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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Republic of Turkey)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서아시아 나라. 정식명칭은 터키공화국(Turkiye Cumhuriyeti). 면적 78만 580㎢, 인구 6810만 9469명(2003). 소아시아반도로 이루어진 아시아쪽 영역은 아나톨리아, 유럽쪽 영역은 트라키아로 불리며 면적의 97%, 인구의 90%가 아나톨리아에 속한다. 아나톨리아의 동부․남동부는 그루지야․아르메니아․이란․이라크․시리아, 트라키아의 서쪽 끝은 불가리아․그리스와 접해 있다. 북쪽은 흑해, 남쪽은 지중해가 있다. 수도는 앙카라.
터키의 자연
터키의 지형
지질구조상 대부분 지역이 알프스․히말라야조산대에 속하고 동서방향으로 산맥들이 몇 겹으로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산이 많다. 아나톨리아에는 북부의 흑해연안을 따라 폰투스산맥과 이스펜디야르산맥, 남부의 지중해연안을 따라 토러스산맥이 가로놓였으며, 토러스산맥의 동쪽 연장에 있는 동토러스산맥과 안티토러스산맥이 내륙부로 뻗어 있다. 이들 해발고도 2000~3000m급의 주요 산맥 사이에는 산맥이 뻗어 있는 심한 기복의 아나톨리아고원이 있는데 이것은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져 아르메니아고원으로 이어진다. 또한 아르메니아고원에는 이 나라 최고봉인 아라라트화산(5165m)이 있다.
서부의 에게해연안에 접한 지역에는 해안선과 직각의 단층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고, 지루(地壘)산지와 지구(地溝)평야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아나톨리아고원을 돌아 흑해로 흘러가는 구즐 울마크강과 사카리야강, 남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가는 세이한강 등이 있고, 아르메니아고원 및 안티토러스산맥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발원하여 이라크․시리아로 흐른다. 에게해 연안의 평야에는 메안다[蛇行(사행)]의 어원이 된 뷔유크(크다는 뜻)․멘델레스강 등이 흐른다. 내륙부에는 반호수와 투즈호수 등의 함수호가 있다. 유럽 쪽의 트라키아에는 북쪽에 우스트란쟈산맥, 남쪽에 갈로스산지가 있으며 모두 해발고도 1000m 정도이다.
전반적으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그리스와의 국경을 흐르는 메리치강 지류인 엘게네강이 윤택하게 해준다.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의 경계는 함몰에 의해 생긴 마르마라해와 그 북동쪽 끝의 보스포러스해협 및 남서쪽 끝의 다르다넬스해협이다. 이들 해협은 길고 가느다란 침식곡(浸蝕谷)이 가라앉아 생긴 것으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연락수로이다.
터키의 기후
터키의 기후는 아나톨리아고원 중앙부와 아르메니아고원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온대기후이다. 서부 에게해 연안에서 남부 지중해 연안까지는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중위도 고압대가 북상하여 고온․건조하지만 겨울은 지중해의 이동성 저기압 영향으로 온난다우하여 연강수량 500~1500㎜, 지역에 따라서는 2000㎜에 이른다. 식생은 올리브 같은 상록경엽(硬葉)수림이며, 지중해 연안 특유의 마키(maquis)라는 숲이 많다.
북쪽 흑해 연안지역은 1년 내내 흑해의 습기를 받아 연강수량 1000~2000㎜ 또는 그 이상의 비가 오는 습윤기후로서 광엽수림․침엽수림이 무성하다. 아르메니아고원은 겨울에는 -40℃로 기온이 내려가는 냉대습윤기후이다. 아나톨리아고원 내륙부는 폰투스산맥․토러스산맥에 의해 바다의 영향이 차단되며 내륙성이 강한 이란․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의 저지대와 함께 연강수량이 500㎜를 밑도는 건조기후지역이며 투즈호 주변 등은 매우 건조하여 반사막경관을 볼 수 있다.
터키의 역사
고대․중세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점에 있어 11세기 터키민족이 들어오기 전부터 여러 민족이 거주․교류하며 문화 접촉이 이루어졌고 많은 국가가 흥망하였다. 아나톨리아 중앙부 챠타르휴유크에는 BC 6000년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나톨리아 원주민 농경취락 유적이 있다. 동기(銅器)를 수반한 트로이 제1기 문명은 BC 3500년경에 번영하였고 BC 2000년경에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BC 1650년경에는 인도-유럽어족인 히타이트왕국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계 최초의 철기 문화를 기초로 번영하였다. BC 1200년 트로이전쟁에서 트로이가 그리스에게 멸망한 무렵 히타이트왕국도 프라키아에서 들어온 트리기아인에게 멸망하였다.
BC 11~BC 8세기에는 그리스의 식민 정책으로 이오니아인․도리스인이 에게해․흑해 연안지역에 들어와 밀레토스․크니도스․시노프 등의 도시가 발달하였다. BC 730년 내륙부에 리디아왕국이 생겼으나 BC 546년 아케메네스왕조인 페르시아에 멸망되고, 그리스의 식민도시를 포함한 소아시아 전지역이 페르시아 지배 아래 들어갔다.
BC 334~BC 33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정복당한 소아시아는 대왕이 죽은 뒤 페르가몬․카파도키아․셀레우코스 등의 왕국이 난립하였으며 북동부에는 폰토스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BC 2세기 말~BC 1세기 초에 로마에 정복당해 300년 동안 지배를 받았으며, 395년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영토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옛 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이 수도가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7세기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이슬람(사라센)제국에 잇따라 위협을 받았다. 11세기에는 중앙아시아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침입하여 동로마제국을 제압하고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으나, 몽골족 침입으로 14세기 초에 멸망하였다.
오스만제국시대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족은 14세기 소아시아 외에 발칸반도까지 영토를 확대하였으며,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뒤 오스만제국은 소아시아에서 마지막까지 남았던 흑해 연안의 트레비종드왕국을 누르고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아 서아시아․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6세기 술레이만 대제 시대에 전성기를 이룬 뒤, 19세기에는 그리스․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는 등 차츰 쇠퇴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때는 독일․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패배하였다. 연합국은 세이블조약으로 터키의 분할을 꾀하고,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서쪽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1922년 M.K. 아타튀르크의 외교와 전략으로 이들을 타파, 1923년 로잔조약에 의해 현재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공화국 발족 이후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정하고 터키공화국이 발족되었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정교 분리, 로마자 채용, 태양력 채용 등 여러 방면으로 근대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그 말기에 독일․일본에 선전포고하였으며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반공․친서방 노선을 취하였다.
1960년 이후 군부쿠데타,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등 정치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980년 9월 에브렌 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나 국가보안평의회(NSC)를 설치, 계엄령 아래 치안이 회복되었다. 1983년 11월 총선으로 군정에서 민정으로 복귀되었다.
터키의 정치․외교․군사
터키의 정치
정체(政體)는 공화국이며 국가원수는 대통령(임기 7년)으로 연임이 금지된다. 의회는 과거의 상․하 양원제 대신 단원제(정원수 550, 임기 5년)이다. 선거방식은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이다. 전국은 67개 주(州;il)로 나누어져 그 서열은 아다나부터 시작하여 종굴다크로 끝나는 알파벳 순서에 따른다. 주 아래는 군(郡;ilce)이며 앙카라․이스탄불․이즈미르에는 대도시권 지역이 설정되어 있다. 주지사는 정부가 임명한다.
터키의 외교
나토 가맹국이다. 걸프전을 통해 동맹국인 미국에의 접근을 강화했다. 걸프전에서 터키는 반이라크전선에 가담, 병력을 파견하고 다국적군 공군기의 발진기지를 제공, 다국적군이 설정한 이라크내 비행금지구역 초계비행에도 협력했다. 1997년 12월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새 EU 회원국 가입협상 대상국에서 제외된 데 대한 반발로 EU와의 대화단절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1999년 12월 회원국 후보자격을 공식 취득했다.
그리스와는 지중해의 분단국 키프로스 및 해양법협약에 따른 배타적경제수역 설정, 에게해의 한 무인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 등을 놓고 갈등 관계이었다가 지진 참사를 계기로 인도적 원조를 제공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다. 2002년 이라크통상장관이 터키를 방문해 경제교류를 대폭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터키의 군사
1952년 NATO에 가입한 터키군은 복무기간 15개월의 징병제를 실시한다. 총병력은 육군 40만 2000명, 해군 5만 3000명, 공군 6만 100명(2001)이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34억 100만 달러(GDP의 4.5%)에서 2001년 51억 달러로 높아졌다. 터키는 키프로섬 북부에 보병 2개 사단 등 3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터키의 경제․산업
터키의 경제
오스만제국 말기에는 유럽 열강의 경제적 식민지 상태였으나 공화국 창설과 함께 국가자본주의로 유명한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계획으로 국영 슈메르은행․에티은행에 의한 기업활동과 외국자본 계열기업의 국유화 등을 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국영기업을 보완하는 형태로 민간기업이 공존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취하였다.
1963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계속 추진, 공업화를 촉진시켰으나 농업 의존적인 경제구조는 여전하여, 주로 제1차생산품의 수출에 의지하였다. 1973년 이후 석유수입가격의 폭등으로 외자(外資) 부족과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며 2001년 금융위기가 촉발되자 리라화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리라화의 가치가 폭락했다. 2002년 8월 IMF는 11억 달러의 신규차관 제공을 승인했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828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은 7300달러이다.
터키의 농․임․어업
농업이 국내총생산의 20%를 넘고 취업인구의 50%를 차지하여 식량은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잉여농산물은 수출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주로 내륙부에서 산출되는 밀․보리․포도․사탕무․해바라기, 지중해 연안에서 재배되는 목화․올리브․오렌지․레몬․바나나, 에게해 연안의 올리브․담배․포도․무화과, 흑해 연안의 옥수수․헤젤너츠․차(茶)․담배 등이다. 근래에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콩도 생산되고 내륙 서쪽 지역에서는 의약용으로 양귀비도 재배된다.
국토의 약 12%를 차지하는 목초지에서는 양․염소․소 등의 목축업이 활발하며 특히 앙카라지방에서 나오는 앙고라염소는 유명하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토로스산맥에는 유목민이 있으나 도시 근교에서는 근대적 낙농업과 양계업이 영위된다.
삼림자원은 고대․중세부터 장기간에 걸친 남벌과 개간에 따른 파괴로 황폐화되었으나 공화국 창설 후 국유화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식수사업을 진행한 결과 자원 회복과 함께 소나무․삼나무 등 용재(用材)의 원목 반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제지원료이며 용재로 쓰이는 포플러를 밭작물로 농경지에 심기도 한다. 연안 각지에서는 도미․고등어․정어리․새우 등이 잡힌다.
터키의 자원
지하자원은 철․석탄․아연․크롬 외에는 매장량이 많지 않지만, 국내 자원에 의한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흑해 연안의 종굴다크탄전과 부근의 철광산지는 카라뷔크 등의 철광업 기반이 되고 있다. 크롬은 유럽을 비롯한 해외시장 수출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석유는 동부의 바트만 부근에서 산출된다. 화력발전을 지탱해주고 있는 아탄(亞炭)은 매장량 50억 t으로 짐작되며, 탄전에서 가까운 곳에 대형 화력발전소 건설이 활발하다. 수력자원도 풍부하여 최근에 유프라테스강의 케방 댐과 쿠즐 울마크강의 힐판르 댐 등이 건설되어 댐식 발전이 본격화되고 송전시설 정비로 수력전기 의존도를 높여 가고 있다.
터키의 공업․관광
공화국 창설과 함께 근대공업 육성에 역점을 두어 1930년대에는 카라뷔크 제철소를 비롯하여 섬유․제당․시멘트 등의 공장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1963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철강․금속제련․화학비료․농업기계․식료품․화학섬유․석유정제․자동차․전기기구 등 많은 업종이 공업화되어 각 지역에 대공장이 세워지고 있다. 국민총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근래에는 농업을 앞질렸다. 한편 옛 전통을 지닌 도자기․융단․피혁․유리세공 등도 각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 흥망의 역사로 사적이 많으므로 관광사업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히타이트의 수도 유적 보가즈쾨이(하투샤), 프리기아의 수도 유적 골디온, 그리스․로마시대의 도시유적 투르와(트로이)․에페스(에페수스)․베르가마(페르가몬), 헬레니즘시대의 소왕국 코마게네왕조의 분묘가 있는 넴루트다산, 비잔틴시대의 사적이 많은 이스탄불․이즈니크(니케아)․트라브존(트레비종드), 같은 셀주크시대의 코니아․시바스․에르주룸 및 오스만시대의 이스탄불․부르사․에디르네 등이 관광지로서 유명하다. 자연관광 자원으로는 경치가 수려한 아라라트화산, 석회의 결정(結晶)이 계단식 모양의 경관을 지닌 팜크칼레, 응회암의 침식지역과 동굴주거유적으로 유명한 교레메(카파도키아) 등이 있다.
터키의 무역
터키의 수출품은 공업화가 진행된 최근에 섬유제품․직물 등 공업제품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지만 곡물․과일․담배․면화 등 농축산물과 1차생산품인 크롬 등이 여전히 주류를 이룬다. 수입품은 절반 정도가 원유․석유제품이며, 그 밖에 공업제품․기계류 등이 상위를 차지한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독일․이탈리아 등 EU 여러 나라와 인접한 이라크․이란 등이며, 수입상대국은 독일․미국 및 석유수입에 관련된 이라크․이란․리비아 순이다.
무역수지는 1960년대부터 적자로 그 폭은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1982년부터는 석유 가격 하락으로 호전되었지만 만성적인 적자 현상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 적자는 관광수입, 해외근로자들의 본국 송금 등 무역외 수입으로 어느 정도 보완되고 있다. 2002년 무역수지는 수출이 351억 달러, 수입이 508억 달러이다.
터키의 교통
철도는 오스만제국시대인 1856년부터 독일 등 외국자본으로 부설되었으며 공화국 창설 후 모두 국유화되어 터키국영철도가 경영하고 있다. 노선 길이는 서아시아에서 가장 긴 약 1만 ㎞이며 주요 도시는 철도로 연결되고 있으나 대부분 단선이고 디젤기관차이다. 따라서 속도․운행회수의 한계가 있어 장거리 교통기관으로서의 편리함이 결여되고 있다. 앙카라․이스탄불 등 대도시 근교지역은 전철화․복선화되고 통근전동차도 운행되고 있다. 이스탄불 실루케지역(驛)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연결되는 국제열차가 발착한다. 한편 국도․주도의 포장정비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 사이의 여행은 철도보다 장거리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1973년 완공된 보스포루스 해협교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자동차교통을 한층 용이하게 해준다. 흑해․에게해․지중해에 둘러싸인 터키의 연안에는 이스탄불․이즈미르의 2대 항구와 삼순․메르신․이스켄데룬 등의 항만이 있어 해운공사가 주요 항로를 운영하고 있다. 앙카라․이스탄불․이즈미르․아다나의 국제공항과 주요 도시에 공항이 있으며, 터키항공(THY)이 있다.
터키의 사회․문화
주민
대부분 터키인이지만 아나톨리아 남동부 이란․이라크와의 국경지대에 약 300만명의 쿠르드인이 살며 아르메니아인․그리스인․아랍인․유대인이 여러 곳에 소수 거주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이 많았으나 그리스인의 대부분은 1974년 키프로스전쟁으로 악화된 터키․그리스관계 때문에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아르메니아인은 제1차세계대전중 터키정부의 탄압으로 약 60만명이 죽고 약 100만명은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의 반 터키 테러 활동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동서지역간 빈부차가 극심하며 해외진출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언어
언어는 터키어가 공용어이다. 문자는 8세기부터 1928년까지 아라비아문자를 썼으나 그 뒤 아타튀르크의 제안으로 29문자로 이루어진 로마자를 채택하였다. 쿠르드인은 아직도 쿠르드어(페르시아어계)를 사용하지만, 쿠르드지역은 터키식 지명으로 바뀌고 있다.
인구는 제2차세계대전 후 해마다 거의 21~27‰ 증가하고 있으며, 연령별 인구 구조도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을 나타낸다.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의 인구이동으로 근래에는 도시인구의 증가가 뚜렷하다.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 등의 대도시에는 시가지에 인접한 구릉 등에 무허가의 강행공사에 의한 급조가옥인 게제콘듀(하룻밤 사이에 세운 집)가 급증하고 있다.
교육․종교
취학 연령은 7~12세이며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5년까지 이루어진다. 식자율은 남자 94%, 여자 78%이다. 각각 3년 과정의 중학교․고등학교와 전국에 22개 국립대학이 있다. 그 가운데 앙카라대학․중동공과대학(앙카라)․이스탄불대학․이스탄불공과대학․에게대학(이즈미르)․아타튀르크대학(에르주룸) 등은 유명하다. 종교는 터키인 외에 쿠르드인․아랍인을 포함하여 수니파 이슬람교가 주류이다. 아타튀르크의 근대화 정책에 입각한 정교 분리책으로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안식일(금요일)과 모스크에서의 예배․순례․단식 등 종교적 행사는 여전히 실시되고 있다.
터키와 한국과의 관계
터키는 6․25 때 UN 참전국이다. 현재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1957년 3월 수교, 6월 터키 주재 한국공관이 설치되었다. 1974년 문화협정, 1976년 항공협정, 1977년 통상진흥 및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스탄불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92년 6월 주한 터키공관이 설치되었다. 1999년 터키 대지진 당시 구조대를 급파하고 유상지원하였다. 북한과는 2001년 1월 수교하였다. 터키의 대한수입은 6억 9708만 달러, 대한수출은 1억 3033만 달러(2001)이다. 2003년 교민 394명, 체류자 580명이 있다
마르마라해 (-海 Marmara)
터키 북서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하는 바다. 면적 약 1만 1400㎢, 길이는 동서쪽으로 약 280㎞, 남북쪽으로 약 80㎞. 북동쪽은 보스포루스해협으로 흑해에 통하고 남서쪽은 다르다넬스해협으로 에게해로 통한다. 동쪽에 이즈미트만(灣)과 프린세스제도, 서쪽에 에르덱만 등이 있다. 마르마라해는 함몰에 의해서 생긴 바다인데, 최대 수심이 1350m에 달한다. 이스탄불항 등을 거점으로 왕래하는 국내외의 선박이 많으며 정어리․가다랭이․도미 등의 어획도 있다. 기후가 온화하므로 섬과 연안에는 휴양지․피서지가 발달하고 담배․올리브․포도 등이 재배된다. 또한 이스탄불과 이즈미트에는 임해공업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 (-海峽 Bosporus Str.)
흑해와 마르마라해(海)를 연결하는 해협. 길이 30㎞, 너비 0.6~3㎞. 다르다넬스해협과 함께 소아시아와 유럽의 접점이다. 두 해안은 비교적 가파르다. 그리스 식민도시로 해협 입구에 비잔티움이 건설되고,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뀌어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해협은 흑해방면 교역로로서 중요하였다. 오스만왕조는 아시아쪽 연안에 아나돌루히사르, 반대쪽에 루멜리히사르를 구축하고 보스포루스해협을 제압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 뒤 흑해는 오스만제국의 내해가 되어 외국선박의 운행이 금지되었다. 18세기 러시아가 흑해 북안에 진출해, 해협의 자유통항권을 요구한 끝에 1774년 쿠추크 카이나르지조약에 따라 지중해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했다. 그 뒤 유럽제국도 같은 권리를 얻어 오스만제국의 해협지배권이 약화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하자 1918년 국제해협위원회가 해협을 관리하고 해협지대를 비무장화했다. 터키공화국 수립 후 1936년 몽트뢰조약으로 국제해협위원회와 해협비무장화가 폐지되고, 약간의 제한만을 허용한 상태로 터키의 주권하에 들어갔다. 1973년 해협을 횡단하는 보스포루스교가 놓였다
부르사 (Bursa)
터키 소아시아반도 북서부에 있는 부르사주의 주도. 인구 106만 7000(1997). 마르마라해 연안에서 남동 25㎞에 있다. 울루다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푸른 숲이 아름답기 때문에 <녹색의 부르사>라고 한다. 오스만제국의 옛도시로서 사적이 많으며 온천과 스키장이 있는 등 관광휴양지로 유명하다. 전통적인 견직물․자수 외에 제당․자동차공업이 활발하다. 도시의 기원은 BC 2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스만제국 2대 군주 오르한의 치세 때인 1326년에 수도가 되었고, 1369년에 에디르네에게 수도의 지위를 양보할 때까지 정치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초대 군주 오스만의 묘당, 2대 군주 오르한의 묘당, 타일의 아름다움으로 <녹색의 묘>라고 하는 메메트 1세의 묘당 등이 있고, 또 <녹색의 모스크>와 <대모스크> 등 화려한 건조물이 있으며, 그 밖에 고고박물관․이슬람박물관 등이 있다
소아시아 (小- Asia Minor)
터키의 아시아령을 구성하는 반도. 북쪽은 흑해, 남쪽은 지중해, 서쪽은 에게해에 둘러싸여 아시아 서쪽 끝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북부의 도시 아미소스(지금의 삼순)와 남부 타르수스강을 경계로 서쪽을 아시아라 했는데, 아시아라는 개념이 동쪽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곳은 소아시아라고 하게 되었다. 이곳을 아나톨리아라고도 하는데,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재위 913~959)가 아시아 영토를 14군관구(軍管區)로 나누었을 때, 현재의 에게해에 닿아 있는 서해안지방을 그리스어로 아나톨레라 한 것에서 유래된다. 소아시아 북부는 흑해를 따라 동서에 폰투스산맥이, 남부에는 해안선과 나란히 토로스산맥이 뻗어 있다. 이 산맥 동부로 이어지는 안티토로스산맥에는 아라라트화산 등 높은 산들이 있고,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들도 이 산맥에서 발원한다. 흑해와 토로스산맥 사이에 있는 내륙부는 해발고도 600m가 넘는 아나톨리아고원이다. 해안지대는 겨울철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기후이며 내륙부는 연강수량이 적고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이다.
역사
소아시아는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가는 통로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많은 국가가 흥망했다. 최초의 통일국가는 BC 2000년 히타이트왕국이었다. BC 1200년 무렵 서부에서 중부를 중심으로 프리기아인이 왕국을 세워 500년간 다스렸다. BC 1100년 무렵 그리스 아카이아인은 도리스인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에 소아시아 남서부 해안을 따라 정착하고 많은 식민도시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남서부에 세워진 리디아라는 나라는 동방으로 통하는 <왕의 길>이라는 길을 개척했는데, 이 길을 통해 동방에서 침입한 페르시아인에게 멸망당했다. BC 33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은 대병력을 거느리고 소아시아를 정복했으나 그가 죽은 뒤 부장(部將)간의 싸움으로 이 땅은 셀레우코스왕조의 영토로 되었고 그 뒤 카파도키아․폰토스․비티니아․페르가몬 등 4왕국이 생겼다. 페르가몬이 로마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왕이 죽은 뒤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1세기에는 다른 왕국도 로마령이 되었다.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틴제국이 고대 로마를 계승하여 이 땅을 지배했다. 10세기에 들어 대(大)셀주크왕조의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 동부 국경지대를 위협했다. 1071년 말라즈기르트싸움에서 승리한 투르크인은 소아시아로 진출했다. 투르크인은 몇십 년에 걸쳐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코니아를 수도로 룸 셀주크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13세기 중엽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14세기 초에 멸망했다. 이 무렵 국경경비에 배치되었던 군후들이 독립하여 군후국을 세웠는데 오스만제국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시조 오스만의 부친 에르투룰도 룸 셀주크왕조의 가신(家臣)이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후반에 오스만왕조 군대는 주변 그리스도교 군후의 영토와 발칸반도에 진출해 슬라브민족도 그 지배 아래 두었고, 1453년에는 비잔틴제국까지 멸망시켰다. 16세기에는 군사봉토제(軍士封土制) 아래 농업생산이 증대했고 상공업도 발달하여 오스만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7․18세기의 오스만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강력한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결과 영국․프랑스․이탈리아군이 진주하였고, 소아시아는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리스군에 의한 서아나톨리아지방 점거는 투르크인의 민족의식을 높여,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하는 조국해방투쟁의 길을 열었고, 이 투쟁에서 승리한 혁명군은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터키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아나톨리아고원 (-高原 Anatolia)
터키의 소아시아반도 내륙부를 차지하는 분지모양의 고원. 아나톨리아란 터키령 아시아의 명칭이며 터키어로는 아나돌루(Anadolu)라고 한다. 해발고도 800~1200m이고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며 아르메니아고원으로 이어진다. 북쪽은 폰투스산맥에 의해서 흑해와, 남쪽은 톨루스산맥에 의해서 지중해와 각각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해양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연강수량은 200~400㎜이며 중앙부에서는 투즈호와 같은 함수호와 초원도 볼 수 있다. 농업이 곤란한 지역에서는 모헤어사(絲)를 얻을 수 있는 앙골라염소와 양의 목축이 성하나, 관개용 댐의 건설과 지하수 이용이 진척되어 밀․해바라기․포도․사탕무․담배 등이 재배된다
앙카라 (Ankara)
터키의 수도이자 앙카라주의 주도. 인구 320만 3362명(2000). 소아시아반도 중앙 북부, 아나톨리아고원 위에 있다. 사카르야강 상류의 앙카라강 및 추부크강 연변에 있으며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둘러싸고 있다. 해발고도 약 850m, 연강수량 345㎜이다. 기후는 건조하고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다(평균기온 8월 22.8℃, 1월 -0.3℃).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수도로 정해졌을 당시 인구는 3만 미만이었고 시가지도 북쪽 성채 기슭 부근에 제한되어 있었으나, 그 뒤 도시계획이 실시되어 남북으로 달리는 아타튀르크로를 간선으로 삼아 새 시가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시가는 고층빌딩과 공원도 있어서 아름다우나 구릉부에는 최근에 게제콘두(하룻밤세우기)라고 불리는 서민주택이 무계획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터키의 정치․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이며, 새 시가지에는 국회의사당․정부기관․외국공관 등이 있고 앙카라대학․중동공과대학․고고박물관․민속박물관 등도 있다. 도로․철도교통의 요충지이고 에센보아국제공항은 북쪽 30㎞에 있다. 제분․식료품․차량 등의 공업도 들어서 있다. 사적으로 로마시대의 목욕탕 유적, 아타튀르크묘 등이 있다. 겨울에는 난방용 석탄으로 인한 스모그공해가 발생한다.
앙카라의 역사
옛 그리스어․라틴어로는 Ancyra, 현대 그리스어로는 Angora라고 한다. 도시의 기원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아타튀르크묘가 있는 아누테페에서는 옛 주택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 뒤 히타이트의 도시가 되었다가 갈라티아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남쪽의 고르디온을 통과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분열된 뒤에는 폰토스왕국령이 되었다가 BC 25년에 로마제국령에 편입되었다. 로마제국의 아나톨리아 거점으로서 아우구스투스의 공적을 기념하는 궁전, 로마식 목욕탕이 건설되었다. 비잔틴제국시대에는 페르시아와 아바스왕조의 공격을 받았다. 11세기 무렵 셀주크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왕조는 1361년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1402년 바야지트 1세는 북쪽 추부크초원에서 티무르에게 패하고(앙카라 싸움) 앙카라를 한때 잃었으나, 얼마 뒤 오스만왕조에 의해 회복되었다. 그 뒤 성채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의 교통․상업의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뒤 케말 아타튀르크는 대국민회의를 앙카라에서 소집하였다. 1923년 터키공화국의 성립이 앙카라에서 선언된 뒤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터키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오늘에 이른다
이스탄불 (Istanbul)
서아시아 보스포루스해협 서안에 있는 터키 도시.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인구 883만 1805(2000). 이스탄불주의 주도이며, 터키의 문화․교통․경제․학술․관광의 중심지이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발달한 도시로서, 유럽 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이라 일컬어졌던 옛 시가(에미뇌뉘․파티프지구 등으로 나뉨) 외에 그 서쪽으로 마르마라해 연안에 있는 제이틴부르느․바크르쾨이지구, 골든혼을 사이에 두고 옛 시가지 북쪽에 있는 베이올루․베시크타슈․시슐리지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시아 쪽은 위스퀴다르․카디쾨이지구 등으로 되어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공업생산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요 업종은 금속․기계․섬유․약품․식료품․의류․피혁․제지․전기기기 등이고, 전통적인 중소공장이 옛 시가지와 시슐리지구 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 밖에 옛날에는 해운을 이용한 골든혼 연안이 훌륭한 공업지역이었으나, 최근에는 도로수송을 이용하여 아시아 쪽에서는 앙카라로 통하는 국도(國道), 유럽 쪽에서는 에디르네로 통하는 국도를 따라 근대적인 공장이 진출하고 있다. 또한, 예로부터 보스포루스해협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현재도 에미뇌뉘지구와 카디쾨이 등을 거점으로 해상교통과 무역활동이 활발하다. 또한 보스포루스해협을 횡단하는 페리는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한편, 철도교통면에서는 에미뇌뉘지구에 오리엔트급행 역으로 유명한 시르케지역이 있으며, 아시아 쪽에서는 앙카라 등지로 통하는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1973년에는 길이 1074m의 보스포루스교(橋)가 가설되었으며, 유럽 고속도로 5호선이 개통된 뒤에는 시의 여러 지역에 설치된 인터체인지로 자동차의 교통조건이 좋아졌다. 또한 시가지 서쪽 22㎞ 지점에는 로에실쾨이국제공항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스탄불에는 사적(史蹟)과 유서깊은 건축물이 많다. 특히 옛 시가지는 토프카피궁전(지금의 박물관), 하기아소피아(지금의 박물관), 술탄 아메트모스크(청색모스크), 술레이마니에모스크, 와렌스의 수도교(水道橋) 등이 있으며 옛 시가의 서쪽을 경계짓는 비잔틴시대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골든혼에 가설된 갈라타교(橋)․아타튀르크교(橋)와 통하는 북쪽의 신시가지에도 제노바인 거류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갈라타탑, 케말 파샤가 집무중 사망한 곳으로 유명한 돌마바체궁전 등이 있다. 옛 시가지에 있는 전통적인 상업지구 그랜드바자르는 장대한 규모로 유명하지만 골든혼 북쪽의 신시가지에도 타쿠심광장과 이스티클라르거리 등 번화했던 상업지구가 있다. 옛 시가지에는 고고학박물관․고대오리엔트박물관․이슬람미술박물관․이스탄불대학 등이 있다.
역사
시의 기원은 발칸반도에서 이주해 온 트라키아인의 취락에서 찾을 수 있는데, BC 7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비잔티움(Byzantium)이라 일컬어지는 어업과 해상무역의 기지로서 번영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동맹도시가 되었으나, 193~196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가 이곳을 점령하고 성벽․경마장․목욕장 등을 건설하였다. 330년부터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이곳을 로마제국 동방령(東方領)의 수도로 정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Konstantinopolis;콘스탄티노플)라 불리었으며, 4세기에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413년 테오도시우스황제에 의하여 성벽이 확장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주요 건축물은 로마를 모방해서 7개의 언덕에 건설되었다. 도시는 14개 지구로 나누어졌으며 400개가 넘는 교회․예배당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326년에 건립된 하기아소피아(아야소피아) 대성당은 동방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395년에 동로마․서로마로 분열된 뒤에는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11세기 무렵부터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이 지중해무역에 진출하면서 비잔틴제국의 상업과 재정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 도시의 번영은 끝났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점령으로 도시는 약탈당하였고 카이제국은 수도를 니케아로 옮겼다. 1261년 십자군에 의해 라틴제국이 붕괴하자 비잔틴제국의 수도로 복귀했으나, 도시는 이미 옛 모습을 잃었고,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정복될 무렵의 인구는 3~5만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의 메메트 2세(재위 1451~81)는 정복 후 즉시 하기아소피아대성당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를 모스크로 바꿈과 동시에, 1457년 이후, 이 도시를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삼고 그 이름을 이스탄불이라 고쳤다. 그는 아나톨리아와 발칸 각지로부터 투르크인․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들을 이 도시에 강제로 이주시켜서 모스크․바자르(市場)․캐러밴사라이(隊商宿)․학교․병원 등 사회시설을 갖추었다. 15세기 말에는 에스파냐계 유대인을 많이 받아들였고,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와 서아시아 각지에서 상인․기능공․학자․문인의 이주가 잇따랐다. 그 결과 16세기 중엽에는 인구 50만 정도의 대도시로 부활하였다. 술레이만 1세(재위 1520~66)의 제국융성기에는 흑해․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오스만함대의 본거지로서, 그리고 동서남북에 이르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16세기 말 인구가 70만이 되자 식량난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고 상비군단의 반란과 민중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비잔틴제국시대부터 골든혼 오른쪽 연안의 갈라타지구는 이탈리아상인의 거류지였으나 17세기 이후, 영국․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이곳에 영사관을 설치했으며, 여러 그리스도교회도 건립되어 신시가지를 형성하였다. 1845년에 옛 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교가 골든혼에 가설되었다. 지난 역사를 통하여 가끔 화재․지진․해일 등의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1774년 1월의 대화재로 2만 가구가 소실되었고, 1839년 1월에는 오스만제국의 정청(政廳;바브알리)이 모두 불탔다. 19세기 이후 제국의 근대화와 식민지화가 진행되자 이 도시는 서아시아․발칸 여러 민족의 반제국주의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자본과 오스만궁정에 의하여 각종 학교․도서관․전기․도시가스․수도 등의 공공시설이 건설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 투르크인에 의한 반제국주의운동이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나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1920년 3월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성립되고 오스만제국이 멸망하자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이즈미르 (Izmir)
터키 소아시아반도 서부 에게해의 이즈미르 만에 맞닿아 있는 항만도시. 인구 225만 149(2000).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이스탄불․앙카 라에 이은 터키 제3의 도시이며, 고대 그리스 명칭으로는 스미르나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 이고 에게해가 육지쪽으로 휘어들어 안쪽 연안에 자리잡은 천연의 항구이다. 도로․철도의 발달로 터키의 중요한 무역도시이며 빠른 속도로 번창하고 있다. 면직․피혁․맥주․올리브유․염료․담배 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해마다 8~9월에 국제견본시장이 열린다. 옛부터 지진 피해가 많아 역사유적은 거의 없으나 고대 아고라에서 대리석 기둥,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상 등이 발굴되었다. 국립도서관과 고고박물관 등이 있다.
역사
BC 11세기 무렵에 아카이아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리디아․프리기아 등의 지배를 받은 뒤 AD 133년부터 로마제국령이 되었다. 11세기 후 투르크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 후 지중해무역의 근거지로 번영하면서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에게해제도로부터 많은 그리스인이 이주해 왔다. 제1차세계대전 뒤 오스만제국이 멸망하자, 1919년 5월 이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에 의한 <이오니아국가> 건설을 구실로 그리스정부가 군대를 파견했으나, 터키인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했다(터키혁명)
트라브존 (Trabzon)
터키 소아시아반도 북동부 트라브존주의 주도. 인구 21만 5058(1995). 흑해 남동쪽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상업중심지이다. 해륙교통의 요충으로 공항도 있으며, 옥수수․개암․담배․차․어류 등이 집산된다. BC 7세기에 시노페(현재 시노프)의 그리스인 식민시로서 건설되었으며, 옛이름은 트라페주스(Trapezus)이다. BC 400년 《아나바시스》의 저자 크세노폰이 그리스 용병대의 한 무리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에서 패주하여 도착한 도시로 유명하다. 폰토스왕국과 로마․비잔틴제국령을 거쳐서 1204년에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때 이 고장으로 도피한 알렉시오스 콤네누스가 창시한 트레비존드왕국의 거점이 되었다. 1461년 오스만제국령이 되었으며, 황제 술레이만 1세는 이 고장에서 출생하였다. 성채․아야소피아성당․예니주마 모스크 등의 사적과 카라데니스(흑해)대학이 있다. 남쪽 30㎞의 산속에 5세기에 세운 수메라수도원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