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3년 봄 중국리그 을조의 용병으로 참가 열흘 만에 모든 대국일정을 소화한 조 국수는 연이어 후지쯔배, 기성전 도전기 최종국에 이르기까지 강행군을 해야 했다.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다. 리듬을 잘 타면 아무리 벅찬 일정이라 해도 연승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지난 연말처럼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거였다.
중국리그 직후에 참가한 후지쯔배 1회전에서 본인방 가토 9단을 꺾긴 했지만 2회전에서 왕리청의 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귀국한 뒤 바로 벌인 기성전 최종국은 사제가 장장 10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한 혈투였고, 피를 말리는 이런 대국일수록 당연히 컨디션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었다.
최종국이 벌어지기 전날 국수를 만나 근황과 임전소감을 물어봤다.
필자 : 중국리그 잘 다녀오셨어요? 국수 : 응, 막판에 삐끗해서 망신을 당했지. 필자 : 그래도 6승을 거두셨잖아요? 랭킹 1위 왕레이도 꺾었고. 국수 : 그럼 뭘 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판을 지는 바람에 홍 콩팀의 갑조 리그 승격이 좌절됐거든. 필자 : 그것도 다 이긴 바둑이었다면서요? 국수 : 그랬지. 확실하게 못질하려다 손등을 찍고 말았어. 이젠 결정적일 때 (정신이) 가물가물하다니까. 필자 : (화제를 바꿔) 절강성 미녀군단 예쁘던데요? 특히 그 중에서도 탕리 초단같은 경우 탤런트 뺨치는 외모던데…? 국수 : (화색이 돌면서) 무지 예쁘지. 아닌 게 아니라 탤런트 쪽도 생각하 고 있는 모양이던데? 필자 : 타이젬에 동영상이 업데이트되면서 탕리 팬들이 많아질 것 같더군 요. 국수 : 중국에서도 최고래. 스포츠 스타 중에서 압도적으로 인기도 1위를 유지하고 있대.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하잖아? 칼라 콘택트 렌즈를 끼었는지 눈동자도 묘한 빛이 감돌던데? 필자 : 가까이서 만나봤어요? 국수 : 그럼, 그 팀하고 붙었었지. 필자 : 국수님은 페미니스트라 미녀한테 한 수 접어주고 두었을 텐데…? 국수 : 후훗, 내가 미녀한테는 좀 약하지. 우리 측 후배 하호정이도 있고 해 서 절강성 미녀군단 전부를 초청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더니 웬걸 그네들이 먼저 초대하는 거 아니겠어? 그 다음날 내가 곧바로 갚았 지. 필자 : 그럼 두 번씩이나 저녁을? 국수 : 오해하지 마. 내가 미녀들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녀들 이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필자 : (견딜 수 없었지만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어 참기로 하고^^) 중국 리그 참 파격적인 구석이 많아요. 어떻게 삼국의 미녀들로 팀을 구 성할 생각을 했을까요? 국수 : 신호팀이 흥행을 고려한 거지. 그런데 탕리는 성적도 좋았어. 필자 : 내년에는 그 팀으로 뛰시지 그래요? 국수 : 하하,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 팀 감독으로 뛰고 싶다고 밝혔지. 그랬더니 반색하던데?
내년 일은 알 수 없으나 조 국수와 절강성 미녀군단의 조합은 예사롭지 않다. 탕리를 비롯한 아마조네스 전사들과 전신(戰神)으로 불리는 플레잉 코치가 합세한다면 기세와 인기가 만만치 않으리라.
필자는 내처 예민한 사안에 관해 물었다.
필자 : 요즘 이창호와 이세돌의 전쟁이 볼만 하던데요? 국수 : 바람직한 현상이지. 필자 : LG배 기왕전 끝나고 창호 만나서 위로라도 해줬습니까? 국수 : 우리는 그런 거 안해.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뭘. 필자 : 그래도 스승이신데 격려해주셔야죠. 국수 : 격려하는 게 더 어색하지. 누가 뭐래도 창호는 아직 챔피언이야. 필자 : 이세돌 바둑도 매콤하던데요. 국수 : 펀치가 세. 둘이 치고 받으며 상호 발전하는 거지. 필자 : 내일 기성전 최종국인데 밑그림은 그려두셨어요? 국수 : 창호랑 한두 판 두는 것도 아닌데 밑그림은 무슨…. 필자 : KT배도 탈락하셨는데 타이틀 하나쯤 건져야 세계대회 참가 자격을 얻지 않겠어요? 국수 : 그러게 말야. 필자 : 상금이 과거 같진 않아도 이창호한테도 내일 결승국이 중요한 의미 가 있겠죠? 국수 : 그럼. 필자 : 사제가 멋진 기보 남기길 빕니다. 국수 : 이제 한물갔기 때문에 기대하지는 마.
그것이 전날의 대화였다. 조 국수의 임전소감은 언제나 엄살로 시작해 엄살로 끝이 난다. 기성전 5국에서 지긴 했지만 내용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10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고도 복기에서 아쉬운 부분을 몇 번이고 짚었다니 노익장의 감투정신을 높이 살 수밖에. 이번 대국으로 사제의 전적은 111승 171패. 천하의 조훈현을 상대로 171승을 거둔 이창호의 무공이 놀랍고 세계 일인자 이창호를 상대로 37%의 승률을 기록한 조훈현의 저력이 놀랍지 않은가? 스스로 퇴물이라 말하지만 아직 전심의 검은 날이 서 있다. 신산(神算) 이창호조차도 세 판 중 한판은 제물로 내주어야 할만큼.
그러나 1996년 무렵 조 국수의 전적은 참담했다. 모든 타이틀을 쥐고 있다 일시에 상실해버린 쇼크 때문에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어지간한 기사들 같았으면 아마도 그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김인 9단이 일인자 자리를 내려오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 훈현이가 아무리 잘 둔다해도 내가 정신을 차리면 기회가 올 거야.” 그러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조 국수는 황폐한 심기를 전환시키는 계기를 금연에서 찾았다. 사소하지만 금연은 자신의 부질없는 욕망을 절제하는 약속이었다. 그와 동시에 북한산 등반을 주기적으로 실행했다. 담배를 끊으니 손과 입이 허전해 군것질을 즐기게 되었다. 정미화 여사는 남편의 손이 자주 가는 곳에 멸치와 한과를 비치해두었다. 그 당시 필자는 조 국수가 한 접시의 멸치를 대수롭지 않게 해치우는 것을 본 적 있다. 아마도 담배 세 갑쯤에 해당하는 분량(60마리)이었지 싶은데, 그렇게 영양식을 먹고 산에 오르며 땀을 뺐으니 운기조식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십년 동안 체내에 축적된 담배의 독소가 서서히 방출되면서 날렵한 그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손이 두툼해지고 바지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새로 맞춰야했다. 체급이 상향조절 되면서 제비의 별명대신 황제, 혹은 전신이라는 별명이 새로 붙어 다녔다. 맷집도 좋아졌고 이제는 15회전 판정으로 가도 버틸만한 지구력이 붙었다. 제자에게 무수히 당했지만 아직은 제자 또래의 신예들에게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힘들게나마 2인자 자리는 지키고 있는 터였다. 이 때부터 조 국수는 본선무대의 상좌에 앉아 제자에게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교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를 통과하지 못하면 이창호를 알현할 수 없는 거였다. 중국기사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 대목에 있다.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나 마샤오춘 9단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순식간에 뒷전으로 잠복한 반면 한국에는 조 국수 같은 거물이 오래도록 승부의 현장에 남아 후배들을 조련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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