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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억이담긴 풍경 원문보기 글쓴이: 마루한
한국인 최초 사막 마라톤 우승자 안병식 씨의 트레킹 제주 '오름'에 오르는 368가지 방법 |
제주도가 아름다운 것은 ‘오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들은 제주도의 남다른 탄생의 비밀과 아픈 근·현대사의 기억, 그리고 오름 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제주도의 비경까지 담고 있다. 매일 매일 오름을 바라보며 잠들고 깨어나는 세 사람, 사막 마라토너 안병식 씨, 제주 4·3항쟁 시신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문민영 씨, 그리고 한라대학교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강의하는 미국인 조이 씨가 트레킹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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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동부는‘오름의 왕국’이다. 동거문오름에서 바라본한라산과오름들.
2제주도의무덤은‘산담’으로둘러싸여있다.
3둘일때는걷지만혼자일때는항상뛰어다니는사막 마라토너안병식씨.
4제주방언으로‘송이’인스코리아는가벼워서 허공에던지면바람에날려떨어진다.
바람을 피할 방법이 없는 정상은 생각보다 추웠지만 오래전에 스스로 쏟아낸 오름들을 발아래 거느린 한라산이 펼쳐졌고 그 반대편으로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몇 번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무릎에 구멍이 날 듯 해진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제주 섬 처녀의 풋풋함이 오름의 정상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제주도 오름은 화산구의 형태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고 하지만 동거문오름에 서서 주변에 펼쳐진‘오름밭’을 바라보니 오름의 형태는 4 가지가 아니라 368가지, 아니 그 이상이다. 특히 동거문 오름은 3개의 분화구, 칼능선, 능선을 잇는 네 개의 봉우리와 새끼오름(알봉)을 거느린 복합형 화산이다. 올라가면서 바라본 모습, 올라서서 바라본 모습, 내려오면서 바라본 모습이 모두 다르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와야 했지만 오름을 오를 때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의례가 하나 남아 있었다. 오름의 정상부마다 위치한 굼부리(분화구)의 중심에 서서‘제주의 기’를 느껴보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누군가가“하늘이 어떻게 보여요?”하고 물었다. 동그랬다.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돌며 하늘의 가장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분화구 안에 갇힌 하늘 아래, 그 작고 작은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전율,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오름 마니아’혹은‘오름 오르미’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노루를 쫓아 구름에 가 닿다
다음 날 우리가 선택한 오름 트레킹 대상은 표선면에 위치한‘큰사슴이오름’이라고 불리는‘대록산’이었다. 사슴이 올라가는 오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멀지 않은 곳에‘작은사슴이오름(소록산)’이 있다. 표선면에서 태어난 안병식 씨는 제주시로 이사하기전까지 이 두 오름을 오르내리며 성장했다. 사정이 생겨서 함께하지 못한 문민영 씨의 자리를‘넘치게’채워준 조이 로지타노 Joey Rositano 씨를 만나 대록산 자락에 접어들자마자 거짓말처럼 노루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따라잡을 수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걸음이 갑자기 급해졌는데, 한라대학교의 영어와 스페인어 강사 조이 씨는 익숙한 듯, 무심한 듯 천연했다. 미국 테네시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그는 친구가 보내준 제주의 사진들을 보고 망설일 것도 없이 당시 살고 있던 스페인을 떠나 1년 전 제주로 왔다. 그는 엄밀히따져‘한국’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에 관해서라면 나보다 한 수위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오름은‘물찾오름’인데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 분화구에 물이 고여 화산화구호를 형성하고 있는 단 9개의 화산 중 하나다.
정상을 지나 반대편으로 내려오기까지 3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대록산 반대편 자락에는 무덤들이 마치 기하학적인 문양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제주도의 오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풍경이 무덤이다. 묘지를 둘러싼 사각의 돌담인‘산담’은 제주도 특유의 무덤 양식인데, 산담에는 반드시 신이 출입할 수 있는 신문 神門이 나 있다. 조이 씨가 마치 수수께끼를 내듯‘제주의 무덤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돌하르방은 아닌 것’을 물어왔다. 대답은‘동자석’이다. 오름 트레킹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는 것은 내국인만이 아니다. 800여 명 규모로 추정되는 제주 외국인들의 커뮤니티 중에는 오름 트레킹 동호회가 있다. 안병식씨에게 사막은‘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설렘’의 대상이듯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은 그과정이‘자유’라고 말한다. 살면서 제주도에 몇 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매일 매일 하나씩 따 먹어도 1년이 넘게 걸리는 368개의‘자유’중에서 고작 2 개를 맛보았을 뿐이다.
아직 남은 자유가 많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