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
세계적인 명지휘자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하게도 아주 심한 근시안으로 악보를 잘 볼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음악을 좋아하였으나 가난하여 정규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어서 첼로 연주자가 되었답니다.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연주할 때마다 눈이 나빠 보면 대 위의 총보를 볼 수가 없어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아예 악보를 통째로 외워 자신의 약점을 덮었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악보를 완전히 암기한 후에 연주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오 롯시라는 흥행주가 조직한 가극단 ´롯시 오페라단 및 오케스트라´ 소속으로 첼리스트 겸 부 합창 지휘자로 편입되어 브라질로 공연하러 갔답니다. 이 때 지휘자는 브라질 태생의 레오폴드 미게츠이었고 공연할 곡은 오페라 ´아이다´ 였답니다. 그러나 레오폴드 미게츠는 가극단과 문제를 일으켜 공연을 앞두고 지휘봉을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공연 직전에 일어난 불의의 사건이라 당황한 가극단은 다급한 나머지 부지휘자를 지휘대에 세웠지만 청중들의 심한 야유를 받고 물러나고 말았고 부지휘자를 대신하여 합창단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았으나 그마저 관중들의 야유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그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서 그 날 연주한 음악회 프로그램의 작곡들을 음표 하나 빼지 않고 전부 외우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가장 나이 어린 토스카니니뿐이었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단장과 단원들의 권유로 우여곡절 끝에 그가 임시 지휘자로 단상에 서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답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대에 올랐지만 관중들의 야유는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직 무대에서 지휘하기가 낯설고 어색하여 맨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지만 그는 곧 침착하게도 보면 대의 악보를 덮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때 청중들의 야유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갔지만 그는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그리고 단 한 번도 악보를 펼쳐 보지 않고 평소 암기한 악보를 떠올리며 대곡 ´아이다´를 완벽히 지휘했답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침묵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감탄의 함성으로 변해 갔고 1악장이 끝난 뒤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새로운 마에스트로(maestro)의 탄생을 아낌없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지휘 공부를 받은 적이 없었던 첼로 연주자가 세계적 지휘자로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첫 무대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미래는 첼리스트가 아닌 단원을 이끄는 명지휘자로 뒤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력이 나빴지만 초인적인 암기력을 발휘하여 토스카니니가 악보를 일체 안 보고 지휘할 수 있었던 곡은 자그마치 교향곡 200여 곡과 오페라 100여 곡 이상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간직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기도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과부와 같이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내 기도자세를 반성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 요한 3서의 말씀입니다. 5-8
사랑하는 가이오스,
5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6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맞갖도록 그대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7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축일11월 16일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신분 : 왕비
활동 지역 : 스코틀랜드(Scotland)
활동 연도 : 1046-1093년
같은 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1046년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인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聖王)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성 스테파누스 왕의 궁중에서 보냈다. 1066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대공이 쳐들어왔고,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한 후 그녀의 가족들은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는 성녀 마르가리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인품과 선행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회 개혁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인 말콤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고 이오나(Iona)를 비롯한 여러 곳의 켈트 성당들을 복구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왕비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녀 마르가리타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말콤 3세 왕과 장남 에드워드(Edward)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의 안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고 3일 뒤인 1093년 11월 16일 슬픔에 잠겨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24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1670-76년 재위)는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성녀 마르가리타를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축일11월 16일 성녀 아녜스 (Agnes)
신분 : 수녀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97-1253년
같은 이름 : 아그네스, 아네스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이며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의 동생인 성녀 아녜스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언니인 클라라의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언니 클라라가 수녀회로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심하였지만 그녀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친척들이 아녜스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산 안젤로 디 판초 수도원으로 몰려왔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수도복을 받았고, 언니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서 살았다.
그 후 아녜스는 1219년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만투아(Mantu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언니를 도와 클라라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였다. 아녜스가 죽을 때 언니가 동석했는데, 클라라가 예언한 대로 11월 16일에 운명하였다.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성당에 안치된 그녀의 묘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11월 19일에 기념한다.
축일11월 16일 성녀 제르트루다(대) (Gertrude the Great)
신분 : 수녀, 신비가, 저술가
활동 지역 : 헬프타(Helfta)
활동 연도 : 1256-1302년
같은 이름 : 거트루드, 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 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 게르트루드, 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 제르트루드, 제르트루디스, 제르트루트, 젤뚜르다, 젤뜨루다, 젤투르다, 젤트루다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는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와 가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다섯 살이 되던 1261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 있는 헬프타 베네딕토회의 성 마리아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성덕으로 유명했던 이 수도원은 설립자이자 원장인 하크본(Hackeborn)의 제르트루다 수녀가 지혜롭게 운영하면서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어린 나이의 성녀 제르트루다는 수녀원장의 동생이며 수도원 학교 교장이었던 하크본의 성녀 메히틸다(Mechtildis, 11월 19일) 수녀의 지도하에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학교를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했는데, 그녀의 지적 열망과 타고난 지능으로 인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와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도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라틴어에 정통해서 수녀원 내 필사실에서 일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러나 세속 학문과 모든 것을 지성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사고로 인해 영적 생활이 소원해지고 거의 냉담 상태까지 갔었다. 그로 인해 극심한 영적 고통을 겪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281년 1월 27일 환시를 통해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했다.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발현한 예수님께서는 지적 공부에만 몰두한 그녀를 책망하며 “멀지 않아 너의 구원은 올 것이다. 왜 그렇게 고통을 받느냐? 너를 슬픔에서 벗어나게 조언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자신과 예수님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있음을 깨달은 성녀 제르트루다는 내적 평온함을 찾고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갔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와 친교 속에서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전례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성녀 제르트루다는 머지않아 스콜라 사상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시와 여러 발현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리는 영원한 찬가’로 바뀌게 되었다.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심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흔(聖痕, stigma)을 주셨다고 밝혔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발현,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은총의 계시를 다룬 “하느님 사랑의 사자(使者)”(Legatus Divinae Pietatis)를 저술했다. 5권으로 된 이 책은 그녀의 대표적 저서로 자서전적 고백서이자 영적 유언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영성 수련”과 성녀 메히틸다에 의해 기록된 기도와 시로 된 소책자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렸고,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고,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진다. 그녀의 풍부한 신비 경험으로 인해 ‘독일의 테레사’로 불리기도 한다.
1288년 심한 병을 알게 된 성녀 제르트루다는 합병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녀원의 시간 전례(성무일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302년 11월 16일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다. 이후 그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르가리타 (Margaret), 아녜스 (Agnes), 제르트루다(대) (Gertrude the Great)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