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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34세)
파리 살롱 전 심사위원들이 〈피리 부는 소년, The Fifer〉을 평면적이라는 이유로 낙선시키자, 마네는 이 그림을 기요가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했다.
A King Charles Spaniel, 1866. Oil on canvas
Still Life with Melon and Peaches.
1866. Oil on canvas
Woman with a Parrot. 1866. Oil on canvas
Portrait of Zacharie Astruc, 1866년, Oil on canvas
화면 우측은 정면에서 본 초상화이고, 화면 좌측은 거울에 비친 실내(室內)이다. 벨라스케즈의 대표작 <侍女들>에서 처럼, 마네도 이따금 거울의 효과를 그의 그림에 원용(援用)했는데, 화가들이 전통적인 대상을 그릴 때 거울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인 특색으로 지적되고 있다.
초상화 부분을 검정색으로, 거울에 비친 실내를 올리브색으로 메운 것은 이 두 색을 대비시켜 주제 인물(主題人物)의 내면적인 성격과 지성적인 분위기를 표출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문제작 <올랭피아>에서처럼, 베네치아파(派) 회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티지아노의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퍽 재미있을 것이다. 마네의 성실한 지지자였고 비평가, 조각가, 작곡가, 시인인 아스트륙을 정성들여 그렸는데, 아스트륙 부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묵었던 작품이다.
피리부는 소년 (The Fifer), 1866년, 캔버스에 유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수평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이다.
인사하는 투우사,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865년 스페인을 여행했던 마네는 귀국 후 수 점의 '투우' 시리즈를 발표했다. <피리 부는 소년>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인물이 '배경이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구성'이다. 마네는 투우사의 모험적인 성격 보다도, 화려한 의상 등 엑조틱(exotic)한 요소에 이끌려 이 시리즈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친구인 테오도르 뒤러에게 1천2백 프랑에 팔았는데, 30년 후인1894년의 경매에서 뒤랑 뤼엘 화랑이 10배 인 1만5백 프랑에 낙찰시켰다. 모자를 벗어 들고 열광하는 관중에게 인사하는 투우사의 영웅적인 표정, 이 표정을 살아있는눈망울과 균형 잡힌 몸매,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게 강조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 대해 이설이 있었으나, 1866년에 그린 대작임이 확인되었다.
1867년(35세)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많은 작품을 거절당한 마네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귀스타브 쿠르베를 흉내내어 알마 광장에서 몽테뉴가로 들어가는 길모퉁이에 진열대를 만들고, 5월에 투우사와 투우 그림들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이곳에 전시했다. 그는 약 50점의 그림을 전시했지만 거의 인정받지 못했고 전보다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도 못했다.
젊은 소설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작품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움에 매혹되어 1867년 1월 1일자 〈19세기 평론, Revue du XIXe Siècle〉지에 발표한 긴 논설에서 용감하게 그를 칭찬하고 나섰다. 졸라는 대중의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은 처음에는 으레 비판적인 여론에 부딪히기 마련이며 마네도 그런 예술가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졸라와 테오도르 뒤레 및 예술 평론가인 루이 에드몽 뒤랑티(마네와 뒤랑티는 신파적 결투를 벌인 일이 있음)가 공개적으로 마네를 옹호하였다.
1860년대말에 그의 작품은 다양한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대체로 명암의 밀접한 관계 및 조명과 분위기의 복잡성에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며, 때로는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에 못지않게 자유분방한 기법을 보여준다.
The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1867-1868. Oil on canvas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four fragments). 1867. Oil on canvas
1867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 1867년, 캔버스에 유채
건물, 인물, 거리, 동물 등의 고유색(固有色)이 한낮의 햇볕을 받아 검푸르게 변한 색채의 매치(match)를 취급하여 색채 상호간의 탄력성 있는 관계를 회화적 차원에서 소화시킨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소년은 <讀畵>에서 언급된아들 레옹 코에라이고, 높이 떠 있는 기구는 사진작가 나다르가 타고 파리 상공을 공중 촬영한 기구인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는 여유 있는 시민들의 동세(動勢)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른바 '현실적인 일상성'이란 마네의 묘화 태도(描畵態度)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나폴레옹 3세가 1867년에 마련한 만국 박람회를 능가한 대(大)박람회를 대작으로 그린 마네의 시대 감각을 이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Soldier (fragment of "The Execution of Maximilian"). 1867-1868. Oil on canvas
Races at Longchamp, 1867년, Oil on canvas
The Beach at Sainte Adresse, 1867년, Oil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년, Oil on canvas
에밀 졸라의 초상 (Portrait of Emile Zola)
1867-1868년, 캔버스에 유채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졸라가 여덟 번이나 와서 포즈를 취한 곳은 마네의 아틀리에인데도,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벽에는 그의 작품 <올랭피아>의 사진과 벨라스 케즈의 <바커스의 승리> 모사도(模寫宜),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가 걸려 있어, 마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를 실물 크기로, 상의(上衣)를 검정 단색으로 처리, 인품을 강조했는데 살롱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Portrait of Théodore Duret), 1868. Oil on canvas
마네의 전생애를 통한 친구이며 유언 작성자인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이다. 뒤러가 인상주의 그림의 철저한 옹호자이며, 세계적인 미술품 수장 가라는 점을 감안, '사려 깊은 지성', '상류 사회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 화면을 짙은 회색으로 처리하고 손의 위치로 동세(動勢)를 표현했다. 이 작품도 에밀 졸라의 경우처럼 우정어린 정성이 포인트이다.
1865년 8월, 스페인 마드리의 한 호텔에서의, 마네와 뒤러의 만남에는 재미있는 삽화도 전해지고 있다. 마네가 정성을 들여 이 그림을 끝내자 뒤러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의 내용보다 이름을 보고 모으는 경향이 있으니 당신 사인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네는 분명하게 서명했다.
발코니 (The Balcony), 1868. Oil on canvas
발코니의 네 남녀,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1869년의 살롱에 출품했는데 시에스노는 '일반인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백, 청, 흑의 색조가 아름답고, 특히 청색의 난간이 툭 튀어나와 발코니임을 입증시켰다.
마네는 불로뉴에 체제중 발코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 장면의 역광 효과(逆光效 果)에 흥미를 느껴 모티브로 택했는데, 모델은 머리에 꽃 장식을 꽂고 녹색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 친구이며, 남자는 카페 게르보아의 친구 화가인 기르메, 어둠 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Mme. Manet at the Piano. 1868. Oil on canvas
아틀리에에서의 식사(Luncheon in the Studio),
1868. Oil on canvas
좋아하는 모티브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마네의 고심작이다. 그림의 왼쪽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마네 부인이 들고 있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 가지 메뉴가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 위해 16번이나 습작을 그렸을 정도이다. 노랑, 검정, 하얀 색과 엷은 푸르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陰影)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아틀리에의 격조를 높이는 한편,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감돌도록 표출시켰다. 마네는 1868년 여름 불로뉴에서의 스케치를 토대로 파리에서 이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전면의 소년은 그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부인, 식탁에 앉은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Beach at Boulogne-sur-Mer. 1869. Oil on canvas
Moonlight over the Port of Boulogne.
1869. Oil on canvas
The Depature of the Folkestone Boat.
1869. Oil on canvas
독서(The Reading), 1869. Oil on canvas
마네 부인이 그의 아파트에서, 책을 읽어 주는 아들의 목소리에 만족해하고 있는 행복한 정경이다. 살갗이 비치는 하얀 옷, 커튼, 의자의 커버 등 백색을 주조로 한 그림으로 화면 전체에 전개되는 백색의 다양한 반영(反映)이 잔잔한 물결처럼 화사하고 음악적이다. 마네는 이 여인과 10년 이상 동거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친구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에 붙였고, 부친이 사망한 3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그림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레옹 코에라는 마네가 죽은 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동생으로 행세, 진짜 마네의 아들인지, 부인의 동생인지, 또 딴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부 자식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네는 1858년에서 80년까지 이 부인을 여러 번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Repose (Berthe Morisot). 1869-1870. Oil
The Salmon, 1869년, Oil on canvas
배를 깍는 젊은 남자, 1869년, 캔버스에 유채
1870년(38세)
살롱 전에 자신을 위한 일종의 선언문인 〈바티뇰가의 화실, The Studio in the Batignolles〉(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출품하여 회화부문의 앙리 팡탱 라투르상을 받았다. 7월 19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군이 진격해오자 마네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피레네 산맥에 있는 올로롱생트마리로 피난했다. 그곳에서는 친구들이 마네의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마네는 국민군 참모 장교로 입대했고, 그의 상관은 소총수들을 즐겨 그린 화가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였다. 그는 9월 26일에 처음으로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들은 기구에 실려 운반되었다.
La Brioche. 1870. Oil on canvas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모델 에바는 파리 명문의 딸이다. 이 여인은 나중에 유명한 판화가 게라르와 결혼, 규수 화가로 활약한다. 당시 프랑스 문예가 협회 회장이었던 소설가 엠마뮤엘 곤잘레스의 딸인 에바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1869년 2월부터 마네의 아틀리에의 내제자 (內弟子)로 들어간다.
이 그림은 에바가 '40회 이상 포즈를 취했다.'고 불평한 난산 중의 난산 작품인데, 은백색의 복장, 백장미, 깨끗한 살결, 그림 속의 하얀 꽃 등 백색에 의한 바리에이션이 아름다우며, 이러한 백색의 반복을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 검은 띠 등으로 조여 매 화면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켰다. 1869년 3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살롱 마감일인 3월 12일에야 완성시킨 이 작품은 살롱에서 악의에 찬 혹평을 받았으며, 이후 에바에게 기증되었다.
조지 무어의 초상
조지 무어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 미술 평론가이며, 술을 좋아하는 천재이자 방랑자이다. 또한 랭보, 뒤랑티 등 상징파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낸 '몽마르트르의 영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네가 자주 다니는 카페의 단골이었으며, 마네와도 자주 어울렸다. 마네는 유채와 파스텔로 만든 무어의 초상화 2점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시기에 마네는 극히 적은 2, 3점의 스케치풍의 인물화를 경쾌한 필촉으로 그렸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에 속하는 것이며, 폭음가인 무어의 취생 몽사하는 몽롱한 모습을 리얼하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지쳐 빠진 중로(中老)의 묵객(墨客), 깡마른 몸집, 전혀 패기라곤 찾을 곳 없는 파리의 방랑객을 연상시키는 멋진 분위기다.
1871년(39세)
2월 마네는 올로롱에서 가족을 만나 파리 코뮌이 세워지기 직전에 파리로 돌아왔다. 기요가에 있는 그의 화실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가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둔 그림들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폴 뒤랑 뤼엘은 당시 돈으로 50만 프랑을 주고 마네의 화실에 보관되어 있던 거의 모든 작품을 사들였다. 마네는 생페테르뷔르가 51번지 1층에 셋방을 얻었는데, 그 구역에는 수잔의 아들인 레옹 코엘라 렌호프도 방 1칸을 얻어 살고 있었다. 그때부터 마네와 그의 친구들은 게르부아 카페 자리에 새로 문을 연 누벨 아텐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The Harbour at Bordeaux. 1871. Oil on canvas
The Barricade (Civil War).
1871. Ink, wash and watercolor on paper
1872년(40세)
7월 마네는 생페테르뷔르가 4번지에 새로운 화실을 차렸다. 또한 같은해에는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프란스 할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여행의 소산인 〈좋은 맥주, Le Bon Bock〉(1873,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는 1873년 살롱전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Nude. 1872. Oil on canvas
Berthe Morisot with a Fan. 1872. Oil on canvas
Berthe Morisot. 1872. Oil on canvas
불로뉴 숲의 경마(Racecourse in the Bois de Boulogne), 1872. Oil on canvas
마네는 1872년 여름 네덜란드의 처가를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와, 스포츠맨이며 수집가인 발레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려, 당시 파격적인 3천 프랑을 받았다. 질주하는 말의 지체가 어떤 모양인가를 연구해서 그린 드가의 경마와는 달리, 마네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말의 모습을 거의 일직선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질주하는 적토마의 기수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모습도 좀 이상스럽다는 게 평론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전경과 원경과의 색채 대비는 훌륭하며, 특히 엷은 살색으로 하늘을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마네는 영국의 '경마 판화'를 참고로 해서 질주하는 말의 모습을 그렸고, 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실토했다 한다.
Marguerite de Conflans Wearing a Hood.
1873. Oil on canvas
생 자라즈 역(The Railway), 1873년, 유채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철도에서>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Woman with Fans(Nina de Callias).
1873. Oil on canvas
크로켓 게임
인상파풍(風)의 필촉을 느끼게 하는 화면이지만, 색채가 프리즘 적으로 분해(分解) 되어 있지는 않다. 그림 속의 인물들도 어느 우연한 순간을 스케치한 것 같이 보이나 넓은 공간과 원근(遠近)을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이며, 따라서 화면 전체가 퍽 안정감 있게 보인다.
파리에 있는 화우 스티반스의 넓은 뜰에서 크로켓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스티반스와 그의 모델, 마네의 옛 친구 등 우정에 넘치는 모임이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게임 장면을 포착, 하늘은 보이지 않고 파랑, 노랑, 흰색이 주조를 이루어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12년 베른의 헌 옷집에서 배우 도리 봐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이색적인 모티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