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9월호 양효숙 수필>
타잔
타잔의 휴대폰에 내가 꽃님이라고 입력돼 있다. 아빠 휴대폰을 가지고 놀던 아들이 다짜고짜 꽃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집에 데려다주면서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던 남자다. 누군가의 꽃이 된 기분은 특별하다.
우린 평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아들도 우리처럼 가끔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 가족끼리 상황에 맞게 이름과 별칭을 써가며 사는 재미가 있다. 몇 년 전에 나온 내 책이 아직도 남편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여전히 떠있다. 뭔가를 써서 보낼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보여주며 반응을 보고 싶은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 글에 살짝살짝 등장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타잔이란 별칭과 함께 이번 글은 좀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
가족 얘기는 되도록 쓰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써야만 하는 세상이 됐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가족이 해체되는 세상에서 가슴 따듯한 이야기들을 본능처럼 찾게 된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내 안의 정서적인 불안과 결핍도 보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현실감에 사로잡혀서 두려웠다. 한 세대가 지났는데 여전히 현실에 대한 불안은 증폭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 짙어져 암울하다.
타잔과 꽃님으로 사는 지금이 좋다. 삼십 대 중반에 만나서 우린 연애기간 없이 결혼으로 이어졌고 허니문 베이비가 됐다. 모든 게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에 가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 안정감 있는 연애기간처럼 다가온다. 오십 대에 소박한 이벤트처럼 커플 폰을 선택했는데 타잔은 케이스를 벗겨서 사용한다. 내 휴대폰은 도서관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평소 무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잔도 어느 새 퇴직을 앞두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평생 일했으니 퇴직 후엔 쉬겠다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타잔은 달랐다. 공부하는 공무원으로 관련된 자격증을 하나하나 취득했다. 자격증 취득으로 노후 대책의 길을 내는 일도 나름 의미 있다. 누군가 그 뒤를 이어 공부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아들에게도 공부하는 아빠의 모습이 좋은 본보기가 돼 줬다.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면 관련 간판이 다시 보인다. 미리 이름을 지어보는 재미가 있다. ‘타잔씨 공인중개사’라는 이름을 누군가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몇 달 전, 평소처럼 먼저 자고 있었다. 남편이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자정 무렵에 오는데 그날은 회식이 있었다. 자고 있는 내게 다짜고짜 소리치듯 말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몇 번이나 했었는데. 마중 좀 나오라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건데.” 가만히 들었다. 아니, 들어줬다. 평소 무음으로 설정된 내 휴대폰에 대해선 남편이 더 잘 알고 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며 배려하던 사람이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마신 건지, 흐트러짐이 없던 남편의 독백이 계속 됐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고 하면서 주어인 내가 생략되지 않고 계속 나왔다. 공무원을 이렇게까지 하기 싫어하는 줄 몰랐다. 생각보다 수위가 높은 취중진담에 잠이 확 깼다. 당장 공무원을 때려 치고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움찔하더니 그래도 아들이 대학은 마쳐야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 순간 나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는 것 같아 미안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남편에 대한 감정이 측은지심으로 변했다.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늘 도전하는 사람이다. 칠전팔기쯤은 무색할 정도로 어렵게 딴 자격증도 있다. 이를 악물고 하는 일이 많아서 치아가 빨리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공인중개사에 합격한 후 작년에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가채점 결과 합격한 줄 알고 이른 샴페인을 터뜨렸다가 아쉽게 떨어졌다. 이번에 다시 시험 본다는 것을 아는 지인들의 기대가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저만치 떨어져서 가채점을 하던 남편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휴대폰으로 채점 후, 이제 버튼만 누르면 합격과 불합격이 뜬다며 주저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 둘, 셋을 세었다. 극도의 긴장감은 울음소리로 터졌다. 남자는 우는 게 아니라고 평소 아들에게 말했던 그 남자가 오간데 없다. 애간장을 녹이듯 우는 남자에게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휴대폰 화면에서 합격이란 두 글자가 보였다. 어깨를 토닥여주고 휴지를 건네주며 그저 애썼다고. 맘껏 울어도 된다고 말해줬다.
결혼을 앞두고 타잔이 치타를 불러내 나를 소개했었다. 치타가 불쑥 나를 향해 그럼 타잔의 제인이라고 역할을 정해주듯 말했다. ‘타잔’이라는 밀림 속 남자와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타잔이다.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봤던 팬티만 걸친 타잔의 울음소리가 독특해서 따라 하기도 했다. 타잔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지면 모든 동물이 출동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타잔은 개그맨이 되고 싶었다. 웃긴 남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여서 웃었다. 공무원을 하다 보니 굳어졌다는 말에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방송국에 응시한 원서가 튕겨져 나왔다.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아 그쪽으로 가려던 흔적들이 드러났다.
우린 고향이 지리산이다. 타잔과 꽃님이라는 인연이 산골에서 나고 자란 정서와 연결되는 듯싶다. 오래된 나무에 새끼줄을 묶고 타잔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다고 말도 못한 채 울고 있는 타잔이 우리 집에만 있을까. 공무원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대놓고 말하는 아들이다. 그렇게 말해줘서 오히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타잔이 말한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결혼도 하지 않을 테니 손자 볼 꿈도 꾸지 말라고 아들이 선포한다. 타잔과 나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녀석처럼 말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아들이 친구들을 데려와 밤을 새고 힙합에 빠져서 가끔 첫 전철을 타고 들어온다. 녀석이 부르는 힙합 가사가 귀에 들어오는 만큼 이해된다. 또 다른 그들만의 타잔으로 서로를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