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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회학교 My Friends 원문보기 글쓴이: 김재형
2012 양문회 여름 RT 목사님 말씀
잠언 16: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아주 중요한 말이다. 잠언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격언이라는 뜻이다. 유태인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고 했던 모든 것 속에서 안 없어지고 남아있는 교훈이다. 격언이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금이나 은은 보석 중에서, 광물 중에서 제일 귀하고 비싼 것이다. 옛날에는 화폐를 물물교환 하다가, 그 다음에는 조개나 이런 것으로 하다가, 은으로 하다가, 금으로 하다가, 금화도 있고 은화도 있고 그렇다. 성경에서 은은 주로 돈인데, 성전에 내는 인두세, 한사람마다 내는 돈도 은으로 내는데, 은의 중량하고 값이 같은 것이다. 우리 돈도 백 원 짜리가 백 원 가치보다 높다고 한다. 비용 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렇다. 결국 이것은 제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금이나 은은 제물이다. 금이나 은보다 낫다.
인생은 결국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을 잘 하면 잘 살 수 있고, 선택을 잘못하면 망하는 것이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매순간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특별히 여러분 지금 학생 때이고 하니까,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중에서도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것이 중요하다. 순간순간 선택하는 것도 있지만, 장래의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선은 한 번 선택하면 중간쯤 가다가 바꾸기가 어렵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경부선에서 호남선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호남선에서 경부선 바꾸기도 어렵다. 노선을 바꾼다는 것은 어렵다. 지금 여러분 때는 노선을 정하는 때이다. 노선을 정하는 때.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때이다. 옛날 말에 그런 말이 있다. 20세에 약관이고 30세에 입지이다. 입지란 말이 뜻을 정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노선을 정했다는 말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선택을 잘못했다. 결국 멸망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선택을 잘못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이 선택은 인류 전체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만의 선택이 아니다. 딸려있는 식구 전체의 선택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선택은 곧 인류의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는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 선택을 잘못했느냐 하면,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조건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조건이 너무 좋았는데 잘못 선택했다. 그러니까 조건이 나빠서 선택을 잘못했다, 이럴 수는 없다.
오늘 두 사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도 선택을 잘 해서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담은 선택을 잘못해서 멸망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아담은 조건이 참 좋은 데서 잘못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아주 악조건에서 선택을 잘한 것이다. 그러니까 악조건에서도 선택만 잘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담을 지은 다음에 하나님의 동산에 두었다. 하나님의 동산처럼 좋은 조건이 어디 있는가. 최고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뒀다. 정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조건에 두었다. 그 조건은 뭐냐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조건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조건이 왜 좋은가 하면, 인간은 육체이다. 그래서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이 없다. 기능은 다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느끼고 판단하고 깨닫고 이런 모든 것은 기능이다. 뇌의 기능이다. 머리의 기능이다. 동물들보다 이 기능이 뛰어나다. 이런 아주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다. 요즘에 컴퓨터가 굉장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움직여야 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기술자가 오면 컴퓨터가 굉장한 것을, 우주에 관한 것을 계산할 수도 있고, 이런 것도 할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는 못한다. 생명이 없다는 말은 그 말이다. 기능은 좋은데 움직일 자가 없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라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쓰면 별로 기능이 많이 안 나타난다. 나는 지금 컴퓨터를 겨우 배워가지고 겨우 워드 배워 가지고 하는 정도다. 나는 컴퓨터를 매일 열지만 그것밖에 안한다. 메일 보고 페이스북 들어가 보고 트위터 들어가 보고 사랑방 들어가 보고 이것밖에 못한다. 다른 것은 못한다. 그렇지만 *** 같은 사람은 그것 가지고 별것을 다 만들어낼 수 있다. 같은 컴퓨터 가지고도 한사람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한사람은 자자분한 일이나 하고 그런다. 생명이 없다는 말은 그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 스스로 방향이 없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것이다. 기능만 가지고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같이 산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컴퓨터는 반드시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한다. 사람 없는 컴퓨터는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도 방향이 없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를 갈 것인지, 단지 자기 하고 싶은 것, 생존에 필요한 것만 하고 있다.
만족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냐하면, 맨 처음에 사람이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빨고 배가 부르다, 그 상태가 만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는 것에서부터 만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족의 개념이 인간에게는 어떻게 정착이 되어 있느냐 하면, 먹어서 배부른 상태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한다. 그 말은 모든 것은 다 먹고 난 후에 만족이 된다는 말이다. 먹는 것이 제일 원초적인 만족이다. 모든 인간의 만족은 다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게 아니다. 먹는 것 이상이 아니고 알고 보면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것이 모두 먹는 걸 위해 사는 거다.
왜 인류는 옮겨 다니면서 군데군데 모여 살았는가? 먹이감 때문이다. 농사짓는 등 이런 이유 때문에 전부 흩어져 돌아다니다가 한국에 머문 사람, 중국에 머문 사람 이렇게 민족이 갈라졌다. 알고 보면 먹기 위한 그 원초적 본능 외엔 없다. 나머지는 거기에 딸린 본능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가장 좋은 조건은 하나님이 있는 조건이 가장 좋은 조건이다. 컴퓨터에게는 기술자가 있는 조건이 가장 좋은 조건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있는 조건이 가장 좋은 조건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이 주어졌다는 조건은 가장 최고의 조건인 것이다. 더 이상없는 조건이다. 거기만 있다면 인간은 타고난 기능을 가장 좋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를 떠났기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원래 만든 사람의 목적대로 사용된 게 아니라 전혀 만든 사람의 목적과는 다른 것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악(惡)하다’고 얘기한다. 즉, 가장 좋은 조건에서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져야 그 하나님이 원하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생명의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생명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버리고 지식을 선택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선택했다. 이 지식을 선택하고 나니까 그 지식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 모든 걸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판단하는 것도 기능이니까 모든 것을 옳고 그른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판단할 때는 판단의 기준이 있다. 무작정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항상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옳고 그름’이다. 그렇게 판단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판단해 봐도 모순적이다. 남을 판단할 때는 괜찮았는데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려니 모순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니까 자기가 자기를 봐도 이상한 존재인 것이다. 결국 혼란의 연속이다. 동산을 쫒겨나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형이 아우를 죽이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계속해서 ‘강자는 약자를 핍박하고 강자는 약자를 죽인다’는 것을 표시한다. 지금 역사를 보면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정의’를 부르짖고 해도 결국 ‘강자냐 약자냐’ 하는 것만 남는다. 지금 독도문제가 불거져 시끄러운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은 우리 입장에선 정당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이 싸움은 결국 국제재판소로 가게 된다. 거기로 가게 되면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력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땐 정의가 이겨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제사회에서는 정의라는 것 보다 힘이 더 그러니까, 우리가 더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강대국이라는 사실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강대국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는 잘못 배워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라고만 배웠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은 다음 이야기고 우선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왜? 하나님의 동산을 떠났기 때문에...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는 말이다. 동산 밖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지금 일본의 전략은 독도문제를 국제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론화해서 국제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거기서는 자기들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강자와 약자‘ 이렇게 되어있다. ‘정의’와 ‘불의’ 이렇게 대립되어 있는 게 아니라, ‘강자’와 ‘약자’ 이렇게 대립되어 있다.
즉, ‘약육강식’의 세계... 이것이 곧 하나님 없는 세상의 원리이다. 이것을 성경은 ‘가인과 아벨’로 표현해 놓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이것이 창세기 11장까지 가는 과정이고 또한 이것은 인류사를 함축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 5장에는 등장인물이 총 10명인데, 모두 800~900살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900년이나 살았는데도 역사는 짧다. 왜냐면, 그 내용이 단순하다. 즉, 먹고 입고 살다가 죽었다. 몇 살을 향수하다가 자식을 낳고 죽었다. 이것이 거기에 기록된 10명의 역사이다. 즉,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기에 대단할 것 같지만, 화려할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추려보면 이것이 다인 것이다. ‘먹고 살았다’, ‘자식 낳고 죽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창세기5장에서 10명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는데, 그 10명 즉 ‘10’이라는 뜻은 ‘완전하다’는 의미(유태인의 관념상)이다. 즉,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다 똑같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 창세기 6장에 가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각기 자기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 하고 그 낳은 것을 보고 ‘네피림’이라 한다. 영어로는 Giant라고 하는데 ‘거인’, ‘용사’란 말이다. 이는 모두 ‘위대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 ‘위대하다’는 것이 그 속에 무슨 뜻이 있냐하면 ‘자기생각에 좋을 대로 한다’는 말이 숨어있다. 왜 높아지려 하고 왜 위대해지려 하는가? 자기 생각대로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각자 지금 표를 얻기 위해서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땀 흘려가며 굽실거리고 돌아다니느냐 하면 지금 잠깐 굽실거린 후 나머지 5년 동안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자기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그러는 것이다. 도지사보다는 훨씬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이 많다. 즉, 보다 많은 권한행사를 위해 악수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이 곧 ‘giant,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인류역사를 보면 바로 그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서 전쟁하는 역사였다. 영웅이 생기면 전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나오니까 유럽에 전쟁이 일어났다.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났다. 창세기6장은 ‘인간은 위대해지면(커지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면 남은 죽는 것이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남을 살리는 사람은 ‘동산 밖’에는 없다. 그런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걸 가르치려고 성현들이 와서 인간들을 가르쳐 왔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게 안된다. 자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마음대로 한다. 아무 것도 아닐 때는 남의 말도 듣고 했지만, 일단 높이 올라가면 남의 말을 안 듣는다. 옛날의 제국의 왕들은 자기를 신이라 하며 신격화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는 노아의 홍수로 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창세기 11장에 가면 이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성을 높이 쌓자, 하늘에 오르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런 슬로건이 나오게 된다. 이 슬로건이 지금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슬로건이다. 옛날 얘기가 아니고 어떤 것을 암시하는 신화적 표현이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인류 역사가 이렇구나 하고 알게된다. 이걸 모르고 역사를 보면 다 속게 된다.
역사란 것도 진실이란 것이 있을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역사책이란 것이 진실한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책이란 것은 사학자들의 사학적 관점에 의해서 쓴 것이다. 그 사람의 관점이 어디 있느냐를 모르고 그 책을 보면 나는 그 사람에게 넘어간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한국의 근대사를 써 놓은 사람이 있고, 자본주의 입장에서 한국의 근대사를 쓴 사람이 있다. 완전히 다르다. 60년 밖에 되지 않는, 지금 바로 그것을 겪어온 사람들이 살아있는 그 역사도 사학자들의 관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써 놓았다. 그러니까 무슨 관점으로 써 놓았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그 책을 읽다보면 글을 잘 써놓은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더 논리적인 사람에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논문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뭔가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니까 더 잘 증명할 수도 있고, 더 잘 못할 수도 있다. 기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무슨 노선에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알고 책을 봐야한다. 사자가 무엇 때문에 달려 오는지, 웅크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으면 영락없이 잡혀먹기 마련이다. 사자가 공연히 엎드려 있겠는가?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를 11장까지 쭉 읽어보면 인류의 역사가 다 그 속에 원리가 들어있다. 왜 저 사람이 저걸 쓰는지, 왜 저 말을 하는지, 왜 저런 짓을 하는지가 거기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안 속게 된다. 안 속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그것을 알면 안 속는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뭉치자는 것은 좋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뭉치자고 하는지를 모른다. '성을 견고하게 쌓자'도 좋은 말이다. 우리를 지키자는 것이다. '하늘에 오르자'는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자는 말이다.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그 속에는 무엇이 있나? 자기를 지으신 이의 통제가 없고 자기 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속에 어떤 통제 기능이 있는 사람인가'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요즘 세상에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전부 다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대가 되어서 전부 자기 멋대로 한다. 부모 말도, 선생 말도 안 듣고 자기 멋대로 한다. 법이란 것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더 문제가 되었다. 앞으로 갈수록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각자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대로 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어려서 아주 엄격하게 아이들을 가르친다. 우리처럼 하지 않는다. 8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님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만든다. 어렸을 때도 잘못하면 깜깜한 방에 가둔다. 한 시간 벌, 두 시간 벌. 그래서, 이 아이들은 깜깜한 고독을 제일 무서워한다. 미국사람들이 사후세계에 갔다가 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부 다 깜깜한 터널을 통과해서 빛이 오더라고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깜깜한 터널이란 것을 잘 모른다. 한국 부모들은 그런 부모들이 거의 없다.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한 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두어 두는 부모는 없다. 정이 많아서 그렇게 못한다. 서양 사람들은 매정하게 그렇게 한다. 젖 먹는 시간도 정해놓고 아무리 울어도 젖을 안준다. 내가 봤는데 아이가 우는데 운다고 하니까 '놔 두세요' 하더라. 울더라도 시간이 되어야 준다. 그렇게 키운다. 그러니까 저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하는데도 속에는 어렸을 때 철저하게 통제받은 정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관이 오면 손을 드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서에 들어가서 술 먹고 난동 부린다. 파출서 옆집에 살면 잠을 못 잔다. 밤새도록 떠드니까.. 술 먹은 놈들이 와서 경찰관에게 오만 욕을 다한다. 시끄럽게 하고. 도저히 안 되면 방에다 처박아 놓고, 무릎 꿇게 해서 앉힌다든지 하는데, 술 먹은 사람들은 그래도 말을 안 듣는다. 우리 한국에서는 술 먹은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다. 술 먹어서 그런 것이지, 저 사람 본심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며 봐 준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법을 바꿔서 술 먹고 행패 부리는 놈은 벌을 더 줘라 이렇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하였더라. 그것이 인류의 종말이다. 이것이 단체로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이다. 아담을 가장 좋은 조건 하에서 가장 나쁜 선택을 하였다. 그러한 노선을 선택하였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그 길을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약할 때는 다 양 같은데 강하면 다 호랑이가 된다. 누구든지 다 똑같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바벨의 조건에서 선택을 한 사람이다. 바벨론, 바벨탑. 바벨은 혼잡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려다 보시고 그들의 행사가 악하기에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한다.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으니 서로 못 알아 듣는다. 영어 하는 사람과 영어 못하는 사람은 서로 못 알아 듣는다. 영어와 한국어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통하지 않는 인류를 보고 한 말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서 거대해지면 절대로 다른 사람과 교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
우리역사에 보면 전**과 노**는 서로 고등학교 친구인데 둘 다 최고정상에 올랐다. 최고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아주 친한 친구였다. 정권 찬탈을 할 때도 서로 도와주었다. 그런데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둘이 서로 말이 안 통한다. 한사람(노)은 ‘내가 생각해서 백담사에 보냈다‘ 라고 하고 한사람(전)은 ’네가 그럴 수 있냐?‘ 라고 한다. 지금도 두 사람은 원수가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역사 중 전 씨와 노 씨의 히스토리이다. 그러니까 올라갈수록 교통이 안 된다. 초등학교 때는 다 좋다. 그런데 올라가서는 교통이 안 된다. 왜냐하면 점점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점 비정해진다. 그것이 바벨이다. 그래서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는 말은 불통이다.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낮을 때가 좋은 줄 알아야 한다. 낮을 때는 친구도 있고 맘을 열고 얘기 할 사람도 있지만 높아질수록 외로워진다. 정상은 외롭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바벨탑, 바벨론. 세상의 종말은 바벨론이다. 요한계시록에 와서 바벨론이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서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 안에 있는 역사는 정말 신기하다. 창세기 11장에 썼던 바벨론은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많은 역사의 과정을 거쳐서 성경 맨 마지막(요한계시록)에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기자가 다르고 연대가 다르다. 수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목요연하게 쫙 정리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똑같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너무 달랐는데 하나님의 하나님 볼 때는 똑같다. 하나님 볼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택해서 가고 있는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관점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달관하는 사람이 된다. 사람을 아는 사람이 된다. 그것을 모르면 사람도 모르고 세상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휩쓸리게 된다.
아까 말한 대로 말 잘하는 사람한테 팔려가게 된다. 논문 잘 쓰는 사람의 논문을 보고 그것에 넘어가 버리게 된다. 6.25 전쟁이 분명히 북한에 의한 침략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논문을 기가 막히게 써서 남한에서 북한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그런 논문을 보고 시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하고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을 일으키려면 상대방 군사력의 3배 이상은 되어야 전쟁을 일으킬 만하고 또 3배 이상 되어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데 남한에는 탱크 1대도, 비행기 1대도 없었는데 어떻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준비를 하고 일으킨 전쟁이라면 어떻게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겠는가? 그렇게 말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논문에 딱 현혹되어 버리니까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된다. 이론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논문을 누가 썼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문제는 더 그러하다. 과학 같은 경우는 실험을 하는 것이라 거짓말을 못하는데 인문과학 쪽은 실험을 할 수 없으니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 우린 이제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으니 그렇지, 우리도 만일 100년 전 일이라면 그 사람들이랑 똑같다. 100년 전 일을 모르니까... 우린 논문은 안 봤지만 6.25 때 우리 눈으로 봤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논문이 너무 잘 쓰여져 있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지금 다 공부하는 사람들이니 속으면 안 된다.
안 속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우리도 보고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 그것을 모르고 책을 많이 볼수록 손해이다. 어떤 사람이 책을 볼 때 다독하지 말고 정독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책만 정독하면 그건 또 안된다. 그럼 완전히 빨갱이 되는 것이다. 종북 세력이 다른 세력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읽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린 역사를 볼 때 공중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땅바닥에서 보면 안 된다. 가장 높은데서 봐야한다. 가장 높은데서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지혜다.
아담은 결국 가장 좋은 조건에서 가장 나쁜 선택을 하고 말았고 바벨론으로 가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가장 나쁜 조건에서 바벨의 조건(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에서 가장 약한 자로 하나님을 선택했다. 자신이 강한 자면 절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 같은데 왜 하나님을 선택하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거기에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복의 문이 되게 하겠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따랐다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오죽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여 가나안까지 오겠는가?
지금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왜 저런데서 살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냥 살만하니까 거기서 사는 것 아니겠는가? 어려서부터 태어나서 그 곳 밖에 모르니까 그냥 사는 것이다. 근데 그것도 너무 괴로우면 도망쳐 나올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먼 길을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으면 거기까지 왔겠는가? 잘사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지는 않는다. 떠나는 사람들은 다 잘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도 역시 잘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 난 어디를 떠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잘 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났다. 그리고, 제주에 가보면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서 잘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제주가 살기 좋은 곳이지만 옛날은 아주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니 누가 거길 가겠는가? 육지에서 살다 살다 안된 사람들.. 빚에 쫓기고 빚쟁이가 날마다 찾아오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배를 타고 제주로 떠나 버렸다. 제주까지 빚쟁이가 따라오진 못했다.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제주의 원주민들은 객지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만 왔으니까 다 자기들한테 피해만 준다고 생각하여 아주 싫어했다. 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실패한 사람들만 왔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들(제주 원주민)한테 덕 될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뜯어 먹을려고 왔으니까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그런 말은 없지만 아브라함은 그래서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좋은 것 있다고 간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밀려 온 것이다. 최악의 조건인데, 최상의 선택을 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내가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을 듣고 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다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선택했겠지만, 그것 밖에 없어서 선택했겠지만 그럴지라도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복이 되는 길이 있다.
계획이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아무리 계획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한 것만큼 하겠냐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계획한다는 것은 결국 아담 안에서, 아담의 계획 밖에는 할 수 없다. 내가 최선의 계획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벨론으로 가는 계획이다. 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구를 해서 계획을 한다면 무슨 계획을 하겠는가? 개의 수준에 맞는 계획을 할 것이다. 개 이상의 계획을 할 수 없다. 연구를 많이 한다고 더 좋은 계획이 나오겠는가? 개는 개 수준만큼 밖에는 계획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아담 수준만큼 밖에는 계획을 할 수 없다. 더 많이 연구하면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불가능한 일이다.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초등학생이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서 고등학생의 것을 하겠는가? 초등학생 수준에서 하는 것뿐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계획, 그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 초등학생의 계획은 고등학생이 되면 변하고, 고등학생의 계획은 대학생이 되면 또 변한다. 그러므로 너무 일찍 결정해도 안 된다. 너무 일찍 결정하면 뒤에 가서 바꾸지 못해 문제가 생긴다. 결정할 수 있을 때쯤 결정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그렇다. 다른 것이 없다. 아브라함이 다 알고 한 것이 아니다. 모르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좋은 말씀이니까 따른 것이다. '내가 너로 복을 받게 할 것이고 내가 너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는 말이 좋은 말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나간 것이 아니다. 옆집에 누가 와서 전도를 하는데 들어보니까 좋은 말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알아서 나간 것이 아니다. 들어보니까 좋은 말이어서 갔는데 그것이 좋은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한 선택이었지만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그 후로 이상하게 교회의 길에서는 떠나지 않았다. 절에 가서도 1년간 산 적이 있는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것이 있어서 절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만약 중이 되었다면 여러분을 만났겠는가! 스무살 때 스님이 날 보고 중이 되라고 하더라. 암자에서 열 달 정도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중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만약 내가 교회를 어려서부터 다니지 않았더라면 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어쩐지 절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처음 선택이 중요하다. 뭔지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다 이것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런 말이 들린 것이 정말 복이라고 생각된다.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관심이 없었다. 왜 관심이 없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교회가 시골교회라서 시시하고, 사람도 몇 명 안되고, 누가 봐도 '야 좋다'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부럽지 않은 것이었다. 하여튼 한 사람도 관심이 없었다. 한 친구는 동네에서 믿은 것이 아니고 목포에 나가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예수를 믿었다. 우리 동네에서 순수하게 믿은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은혜라고 하 수 밖에 없다. 하필 그것도 이웃 집에서 그랬는지.. 나보고 오라 해서 갔었다.
선택이란 것이 참 중요하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중요하다. 내가 어려서 인생을 다 아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해도 실제로는 다 알지 못한다. 다 모른다면 최선의 선택은 좋은 사람, 신실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다 알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다 하는 것은 아직은 안 된다. 사람을 잘 만나면 좋은 선택이 된다. 좋은 사람을 좋아해야 희망이 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지혜와 명철.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이 누구인가? 반대로 가장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멍청한 사람은 아담이다. 그 좋은 동산을 버리고 바벨론으로 갔으니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앞에서 말한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더 지혜로운 사람이 나왔다. 아브라함이 나무라면 열매인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다. 훨씬 농도가 짙다. 나무에서 나무 뿌리 맛과 잎사귀 맛과 열매 맛을 비교해 보면 다 동일한 향기가 있다. 그 중 제일 맛있는 것은 열매다. 열매는 그 나무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런 사람이다. 최악의 조건에서 하나님 말씀 하나만 듣고서 따라간 아브라함의 열매이다. 잠언에 나오는 지혜라는 말을 전부 예수로 바꾸면 된다. 지혜와 명철은 바로 예수 자신이다. 희랍적 사고방식으로는 지혜라는 것이 객관적인 지식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인격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가 무엇이냐' 하고 찾아선 안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찾아야 한다. 지혜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일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한다. 어리석은 일, 지혜로운 일만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므로 지혜를 선택하려면 지혜로운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명철을 선택하려면 명철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멍청한 사람은 뭘 해도 멍청하다. 돼지는 뭘 해도 돼지 근성이 나온다. 개는 뭘해도 개다. 자기는 최선을 다한다 해도 도로 개다. 그것의 지혜만 배우려 해서는 안된다. 거기서 그것이 나오는 것이니까 예수를 선택하는 것은 최상의 선택이다. 여러분이 예수를 다 모르지만 예수를 선택하는 것은 최상의 선택이다.
나는 성격이 무엇을 해도 백 퍼센트 만족하는 경험이 없다. 나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선택해도 100% 만족한 경험이 없다. 가면 갈수록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선택해도 가면 갈수로 부족하고 후회가 된다. 그러니까 뒤집어야 되고 그럼 또 뒤집어야 되는 그런 성격이다. 나는 100%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일정한 길을 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이거했다 만족이 안 되면 또 다른 걸로 바꿔야 되고 하다가 만족이 안 되면 또 바꿔야 되고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이 한없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몇 번 하다보면 인생이 가버리고 만다. 연습만 하다가 마는 것이다. 우리가 붓글씨 쓰는 곳을 가면 연습을 많이 한다. 본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연습만 하게 된다. 내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더러 많이 본다. 이것도 좀 해보다가 저것도 좀 해보다가 맨날 그러다 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성공 못한다. 그래도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판 사람은 그래도 뭐라도 하나 한다. 우직하게 깊이 파면 물이 나온다. 그런데 조금 파고 물 안 나온다고 다른 데 파고 또 다른 데를 파면 물이 안 나온다. 그래서 세상에서 오히려 우직한 사람이 지혜롭다. 지혜롭고 팔팔 뛰는 사람이 잘 살 것 같은데 안 그렇다. 그런 사람이 잘 못산다.
백공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못하는 것이 없고 오만 일을 다 잘한다. 그런데 항상 쌀 도가니에 쌀이 없다. 그러니까 한가지 밖에 모르면 한 가지만 할 텐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이것 좀 하다가 좀 어려우면 다른 일을 하고, 늘 그러니까 성공할 수가 없다. 연습만 하다가, 그림 좀 그려보다, 글씨에 좀 써보다, 피아노 좀 쳐보다가 뭐 이렇게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인생을 모르고 살려면 차라리 우직하게 사는 것이 낫다. 그냥 우직하게 한 가지만 하다보면 망할 길로 가든가 아니면 성공으로 가든가 둘 중에 하나는 될 것이다. 그런데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인생을 알고도 선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참 지혜로운 사람을 따르면 된다. 인생을 가장 성공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누가 인류사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인가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예수보다 더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이 경영능력이 좋아서도 기술이 좋아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석가모니도 그렇고 공자님도 그렇고 유명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은 지식은 훨씬 모자란다. 비교도 안 된다. 그런데 왜 예수는 지혜로는 사람인가? 하나님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다. 다른 것은 없다.
온 인류가 마지막에는 그 사람에게로 가야한다. 그래야 해결이 된다. 일단 예수를 선택했다는 것은 은혜다. 뒤로 알고 보면 도저히 내가 선택 못할 사람을 선택한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흠모할 사람인지 모르고 내가 선택했다. 그런데 뒤로 가면 가볼수록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선택 했는가, 이건 내 생각으로 선택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해서 나를 예수 안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을 보면 단순하다. ‘예수 사랑하심은 ~’ 하는 찬송가를 듣고, 그 간단한 것을 듣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쉽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난 한 번도 이 일을 후회해 본적이 없다. 그렇지만 다른 일은 다 후회했다. 하고나도 후회하고 하고나도 후회하고... 그렇지만 이 길을 한 번도 뒤돌아 본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 분을 알고 싶다. 왜냐하면 알수록 인생의 문제가 더 깊이 보이고 인생의 문제가 더 원천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표면적인 것만 가지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얘기하지만 그 분을 알면 아주 원천에 들어가기 때문에 원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것이 바깥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가 단순하고 쉬워진다.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너무 간단하게 된다. 여러분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항상 문제를 단순화 시켜야 한다. 단순화 시킬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안 하고는 해결 못한다. 약분을 해야 해결하지, 그 많은 숫자를 나열해서는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최소한도로 약분시켜 놓고 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문제도 최소한도로 압축시켜서 가장 단순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둘이 한참 싸우다가 이혼하는 데까지 갔는데 처음에는 아주 좋아서 너 아니면 나 죽고, 나 아니면 너 죽는다 해서 결혼 했는데, 살다보니 티격태격해서 싸워서 이혼까지 가서, 법정까지 갔는데 그동안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로 얽히고 설킨 복잡한 얘기가 너무너무 많다. 그 때는 이렇게 섭섭하게 했고, 그 때는 이렇게 불쾌하게 했고 등의 한 없이 많다. 그것을 무슨 수로 지금 다 보상을 하고 해결 하겠는가? 그리고 할 수도 없다. 이미 그렇게 이혼하자고 나올 때는 이미 감정이 팍 상해 버렸기 때문에 이혼을 한다. 자기는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식까지 두고 이혼하겠는가? 그땐 이미 말릴 수 없게 돼버린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를 원천으로 되돌아 가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어느 날 밥상에서 숟가락 하나로 시작된 문제가 이혼소송까지 가게 된다. 그리 간단한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원천을 알고 원천에서 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아무리 그래도 근원은 이것이구나. 병도 근원을 알고 치료하는 사람은 명의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치료하는 사람은 매일 병만 치료하다가 말게 된다.
우리가 영원한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말을 듣게 되면,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예수는 지혜자다. 난 다른 것을 알고 싶지 않다.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싶지 않다. 옛날에는 성경 안에도 문제 해결하는 방법 많다. 많지만 그 방법을 알아 해결하고 싶지 않고, 예수를 알면 저절로 해결된다. 그분을 더욱 알면 알수록 더 깊이 해결 된다. 그분을 알면 해결된다. 왜? 원천으로 돌아가니까 해결이 간단하다. 낙동강 물을 정수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야 정화되겠는가? 근데 낙동강의 원천으로 돌아가면 맑은 물이 있다. 그것과 인생문제도 똑 같다.
여러분이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철이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나는 내 인생이 예수밖에 없다. 어디 가서 말하라면 예수밖에 없다. 내놓을 것도 예수밖에 없다. 근데 내가 생각해 봐도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고 남이 봐도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도저히 이해 못한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살고 있는가? 이혜를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기적이다. 모르는 일이니깐 기적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기적이다. 내가 통 연락을 안 하고 살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알고, “아직도 그 사람 살아있냐?”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10년 전에 들었다. 벌써 죽었을 사람인데 살아 있는 것 이것이 기적이다. 살았다 하더라도 제대로 못살았을 것이다. 내게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겠는가? 근데 힘은 없지만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것을 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저 사람이 이때까지 살고 있나? 원천이 어디 있는가? 비결이 어디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한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예수만 알려고 했던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교회가 신기하다. 어떻게 해서 이런 교회를 할 수 있는가?, 무슨 방법으로 해서 이렇게 교회가 되었는가?” 라고 목회자들이 질문을 한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나는 할 말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해줄 말이 없다. 나는 어떻게 해 본 일이 없으니까! 나는 예수라는 한 사람만 추구했을 뿐이지 다른 것을 해 본 일이 없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 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한 일 없다. 그러니까 내 친구에게도 어떻게 하라고 말을 못 해 주겠다. 보통 목회자들은 목회하는 방법이 많다. 그래서 목회자들을 위한 부흥 세미나가 많다. 성공한 목사들이 나와서 세미나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다 자기들도 성공하고 싶으니까. 거기 가면 기도는 어떻게 하라. 뭐는 어떻게 하라는 등의 매뉴얼이 다 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대로 해 본다. 해 본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할 사람이 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모여든다. 그런데 나보고는 물어보면 할 말 없다. 한가지 밖에 없다. "예수만 알면 됩니다." 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안 해보면 모르는 것인데. 될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이렇게 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오직 예수가 좋아서, 그리고 그 해답이 있어 나는 예수를 찾은 것 밖에 없다.
여러분이 예수를 선택을 했다면, 예수의 영역 안에 왔다면, 이것은 위대한 선택이다. 세상 사람들이 별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 봤자 결국은 바벨로 가는 것이다. 어디로 가든 바벨로 가는 것이다.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나는 여러분이 청년의 때에 이 길을 선택한 것을 축하하고, 여러분이 이것을 더 깊이 관심가지고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길이 확고하게 정해지길 바라고..
그렇다고 다른 것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못 듣고 ‘그러면 공부는 안 해도 되는가?’ 라고 생각하는데 공부는 공부이지, 공부를 해야 취직하고 밥 먹고 사니까 공부를 해야 한다. 만일에 공부 안하고 직장 가질 수 있고, 취직할 수 있으면 공부 안 해도 된다. 자기 아버지가 재벌이면 안 해도 된다. 후계자 수업만 받으면 된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공부 안 해도 농사만 지으면 되었지만 지금은 공부를 안 하면 취직을 못하니까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는 것은 철저하게 내가 직업을 얻기 위해, 생존을 위해 한다는 철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를 언제까지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독립하려면 독립만세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실력을 갖추어야 독립만세가 되는 것이다. 3.1절 아무리 불러 봐도 안 되었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안 된다.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다른 것이다.
내 인생의 길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정해야 되고, 공부는 공부대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기만큼 다 된다. 사람이 생각이 어지러워 공부가 안 된다. 길이 안 잡히니까 뭐가 뭔지를 모르니까 떡인지 밥인지 모르니까 공부가 안 된다. 근데 딱 명확하게 갈라져서, 공부는 오히려 쉬워진다. 모든 일은 간단화, 단순화 시켜야지 빨리 빨리 나간다. 단순화 시킬수록 힘이 생긴다. 두꺼운 철판을 자를 때 물로 자른다. 톱으로 자르면 얼마는 열이 나겠는가? 아주 가는 물총으로 쏘는데 엄청난 압력으로 자르는데 열도 안 난다. 집중하면 힘이 생긴다. 딴 생각 안 하면 힘이 생긴다. 열중하면 힘이 생긴다. 공부도 잘하게 된다. 내 인생을 예수 안에 닻을 내리고 공부를 하면 쉽다. 인생 때문에 해맬 일은 없다. 공부 때문에 머리 쓸 일만 있지, 인생 때문에 해맬 일은 없다. 다들 인생 때문에 해매다 공부를 못한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딴 생각을 하니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겠는가? 그러니까 파일 정리하듯 예수 안으로 내 인생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 무엇이든 자기 재능대로 무엇이든 하면 된다.
위대한 선택. 인생은 선택하는 것이다. 바벨론으로 가는 사람은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선택을 잘못해서 가는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선택하므로 가는 것이다. 인생의 참 행복을 말할 때 천국이라 말할 수 있다. 천국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어떤 상태이냐?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태이다. 그 상태로 가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디를 선택하느냐? 그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여러분이 위대한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청년의 때에 너는 조물주를 기억하라. 너는 젊었을 때에 조물주를 기억하라. 그래야 내 뼈 속에 양약이 될 것이다. 골수에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기초가 생긴다는 말이다. 30에 입지인데 여러분 중 30된 사람도 있고 넘은 사람도 있는데, 넘는 사람은 조금 아쉽지만 거꾸로 돌아가 입지하고 아직 안 된 사람은 시간이 있으니까 30 전에 입지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바쁘다. 그리고 40에 불혹이 돼야 한다. 근데 40에 입지하려면 너무 늦어서 안 된다.
나는 스물일곱에 입지를 했다. 적절한 시기에 입지한 샘인데 그래도 인생이 40이 되니 불혹이 되었다. 내가 대구에 내려올 때가 36이었다. 전혀 다른 것에 흔들림이 없었는데 그래도 지금 아쉬운 것은 내가 좀 더 힘이 있어 가지고 더 내가 인생을 정리했더라면 더 좋은 걸 남겨줄 수 있을 건데. 시간이 아쉽다. 여러분도 시간이 아쉽지 않도록 착 착 맞아야 한다. 30에 입지, 40에 불혹, 50에 지천명, 그래야 60에 이순 할 수 있다.
예수 안에 내 인생을 정하자. 예수 안에 내 인생의 뜻을 정하자.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기도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셀에게 잡혀간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가 한 뜻을 정하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하다. 그럭저럭 살다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하게 된다. 어느 때 인생 가는 줄 모르게 금방 간다. 주머니에 돈 넣고 써보면 언제 다 나간 줄 모르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 젊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지만 금방 지나간다. 근데 석양이면 해가 굉장히 빨리 내려가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석양에 해 지는 것을 보면 금방 빨간 해가 내려간다. 그것을 황혼이라 한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예수, 참 지혜자요, 참 명철한 자인 그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들을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고, 당신의 그 거룩한 영역 안에 포함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들이 아직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저들에게 권고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지혜와 명철이신 그 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