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의사당은 대지 10만 평에 건물면적 2만 4,636평을 차지하는 지하 2층 지상 8층의 석조건물이다.
단일 의사당 건물로는 동양에서 제일 크며, 장차 남북통일이 되고 의회제도가 양원제로 채택 되더라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6년의 공사 끝에 1975년 8월에 준공되었으며, 현대식 건물에
한국의 전통미를 가미하였다. 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24개의 기둥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뜻하며,
'돔' 지붕은 국민의 의견들이 찬반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는 의회 민주정치의 본질을 상징한다.
1948년 제헌국회 의사당은 현재는 사라진 중앙청, 옛 일본 총독부 청사에 자리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경남도청 무덕전이 임시의사당으로 쓰였다.
1954년부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의회로 쓰이고 있는 옛 부민관에 자리를 잡는다.
부민관은 일제시대 경성부민들을 위해 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이다.
일종의 대형 공연장이었다. 회의장이 협소하고 제반 시설이 불충분해 의사당으로 부적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승만 정권 때는 남산 백범광장 근처에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설계 공모를 했다. 건축가 김수근이 당선됐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공사도 지지부진해졌다.
군사쿠데타 발발 후 제6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의사당건립계획은 다시 추진되었다.
1965년부터 서울시는 제3한강교 건설계획과 함께 강남지구 개발에 착수했다.
1967년, 한강 전역에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는 내용 등을 담은 대대적인 ‘한강종합개발계획’이 발표된다.
그때 여의도개발이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1968년 2월에는 여의도가 국회의사당 입지로 선정된다.
여의도는 관청들이 들어선 세종로에서 반경 5㎞권내에 있고, 번잡한 도심에선 벗어나있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텅 비어있었다. 새로운 구상을 실현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1969년 5월 완성된 건축가 김수근씨의 마스터플랜은 여의도에 국회의사당과 외국공관, 시청과 대법원,
주거지를 망라하는 계획이었다. 공시기간만 20년, 투자금 1000억원이 필요했다.
같은 해 10월 여의도 중앙 12만평 부지에 아스팔트 광장을 조성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내려오면서
원안은 대대적으로 손질을 한다. 당초 구상도 현실과는 동떨어져있어 계획은 전면 재검토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사당은 1969년 7월에 여의도에서 기공식을 갖고 1975년 9월에 완공한다.

국회의사당을 건축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국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이 녹색 돔이다. 무게만 해도 1000톤이 넘는 돔은 원래 황색이었다.
황색 구리판이 산화하여 자연스럽게 녹색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돔이 없이 직사각형의 평지붕 양식을 한 설계안이 당선됐다.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원안이 어깃장이 나고 결국 콜로니얼 스타일의 돔이 얹어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돔이 없으니 마치 상여처럼 생겼다”고 지적해
설계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2008년 4월 국회 사무처는 국회 개원 60주년을 맞아 의사당 후문 앞에 ‘국민과 함께하는 민의의 전당’이란 문구가 새겨진
간판석을 세웠다. 높이가 무려 7m에 달한다. 하단 폭은 2.6m, 상단 폭 2.2m이고, 무게는 68t이 넘는 초대형 비석이다.
이 간판석은 ‘남근석’을 닮은 모양 때문에 입방아에 올랐다.
“여의도는 조선 시대 궁녀들의 화장터로 음기가 센 곳이어서 정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 음기를 누르기 위해 남근석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풍수 논란까지 겹첬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현재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서울 여의도 1번지의 터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화장터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처럼 국회의 본관인 의사당이 ‘흉터’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지세를 누를 목적으로 처음부터 남근석을 세우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실제 거석을 세울 때 김태랑 사무총장은 절친한 풍수지리학자의 조언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총장은 후보를 물색하던 중 가까운 동교동계 인사로부터 거석을 기증받았다. 설치비용으로 국회 예산 2억 1000만원을 들였다.
또 처음에는 거석만 세웠다가 설치 한 달 뒤에는 거석 좌ㆍ우에 약 1m 높이의 둥근 모양의 보조석을 둬서 더욱
‘남성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바위 3개만 덩그러니 세워둔 게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다”는 의견에 따라
거석의 옆면에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의의 전당’이란 문구를 새겼다. 거석 건립 직후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한국교회언론회는 그해 6월 20일 성명에서 “국회의사당과 같은 민의의 전당에 남근상과 같은 희화화된 조형물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정치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상징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국회 내 남근석은 음기를 누르는 것이 아닌, 배를 묶어놓는 ‘닻’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는 이설도 나왔다.
여의도의 형상이 배가 떠나가는 행주(行舟)이기 때문에, 배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겪듯 정치권이 시끄럽다는 게
한 풍수학자의 해석이었다. 이 거대한 비석을 닻으로 삼아 ‘여의도 배’를 떠나니지 못하도록 하자는 뜻으로 거석(巨石)을
세워놓았다는 설명이다. 남근석 논란과 비판에 결국 2억1000만원의 예산이 들어간 이 거석은 세워진 지 1년 만에 철거돼
인적이 드문 헌정기념관 뒤 공터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