 지켜 행하였다고 자신 있게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본문 19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리까?” 이 말씀은 자기는 영생을 얻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이만큼 했으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예수께서 한 말씀 때문에 그는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온전하여지고자 할진대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것입니다. 근심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0, 21절 말씀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몹시도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 라며 의문을 제기했고, 베드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본전 생각이 났다고 이해하겠지만, 사실, 제자들이 이렇게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자기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얻지 못할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먼저 주님을 따랐으니 나중 주님을 따른 자보다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다 마치신 후에 본문 30절과 그리고 포도원 비유를 마치신 직후에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렇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하시는 요점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등장하는 품꾼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들을 고용할 때 어떠한 자격 조건을 제시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아침 일찍 7시와 9시 오후 3시와 마지막에 온 오후 5시에 들여보낸 품꾼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 출신입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고 저는 처음부터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여제자인데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 대부분은 학벌이나 문벌이 좋거나 직업이 좋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일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일에 경험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어린아이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오후 5시에 들여보낸 품꾼들에게 속합니다. 그리고 아침 7시에 일찍 와서 종일 더위를 견딘 품꾼은 제자들 자신이나 부자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주인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 돈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그 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에는 그래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여러 배나 받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중에서도 베드로가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온 사람도 먼저 온 사람도 포도원 주인은 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전 7시에 아침 일찍 나와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이나 9시, 오후 3시, 아니 오후 5시에 온 사람들 처지에서는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품꾼으로 데려다 쓰지 않으면,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불러다 품꾼으로 써 주시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거기에 품삯까지 넉넉하게 쳐주니 더 고마워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격이 있어서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격이 충분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똑같이 교회에 등록했는데 나보다도 먼저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세례도 늦게 받았는데, 그가 나보다 교회의 중직자가 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임직식 날 목사님께 삐져서 참석도 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마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축하는 해 주지만 마음은 그 자리가 내 자린데, 내가 장로가 돼야 했었는데 권사가 돼야 했었는데 하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또한 부교역자들은 당회로부터 다른 부교역자가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사례비를 더 받으면 힘들어합니다.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자기 능력에 맞게 대우해 주는 교회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자기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정할 때 자신은 이전에 큰 교회를 담임했기 때문에 거기에 알맞은 대우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도 받아왔기 때문에 거기에 알맞은 사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일평생 목회를 한 후 은퇴할 때 자신이 교회를 이만큼 부흥시켰으니 전별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받아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