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한강 서호(西湖)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신선이 놀러와 노딜던 곳' 선유봉(仙遊峰)이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자연과 인물 풍물을 사실대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선유봉(仙遊峰)>이다.
조선 선비들의 풍류(風流)와 멋을 마음껏 즐긴 서호이었고 그 가운데 선유봉이 시인묵객들을 유혹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그저 한번 들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그 절경 속에 별서(別墅)와 누정(樓亭)을 마련하였다.
서호의 양화나루의 상징은 바로 선유봉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해발 40m) 물가의 바위 봉우리이다.
여의도와 밤섬으로 나뉘었던 한강 서강 물길이 양화나루에서 합쳐지는 바로 그곳에 선유봉이 자리한다.
선유봉 양쪽 아래 나루에는 모두 큰 마을과 작은 마을 등 여러 마을이 들어서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 권필(權韠) 성로(成輅)와 함께 '서호삼고사(西湖三高士)'로 알려진 연봉 이기설(蓮峯 李基卨)이 선유봉 일대에 살았다.
비슷한 시기에 이정귀(李廷貴)가 보만정(保晩亭)을 지어 산수자연(山水自然)을 즐겼다.
선유봉 동쪽에는 이수광의 아들 이성구(李聖求)가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살았으며 이민서(李敏敍)와 이건명(李健命)부자가
선유정사(仙遊亭舍)와 삼유정(三有亭)을 지었다.
최완수(崔完洙)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은 200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겸재정선이 본 한강진경>'선유봉'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작은 마을의 초가들은 나루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평민들의 집일 것으로 보인다.
큰 기와집은 이 곳에 은거해 살았다는 연봉 이기설(蓮峯 李基卨·1558∼1622)이 살던 집일 듯 하다.
이기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을 조달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상관의 부정을 목도하고 벼슬을 버린 뒤에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은거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인물이다.
그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으로 짐작하고 가족을 이끌고 이 선유봉 아래로 이사해
광해군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 9년(1617)에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이기설은 다시 선유봉 아래 양화리를 떠나 김포로 숨어버렸다. 그가 죽고 난 다음해(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에게는 이조참판직이 추증된다. 이기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이언침(李彦욞· 1507∼1547)의 손자이고, 효자로 유명한
영응(永膺) 이지남(李至男·1529∼1577)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지남 때부터 선유봉 아래에 터잡아 살았던 듯 ‘양천읍지’에서는
이지남의 두 아들인 이기직(李基稷·1556∼1578)과 이기설 형제의 유적이 선유봉에 있다고 했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이기설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서호의 희우정(喜雨亭) 조금 남쪽 강 가운데 바위섬이 있는데 민간에서는 선유봉이라고 부른다.
광릉(廣陵 광주)에서 떠내려온 것이라고도 한다.선유봉은 동서로 백여 보쯤 되고 남북으로는 10여 척 정도다.
낮은 언덕이 절벽에 임해 있는데 남쪽 기슭에 어부의 집 10여 채가 있다.모두들 그저 그런 백성들로 이익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유람 나온 객들은 가끔 배에서 내려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술잔을 들고 서로 권한다.
시골이야기나 속된 말을 나누면서 멋대로 우스갯소리를 하고 돌아가곤 한다."-최유연,<선유봉 기문>에서
이 기문을 보면 선유봉은 동서로 백여 보나 되고 남북으로 10여 척이 된다고 한다.그 규모가 제법 컸다고 하겠다.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이 말년에 이 근처에 별장 영복정(榮福亭)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세조 5년(1459)에 세조가 서쪽 교외에 나가 백성들의 농사짓는 상황을 살펴보고 마포에 백부인 양녕대군이
말년에 새로 지은 장자가 있어 안부 차 들렸다.때마침 정자 이름을 짓지 않고 있던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세조는 즉석에서 '영복정(榮福亭)'이라 짓고 직접 글씨를 써서 주었다.
그 정자 이름 아래에 그 의미를 풀어서 주를 달기를 "한평생 영화롭게 살며 한평생 복을 누리라(榮一世 享百年)."라 했다.
세조 14년(1468) 6월에는 신숙주 한명회 등 대신들이 영복정에 나가 조운선을 점검하였는데 세조가 우승지를 파견하여
이들에게 특별히 음식을 하사하여 노고를 치하하였다.이에 신숙주는 영목정 앞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세조에게 올렸다.
성종 6년(1475) 성종은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작물의 작황을 살펴보고 농민들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며 술을 하사하였다.
이어 영복정으로 거둥하여 한강에 정박해 있던 조운선들을 점검하고 조운선을 관리하는 관원들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성종 때 사림 세력으로 중앙정치에 발을 디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원화중 등 선비들과 한강유역에서 노닐다가
비기와서 이곳 영복정에 들러 하룻밤을 묶었다.그들은 이곳이 양녕대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알고 기생 두 사람을 불러
시를 지으면 시간을 보냈다.그 시의 일부를 옮긴다.
"강변에서 말 타고 향기로운 꽃밭 거니노니(江邊跨馬踏芳菲)
강가의 화려한 정자 낚시터 굽어보네(江上華亭俯釣磯)
소나기는 어지러이 붉은 꽃 따라 떨어지고(白雨亂隨紅雨落)
멀리 돛단배 앞 뒤로 이어져 돌아오네(前帆遙後帆歸)
위 시는 선비들이 영복정에서 즐기는 풍류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민서(李敏敍, 1633-1688)와 이건명(李健命, 1663-1722) 부자가 선유정사(仙遊亭舍)와 삼유정(三有亭)을 경영하였다.
이민서는 호를 서하(西河)라고 했다.서하는 사강 서호를 말한다.1670년 선유봉에 별서 선유정사(仙遊亭舍)를 마련한다.
이후 풍파가 심한 벼슬길에서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그가 담당한 과거시험에서 부정의 혐의가 있다고 해서
탄핵을 받았다.이에 사직의 글을 올리고 선유봉으로 물러났다.
강이 큰 들을 삼켜 사람 자취 없는데
압도와 잠두봉은 돛단배처럼 자그마하네.
병든 객이 홀로 지주 위에서 졸다가
긴 강 건널 배 없음을 탄식하노라.
江呑巨野絶人煙 鴨島蠶峯小若船
病客孤眠砥柱上 恨無舟楫濟長川
- 이민서, <선유봉으로 돌아가다(歸仙遊峯)> -
이민서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선유정사는 아들 이건명이 물려받았다.
1712년 당벌의 소용돌이 속에서 물러나 이곳에 삼유정(三有亭)을 지었다.
삼유정은 산과 물과 들, 이 세 가지를 차지하였다는 뜻이다.
"지주대(砥柱臺)의 남쪽에 어부의 집 수 십 채가 절벽을 깎고 그곳에 거처한다.
우리 선인(先人)의 옛 정자가 그 가운데 있는데 산의 중턱에 자리해 있다.
앞으로 작은 지류가 있어, 동쪽으로 흘러들어 물웅덩이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철진(鐵津)에서 만나며
또 서북쪽으로는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큰 들이 수십 리에 아득하고 관악산과 소래산 등이 줄지어 읍하는데
올라가 보면 눈과 마음을 유쾌하게 할 만하다. 나는 지난 가을, 뭇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로 곤경에 처해
수개월 간 옛 정자로 나와 머물렀다. 정자는 모두 6칸인데 남는 땅이 없었다.
이에 이웃 사람으로부터 정자의 동쪽 빈 터를 구입하고는 올 가을 사헌부 직책을 사양하고
다시 와서 새로이 5칸을 경영하였다. 아아! 나의 집을 지으려던 숙원과 강호에 머무르려던 늘그막의 계책이
지금에야 모두 갖추어졌도다! 정자가 완성된 뒤 이름 짓기를 삼유정(三有亭)이라 하였다."-이건명,<삼유정기>
"사람들이 소유한 정자는 산이나 물이나 들판 중에 하나를 차지하고 있어 그것으로 이름을 삼기에 족하다.
지금 나의 정자는 이 셋을 겸해 가지고 있다.게다가 이 정자는 선친이 세운 것이요,이 땅은 조부 문정공
이경여께서 고른 것이다.이제 나에게 전하여 삼대 동안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를 '삼유(三有)'라 해도 될 것이다."
이건명이 말하는 삼유(三有)이다.이건명은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김창협(金昌協) 집안과 절친하였고,
정선이 바로 이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
(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