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전수일)' 중 마치 오브제들을 심듯 인물들의 비일상적인 배치와 공간 점유를 설정하면서 폐허의 광간과 일상의 불안한 조우가 기획되고 있다. 이때 철원 옛 노동당사의 스킨은 과거 무언가였을 스스로의 실체와 그 기억을 오히려 조기의 '선'의 영역으로 회귀시키며 장소와 시간에 대한 지각을 '흔들게'된다.
4.허리케인에 의해 삭제(?)된 플로리다의 어느 집합주택지 이 장면을 보며 문득 위의 영화 '도그빌'을 떠올리고 있었다.
재난의 잔해는 예기치 않게 등척(等尺)의 '평면도'를 지면에 남기고 있다. 구축을 반환점으로 현상과 시간은 역류하고 장소와 관련한 모든 행위와 기억과 경험이 초기화 된것이다.
5. 지리 키리안(Jiri Kylian)의 안무, 'Sweet Dreams' 중 댄서들이 가상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빛과 기하학이 만나며 하나의 낯선 자연이 들어선다. 이 장치를 통해 경계는 순간성과 임의성으로 불안한 새로운 영역의 '선'을 낳고, 이어서 이 글에서 거론하고 있는 '개체들간의 망(望)의 영역'으로 코드화되는 것이다.
2.영화 '노스탈지아(Nostalghia, Andrei Tarkovsky)' 중 산 갈가노(San Galgano) 성당 유적의 엔딩 신-폐허의 현상을 현실과 회상공간을 화해시키기 위한 장치로 번역해내고 있다. 작가 고유의 의식이 깃들며 초기화되었을 어떤 인간 중심의 구축제도 언제든 서사의 희미한 후경으로, 자연의 오래된 지형으로 귀속하며 중성화도리 가능성으로 열려 있음을 언뜻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까. 기억과 경험을 매질(媒質)로 취해 하나의 불가해한, 비언어적 '의미의 울림'을 기록하며.
3.영화 '도그빌(Dogvill, Lars von Trier)' 중 물리적 미장센을 대거 제거, 공간들 간의 경계는 허무하게 2차원의 단선들로 그치고 있다. 각 캐릭터의 섬세하고 정밀한 연기에만 온전히 시선을 거두려는 극도의 연출 전략일 거다. '선'들의 행간에서 현실적ㆍ물리적 공간을 해독하는 일은 건축가 고유의 몫이 아니었던가. 선으로 코드화된 물질들로 인해 일반인들은 친숙하고 진부해야 할 공간들에 대한 낯선 시각을 갖게 된다. 또 경계의 결핍은 영화 속에서 아주 작은 커뮤니티(community)의 공간적 특성, 즉 사생활의 투명성, 정보의 공유, 뚜련한 연대의식 등을 더 없이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분명 무언가의 퇴적체(sediment)임에도, 존재한다고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의 지각(知覺)이라 부르는 세계 내에 고요히, 또 아득히 더께진 채 뻗어 있는 기억과 인식의 지형 역시 그 중 하나일거다. 발화된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물론이고 음악의 체험도오로지 우리 의식 내의 위상체(topology)에서만 고유의 풍경을 그리지 않는가. 그 경험의 경이로움에 비해 현상 자체는 과연 그것이 외계에 존재한다거나 이를 규명해낼 수 있기나한지 의심스러운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소리들은 그저 공기를매질(媒質)로 취해 이의 단선적 변화량으로 진동을 발생할 뿐인데, 일단 우리 의식의 해독-분류(?) 프로그램을 거쳐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각기 자신의 위치에 안착하면서 어느새 친밀한 ‘다선’적 공간을 내면에 사상(寫像) 해버리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의 내면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은 ‘자기 밖’으로 순수하게 외출함으로써 공간을 ‘외면화’하는 건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20세기 중반 이후 이른바 현대음악의 실험적인 악보들은 작곡가들과 그래픽 아티스트들 간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에게 발생한 이 같은 내면의 위상 공간을 선적인 요소들을 매개로 대거 번역해내려 했던 증거일 거다. 어찌보면 건축이 투사해내는 공간 또한 때로 선적인 요소들의 위상 진행으로 번역해 낱낱이 읽어내(decode) 볼 만한 일이 아닌가. 언어와의 관계를 놓고 에코(Eco)의 생각을 빌어도 어차피 건축공간이란 기생적인 언어, 즉 미지의 언어에 기대어서만 자체의 의미가 낚일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최소한 내 작업초기에 개입히는 언어의 이른바 어휘소는미지의 ‘선’들로 짜여진 코드들이며 이들 간의 인력(引力)이나 반발이 극성(極性)이나 자성(磁性)을 띠며 늘 어지럽다. 이 코드들은 역시 내 심상의 퇴적지형을 타고 오르내리며 물질적ㆍ공간적 기획의 크고 작은 기착지를 향해, 최적화의 옵션들을 놓고, 수없는 스캔 행위를 거듭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되기를, 이런 여정을 따라 차츰 조직된 언어들이라 할지라도 초기에 상정된 바 있는 미지와 이질성, 원시성은 여전히 그 행간의 선도(蘇度)를 유지해야 한다. 내 작업에서 선은 어떤 존재의 임계(臨界)이기도 하지만 사실 '부재'의 임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선은 '부재'이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많은 지성들이 공감하듯 '부재'를 재현하는 일은 이것이 처한 고유의 역설적 필연에 불안하다. 부재의 대상으로서 무엇인가 전제되고 이 부재가 가장 완벽하게 재현되는 순간 그 ‘재현’은사라진다는 운명 말이다. 결국 내 작업이 추출하는 선들의 많은 부분은 어쩐지 부재의 기슭에서 궁극에 얻지 못할 모종의 재현, 그 틈을 노리며 서성이기 마련이다. 기슭이란 늘 어떤 두 개의 상반되는 영역이 부딪고 갈등하며 교착(交錯)하는 경계가 아닌가. 한편 점유와 부재를 가르는 경계는 내게 단순히 선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존재론적 망(望)의 영역이다. 관념의 차이로 대립하는 양극을 긴장어린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거나, 공히 양측에서 오는 소외로 신음하며 특유의 불안으로, 비결정질로 떨리는 주파수다. 소리의 실체보다는 묵음, 여백 중심의 선적인 진행, 즉 케이지(Cαge), 헨쩨(Henze), 슈니트케(Schnike), 페르트(Paert) 등 헤아릴 수 없는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이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추구하는 전략, 또는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대상에 대한 치열한 회의를 보라.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경계 공간 역시 정작 그 안에 들어서면, 아니 들어설 수 있다면 존재에게 전혀 친절할 리 없다. 이 드세게 밀쳐내는 힘을 견디며 그저 양편을 살피는 불안정한 시선의 흔들림만이 그 의미를 갖는 영역일 거다. 공간 속에서 점유와 부재의 차원이 교차하는 경계의, 무한한 밀도로 한없이 가느다란 선 역시 물질과 비물질들간의 ‘바라보는’ 일(望) 또는그성분을 조금이라도 함유한 본연의 제스처들이 그 의미의 순도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조망, 관망, 탐망, 야망(horizon), 희망, 요망, 선망, 욕망 등에 이르기까지. 한편 건축 말고도 알다시피 모든 작(作)이나 출(出), 현(現) 등의, 무언가 ‘만들어내는’ 운명과 사건에 연루된 최근 진보적 인물들에게도 약속이나 한 듯 선은 가장 유효한 초기 발상의 매개가 아닐까란 추측을 해 본다. 물론 각기 내용은 다를지언정 그들에게 선이란 기억과 시간, 행위, 상정, 신호, 정보 등, 수많은 인식과 경험의 가닥들이 꼬여 물화, 체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역일거다. 또 때로는 이들의 궤적이며 침적(沈積)을 암시하는 모종의 광맥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에게 여전히 선은 상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 외부의 인물들이 추측하는 바와 달리 작가 내면 인식의 퇴적지형은 황폐와 방황의 영토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벤야민(W.Benjamin)이 이미 오래전 그의 글에서 밝히듯, 작업의 세계에 갇혀 버린 인물이나 이에 거리감을 잃고무례하게(?) 접근한 대중은수없는 상처의 가능성에 노출된 반면, 이 세계에 부주의한 인물들은 예술이라 칭해지는 것들과 대체로 캐주얼한 관계에 놓여 있을 것이기에.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내 작업의 경계에 도려내지고 삭제되는 이른바 ‘부재’의 윤곽선들은 보기와는 달리 예의 상처로 거칠어진 야성의 영역으로 읽혀야 한다. 우선 뜻밖에도 이것들은 무언가의 구축이나 점유를 향한 벡터방향이 아닌, 도리어 존재의 소멸, 이미 초기화로 향해 반환점을 돈 이후의 벡터 선들이다. 애초부터 물질과 공간의 외곽에 대한 기획이 유일하게 시선을 둔 기착지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폐허’가 증거하는 시간의 역류이며, 그언어, 의미들이었으므로. 이 공간은 분명 근대의 작가들이 이지적으로, 냉건하게 재단해내던 외부공간의 제반 논리들로부터 비껴 서 있다. 그렇다고 한편으로 공간적 서사의 풍요로움에 관심을 둔 일도 더욱 아니다.그저 비의(秘意)로 침착하기만한 균열과 침식의 영역이랄까. 또 이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모든 선들은 존재로부터가 아닌 ‘부재’로부터의 침식으로 그 진행이 암암리에 설정된다. 이미 경계와 부재의 아말감은 초기화된 것이다. 나아가 이 장치는 현대의 가장 엄한 자본주의적 강령, 즉 ‘효용’과 관련한 제반 가치를 슬쩍 모른척한다. 소위 비극적 리얼리즘이란 화풍의 역사적 피봇 힌지가 된 셈인 카라바지오(Caravaggio)와 그의 종교화는 내 이 같은 치우침을 심리적으로 지원하던 사건들 중 하나다. 그 자신 쫓기듯 바닥의 삶을 영위했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대를 지배한 종교적 숭고함, 그 가치가 주는 억압에 대해 그의 그림들은 무례하다. 대들 듯 자신의 화폭에서 간단히 성스러움의 윤기를 거두고 대신 삶의 고단함, 일상의 처연함을 감히 그표층에 내걸고있다. 내 작업에기획된 ‘폐허’의 장치는 어떤 면에서 현대 사회가 의뢰한 용역에 대한 은밀한 위반이며 카라바지오적 불경(blasphemy)의 기록일 수있다. 장소란 캔버스에서 상업적 자극이나 자본주의적 효용의 윤기를 번번이 벗겨내는 공간적 스트로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간이 지닌 고유의 ‘탈논리’와 사적인 사유 경로 탓에 그 의미들을 공공연하게 밝히거나 논점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내면적으로 나는 이 장치를 편의상 형이상학적 공동(空洞; meta-hollow)으로 통괄,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 이 ‘부재’의 장치, 메타 할로우는 작가적 상처의 영역이며, 존재의 균열에 대한 시화(詩化)의 욕구일거다. 또 공간적 의미들이 애초에 빛을 잃고 ‘몰락’해가는 현상에 대한 까닭 없는 매료, 그 두근거림일 거다.
6.영화 '피크닉(Picnic, 이와이 슈운지' 중 영화 내내 이들의 일탈은 고집스레 도시의 담장 위를 따라서만 진행된다. 그저 경계를 제시하는 '선'으로만 존재하던 도시 속 일상의 코드들이 비로소 영화작가의 문학적 성찰에 의해 하나의 손색없는 위상체(topology)로 인식되고 취급되는 순간이다. 담장들은 역시 위에서 말하는 '망(望)의 위상을 등장인물들의 시각을 빌어 제공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8. 청원빌딩(김헌, 1994) 이미 여기에서도 인식과 기억의 기제가 규명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적 서사가 기획되고 있었다. 점유와 부재간에 서로의 재현을 다투는 동안에 의미의 울림만이 불안하게 표층에 걸려 있고 만다. 또 도시 건축의 '효용'과 관련해 현대의 종교보다도 엄한 자본주의적 강령을 두고 카라바지오(Caravaggio) 풍의(본문의) 은밀한 위반을 보인 셈이다.
9. 한스 반 마넨(Hans van Manen)의 안무, '콘체르탄테'중 두 사람의 몸 각 부분의 윤곽들이 순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다양한 '공동(hollow)'들의 표층적 의미구조는 힘, 긴장, 균형, 탈 중력 따위일 터다. 반면 이들의 심층적 의미구조는 우리의 인식에 대해 전혀 친절하지 않다. 보다 큰 시야의 여백들과 수시로 결합하여 낯설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의미들로 끝없는 '결합'의 경로를 더듬을 뿐이다.
7.영화 '콰이단(Kwaidan, 고바야시 마사키)' 중 사실 누군가의 안면이 인식되는 메카니즘은 아직 구체적으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얼굴의 기표는 마치 이 장면의 문자들처럼 우리에게 일단은 친숙한 코드들의 복합체로 의식 속에 저장될 것이다. 이의 내적재현을 통해 안면의 구조는 우리에게 나름의 '의미'들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처음 보는 얼굴은 이른바 에피소드의 형식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타인의 안면처럼 내 작업의 메타 언어적 공동(mata-hollow)은 쉽게 퍼올려지지 않는 인식의 깊은 우물구조에 가깝다. 공간이 타자의 인식을 포획하려들기보다는 이에 거리를 두는 한편 낯선 에피소드들의 연속된 구조에 그 초점이 닿아 있기 때문이랄까.
10.칠리다(Chillida)의 공동(hollow) 이 작업의 중력과 무게와 밀도, 깊이, 비례, 형상, 스케일, 질감, 온도감, 가촉성(tactility) 등 하위코드들이 이루는 언어의 외시적 구조는 하나의 의미로 응고되지 못한다. 애초에 이들 간의 언어적 결합 규칙이 전제된 바 없기 때문일 거다. 오히려 불가해한 작업과정과 시간, 또 도려내어진 부분의, 공동(空洞)의, '부재'의 재연 등과 관련한 내포적ㆍ비언어적 구조가 이 작업의 의미경로를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건축에 의식적으로 삽입되는 공동(hollow) 역시 근-현대 건축의, 지성과 논리로 무장한 이른바 외부공간의 직태와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