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햇살을 타고
신 상 숙
팔월이 구월에게“내 더위 가져가라.”고 하나 보다.
고추 따는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는 오후, 방송국에서 나왔는지 카메라를 메고 낯선 사람이 고추밭 고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남편에게 느닷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인터뷰를 청하자 부담스러운지 나를 향해
“저 사람에게 가보셔,” 하며 등을 돌린다.
모, 문학상을 받은 여류작가는 동료 작가의 시상식이 끝나고 관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뒤, 행사장 바닥에 버려져 있는 꽃송이를 집어 들고 수상자들의 심부름을 하는 자신이. 언제쯤 주인공이 되어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부러웠다는 그녀의 수상소감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힐 법도 하련만,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사 내용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더구나 글이라고는 편지 쓰는 일이 전부였는데, 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오랫동안 간직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슴속에 요동치는 꿈조차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삶이 아니었던가! 그 좋은 세월 다 떠나보내고 흰 머리카락 듬성한 지금에서야 수필이라도 써 보겠다고 컴퓨터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전원생활”이라는 잡지에 처음 응모한‘살며 감사하며’라는 수필이 2003년 11월 짧은 글 긴 얘기, 난에 실렸다. 가슴이 터질듯이 기쁘고 용기도 나서 농사지으며 체험하는 일을 글로 옮겨 쓰기로 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정리하고 좋은 글감 찾으려 노력도 한다. 또 산과 들녘에 널려 있는 꽃들이 아름다워 혼자보기 아까울 땐 카메라에 담아둔다.
TV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좋은 글이 자막으로 나가는 방송을 보면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바짓가랑이 젖을까 이슬 털어가며 논두렁을 걸어가는 남편, 그 어깨 너머로 드리우는 저녁노을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루 종일 대지를 달군 태양은 붉은빛을 띄우며 산등성이로 넘어간다.’ 이 아름다운 수필내용이 저 화면에 떴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헛된 꿈이 아니길 바라는 나에게 정말로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민통선 마을 사람들을 찍고 싶다며 다가오는 카메라 앞에서 민통선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을 설명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수필로 기록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야생동물과 공존하면서 그들에게 받은 농작물의 피해를 야생동물 보호법에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포도, 배, 사과가 익기도 전에 까치가 쪼아놓아 속상한 일, 그들이 물어보는 습지보존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글로 간직한다는 내 말에, 오래전에 써놓은 수필을 보여 달라고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볕에 고추 따드리는 모습을 촬영하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카메라맨이 안쓰러워 집으로 들어가 시원한 차나 한 잔하자고 했다. 이른 봄 텃밭 가장자리에 꽃단장을 하던 매실과 살구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 모든 농산물을 자급자족한다는 말을 NG를 냈다. 살구향이 가득한 차 한 잔에 얼음 몇 조각을 띄워 내었더니 찻잔도 카메라에 담고, 수필‘살며 감사하며’를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는다. 이웃 농경지와 경계선으로 심어 놓은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몇 송이 따주자 그것도 열심히 찍었다.
해 그늘이 들기 전, 머머리 섬으로 가야 한다는 그들이 희망이라는 부푼 꿈을 나에게 안겨주고, 아름다운 꿈을 카메라에 담고서 훌쩍 떠났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성실하게 사노라면 꿈은 꼭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농사일 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내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겸손을 잃지 않으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리. 계절마다 아름다움이 넘치는 우리 마을 이기울에서, 풍성한 소출을 기다리며 밭 갈고 씨 뿌리듯 행복도 함께 가꾸리라. 아름다운 꿈 햇살을 타고서!
북한에서 떠내려 온 황소가 5개월 머물렀던 섬을 머머리섬이(留島)라 부른다.
2005년 11월 k b s 열린 채널 방송.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편안한밤 되세요..
긴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