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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泰岐山 1261m)
태기산(1261m)~봉복산(1021.5m)
신대리~봉복산~덕고산~태기분교터~태기산성~송덕사~신대리 20km
백두대간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뻗어내린 유장한 산줄기 가운데 가장 깊숙한
태기산(1,261m)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과 둔내면, 평창군 봉평면, 홍천군 서석면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횡성군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옛 이름은 덕고산이었는데, 삼한시대 말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이곳에 성을 쌓고 신라에 대항하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산 동쪽에는 '메밀꽃 필 무렵'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가산 이효석 선생의 생가와 물레방아 등이 있는 효석문화마을이 있고, 동남쪽에는 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휘닉스파크가 백야를 밝힌다. 또 청태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산줄기 아래는 청태산자연휴양림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산정 800m 부근은 옛 부족국가 시대에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가 신라군에게 쫓기어 이곳에 태기산성(1.8km)을 쌓고 군사를 길렀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와 관련된 허물어진 성벽과 집터 등이 수림지대 아래 흩어져 있다.
정상 아래 1000m 고원에는 1970년대 초만 해도 이 산에 150여 호, 근 천여 명이나 살던 마을 태기리가 있었다. 지금은 눈 덮인 태기분교터만 남아있다. 또한 어깨 한쪽에는 상흔처럼 해발 100여m 양구두미재 넘어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치고 있다. 신대리 초입에 있는 신라시대 창건한 봉복사와 삼층석탑도 눈길을 끈다.
봉복산, 덕고산, 태기산의 주 기점이 되는 신대리에 들어선다. 봉복산을 오르는 어둔내나 한남대쪽 계곡, 큰성골, 작은 성골 등에서 쏟아진 물이 신대리에서 하나가 되다.
한남교를 넘자 좌측 캠핑장에 이웃한 청일초교 신대분교가 보인다. 오지임에도 폐교되지 않은 것이 기적이다. 전교생은 10여 명, 대부분이 성골 초입에 자리잡은 천태종 송덕사에서 다니는 아이들이다. 송덕사는 해방되던 해에 당시 밭이었던 그곳에서 일하던 농부에 의해 부처상이 발견되고, 6.25 때 방공호를 파다가 관음불상이 발견되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창건됐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 어둔내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로 내려선다. 멋들어진 커다란 펜션을 지나 어둔내로 들어선다. 계곡 우측에 난 길은 계곡을 여러 번에 걸쳐 넘나든다. 완만하고 길게 이어지던 계곡은 크게 두어 번 갈래진 다음 봉복산 서쪽 795m봉 우측 안부를 향해 올라선다.
안부에는 누런 황소가 그려진 안내입간판이 있다. '봉복산 총 산행거리 12.3km 중 현재위치 3.75km' 지점이다. 고도 764m로 봉복산(1021.5m)까지는 1.26km가 남았다.
주릉에 올라탔어도 조망이 전혀 트이지 않는다. 시누대(산죽)는 더욱 무성하다.
신대리란 명칭도 이곳에 시누대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1970년대 이곳 신대리는 산죽을 재료로 해서 복조리를 만드는 것이 농한기의 커다란 부업이 된 적도 있었다. 복조리가 한참 나갈 때는 겨울 한철 심심풀이로 만든 복조리로 소를 산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태기,봉복산 어느 곳을 가든 시누대가 짐승의 털처럼 온 산에 무성하게 깔려 있다.
누런 황소 한마리가 봉우리 위로 고개를 내민다. 봉복산이다. 산세가 봉황을 닮아 그리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횡성의 명물인 한우의 고장답게 입간판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한우가 그려져 있다. 주변의 나무들이 베어져 있지만 조망은 한 점 트이지 않는다.
산길은 더욱 거칠어진다. 도처가 시누대인 능선을 올라서니 평평하게 봉우리를 이룬 1031봉이다. 이곳에서 산줄기는 크게 갈래친다. 좌측은 운무산(980.3m), 우측(동쪽)이 덕고산이다.
1095봉에 올라서니 한남대 방향으로 떨어지는 하산코스가 나온다. 신대리까지 5km나 되는 먼 거리다. 주릉을 따른다. 표지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암석도 드문드문 날을 세웠다. 사방이 절벽이다. ..."
눈앞의 가파른 능선을 올라선다. 덕고산(1125m) 정상이다. 평평한 터에 주변은 굵직한 신갈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산을 내려서는 길 시누대가 더욱 빽빽이 찼다.
능선은 여전히 끝없이 이어진다. 오르고 내려서고 또 올라야 한다. 산줄기도 기묘하다. 동쪽을 향해 반듯하게 이어지다 꼬챙이 끝처럼 휘기도 하고, 좌우로 거침없이 휘어가기도 한다.
1095봉을 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올망종망 늘어선 산등성이 사이로 태기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발밑에 내려다 보여야 할 임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1135봉을 거쳐 남쪽으로 방향을 튼 태기산 정상으로 이어진 산줄기만 장대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사면을 가르는 산죽이 점령한 임도를 따른다.
낙수대로 떨어지는 갈림길을 지난다. 태기왕이 낚시질을 했다는 낙수대 폭포가 아닌가.
낙수대 폭포 옆에는 봉복사의 산내 암자였던 낙수암 절터가 있다고 한다.
비로소 임도의 잡목과 산죽숲이 지나고 태기산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송신소 도로에 닿는다. 하지만 산정은 국가시설물이 있어 출입통제다. 아쉽지만 양두구미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미끄럼을 타고 내려선다. 모처럼 남녘의 산들이 활짝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맘껏 조망해보는 산들이다.
임도삼거리에는 '태기산 정상' 이라는 웃지 못할 팻말이 있다. 머리 위에는 태기산을 점령한 국가시설물이 점령군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패잔병처럼 태기분교터로 내려선다.
태기산에는 원래 태기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고랭지채소와 당귀 재배, 산나물 채집이 주요수입원이었던 이 마을은 산 아래 신대리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여기서 나는 배추와 무는 더없이 실해서 장마 때면 금값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의 화전정리사업으로 태기리는 1976년에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성골이나 동문밖 등 태기산 곳곳에는 마을터와 집터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태기분교터는 이 산을 삶의 터전으로 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갖추고 있다.
태기산성터에 다다른다. 성은 무너지고 잡목만 무성하다. 패망의 운명을 늦춰보고자 했던 태기왕의 비원이 무너져 내린 바윗돌로 쌓여 있다. 해발 750m에 쌓은 이 성은 폭이 1m 가량으로 둘레가 1.8km쯤 된다. 동문과 서문, 남문 등 세 개의 문과 우물터 등의 흔적이 현재도 남아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주검들이 성터 너머 이 삭막한 골짜기에 뒹굴었을까. 태기왕의 비애가 애절하게 다가온다.
이 지역 일대에는 태기왕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태기산성이 함락되고 급히 피난을 떠났던 태기왕이 당황하여 옥산대(지금의 안흥동)에서 옥새를 잃어버리고,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도 모두 전멸하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 백의(白衣) 장군이 옥체를 업고 물에 빠졌다 하여 백옥포라 부름)에 투신하여 최후를 마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쫓겨서 태기산으로 가던 도중 태기왕이 갑옷을 씻었다는 개울은 갑천, 아라왕비를 위해 매화를 심었던 들메지, 낙수대폭포 등의 지명이 산자락을 적시고 있다.
산성터를 벗어난 능선은 점차 가팔라진다. 아니 두어 곳은 칼날능선을 지나야 한다. 절벽이 아니고서 순전히 흙과 나무로 엮어진 사면이 이렇게 가파를 수 있을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이다. 말뚝과 밧줄이 능선 양 옆에 설치돼 구름다리나 다름없다. 눈이라도 쌓여 있으면 살 꽤나 떨렸을 길이다.
가파른 사면을 내려서자 맑고 깨끗한 소와 담이 계곡을 따라 펼쳐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비경이다. 한여름이 그리워질 정도다. 때 아닌 곳에서 아름다운 여인네를 만난 듯한 그런 황홀감이 아닌가. 가슴 설레게 했던 탐하고 싶을 여인네 치마폭에는 이미 펜션촌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신대리까지는 아직도 1시간, 전설이 되어 흩어진 왕의 골까지를 내려서야 한다.
*산행길잡이
신대리-(10분)-샛골 갈림길-(1시간20분)-'정상 3.9km' 팻말-(30분)-795봉 안부-(1시간10분)-봉복산-(1시간)-1031봉-(1시간)-1095봉-(50분)-덕고산-(2시간)-1059봉-(20분)-구임도-(15분)-낙수대 갈림길-(30분)-삼거리-(10분)-태기분교터 갈림길-(45분)-태기산성-(1시간)-산막-(40분)-신대리
태기산은 봉복산, 덕고산과 더불어 아직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대리를 중심으로 봉복산에서 태기산, 태기산성, 송덕사를 거쳐 원점회귀 산행시 도상거리가 20여km다. 건각이라면 소배낭 메고 하루치기라도 가능할 듯싶다.
산행기점은 신대리 마을이다. 한남교를 지나 포장도로를 따라 500여m 가면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정상까지 '4.62km' 팻말이 있다. 신대리 펜션 이정표 방향(우측)으로 내려서면 비포장도로다. 펜션을 지나 들어서면 계곡이 나온다. 길은 계곡 우측으로 나 있지만 서너 번에 걸쳐 계곡을 넘나든다. 노란색 입간판이 갈림길마다 세워져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종주산행시 산행시간과 체력에 맞춰 봉복산, 1095봉, 덕고산, 낙수대 갈림길, 태기분교터 갈림길, 양두구미재 등 다양한 코스를 선택, 즐길 수 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라면 양두구미재에서 태기분교터까지 도로를 따라 가볍게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주위 조망이 뛰어나고 눈꽃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태기산 정상은 국가시설물이 있어 입산이 통제되기 때문에 오를 수 없다.
태기산 & 흥정계곡
태기산은 강원도 특유의 빼곡한 산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계곡 또한 깊어 한여름에도 항상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특히 횡성군 청일면 일대의 큰성골과 작은성골, 인근 봉복산에서 발원한 봉복산계곡과 봉복사골 등은 수량이 풍부하고 오염이 안돼 피서지로 제격이다.
태기산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일반 등산객들은 잘 찾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중요시설물 때문에 정상을 오를 수 없어 산행지로서 인기가 덜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자연은 오염도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게 됐다.
태기산 산행은 양두구미재 정상에서 시작해 청일면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는게 일반적이다. 횡성군과 평창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양두구미재는 대중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해 접근한다.
양두구미재에 올라서면 커다란 통신탑이 보이고, 그 건너편 산자락으로 급경사의 시멘트 콘크리트 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는 태기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연결되는데, 태기산 산행을 하려면 이 길을 따른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는 곧 비포장으로 바뀌지만 지프차는 무난히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노면상태가 유지된다. 폭은 상당히 넓어 차량의 교행도 가능할 정도.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가끔씩 시야가 트이며 강원도 산골 특유의 산록 풍경이 펼쳐진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높은 산릉에서 첩첩산중을 내려다보며 걷는 맛은 참으로 짜릿하다.
양두구미재에서 출발해 30여분 걷다보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오른쪽 사면으로 산 정상에 이르는 급경사 계단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곳은 군부대 시설로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곳곳에 경고판이 붙어 있다.
계속해 넓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700m쯤 내려간 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될 즈음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 횡성군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서 있긴 하지만, 뚜렷한 삼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길 왼쪽으로 산악회에서 붙여놓은 표지리본을 잘 살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거리에서 태기산성을 거쳐 신대리 하산지점까지 3시간 정도 산행이 이어진다. 길은 비교적 뚜렷하지만,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잡목이 우거진 곳이 많다. 짐승들의 이동로와 다름없을 정도로 좁고 낮은 구간도 있다.
하산길은 햇빛 한 점 보기 어려운 완벽한 숲길이다. 울창한 숲 아래로 산죽이 지천에 깔려 있다. 하산도중 특별한 갈림길이 전혀 없어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다. 삼거리에서 1시간 반이면 태기산 성터에 이르게 된다.
성터를 지나 내려서면 절벽을 끼고 이어진 등산로가 나타난다. 하지만 밧줄을 매어놓아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절벽지대를 지나 조금 더 내려서면 계곡이 시작되고, 이곳에서 불과 10분이면 실질적인 산행은 끝이 난다. 여기서 신대리 버스종점까지 2km 거리.
*흥정계곡
흥정계곡은 평창강 최상류의 물줄기로 수질이 뛰어나고 숲이 짙어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이 골짜기에는 무려 60개 이상의 펜션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펜션단지가 조성되게 된 것은 이 계곡 가운데 자리한 허브나라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창의 유명 관광지로 자리잡은 허브나라는 10여년 전쯤 국내에는 생소했던 '허브' 라는 테마로 꾸며진 농원이다. 현재 허브나라는 크게 허브가든, 숙박시설, 식당으로 구성돼 있다.
흥정계곡에서 야영은 금지되고 있다. 피서철이면 야영장이 두 곳 정도 문을 열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물놀이 정도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다만 계곡의 경치 좋은 곳마다 대개 펜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투숙객이 아니면 차 세울 곳도 마땅치 않다. 피서철에는 이 계곡에서 지내고 싶다면 펜션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교통
서울-횡성=상봉터미널에서 하루 8회(06:30~17:20) 운행하는 횡성행 직행버스 이용. 1시간50분 소요. 요금 7,800원.
횡성-신대리=1일 8회(1시간 소요) 운행하는 군내버스 이용.
양두구미재는 대중교통편이 운행하지 않는다. 인근의 봉평에서 택시를 이용해 이동한다. 전화 033-335-6254 봉평 개인택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영동고속도로 면온나들목으로 빠져나와 피닉스파크 스키장으로 진입한다. 스키장 앞을 지나 2km 가량 진행하면 봉평에서 횡성으로 연결된 6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좌회전해 5.8km 가면 양두구미재다.
원주를 기점으로 하는 것이 편리하다. 원주~둔내행은 원주시내버스터미널(0371-761-3135)에서 06:00~19:20까지 1시간 간격 운행. 요금 2,800원. 1시간 소요. 원주~신대리행은 07:20~18:12까지 3회 운행. 요금 1,300원. 1시간30분 소요. 신대리행 버스를 놓치면 횡성에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숙박
흥정계곡 내의 펜션이나 민박. 허브나라 335-2902, 숨은그림찾기 336-5744, 그라찌아 335-8887, 어울림 336-5424, 에델바이스 336-3598, 좋은사람들 336-5516, 통나무마을 336-8921, 평창갤러리
신대리에 태기골산장(033-345-5331, 송어, 토종닭), 새터민박(345-5413), 야영장펜션(345-5480, 민박), 덕주네민박(345-5641, 토종닭), 우리마을쉼터(345-5499, 토종닭), 종점슈퍼(345-5673, 민박), 맑은물펜션(345-2320), 태기관광농원(343-6878, 산천어, 송어), 성골그린랜드펜션(343-5166). 또한 태기산 동남쪽에 자리한 보광휘닉스파크나 이효석문학관 주변에서 숙식하는 것이 좋다.
봉복사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에 있는 봉복사(전통사찰 14호)는 덕고산 자락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월정사 말사로 횡성군에 있는 현존 사찰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유서가 깊은 사찰이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6년)에 자장율사가 덕고산 신대리에 창건하고, 오층석탑을 조성했다. 현 건물로는 인법당과 삼성각, 국사당, 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자장이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사찰 입구에는 부도 7기와 비석 1기가 있다.
횡성 신대리 삼층석탑
신대리에서 봉복사로 들어서는 길 우측 인삼밭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았으나 고려 중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축대가 있고 주변에는 많은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서 탑 주변이 봉복사 터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60호.
이효석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태기산 동쪽 자락 아래 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학관과 공원이 있다. 이효석문학관 주변으로는 메밀 꽃길, 물레방앗간, 이효석 생가 등이 있어 문학산책을 하기에 좋다. 월요일과 1월1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열려있다.
태기산성
진한시대 태기왕의 마지막 은거지
5월 태기산 등산로엔 산나물이 지천일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과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태기산의 태기산성은 삼한시대 말기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서기 937년경의 일로 삼한 중에서 가장 융성했고 부강했던 진한은 신생국가인 신라와 일전을 겨루어 통합왕국을 세우고 싶은 야망에 불타고 있었고, 신라는 신라대로 진한이 목의 가시같은 존재로 양국 다 언젠가는 전쟁을 치뤄야 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급기야 진한의 왕 태기는 고국을 버리고 약간의 근위병을 데리고 피난을 거듭해 이곳 덕고산에 와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되었지만 너무나 초라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갈곳 마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산에서 4년이란 세월을 지내며 분노와 한을 안고 지내게 되었고 실지 회복을 노리며 부하들로 하여금 성을 쌓게 했다. 신라군과 일전을 할 굳은 결의로 화전을 개간하고 몇 백명 되지 않는 부하를 강력한 군대로 양성하기 위해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진한 왕의 생활은 얼마 되지 않아 신라에 탐지되었다.
신라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박혁거세의 지휘로 전열을 채 가다듬지 못한 진한 원정길에 나섰다. 진한군은 11정록에 성벽을 구축하고 제법 정예군다운 훈련을 했으나 신라의 대군 앞에 어쩔 수 없이 참패당했다.
한때 부족국가로서 영화를 누렸던 진한은 멸망하고 태기왕도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태기산의 넋이 되고 말아야 했다. 이후부터 태기왕의 이름을 따서 태기산이라부르고 그 성터를 태기산성이라 불러왔으며 수십 년 전 까지만 해도 이 성터는 주민의 기우제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