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법원로 15(서초동) 법원단지 정곡빌딩 서관 입구에 있는 정역(鄭易) 신도비이다.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와 그 남쪽 일대에 옛날 해주 정씨들이 모여 살던 정곡(鄭谷)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조선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 (集賢殿 大提學)을 지낸 정역(鄭易)의 묘소가 있었다.
이 일대에 법조단지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는 1984년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고 현재 그의 신도비(神道碑)만 있다.
정역(?∼1425년)은 본관이 해주이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태종 이방원과 함께 같은 해 과거를 봤던 동기이다.
그는 조선왕조 초기 국정운영에 참여하면서 친구였던 이방원이 개국 초반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도왔다.
이방원은 정역의 딸을 숙의옹주로 삼아 효령대군 이보의 배필로 들인다. 이 가문은 조선왕실과의 끈끈한 유대를 맺었다.
정역은 예조·형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 집현전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품이 근검하고 왕실과 인척관계이지만
교만하지 않고 덕이 많았다고 한다.
해주 정씨들은 정역 사후에도 약 500년동안 그의 묘역 아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이 일대를 정곡(鄭谷)이라고 불렀다.
정곡마을 입구에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백석(白石)정중만 (鄭重萬)이 쓴 정곡(鄭谷)이라는 표석 2개가 있었다.
지금도 정곡빌딩 서관 뒤편에는 '鄭谷"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1979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법원 등이 정곡마을로 이전하면서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로 이장한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해주 정씨로 시집을 간다. 단종의 정순왕후 송씨가 세상을 떠나자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사를 치르고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한다. 그것이 오늘의 사릉(思凌)이다.1984년 사릉묘역의 소나무 두 그루는 강원도 영월 단종의 장릉으로
옮겨 심었다.그토록 이별하고 살아온 단종 부부가 '서로 손잡고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라'고 그 소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는 아비와 어미를 잃어 천애고아가 된 정미수를 양아들로 삼는다.정미수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이다.
자식이 없던 정순왕후 송씨기 기댈 곳은 미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김별아의 장편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은 정순왕후와 미수의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대로 정업원 지붕을 박차고 떠올라,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립니다.찾고픈 혼백이 있어요.잠시나마 해후상봉하고픈
그리운 영혼이 있어요.당신 말고는 아무도 그리워할 수 없게 운명지어진 내게도,일말의 위로인양 살붙이의 은애를
나누었던 상대랍니다.
미수야!미수야!
나는 생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무람없이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내 쉰 목소리가 자욱했던 구름을 흩어놓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그는 이미 중음을 벗어나 다음 생을 찾아 떠났나 보내요.
한편으로 당연하고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이내 목이 메고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불러주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비록 배를 앓아 낳은 친자식은 아니지만,그가 나를
향해 그 낯선 이름을 부를 때에 나는 지옥의 밑바닥마냥 어두컴컴한 가슴속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비로운 모성의 빛이 이미 중년이 된 나를 달금한 젖내를 풍기는 어린 어미로 만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몸이 뜨거워졌습니다.마음도 흐늘흐늘 풀렸습니다.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운명 속에서 붙임의 평생을 살아낸 내게
생경한 모성은 예성치 못한 생의 축복이었습니다.
당신은 미수를 기억하시나요?당신이 영월 땅에 유배되어 돌아가시 전년,당신이 그토록 의지하고 사랑했던 누이 경혜공주가 낳은 아들,당신의 조카입니다.그래요,바로 그 피바람 몰아치던 기혹한 때에 고물거리며 태어난 가엾은 생명입니다.
미수의 팔자도 기구하기가 나에 못잖습니다.아버지인 부마 정종은 사약을 받아 죽고,경혜공주는 순천의 관비가 되었지요.경혜공주는 순천부사 여자신이라는 자가 관비의 사역을 시키며 모욕하려 하자 끝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새벽이슬처럼스러져가셨습니다.그 후 아비와 어미를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미수는 기막히게도 원수나 다름없는 세조에게 거두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