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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말
스스로에게 그럴싸한 실존 영웅의 이미지를 포장하고,
극히 지당한 설법을 입에서 쉴새없이 쏟아내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새치의 놀림과는 별도로,
나는 스스로의 못된 성격을 어떻게 고쳐낼 수 있을까 늘상 고민하곤 하곤 한다.
과속하는 트럭으로 바람을 몰아붙이며 내 자유로운 진군에 위해를 가하는 이들을 씨부리는
것을 두말할 것도 없고, 되어야할 일이 안되었다고 생각할 때도 이의 실현을 방해한 인간들
에게 (혼자만 들릴 소리로) 입에 담아 잘근잘근 씹곤 한다.
이는 과거로부터의 ‘불의한’? 환경이 만들어낸 나름의 모난 성깔이 만든 ‘부작용’이다.
잘 못된 사회현실을 냉철히 분석하고 비판하고 분노하며 개선을 위해서 힘쓰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정의감’이 너무 습관이 되다 보니, 사사건건의 문제에 대해서 늘상 비판하고 심판하
려는 행태를 갖게 된 듯하다.
과거로부터 ‘부정’ ‘부당’ ‘불의’한 상황을 접할 때는 상대가 백발이 성성한 이라도
‘우선은 삿대질부터 시작하고 달려들자’는 활동 원칙?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전통과 관습을 배반하는? 못된 원칙이 습관으로 굳어지다 보니 ‘과격함’은 나의 일상을 지배했다.
제대로 단련되고 다져지지 못한 나는 오늘 하루도 수 없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뒷 통수를 후려 댔다. 이 못된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참으로 고민이다.
그나마 이 유랑의 길에서 좀 다듬어지고는 있기는 하다만.
아무런 비판과 분노도 없이 시종일관 마음의 평안만 갖고 살아가는 것을 최선의 길로 여기는
말 그대로 ‘호인의 삶’ 과
그 정 반대로 부정-불의한 ‘X 같은 세상’(각주-1)에 대해 끝없는 '비판, 분노하는 삶'...
과연 나는 그 중간의 ‘어느 선상’에서 나에게 주워진 실존적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가.
6월 30일 토요일
함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그간 묵었던 민중연대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 나온다.
오랜만에 몇 일간 편히 묵었던 장소...
장수로 향하는 길에는 다시 '끼니'와 '잠자리' '배설'과 관련한 수 많은 '불편'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걸'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빌어먹기
길바닥에서 생활하다보니 한 끼 먹고, 하루 잘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는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큰 축복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유랑의 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리라.
그간 ‘당연시 여겼던 것’의 당연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 끼라도 더 얻어먹고 비를 피할 장소를 얻기 위해서 나를 끝없이 낮추고 비워야 하는
일상들...
이런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았으면 나는 끝없는 교만과 허울 속에서
한 평생을 내 자신의 일상에만 갇혀 살아야 했으리라.
예상되는 행동의 효과와 작용과 결과들만을 쫓으면서, 기대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안정된 일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야 했으리라.
자신의 생활과 관계없는 ‘상황’ ‘사람’과는 철저히 ‘격리’되어, ‘일상’을 벗어난 세계에
얼마나 풍요로운 역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모른 체로 살아야 했으리라.
참으로 살갑고 다정다감한 이들이 내 편의를 돌봐 줌으로 인한 ‘풍요’와 함께,
나를 박대하고 깔보는 이들의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인간작용의 결과인 것을 알아가는 것
역시 이 유랑의 길에서 얻는 ‘풍요’의 일면이다.
늘상 ‘좋은 것’ ‘편한 것’을 쫓는 것만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 ‘훈련된
좁고 날카로운 소견’은,
무한의 가능성과 상황이 복잡하게 널려진 길바닥에 내던져져서 나뒹굴며,
조금씩이나마 ‘인간존재의 의미’를 바로 읽어내고 ‘자연의 원리’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모양새로 둥글게 둥글게 다듬어지고 있는 듯 하다.
이 유랑의 길 끝에서 ‘하늘의 뜻’을 담아낼 마음을 얻으리라고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내 이렇게 자유하고자 '걷는' 노력 자체가, 그 격리되고 단절된 인간-생명과 소통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기에
나는 이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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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시가지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 주차 된 승용차 뒤편에 지도를 펴 놓고
방향을 가늠한다.
다음 행선지는 전라북도 ‘장수군’.
세달 동안 경상남도 지역 누비고 다니는 중에 갑자기 전라도 지역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아이들 방학시작 할 때도 되었겠다. 돈도 떨어지고 있겠다.
이제 고향 가서 활동비를 벌어야한다.
그래야 여름방학 끝나는 시점에 맞춰서 짐 챙겨서 다시 움직일 수 있으리라...
승용차 뒤편에 지도를 펴고 장수로 향하는 최단거리를 뽑고 있는데,
아저씨 한분이 관심 있게 다가 오셔서 ‘어디가려고 하냐?’고 물으시더니,
세세한 가르침을 주신다.
산림공무원 3년 하셨단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명과 방향을 세세히 설명해 주신다.
지도상에 표시된 국도만 따라 가려면 길이 너무 돌아가게 되어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마침 나타나주셔서 ‘정답’을 던져주고 가신다.
중간 중간에 이런 분들 서너분의 도움을 더 받아야 했다.
[ 1000 상림지 외곽 / 위천을 끼고 가는 길 ]
[ 1010 참 특이한 기둥 / 뚝배기를 붙여 놔서 그 위에 뭔가를 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
한 참 걷는 데 길가에 아주머니 셋이서 뭔가를 다듬고 계신 모습이 눈에 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쳐 가랴~
뭔가는 모르지만 한주먹 반찬으로 얻을까 해서 친한 척 말을 걸면서 ‘그게 뭐예요?’라고
묻는다.
‘토란’이란다.
양념꺼리도 있으면 모르겠으나, 맨밥에 ‘톡~’ 쏘는 맛을 즐길 일이 없다.
그냥 인사하고 길을 재촉한다.
아주머니들은 ‘그것을 어떻게 지고 다니냐’며 등에 맨 짐의 무게를 걱정해 주신다.
[ 1020 토란대 다듬는 아주머니 들 ]
교통법에 강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은 국도상에서 좌측통행을 하도록 권고
받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매고 다니는 짐의 ‘폭’이나 ‘중량’을 고려해서 스스로를 ‘차’
로 분류하고 있고(ㅠㅜ) 짊어진 짐에 붙인 ‘플랭’을 차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
록 우측통행을 한다.
[ 1030 매고 다니는 차량 뒷모습 / 지나는 차량은 플랭의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이날은 30도 넘게 기온이 올라갔고,
그래서 그런지 복사열이 유난히 강한 것이다.
국도 우측 한편에 인도를 넓혀 놓은 씨멘트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복사열이
얼나마 강렬하던지 눈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 1040 국도상 우측편 씨멘트 바닥 ]
그래서 씨멘트 바닥이 안 깔린 좌측으로 (오랜만에) 걸었다.
그러고 보면 사막 같은데 떨어서 몇 날 몇 일을 헤매고 다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참 용하
기도 하다. 이렇게 지도에, 나침반에, 물통에, 반듯이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기껏
30도 갓 넘은 날씨에도 이리 겔겔 거리는데,
40여도가 넘는 기온에 천지 사방이 불같이 달궈진 모레뿐인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서들
돌아 올 수 있는 것인지...
땀을 흠뻑 흘리고 겔겔거리는 중에 허름한 오아시스?가 눈에 들어온다.
[ 1050 시원한 바람과 그늘이 있는 공간 ]
진땀 한번 흘리고 그늘에 누우면 필름이 ‘딱’하고 끊기면서 한 숨 잘 자고 일어나곤 한다.
함양에서 장수 가는 길에는 막 여물기 시작하는 과실들의 모습을 유난히 많이 대하게 되었다.
[ 1060 배 열리는 모습 ]
[ 1070 복숭아(추정) 열리는 모습 ]
[ 1080 사과 열리는 모습 ]
[ 1090 포도 줄기 올라오는 모습 ]
[ 1100 청포도 익어가는 모습 -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
문득 작년 추석 당일 날부터 시작된 진도~완도 까지의 장정이 떠오른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몸 상태도 안 좋고 해서, 길어야 이틀이면 갈 길을 4박 5일을 절룩이며
걸었는데, 길 가의 수 많은 유실수들이 내 배를 풍요롭게 했었다.
이곳 함양에서 장수 가는 길도 서너 달만 늦게 들어섰으면 풍만한 자연의 결실들을 마음껏
맛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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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편 주유소가 있어서 빈 물통을 담으려고 주인아저씨에게 말씀 드리고 물을 담고
있는데, 안에 들어가시더니 냉장고에서 ‘깡깡’얼려진 얼음병을 하나 가져오신다.
목 뒤에 얹고 걸으니 정신이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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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을 낀 아담한 학교. 토요일 오전의 설레임 가득한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전해진다.
[ 1110 아담한 시골학교 ]
논이어야 할 곳에 수련 밭이 보여서 마침 주변에 계신 주인아저씨에게 물으니,
소득사업이시란다. 수련 잎 하나에 100원씩 쳐주는데, 농사짓는 것 보다 타산이 맞으시단다.
진드기들이 달라붙어서 좀 번거롭기는 하단다.
[ 1120 수련밭 ]
길 가는 중에 트럭이 하나 서더니 아주머니가 하나가 잘 아는 사람인 것 처럼 말을 걸어오신다.
알고 보니 함양 민중연대에서 통화하셨던 분이셨다.
어떻게 용케 알아보신 것이었다.
백전면에 있는 ‘녹색대학’으로 가족들과 수업하기 위해서 가시는데, 태워 주신단다.
말로만 듣던 녹색대학을 구경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처음 만나뵈었던 ‘산림공무원하셨던 분’의 가르침만 너무 맹신하다 보니 좋은 기회를 지나쳤다ㅠㅜ
녹색대학 뒤편으로는 장수로 갈 길이 있었을 터인데...
[ => 녹색대학 홈페이지 http://www.green.ac.kr/ ]
하여간 터벅 터벅 걷다가 녹색대학으로 향하는 백전면과 번암면으로 향하는
갈래 길에서 짐을 풀고 밥을 했다.
[ 밥을 한다. ]
[ 밥이 다 되면 뚜껑에 밥을 퍼 넣고 라면을 끓인다. ]
[ 라면이 끓면 밥을 넣고 함께 푹 삶는다 ? ]
[ 멀국 한 방울도 안남기고 싹싹 긁어 먹는다. ]
[ 다리 밑에서 ㅠㅡ ... 위에 보이는 다리는 88 올림픽 고속도로 ]
밥 먹고 한 시간 반경을 낮잠 자다가 짐을 챙겨서 다시 움직인다.
[ 1300 눈앞에 보이는 오르막길 저 모퉁이를 돌면 평지가 나올까? 계속 오르막이 나올까? ]
눈앞에 보이는 오르막 길이 보일 때 마다 다리가 후둘거리곤 한다.
한 시간을 걸어 올라야할지 두 시간을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야 할지는
산신령 맘이기 때문이다.
오르막 중간에서 가쁜 숨을 멎게 할 장면이 펼쳐진다.
[ 1305 1310 황량함의 풍경 ]
한 시간여 가량을 걸으니 오르막 길이 끝난다.
그 후 30여분 가량을 더 걸어 도경계 선을 접한다.
[ 1320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 저 딸딸이를 몰고 가는 아저씨는 경상도분일까? 전라도분일까? ]
세 달간 경상도남도 남서부지역을 훑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뇌리에 스친다.
가야에서 만난 (그 후 연락이 두절된) 동준이라는 놈을 생각하고 있던 대목에서, 양파
밭 인근에 트럭을 댄 아저씨 한분이 오시더니 대뜸 말을 거신다.
‘어디까지 가시냐?’고...
이래저래 말씀 드리니, 아침에 ‘함양에서 오면서 봤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내가 전라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을 확인해 주시듯이 힘 있고 간결하게 한 말씀
하시고는 사라지신다.
‘애쓰쇼~’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와서 찾아 들어가 20여분 가량 한숨 붙인다.
[ 1325 산뜻한 정자위에서 한숨 하고~ ]
[ 1330 정자는 거대한 포플러 나무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
5시 30분 쯤이 되자 이정표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 1340 장수가는 이정표 ]
꺼억~ 장수까지 29Km 남았다니...
번암이라는 곳이 12Km 래니 오늘은 그곳에서 묵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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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으로 가는 중간 마을 2Km 정도의 거리를 관통하면서는 동화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어 힘겨운 것을 잊었다.
그 마을은 바로 [ 흥부마을 ] 이었다.
[ 1350 1360 흥부마을 선돌 ]
꺼억~ 흥부가 ‘실존’인물이었다니. ‘박춘보’라...
처음에는 어처구니 없었지만, 한발 두발 걸으면서 길가에 서 있는 표지를 찬찬히 읽어
보니, 흥부와 놀부라는 우화가 실존인물 ‘박춘보’와 그의 형을 모델로 삼았음직도 했다.
[ 1370 - 1400 흥부마을 표지들 - 실존인물 박춘보와 우화 속의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해설하는 표지들 ]
그렇담. 궁금해지는 대목.
‘놀부마을’은 어딜까?
가는 길에 인심 박한 마을이려나?
[ 1410 중간에 보게 된 특이한 비석 - 밑둥이 잘려나가서 잘려나간 부분을 띄웠나? ]
[ 1420 아직 채 열매 열지 않은 산딸기... ]
진주 -> 산청 오는 길에는 유난히 많이 열려있는 산딸기를 접했다.
그 몇 일 후 산청 -> 함양 오는 길에는 산딸기가 대부분 쇄었길래, 이제 산딸기는 철이
지난 것으로 알았더니, 이렇게 함양에서 장수로 향하는 길에 산딸기가 채 열매도 맺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다. 위도상으로 /고도상으로 / 지형적으로 열매 여는 시기가 천차 만별이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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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로 넘어온 후에 한동안 평지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경사로가 다시 시작되었다.
신께서는 나의 이러한 노고를 치하하사 동전 두개를 바닥에 던져주시고...
[ 1430 산청에서 함양 오는 길보다 20배 많은 수입 ]
쉴만한 자리를 내주셨다.
[ 1440 언덕 꼭데기에서 잠시 휴식 중 ]
잠시 누워서 쉬다가 산 모퉁이를 도니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거대한 산 봉우리 몇 개를 헤치고 나니, 저 아래 마을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언제 저기까지 걸어간디야. ㅠㅜ
[ 1450 까마득한 아래에 보이는 마을 - 번암 ]
재 꼭데기에서 내리막 길로 미끌어지고 있는 중에 난데 없는 개떼를 만나게 된다.
근처 사는 아주머니가 산책 나오자 개들이 따라 나온 것인데,
이리 산 정상부근에 민가가 있는 것도 놀랍지만,
개들이 줄줄이 따르는 풍경 또한 독특하다.
[ 1460 아주머니 주변을 개떼가 따르는 모습 ]
조금 더 내려가니 봉수대가 눈에 띈다.
그렇지 저리 아래가 탁 트이는 곳에는 봉수대가 있을만도 하지.
[ 1470 봉화산 봉수대 ]
그로부터 조금 더 걸으니 봉화산 철쭉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봄 철에는 철쭉으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란다.
봉화산 정상을 향해서 계단이 끝 간 곳 없이 놓여져 있다.
[ 1480 봉화산 철쭉 군락지 ]
[ 1485 군락지 올라가는 입구 ]
그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 옆에는 약수가 졸졸 흐르고 있다.
꼭데기까지 올라갈 때 흘릴 수분을 먼저 보충하고 가라는 듯이.
[ 1490 봉화산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의 약수터 ]
그 바로 옆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돌탑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누군가 처음 돌무더기를 뒤적이다가 균형을 잡아 이를 하나씩 포개 쌓아 올린 이후로...
지나치는 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성격과 기질과 바램을 그 탑 안에 불어 넣은 흔적들이 그리
널려 있었다.
[ 1500 중간에 우뚝 솟은 돌탑 - 세워진 큰 돌 그늘 아래로 작은 돌이 보호를 받는 형세
-> 아마 부자간 정 염원하며 세웠으리라. ]
[ 1510 굳건하고 올 곧은 돌들이 꼿꼿이 솟은 형태 -> ‘정진’과 ‘고독’의 다소 대소적인
이미지가 중첩된 돌탑. 수 많은 배신과 이에 따른 실패의 실패를 아랑곳 않고 ‘외롭지만
힘차게 가자’ 는... 이번으로 벤처기업 세 번째로 도전하는 박사장의 결의를 엿 볼 수 있다. ]
[ 1520 단단히 받쳐진 기반 위에 자잘한 돌들이 올라선 형태 -> 화목한 가정위의
번성하는 자손을 드러낸다. 올해로 8순을 맞은 김노인이 자손만대의 번성을 위하며 쌓았다 ]
[ 1530 전형적인 피라미드형 구조의 돌탑 -> 만년 계장인 박계장이 승진을 염원하며 세운 탑 ]
[ 1540 중앙의 몸체를 굳건히 뻗은 양 다리가 버티고 있다. -> 양 다리로 대지를 밟고
서는 형세는 공고함과 안정감을 주고 언 듯 ‘튼튼한 조직’ ‘평화로운 삶’을 연상시키지만,
기실 이 작품은 노총각이 마음에 담고 있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둘이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쌓아올린 작품이다. ]
돌탑 구경을 하다가 다시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천지는 차츰 어둑 어둑해 진다.
[ 1550 내리막길 ]
전라북도 땅에 당도한지 5시간도 채 안되었지만, 새삼 가난한 동네의 현실이 피부로 와
닿는다. 오는 내내 가게도 하나 없었고, 밭에 세워진 허수아비는 앙상한 뼈에 런닝 하나만
걸치고 있다.
[ 1560 앙상한 허수아비 ]
[ 1570 ( 참고로) 경상도 함양의 패션어블한 허수아비 ]
한참을 더 걸으니 마을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번암읍’이다.
[ 1590 번암읍 야경 ]
8시 반경에 도착한 번암...
주변 식당을 찾는다.
하루 죙일 걸었으니, 아마 1.5kg은 빠졌으리라.
영양을 보충해 줘야 한다.
삼거리 음식점에 들어간다.
반찬이 나온 것이 참으로 정갈하고 맛나다.
역시 ‘전라도음식’의 실감이 난다.
가격도 4천원 밖에 하지 않는데,
아주머니는 ‘알아서’ 배고풀 것을 염두에 두고 공기 한 개를 더 가져다 주신다.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전라도 지역에 ‘왜?’ 음식 맛이 좋은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
해 본다. 지역 형편이 안 좋으면 식당 운영하는 형편도 안 좋을 텐데, 왜? 반찬의 양이나 질,
맛이 ‘잘 사는 지역’의 그것 보다 나을까?
없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알아먹을 것에서라도 정성을 보이는 이유일까?
아니면 굶주린 이들이 거듭된 허기짐의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음식 맛의 본질을 접하고
이를 조리해 낼 수 있었던 기회 때문인 것인가?
아~ 몰라 몰라~
내 앞에 차려진 밥상에나 충실하자.
내 손님으로서의 의무는 열심히 먹어주는 것이다.
[ 1600 싹싹 비운 반찬그릇 ]
저녁 야영
밥을 먹고 나서 근처 야영할 곳을 물색한다.
도로 옆으로 공업사가 몇 개 세워져 있다.
인기척도 없기에 하루치고 잔다고 뭐라 할 사람 있는가?
텐트를 치고 들어가 눕는다.
아침 열시부터 밤 여덟시 반까지, 쉬는 시간 빼고 족히 8시간을 걸었을 텐데,
이런 날은 특히 푹~ 쉬어줘야 한다.
그런데 뭔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두두...’
난 내가 방금 전에 들은 소리가 잘 못된 소리이기를 바란다.
아니 그보다는 텐트 바닥에 누우면서 너무 복에 겹다 보니, 과거 텐트를 치고 난 후 비가
와서 철수했어야 했던 일련의 끔찍한 기억의 시초인 ‘빗 떨어지는 소리’가 뇌리에 잠깐
스친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환청’인 사실을 확인하고, 얼굴에 미소를
한번 지어보이고는 그냥 그대로 눈을 붙이고 잠이 들면 된다.
‘우두두...’
아침까지 일기 예보를 통해 확인하기에는 내일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좀 버텨보자.
‘우두두두두...’
비가 멈추지 않는다. ㅠㅜ
일기예보만 믿고 지붕 없는 곳에 손쉽게 텐트를 친 댓가를 치룬다.
그렇더라도 조금 더 그 자리에서 버텨보려고 했는데,
가족끼리 외식을 마치고 온 그곳 공업사 주인이 ‘그곳에 치면 안된다’고 한다.
버텨 보고 싶어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야밤에 그것도 비 떨어지는데, 주변 지붕이 있을만한 건물에 대한 정보도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바로 옆의 건물을 보니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할 공간이 눈에 띈다.
일차로 짐을 빼서 옮기고 난 후에 텐트체로 들어서 처마 밑으로 옮긴다.
[ 1610 모 건물 처마 밑으로 텐트를 옮겼으나, 딱 그 경계가 되는 위치로 건물 지붕을
타고 모아진 빗물이 내리 쏟아지며 텐트를 적신다. ]
다급해진 상황에 음식점에 들어가서 주변에 텐트칠 공간이 있냐고 아주머니들에게 가서 묻는다.
곰곰이 생각하시던 아주머니의 미간이 잠시 모여졌다 펴지더니, 강한 확신과 함께 그 이후
이틀을 내가 머물게 할 장소를 점지해 주신다.
‘이 앞에 다리 밑이요’
그랬다.
‘요천’을 가로 지르는 번암교 밑에 공간이 있었다.
짐을 챙겨서 비 안 맞게 판쵸위를 두르고 다리 밑에 당도한다.
하지만 막상 텐트를 치고 나서도 영 불안불안 하다.
바람이 워낙 심하게 불어대는 터라, 빗물이 튀겨댄다.
텐트 좌우편에 자그마한 빗물 방울이 맺힌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떨어지는 비를 피할 공간을 얻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누워서 좀 쉬어야 할 터이다.
팔다리 고생 많았다.
단꿈을 꾸면서 내일을 기약하자.
그런데 부는 바람이 영 심상치 않다.
한 번씩 강풍이 불어서 텐트가 휘청휘청 하는데,
폴대가 부러질 까봐 누운 상태에서 양손으로 부여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폴대가 삭아서 텐트가 제 모형으로 서있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한 두시간 바람 불다가 말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내 바램이었다.
우뚝 솟아 있는 봉화산에서 쏟아져 내려 불어오는 바람은 ‘요천’ 줄기를 따라 거칠 것 없이
돌진해와 밤 새도록 내 텐트를 뒤흔들어 댔다.
이방인이 알지 못한 지역에 얽힌 어떤 사연을 말하기 위함인가?
비바람은 내가 잠들지 못하게 끝없이 텐트를 뒤흔들어 대면서 내 비몽사몽간의 의식에 기억
할 수 없는 어떤 관념의 단편들을 떨궈댔다.
열댓번 깨엇다가 잠들었다가를 반복한다.
지칠대로 지친 심신으로 더 이상 텐트를 사수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바람에 텐트가 꺽이든 말든 고개를 파 묻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비바람이 동반하는 요동이 의식의 한편을 한순간씩 자극하여 깊은 잠을 들 수
없게끔 만들어 낸다. 텐트 후뢰슁이 벗겨져서 바닥에 패댕이 쳐진 것은 진즉이었다.
나가서 다시 텐트를 씌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악몽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다.
7월 8일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부대낌을 당하다가 여덟시 경에 일어나서 텐트 정비를 한다.
바람이 좀 잦아졌다.
[ 1620 밤새 수난당한 텐트 ]
잠시 후에 다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 채 하지 못한 말이 있는가 보다.
[ 1640 비 떨어져 내리는 풍경 ]
그나마 바람이라도 좀 잦아져서 다행이다.
전날 행군에서의 피로와 수면부족이 겹쳐서 오후 두시 경까지 쓰러져서 겔겔거린 후에
텐트 밖을 나서서 바람을 쐔다.
[ 1650 요천에 백로 하나가 자태를 뽐내면서 비 맞고 있다. 내 옷과 배낭과 텐트도
저 깃털 처럼 방수가 잘되어서 내리는 비에도 저리 당당히 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ㅠㅡ ]
개천물이 불어나자 마을 주민들 몇이 뜰채를 들고 천가에 모여서 고기를 잡는다.
[ 1653 비온 후에는 물 바닥이 뒤짚히면서 고기들이 미쳐 날뛰곤 하는데, 뜰채 하나만
있으면 초보자라도 쉽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
[ 1655 천 흐르는 광경 ]
[ 1657 비 갠 후에 씻겨 내려간 대기를 뚫고 뿜어지는 햇살은 유난히 청량하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햇살이 봉화산 산등성이를 비추고 있다. ]
[ 1660 1670 요천에 지는 석양 ]
[ 1680 해가 진 후 마을에 가로등이 하나씩 밝혀지는 풍경 ]
밤이 되어 텐트에 누워있는데, 작은 짐승의 그림자가 눈에 띈다.
고양이이다.
[ 1690 고양이 찝적대는 모습 ]
이놈의 고양이들의 희한한 습성은 멀리서 사람이 다가가려고 할 때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피하거나 날쌔게 도망가곤 하는데...
사람이 있는 장소에 자신이 나타나서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별로 놀래하는 기색도 없이
살피다가 유유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녀석에게 비상식량 영양갱을 잘게 잘라서 좀 던져 줬더니 몇 개 집어 먹더니,
몇 개 집어 먹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진다.
좀 놀아나 주고 갈 것이지.
7월 2일
장비를 걷어서 다시 장정에 돌입한다.
가진 것 없는 떠돌이 민중(=거지)의 영원한 안식처인 다리 밑이여 안녕~
[ 2000 정든 다리를 뒤로 하고. 장수로... / 오토바이 받치는 아저씨 이외에는 얼쩡거리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
20여분을 걸으니 장수 가는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 2010 장수 가는 이정표 ]
한참을 더 걷자 이정표 하나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 2020 장수와 방화동계곡으로 가는 갈래 길 ]
이정표를 보고 적잖은 고민을 하게 된다.
국도로 통해서 장수를 가는 것은 문제없지만, ‘방화동계곡’을 통해서도 장수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둥한 도로는 걷기는 쉬우나 볼 것이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고,
계곡을 끼고 걷는 것이 볼 것이 많겠지만, 대신 진땀 빼게 하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난 계곡이라면 최소 천여미터 정도 높이의 산맥이 물을 대고 있을 터였고,
그에 걸 맞는 규모의 고개가 나를 집어 삼키기 위해서 아가리를 떡~ 버티고 있을 터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계곡을 향한다.
방화동 계곡의 아가리가 나를 집어 삼킬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이래뵈되 산전수전 다 겪은 배테랑 노숙자인데, 가다가 쓰러지기야 하겠는가?
역시나 계곡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국도를 걷는 기분과는 달랐다.
[ 계곡 오르는 길 ]
방화동 계곡까지는 8 km 거리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그 하류 지형 역시 양쪽이 산으로 둘러져 있고, 그 새로 졸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의 다름이
아니었다.
울창한 산맥 사방에서 계곡 물이 흘러 나온다.
그 다종다양한 ‘졸졸거림’은 산새들의 노래 소리와 절묘한 화음을 만들어 낸다.
[ 2040 2060 산에서 물 내려 오는 풍경 ]
계곡을 따라서 쭉~ 들어선 마을의 풍경도 참으로 이색적이다.
[ 2070 만약 내가 지금 국도상을 걷고 있었더라면 산을 등지고 서 있는 농민의 모습이 아닌,
도로나 전봇대, 건물을 배경으로 한 농민을 접했으리라. 계곡으로 걸어본 적이 없어서
참으로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
[ 2080 공기 좋은 곳에 사셔서 그런지 백발이 성성하신 할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논 일을 보시고 계셨다. ]
[ 2090 원두막일까? 정자일까? 하여간 넝쿨이 가득 달라붙은 모습 ]
[ 2100 한 마을의 계곡을 낀 운치 있는 정자의 모습 ]
[ 2101 전원의 풍경 ]
[ 2102 때 이른 낙엽 ]
[ 2103 하트모양 거미줄 ]
내가 거미라면 그녀의 창 앞에 저 모양의 거미줄을 치리라~
[ 2104 계곡으로 향하는 길 ]
7, 8 km를 걸어 두 시간을 넘게 계곡 길을 걸어왔는데, 방화동 계곡 본 입구는 안보이고
이정표만 다시하나 눈에 띈다.
[ 2110 이정표 ]
지도를 분석하고 이정표를 살피니,
방화동 계곡으로는 장수 넘는 길은 ‘재’를 넘는 수준이 아닌, ‘봉’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한다면, 간편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 사이를
피난민 짐을 짊어지고 겔겔거리다가 종국은 낙오해야 하는 수모를 당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방화동 계곡의 쉼장부를 향해 걷던 발걸음을 꺽어 장수 가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
길로 발 걸음한다.
[ 2120 오르고 또 오르는 길... ]
헐떡 거리며 오르는 길에 몸을 잠시 식히고자 물 쏟아 내려오는 곳을 찾는다.
이곳 관광순환도로는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라,
온전한 계곡을 찾지 못하고 공사중의 파쇄된 돌들 사이로 물 흘러 내려오는 곳에 짐을 놓고 자리 잡는다.
[ 2130 파쇄된 돌들 사이로 물 흘려 내려오는 모습 ]
[ 2140 발을 담그고... ]
그 물의 뼈 솟까지 스미는 차가움은 30초 이상을 발을 담글 수 없게 만들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열 불 나던 발바닥은 그래도 이렇게 노고에 대한 사례를 받았다.
10여분 더 걸으니 드디어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 2150 당재터널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
장마철이라 계곡을 찾은 행락객들이 없어서 500m 걷는 길 내내 터널 중간으로 걷는 중에
차 한대가 지나가지 않았다.
[ 2160 당재터널을 중심을 가르며 ]
그런데 터널을 벗어나기 직전에 ‘초현실’? 적인 장면을 하나 담는다.
[ 2170 터널 벽면 타이루 ]
타이루 가득히 붙은 터널 벽면...
그런데 도대체 저 바닥에 떨어진 타이루는 어디에서 떨어진 것인가?
그 주변에도, 그 뒷면에도 어디하나 타이루가 떨어진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터널을 벗어나자 ‘장수’ 경계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 2180 장수군 경계표지 ]
이제 부터는 내리막길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된다.
내리막길의 끝 즈음에 장마비로 인한 산사태로 파헤친 산 한쪽이 붕괴한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 2190 가벼운? 산사태 ]
내리막길의 끝에서 다시 끝이 안 보이는 평지를 대한다.
[ 2200 장수 가는 이정표 ]
이제 7km 만 터덜터덜 걸으면 장수에 도착하리라.
[ 2201 길가는 중의 무너져가는 흙집 ]
가지 밭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군것질 꺼리로 가지 하나를 얻어 배어 물고
[ 2210 가지 하나를 배어 물고 ]
지혜로운 엉덩이 의자를 달고 계신 한 아주머니를 지나쳐 걸으니
[ 2220 아무 때나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엉덩이 의자 ]
장수 특산물 장수사과 모형이 큼지막하게 길 한편에 세워져 있다.
[ 2230 장수사과 모형 ]
장수는 일교차가 심해서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해서 지역의 특산물로 생산된단다.
그런데 한 브렌드상표의 장수 사과를 들고 있는 여인이 눈에 익는다.
[ 2231 장수사과를 들고 있는 단아한 여인의 케릭터 ]
어디서 많이 본 여인인데... 이름이 혀 끝에서 돈다.
누구였더라?
몇 발짝을 더 걸어 왔을까... 도로 너머로 군소도시의 윤곽이 드러난다.
장수에 당도해서야 비로소 그 여인의 실체를 확인한다.
[ 2240 멀리보이는 장수 ]
전라북도 장수
[ 3000 전라북도 장수의 지리적 위치 ]
2만 4천여인구를 가진 장수군은 전라북도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지리산, 장안산, 덕우산, 팔공산으로 사방이 산악으로 중첩되어 있는 지역이다.
장수군의 [상징]은 장수의 특산물인 사과를 의인화한 ‘사과랑’이다.
[ 3001 장수군 상징 ‘사과랑’ ]
장수지역은 일교차가 심해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한 사과 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장수군 곳곳이 사과밭인데, 군에서는 이를 특화 시켜 사과농장체험[일명 사이버팜]을 실행
하고 있다. 이는 ‘사과나무의 분양을 통해 어린이에게 체험학습의 기회를주고 도시민들에게
는 농촌의 소중함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나 언제든
지 장수를 방문하여 ‘청정장수’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장수군 안내책자 발췌)‘이란다.
장수의 [케릭터]는 ‘충절의 상징’인 논개였다.
그렇다.
앞서 봤던 사과농장표지의 여인은 바로 논개였던 것이다.
진주의 진주성에서 의암을 발로 디뎌보고 논개 사당 사진까지 담아왔는데...
그래서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 을 했었는데,
장수군에서 군 캐릭터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장수는 논개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장수는 바로 논개의 고향이었다.
500여년 전을 살다간 한 인물이 하여간 여러 지역 먹여 살린다.
[ 3010 장수군의 논개 케릭터 ]
[ 이경해열사 묘역 ]
장수읍 진입로에 막들어 섰는데, 표지가 하나 눈에 띈다.
[ 3120 이경해열사 묘역 안내 표지 ]
아... 그러고 보니 이곳이 바로 이경해열사의 고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충절어린 인물들이 많이 태어나는 기운이 있는가보다.
장수읍을 앞에 두고 500여 미터의 언덕길을 다시 올라 묘역에 참배하고 읍으로 들어갔다.
[ 3130 이경해열사 묘지 - 그 옆에 콘테이너 박스 하나만 설치되어 안내 문구로
그곳이 이경해 열사의 묘지임을 말할 뿐 묘지석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 ]
이경해 열사는 한평생 농민운동에 전념해 오셨고, 전라북도 도의원이셨으며, 한국농어민신
문사 회장까지 하시다가, 2003년도 맥시코 칸쿤에서 ‘WTO(세계무역기구)가 농민들을 죽인
다’고 외치며, 시위현장에서 자결하신 분이다.
그가 과거에 제네바 WTO 건물 앞에서 배포한 성명 글을 꼭 한번 살피시기를...
아래 클릭 =>
이경해 열사 묘역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길가에 흔들리는 반 FTA 깃발이 힘차게
흔들리는 듯 했다.
[ 3300 이경해열사 묘역 앞 도로에 꼿혀진 반 FTA 깃발 ]
장수군 민중연대
시가지에 들어와 이곳 저곳 기웃거리고 있는데,
‘민중연대’ 사무실이 눈에 띈다.
나름대로는 민주노동당 당원도 아니고 노조활동도 안해봤지만,
다른 관변단체(시민운동 한답시고 관의 보조금 받아 챙기면서 관의 대변 노릇을 하는
시대의 사생아들)들과는 달리 ‘노동자’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이 ‘민중단체’들의
경우에는 ‘자기들의 것을 내 놓을 줄’ 안다.
‘내 입장’에서 봤을 때, ‘(나 같은)거지에게’ 식사대접도 해주고 사무실도 개방해준다는
것이다. 약자를 위해서 헌신하며 투쟁한 결과가 그들의 경계심을 풀고, 자신들의 가진 것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강도나 도둑일 수 있음의 사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함양 민중연대에서 몇 일 묵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편하게’ 있다 온 기억이 있는지라,
대뜸 눈에 민중연대 사무실이 보이 길래, 들어가서 주변에 텐트라도 칠 곳을 여쭸다.
마침 상냥한 사무차장님이 안에 계셨는데,
오후 7시 30분 경에 사무실에서 회식한다고 오시라는 것이다.
이곳 저곳 둘러보다가 시간 돼서 사무실로 가보니
여러분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식준비를 하고 계셨다.
과거 민주화 운동 등을 하신 전력이 있으신 분들로, 그중의 대부분이 귀농하신 분들이셨다.
귀농한 젊은 부부 세 쌍도 있었는데, 각자 자신들의 집에서 ‘유기농’으로 키워온 채소 등을
가져다가 펼쳐 놓고 고기를 굽기 시작하는데, 여간 입맛이 당길 수 없었다.
아하~ 신께서는 나에게 이런 기회도 주시는 구나 ㅠㅜ
당원들 중에 귀농하셔서 유기농하시는 분들 중심으로 모이셨단다.
잠시 나를 소개해줄 기회를 주셔서 ‘이런 저런 활동하고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저녁에 텐트 칠 장소를 묻는 와중에 ‘역시나’ ~ ‘이곳에서 묵으면 되겠네’라며 입이 모아졌다.
실세? 인 사무처장님의 재가가 있는 순간은, 먹 꺼리는 물론 잠자리마저 순식간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터인데, 장수군에 대한 ‘충성심’? 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여~
[ 3310 장수민중연대 사무실에서 당원들 회식하는 모습 ]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농민회’ ‘민주노동당’ ‘전교조’ 등의 단체들이 각각의 사무실을
두고 열심히 활동하시는 모습을 뵈니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배 터질 만큼 음식을 즐기고 나서 함께 청소와 설걷이를 했다.
밤이 늦어가고 있어서 모두들 빠져나간 자리에 사무차장님하고 독대를 했다.
사무차장님은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원래 민중운동을 해본 전력이 없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이 활동을 접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야가 열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신다.
본인도 잘 알 수 없었던 어떤 갈망이 민중운동진영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구체
화되었다고 하신다. 이러다보니 남다른 ‘폭발력’으로 작용해서 참신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트이고 있는 듯 했다.
일명 ‘잔뼈가 굵은’ 민중운동가들은 거쳐 온 ‘엘리트코스’ 덕분에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던 것’만 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 ‘늦바람’ 든 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현재 필요로 하는 활동’에 정확히 쏟아 낼 수 있는 장점을 갖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장수군위원회에는 힘이 느껴졌다.
아뭏튼 이곳에서 몇 일을 묵게 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7월 3일
논개 사당
앞서 말했듯이 논개는 장수군의 캐릭터이기도 한다.
장수읍 한편 ‘의암공원’에 논개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고 군 이미지와 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다.
[ 3410 너른 잔디밭 너머로 세워진 논개사당 ]
[ 3420 논개사당 안내 비 ]
화상사이즈 축소하는 중에 글씨가 못 알아보게 되었음. 관련 자료 네이버 검색 아래 클릭
=> http://100.naver.com/100.nhn?docid=736311
[ 3430 의암루 ]
[ 3440 두산제(뚝) 으로 연결된 작은 석교 ]
[ 3450 두산제 너머의 문화회관 ]
저녁
민중연대 사무실에서 전교조 김**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전교조 활동하면서 민중연대 일까지 함께 보시고 계셨는데,
나이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열정적으로 지역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힘쓰시는 모습이 참으로 뵙기 좋았다.
마침 고향 군산에 있는 잘 아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이름을 거론하시니 친근감이 더해진다.
그래도 어디에나 이렇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서
개인생활 접어두고 노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사회가 그나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
7월 5일
장수초등학교 활동
[ 4000 장수초등학교 후문 ]
학교 ‘후문’에서 캠페인을 하는데, 유난히 관심 있게 모인 아이들이 많았다.
처음 보는 외지인이 와서 캠페인 하는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나 보다.
1, 2학년 아이들 예일곱명이 활동 끝날 때 까지 이편에 앉아 있다가, 저편에 앉아 있다가
다가와서 말 걸었다가, 친구들 데리고 와서 스티커 가져라가고 안내해 주면서 주변을 배회했다.
게중에 수줍어하는 꼬마아이들 몇몇이, 와서 받아가고 싶은데 쑥쓰러워서 멀찌감치 떨어져
눈치만 보는 모습도 접하게 되었다. ‘와서 가져 가세요’라고 손짓 하니까 수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스티커를 가져간다.
학생수 300의 작은 초등학교라 시종일관 여유 있게 활동할 수 있었다.
장수를 떠나며 ...
지리산맥 등으로 둘러 쌓인 청정지역이 지역민들에게 심어 놓은 인심 때문이었을까?
장수에서 머무르면서 유난히 많은 분들이 관심을 주셨다.
함양에서 장수로 넘어오는 길에서부터 택시 한대가 멈추면서 기사 아저씨가 타라고 호의를
배푸셨을 정도였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그러한 호의를 베푸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경우였다.
민주노동당 열성여성 사무처장님의 된장찌개까지 끓여주시는 정성은 물론이고,
군청 홈페이지에 써 올린 글을 보고, 장수분들만 세분이 홈페이지 방명록에 글을 남겨 주셨다.
다른 지역의 경우 군 홈페이지에 ‘구걸을 요하는 글’을 아무리 올려도 5, 6개 지역 당 한명
꼴로 관심 갖고 홈페이지에 인사말을 남길 정도임의 사실에서 볼 때,
장수인심은 다른 지역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듯 하다.
심지어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고 ‘공무원’까지 연락을 주며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시란다.
마침 벌교에 사는 목사님 한분이 후원을 해주셔서 장수에 있다고 하니,
그곳은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하신다.
물론 지자체 재정자립도가 끝에서 2위임에도 불구하고 군수가 얼마전에 오피러스로 차를 바꾼 것 등으로
몇몇 정책과 행정, 가치 등이 민중의 원성을 사는 모양을 보이고는 있지만,
장수는 나와는 인연이 많은 지역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몇 일 묵지도 않은 지역을 떠나오며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 2007년 7월 5일 전라북도 장수에서
- 잡글 -
‘확대된 나’
그는 ‘내가 세계이고 세계가 나다’는 식의 그럴싸한 문법을 구사하며 주위 사람들의 관심
을 불러일으키고 호감을 샀지만, 그렇게 ‘나’와 ‘세계’를 동일화 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실천의 요구가 발생하지 않는 감상적인 사안의 것이었다.
그는 결코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연
대감’을 느끼며 ‘나와 세계가 하나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늘상‘감상적’인 관점에서만 세상과의‘일체감’을 경험했고, 실천이 필요한 사회적인 사
안의 문제를 접할 때는 ‘내가 관심을 갖고 실천한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방
관자 적이고 운명론적인 시야를 고수했다.
반면 그는 자신의 일상이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세운 장단기적인 계획을 철저히
실현하는 실천가였으며,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기필코 나서서 이를 쟁취
하는 정력적인 투쟁가였다.
물론 그가 자기 자신이 필요를 충족시킴으로 인해서 안락과 평안을 추구하듯이, 다른 사람
의 경우에도 ‘그것’이 필요할 것임으로 ‘사회적인 실천을 통해서 그 요구를 충족시켜줄
필요성이 있음’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연대감에 기반한 그러한 구체적인 고민과 실천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대상화 - 관념화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노력이 타인의 배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음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 ‘배 굶주리는 각기의 타인’으로부터 ‘감정’과 ‘개인성’을 빼앗고,
뭉뚱거려진 ‘사회문제’혹은 ‘사회’로 대상화 하고 관념화 한다.
이렇기에 그는 ‘세상의 문제’를 머리로 이해하거나 삶속에 체현하지 못하고, 잠시 뇌리에
표류하는 관념으로 남겨두다가 막연한 감상의 것으로 일관하다가, 자신의 일상의 문제에 대
한 고민이 시작될 때 다시 내 팽개치는 것이다.
그는 결국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감정이입을 하는데 실패하게되고, ‘각기의 배 굶주리는
이들’을 볼 수 없게 되며, 그 문제를 ‘진정’가슴으로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이웃인 영수]에게 빵을 건넴으로 그의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는 ‘실천적
현실의 효과’를 [관념화된 세계의 문제]로 ‘희석’‘변질’시킨다.
그들은 자신이 건넬 빵이 ‘구체적인 영수’의 배를 부르게 하여 생의 활력을 일으킬 것임
을 생각하지 않고, 그 빵이 백사람, 천사람, 만 사람, ‘전인류’에게 ‘나눠져봤자’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야 말로 이론적/관념적으로는 온당한 생각이다. 빵 한 조각을 70억분의 1
로 나눈다면, 그 몇 개 씩의 분자 조각을 받을 사람들이 무슨 효과를 보겠는가?
결국 이렇게 자신의 ‘실천적 노력의 효과’를 ‘애써’ 희석시킨 결과 그의 입에서는 ‘내
가 나서봤자 세상이 변하겠는가?’라는 주절거림이 자연스레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입
’에서 나온 말은 그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의 머리에 사회적인 연대의식이 개념이 약간이라도 구축되어 있으면
‘내 하나부터 시작된 모든 사람의 노력이 결국 세계를 변하게 하는 길을 발견하여, 내가
구체적인 내 이웃을 위해서 힘쓰는 마음가짐과 실천이 결과적으로 다른 개인들의 노력을 부
추기면서 세계를 바꿔내는 것’을 확인하겠지만,
이러한 이해가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나 하나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나
서봤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자기 삶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전혀 다른)이율배반적이고,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 발상’은 이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성향의 무리’, 즉 막연히 세상과
의 일체감을 떠벌릴 뿐 구체적인 실천의 필요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하나
의 ‘대세’로 매김한다.
이것은 비단 ‘배 굶주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 ‘사회’ ‘환경’의 문제 등에
널리 만연한 풍토이다.
이렇게 ‘인류’와 ‘사회’ ‘환경’을 철저하게
관념화 대상화 한 결과는 단순히 ‘세계의 변할 가능성 없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사회와 환경’을 세계로부터 그리 철저히 외면한 ‘딱 그만큼’ 각자는 그것들로
부터 ‘고립’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그리 많은 이유이고, 그
결과로 세계가 ‘이 모양’인 이유이며, 다시 ‘그러한 사람들의 수’를 늘어날 수 밖에 없
는 사회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내가 세계고 세계가 나다’는 말이 감상적인 허울에 지나지 않고 온전한 주장 그대로 실
현된다면... 내가 내 자신인 세계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내 자신을 구하는 노력임을
알리라.
우리의 ‘확대된 자아’가, 이 엮어져 있는 존재의‘현실’직시할 수 있기를...
부디 ‘철수’의 성장을 기원하며...
- 철수의 일생 -
철수가 있었다.
그가 '우리학교'를 외칠 때는 '다른 학교'와 체육대회를 할 때이며, ‘지역에 대한 샘솟는
애정이 뿜어질 때’는 다른 지역을 향해 삿대질 할 때이고, '애국심'을 가질 때는 '일본'과
축구시합 할 때 뿐이었다.
살아생전 단 한번 그가 '인류애'를 가지고 전 세계인들을 포용했을 때는 '화성에서 외계인
들'이 침략했을 때였다.
물론 그는 그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은 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여름 휴가 철에 멋진 풍경을 대하고 ‘감상’에 젖었던 순간에 국한된다. 지는 노을과 멋진
산야가 눈에 들어올 때 솟구치는‘감상적 일체감’은 구체적인 고민과 실천이 필요 없어서
아주 손쉬웠음으로 그는 더더욱 그 풍요로운 기분 ‘속에만’안주했다.
그는 결코 과자봉지가 손에 쥐어져 있을 때 '친구'를 찾지 않으며, 일본선수의 멋진 플레이
에 대해서는 조롱만 일삼았다. 기아와 전쟁에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통이 그의 마음에 전해
질리도 없었다.
그가 ‘우리’를 찾을 때는 그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때 뿐이었다.
‘너’가 ‘저쪽에 서 있는 나’임을 모름으로
그는 언제까지나 ‘상대’를‘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편협한 이익을 쫓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헐뜯어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신이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저주이기에 이를 ‘풀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각주-1)
그러고 보니 위의 ‘X 같은 세상’에서의 ‘X’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은 참으로
편견적인 것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의 모양과 크기에 불만을 가진 이에게 있
어서는 물론 ‘*’이 비하의 뜻이겠지만, 사랑에 빠진 연인이 대하는 남성의 ‘*’이 그러할리 있
겠는가? 그러고 보면 앞으로 (항상 그리하기는 힘들겠지만,)기분 좋을 때 ‘* 같다’는 표현을
사용해 볼만도 하다. 예) ‘인생은 * 같아와라’
참조 : 시사저널 사태 관련
http://news.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200707/04/tvreport/v173197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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