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양군 이종을 왕위에 올리는 쿠테타, 그 반정에 앞장선 인물로 김자점(金自點)이 있다.
그의 이름 김자점(金自點)은 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거기에는 기이한 사연이 있다.
그 옛날 낙안읍 고을에 해마다 15세 처녀를 재물로 바처야 고을이 무사하여 연중행사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고을 사또로 부임하는 사람은 첫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기백이 장대한 인물을 뽑아 보내고자 전국에 방을 써서 부쳐 신임사또를 구했는데
마침 김자점의 아버지(김균태)가 이 고을 사또로 임명장을 맏았다.
김자점의 부친이 낙안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낙안고을에 퍼지자 육방거족들이 새 사또가 오는 것을 보고
'똑똑하게 생겼지만 인생이 불쌍하다'고 혀를 찼다.
신임 사또 김균태는 부임하자마 명주실과 독한 담배를 준비하라고며 육방에 알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육방들은 사또의 하직 밥을 정성드려 만들어 올렸다, 사또는 태연스레 밥을 먹은 후에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명주실을 잡아당기면 잘 나가도록 길게 풀어 놓고 독한 담배를 방에다 피우고 화롯불을 켜게 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오디선가 '쿵쿵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슬그머니 열리었다.
연기 때문에 전혀 앞을 볼 수 없었다. 순간 '버스럭 버스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로 물러서고
다시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사또는 큰 기침을 하며 인적을 나타내었더니
"스르르 스샤샥샥'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새자 아전 육방이 문을 열러보니 사또는 태연히 앉아 있다가 명주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명주실은 지붕 위로 끌려간 것을 알고 용마루 사이에 큰 지네가 숨어 있었다. 사또는 칼로 지네의 허리를
내려치자 피가 튀어 사또의 이마에 떨어졌다. 그 후 사또는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가 태어나서 아들의
얼굴을 살펴보자 자신이 얼굴에 핏자국이 묻었던 바로 그 자리에 점이 찍혀 있었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궁금해 하면서도 아이가 너무나 영특하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냈다.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1588년 안동에서 태어났다.-<마포자료총서 제7집 마포의 역사인물>에서
김자점은 단종복위운동 때 성삼문 박팽년 등을 배반하고 장인 정창손을 통해 거사사실을 수양군에게
고자질해 사육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김질의 5대손이다. 김자점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파주의 명현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이귀 등과 함께 수학을 한다. 이귀와는 사돈관계이다.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할아버지 덕택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오른다, 광해군 때 병조좌랑이었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반대하다 당시 대북세력에게 밀려 조정에서 쫒겨난다.
이후 최명길 심기원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물론 사돈 이귀도 끌어들인다.
1622년 김류 신경진 등을 합류시켜 세력을 규합한다. 마침내 능양군을 추대해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광해군 측근에서 반역의 고변을 차단한 상궁 김개시(金介屎)가 있었기에 반정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김개시를 뒤에서 반정세력에 유리하게 움직인 인물로 김자점을 꼽는다.
상궁 김개시(金介屎)는 ‘시(屎)’ 자의 순우리말인 ‘똥’으로 불러 김개똥으로 불리기도 했다.
‘계축일기’에는 ‘가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김개시는 상궁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광해군과 김개시의 인연은 광해군의 세자 시절인 선조 때부터 시작된다.
김개시는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비밀스러운 방책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광해군의 최고 심복 이이첨과 교분을 맺게 됐고 권세가와 자유롭게 접촉했다.
김개시는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역모 혐의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이에 적극 가세하면서 광해군을 정치적으로 도왔다.
광해군 정권 내내 국정을 농단한 그녀였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 편이 되지 못했다.
반정군 쪽에 포섭돼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역 모의를 알리는 전언에 대해 김개시는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광해군에게 반정의
징표를 묵살하도록 했다. 반정의 기미를 알리지 않고 광해군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김개시는 반정 공신이었지만,
반정 세력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1623) 3월 13일 계묘 6번째 기사이다.
그 일기는 '상궁 김개시(金介屎)를 베었다'며 인조반정 직후 김개시를 처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시가 정업원(淨業院)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민가에 숨어 있었는데,
군인이 찾아내어 베었다.'
김자점은 인조정권의 최고 실세로 부상한다.
그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기여해 그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힌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북인세력이 이괄과 내통할 만일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감옥에
가두웠던 대북파인물 40여명을 처형할 것을 건의한다. 결국 대북파 인물 40명은 그의 주청대로 처형된다.
병자호란 때 그의 활약(?)은 지금 논란거리이다. 정묘호란 때 도원수로 진급한다.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로서 서북방의 방어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
국경선에서는 봉수대의 봉화로 청군의 침략을 긴급하게 알렸다.
그는 '청이 겨울에 처들어올리 없다'며 묵살한다.
그가 거느린 병력도 2만으로 모두 북방의 정예병이었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에서부터 한양까지 최단거리로 냅다 달려왔다.
김자점이 관할하는 지역을 무사 통과한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 가량을 버틴다.
그 사이에 지방에 있던 수만의 근왕군이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한다.
이때 근왕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정예병을 가지고 있던 김자점에게 함께 청군의 배후를 치자고 권유했다.
이때도 김자점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각지의 근왕군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따로따로 싸우다가 각개격파 당한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조정의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김자점 탄핵을 외쳤다.
결국 김자점은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형 중 가장 강도 높은 형벌)에 처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다는 이유로 형이 완화되고 1년 뒤에는 공직에 복귀한다.
김자점의 복직은 이런 인조의 계획 중 일부였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친청파 인사였다.
김자점은 지속적으로 인조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소현세자의 아들 대신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한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에게 왕에 올리는 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리는 것이다.
두 문제 모두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대한 일이었으나 인조는 강력하게 밀어붙였고,김자점은 임금의 충실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김자점은 꾸준히 점수를 땄고, 본인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인조는 참으로 김자점을 대단히 아꼈다. 죽기 직전 효종에게 ‘김자점은 나와 같이 대하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권력의 정점에 선 김자점,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인조 시절 적을 만들면서까지 인조곁을 지켰던 김자점이기에 인조가 죽자마자 그의 권위는 끝도 없이 추락했다.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대간들에 의해 탄핵당한다.
‘김자점은 인조께서 승하하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
효종은 이런 이유를 대며 그를 광양으로 귀양 보낸다.
김자점은 여기서 또 무리수를 뒀다.
대표적인 친청파 인사였던 그는 청나라의 힘을 이용해 효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 것이다.
김자점은 인조의 능지문에 청나라의 연호가 아닌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등을 몰래 청나라에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전진 배치하고 조선에 외교적인 압박을 가한다.
다행히 당시 김자점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된 이경석이 목숨을 걸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려
조선은 청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이듬해에 청나라의 외교적 압박이 모두 김자점의 탓이란 것이 밝혀지고,
김자점과 그의 아들은 역모죄로 처형당하게 된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김자점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 조선팔도에 보내졌다고 한다.
실록에는 이 안건이 너무 잔인해 기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실제로 야사의 일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으나,
최소한 당시 김자점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나빴는가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