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과 『삼국지』와 『변경』이 날개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화덕헌씨(37, 이문열 돕기운동 대표)는 다시 한 번 이문열씨의 책을 고물상 빈터에 집어 던졌다. 흩어진 7백33권의 저작들은 '필론의 돼지떼' 마냥 웅크리고 있었다. 과연 한 '영웅의 시대'가 가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표현을 뒤집자면 그것은 전대미문의 '문화적 거사'였다.
부악문원에서의 기묘한 헤프닝
11월 3일 오후 2시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늦가을 정취가 완연한 한적한 시골마을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문열씨가 집필과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부악문원'을 찾은 방문객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 주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방문객들의 성격은 첨예하게 둘로 갈렸다. 이문열 돕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쪽은 이른바 '홍위병을 떠올리게 하는 무리'들이었고 '안티DJ', '민주참여네티즌연대' 등의 이름을 내건 다른 한쪽은 말하자면 '백위병을 떠올리게 하는 무리'일 터였다.
반면 '홍위병의 지식인 테러와 언론탄압 행위 중단하라'는 문구의 현수막으로 치장한(이들은 현수막으로 온몸을 가리곤 했다) '민주참여네티즌연대' 등 10여 명의 참가자들은 몇 개의 피킷을 손에 들고 부악문원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문원측이 고용한 '경호원'들처럼 비칠 수도 있었다. 특히 이들 중 한 회원은 기자들을 향해 "나는 여기 사는 주민인데 산 사람 책을 장사 지낸다니 정말 홍위병 같다"며 언론플레이(?)를 펼치다 그만 "이러시면 우리한테 득 될 게 없다"며 말리는 동료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피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들의 '짝사랑'과는 달리 문원의 사숙생들에게 "그 사람들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이롭다"고 당부했다는 이문열씨의 곤혹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이장님'이 계셨다. 『조선일보』김광일 차장대우가 그토록 흠모했던 장암리 이장님. 밭일을 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는 이장님은 그러나 '문화동네를 지킨다' 는 김 차장의 추켜세움과는 달리 이 날의 '문화 참사'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계셨다. 다만 김 차장의 질문에 따라 자신의 '한자 이름'을 불러주고 예의 "장례행렬만은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실 뿐이었다.
선정성의 극치 보인 조·중·동
늦가을의 정취가 한껏 무르익은 문원 뜨락에서는 젊은 사숙들이 때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때론 근심스런 얼굴로 이 낯선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하늘에 '한국 문학의 미래를 절망케 하는 검은 만장 같은 징후'가 떠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문학이 정치와 언론에 의해 오염되고 일부 문인의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출세를 위한 발판"이 돼서야 되겠느냐는 이름 없는 독자들의 함성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혹시 모를 두 진영 간 '충돌의 완충지대'가 되어주었던 '영정 든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도 함께 하늘로 피어오르곤 했다.
그후 며칠간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메이저 신문들은 이 작은 행사를 놓고 사설까지 동원해 가며 '전대미문'의 공격을 퍼부어댔다. 급기야 『경향신문』이 이들 신문의 행사보도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그날 부악문원 앞에서 만난 한 사숙생조차 "이렇게 정중하게 끝마쳐 줘서 고맙다"고 말했던 책 반환행사가 어째서 이들 언론에게는 그토록 '문화적 히스테리'를 발산한 '홍위병 테러'와 '참사'로 비춰졌을까. 아마도 이들에게는 문학의 이름으로 쌓아온 누대의 '권력'에 대한 수용자들의 저항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예의 홍위병을 떠올리며.
그렇지 않아도 영남지역 양반문화에 대한 '애틋한' 천착으로 구설에 휘말리곤 했던 그의 입에서 타지역을 폄훼하는 발언이 나온 것은 실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기자가 화덕헌씨를 직접 만나 들은 전후사정은 이런 것이었다.
10월 17일 저녁, 집에 있던 화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짧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 이문열이오, 만납시다."
둘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 곳은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커피숍이었다. 이문열씨는 이미 전작이 있은 후였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는 문제의 "전라도 사람" 발언을 꺼냈다. 이미 알려진 대로 화씨가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산에만 살아온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이씨는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까지 물어보며 화씨의 '족보'를 따졌다는 것이다. 화씨가 버럭 화를 내자 이씨는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화덕헌씨가 추미애 의원을 겨냥해 지은 소설 등에 대해 "왜 사적인 감정을 소설을 통해 보복하느냐"고 묻자 이씨는 "(그의 소설이 통일문학전집에 수록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최재승 의원은 그 문서를 작성했던 보좌관을 해임함으로써 내게 간접적으로 사과의 뜻을 내비쳤지만 추 의원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는 대목도 있었다.
지역감정 '악령'에 사로잡힌 이문열
이문열씨를 직접 만나본 후, 화덕헌씨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노라"고 토로했다. 젊은 시절 이씨의 열렬한 독자였던 그였기에 실망과 허탈함은 더욱 컸을 것이다. 더욱이 책 반환행사를 대서특필하면서도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보수신문들의 행태는 실망을 넘어 자책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탄식한다.
"앞으로 『조선일보』같은 인간들이 우리나라를 천년만년 지배해 간다면 모르겠지만 상식이 조금씩 회복돼 가는 사회가 된다면 자신들이 쓴 글이 원자료가 돼서 역사의 사료로 남을 것 아닙니까.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있는 거예요."
11월 13일 저녁, 기자는 이문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1시간 30분 가까이 이어진 전화통화에서 그는 "최근 사안과 관련한 공식적인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겠다"면서도 몇 가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우선 그는 책 반환행사에 대해 1백 일 후에 대응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관련 "반대진영에서는 나에 대한 구체적 검증 없이 글 몇 편만 가지고 평가하려 든다"며 "1백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정리하는 시간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1백 일 후의 대응은 "「독일청년에게 고함」같은 것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지한 담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화덕헌씨를 만난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인상이 참 좋았다"면서도 '전라도 사람' 발언과 관련해선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 나눈 이야기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며 언급을 피했다. 통화 말미에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진영에 대해 "안티운동이란 스스로를 죽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인데 아마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른바 문학의 참여-순수 논쟁이 한창 불거졌을 때 순수문학 진영에서 되풀이했던 논리는 '문학을 정치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기가 바뀐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시대와의 불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철저하게 '비참여'적이었던 이문열씨가 되레 '정치적 색깔 공세'와 '정치 선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행여 이문열씨가 순간 잘못 디딘 발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레테의 강'을 건너지는 않기를 빈다. 기자 또한 '검은 만장 같은 한국 문학의 절망적 징후'가 더욱 깊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말이다.
(끝으로 이 글을 쓴 기자의 본적은 경북, 그것도 이문열씨의 고향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며 조상 대대로 그 지역을 떠나지 않은 토박이 가문임을 아울러 밝혀 둔다. 행여 누군가처럼 '출신 성분'으로 인해 사람이 재단되는 참담한 경험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월간'말'이라는 잡지에서 퍼왔어요^^ 아저씨 수준이 어떤지
이젠 이해를 하셨죠^^......컥(가래침 뱉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