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엉망인 채로
마음이 바닥까지 훑으며 들고 일어날 때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법,
그런 거 있나요?
일하세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진흙을 이겨 무엇인가 만들어 보세요!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피아노를 두들겨 보세요!
그리고 그리고
가만있으세요
우주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빈 마음속으로 바람소리 들릴 때까지
하느님이 가만 가만 부를 때까지
성자는 어디에나 있다
얼마 전에 예수살이 공동체 제자모임엘 가게 되었는데, 서정홍 시인이 초대 손님으로 오셔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합천 황매산 골짜기 마을에 이년 전에 귀농하여 살고 계시다는데, 그동안 우리농살리기 운동본부에서 일을 많이 하셨던 분입니다. 특별히 일상을 돌보는 글과 시를 애정을 담아 써오신 터인지라,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깐 몇 가지를 옮기면 이러합니다.
평생을 산골에 살며, 일하고 살림을 돌보던 할머니가 어느 날 손을 심하게 짓찧어 피가 흐르는데, 이걸 본 시인 내외가 놀라서 시내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설치는데, 할머니께선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평생을 병원 신세 한 번 지지 않았는데 웬 수선이냐”는 것이지요. 그리곤 마루에 놓여 있던 걸레 한 귀퉁이를 부욱 찢어 상처를 처매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난 10여 년 동안 장에도 나가지 아니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자리에서 꼭 매달려 사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모시고 갈 수는 없고, 시인은 시내에 나가서 마데카솔 인가 뭔가를 사다가 드렸습니다. 약을 바르고 새로 사온 붕대를 감으며, 손가락에서 풀어낸 피 묻고 낡은 헝겊 쪼가리를 마당에 버리려는데, 할머니가 “그 아까운 것을!” 하시며 던져진 헝겊을 냉큼 도로 주어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눈만 뜨고 나면 쓰레기가 수북이 쌓이는 도시생활을 생각해 볼 때, 도통 버릴 게 없다 하고 살면서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시는 할머니는 평생 죄 없이 사시는 분입니다. 성자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수년 전 제가 예천에 처음 귀농했을 때 생각이 납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빠져나온 산골마을이었는데, 그곳에도 그처럼 허리가 굽은 자그마한 몸집의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셨지요. 그분은 자그마한 집에 살면서 짐짓 천 평은 됨직한 밭을 혼자서 일구셨습니다. 농기구도 별로 없습니다. 그분 손에는 호미 하나만 달랑 들려 있었고, 그 호미로 그 밭을 다 헤집고 김을 매고 돌보는 것입니다. 산길을 내려가다가 쳐다보면, 경사로 난 밭에서 검불을 태우며 밭둑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경험한 세상은 어떤 빛깔일지 궁금합니다. 밭을 매고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지, 아님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제 큰 욕심을 내려놓고 저승길까지 천천히 걸어가실 분입니다.
축복 같은 노동
14세기의 독일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먼저 노동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곳에서 하느님을 꽉 붙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의 은수자들은 사막의 동굴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노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밭을 일구고 바구니를 엮거나 나무를 깎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다소 가혹하게 말했지만, 양식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게으름이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1-12).
사실 노동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삶의 지루함이나 슬픔마저 몰아내고 깨끗하게 씻어 내립니다. 일하는 자의 몸에서 땀이 배출되는 동안에, 마음 에 엉겨 붙은 감정도 몸을 빠져나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의 떨림 속에서 애정을 담아 자주 그렸고, 톨스토이는 특권계층이나 수도원보다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이 말하는 거룩함을 더 자주 발견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일하고 삶의 선함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 밤에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지요.
거룩한 부엌데기
베네딕트 성인은 “기도하고 노동하라”는 단순한 표어 안에서 더 깊은 뜻을 담아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을 붙잡으려면, 노동과 기도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노동과 기도는 다른 것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네딕트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도원장으로서 매일의 생활이 기도와 공부, 그리고 노동으로 조심스럽게 나누어져야 한다고 ‘규칙’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세상적인 노동행위를 일부러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느님의 일이므로 하나의 노동이며, 손노동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할 때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란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손을 얌전하게 포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결을 살피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의 부르심에 나름대로 응답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서 풀을 뽑거나 밭에 씨앗을 심을 때, 자동차를 몰거나 글을 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을 선함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이미 거룩함의 영역에 옮겨와 있는 것입니다.
로버트 엘스버그가 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이라는 책에서는 ‘부활의 로렌조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렌조는 중년이 나이에 오랫동안 군복무를 한 뒤 파리의 한 수도원에 입회하였는데, 시골뜨기에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80세에 죽을 때까지 부엌에서 40년 동안을 냄비와 프라이팬 속에서 살았습니다. 죽은 뒤에 영성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던 로렌조 형제는 언제나 깨어 있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속에 계신다고 여겼습니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부엌의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 속에서, 때때로 이것저것을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마치 성체조배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모신다. ... 우리의 성화(聖化)는 우리의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들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시지 않고, 그것을 얼마나 사랑을 갖고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엘스버그는 로렌조 형제를 통하여, 수도자들의 거룩한 일과 세상 속에 사는 평범한 일 사이에 다리가 놓여있음을 발견합니다. 대부분 성인들은 ‘평범한 일’을 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교사, 간호사, 농부, 로렌조 형제 같은 부엌데기도 있었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성인들이 성직자이고 수도자였지만 실제로는 온갖 종류의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확인해 둘 것은 일의 종류나 신분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일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애초부터 거룩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노동이든지 섬김이나 자비를 행하는 기회가 되고, 기도의 때로 삼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로 받아들여질 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아무리 ‘성무(聖務)’라는 딱지가 붙은 일을 하더라도 허영과 욕심이 담겨 있으면 그 일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손끝에 앉은 천사
버스나 택시 기사들에게 인기가 좋은 장 크리스토퍼 성인은 강을 건너는 여행자들을 등에 업고 날라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거인이었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밤 그가 한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갈수록 무거워졌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하지요!” 하고 아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온 세계를 업고 있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왕이지요!” 엘스버그는 “일상의 일이 지루하고 부담스러워도 우리가 찾고 있는 왕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평범한 이러한 일이나 과제를 얼마나 다르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경탄합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에 손끝에 천사가 올라와 앉아 있는 듯 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사랑스러운 글을 쓰는 까닭입니다. 천사가 내게 눈빛을 맞추고 나는 마음으로 그를 잔잔히 애무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손끝에 망치가 들려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입이 거칠어지고 몸이 푸석거립니다. 나는 몹시 화가 나 있고 제 마음조차 다스리지 못할 때입니다. 물론 이럴 때는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을 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서정홍 선생님 말씀대로, 밥을 지을 때 어젯저녁부터 들끓던 화가 남아 있거든 밥 짓기를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어설프게 지은 밥이 식구들을 건강하게 돌볼 수 없습니다. 밥은 생명을 주는 것이므로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이어야 사람에게 생기를 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돌보아, 우리의 일상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 안에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돕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겨진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