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외 2편)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삼월에 내리는 눈
봄눈은 할 말이 많은 것이다.
지금 봄의 문전에 흩날리는 눈발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질 줄 알았던 것이다.
전속력으로 내리 꽂히고 싶었던 것이다.
봄눈은 이런 식으로
꽃눈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땅의 지붕이란 지붕을 모두 난타하며
오래된 숲의 정수리들을 힘껏 두드리며
봄을 기다려온 모든 추위와 허기와
기다림과 두려움과 설렘 속으로
흔쾌하게 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꽃눈을 흥건히 적시고 싶었던 것이다.
지상에서 지상으로 난분분
난분분하는 봄눈은
난데없이 피어난 눈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빗방울의 꽃이 된 것이다.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선뜻 착지하지 못하는 봄눈은
아니 비의 꽃은 억울해 너무 억울해서
쌩한 꽃샘바람에 편승하는 것이다.
비의 꽃은 지금 꽃을 제 안으로 삼키고
우박처럼 단단해지려는 것이다.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면
지금까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이는 아직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가 첫 단추가 아니다.
첫 키스는 서툰 기습 같은 것이다.
사랑은 손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손이 하는 것이다.
손이 손을 잡았다면
손이 손 안에서 편안해했다면
그리하여 손이 손에게 힘을 주었다면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두 손은 서로의 기억을 가지려 한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그이의 얼굴로 보일 때
손금에서 꽃 피고 별 뜨고 강물이 흐를 때
그리하여 그대가 알고 있는 그이의 이야기와
그이가 알고 있는 그대의 이야기가 같아질 때
그때부터 둘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헤어질 수 있는 자격은 그때서야 생기는 것이다.
먼 훗날, 아주 먼 곳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추억할 수 있는 권한은 그때서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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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제국호텔』『지금 여기가 맨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