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信希有分 第 六 (3)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불고 수보리하사대 막작시설하라.
여래멸후후오백세에
유지계수복자가 어차장구에
능생신심하야 이차위실하리니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답하십니다.
“자네는 형상을 떠난 부처님의 진실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여래 멸후 후 500세라는 것은 여래가
열반한 뒤 다섯 개의 오백년 중에 제일
마지막인 제5오백년을 말합니다.
여래 멸후 2500년경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로 봐도
좋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로서
‘계를 가지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서
이 구절에 능히 신심을 내어서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여래는 형상이 아니야.
32상 80종호도 아니야. 또 80세를
살다간 역사적인 사실도 아니야.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난 것에 여래의 실체가 있어.
그것은 가르침이요, 진리요, 그 진리를
만 천하에 선포하신 자비와 원력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여래의 실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2천 5백년이 아니라 2만 5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그사람의 타고난 성품에 달렸고,
수행하기에 달렸고 공부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형상 아닌
것에서 여래를 보는 차원의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오백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멸후
제1 오백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
해탈이 성할 때입니다.
제2오백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
선정이 성한 때이고,
제3오백년은 다문견고(多聞堅固)
다문이 성할 때라고 표현합니다.
제4오백년은 탑사견고(塔寺堅固)
사원과 탑을 건립하는 사람이 많은
때입니다.
제5오백년은 투쟁견고(鬪諍堅固)라고
해서 자기의 설을 고집하여 서로
싸우는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꼭 시간상으로 그렇게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경전에서 굳이
500세를 잘라서 이야기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여년 후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 운동은 불교역사에 있어서
마치 부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온 것과
같은 커다란 사건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00년 뒤에
일어난 불교 역사의 큰 변화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에는
5백년이라고 하는 말, 5라고 하는
숫자를 특히 많이 씁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 삶의 과정, 또는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우수한 경지가 해탈이라면
그 다음은 선정이고 다음으로는 다문,
그다음은 탑사 또 다음은 투쟁입니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갈등과 투쟁과 시시비비에 온 정력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쯤 부처님
도량에 왔다면 보고 듣고 하는
그 사실만으로도 뭔가 마음이 달라집니다.
절에 모셔진 부처님이나, 탑이나
전각이나 아주 수려한 산세 등등
이런 것을 보고 상당히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시비와 투쟁으로써 일관하다가
절에 와서 그 환경만 보고도 ‘신선 같이’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문득 ‘이런 좋은 환경과 이런 좋은 시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존재할까’
좀 알아보자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책도 구해보고 법문을
들어보기도 하고 스님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불교가 어떤 것이기에 저런 근사한
시설이 천 년, 이천 년, 삼천 년의 세월에
걸쳐서 그렇게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빛날까’ 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많이
듣는다는 다문(多聞)입니다.
불교를 알고 싶어하는 것, 법문을 듣고
경을 공부하고 강의를 듣고 하는
이 사실을 다문이라고 합니다.
다문을 많이 하고, 이론도 많이 알고,
교리도 많이 알고 경전내용도 알게되면
이것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지.’
해서 좌선을 한다든지 사유를 한다든지
명상을 합니다. 그동안 이론적으로
공부한 것, 소위 다문한 것을 마음속에
아로 새기고 나의 인격으로 만드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근래에서는 주말참선이나 일요참선
시민선방에 참여해서 그동안 보고 듣고
많이 배운 것을 깊이 사유하고 나의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선정입니다. 선정이
깊어지면 결국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아주 대자유인이 되는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처음 500년은 해탈이 무성한 시대다’
‘그 다음 500년은 선정이 성한 때다’
‘다음 500년은 다문이 성한 때이고
그다음 500년에는 절 짓고 탑을 쌓고
하는 불사가 성한 때이다’
‘다음 500년엔 투쟁을 많이 한다’고
하였지만 이것을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볼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역으로 보아도 똑같아요.
우리도 세속에 살면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투쟁 안 하고는 못살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마음으로나 겉으로나 늘 투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세상과 다른 세상인
도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알게되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재하는가 알아보게 됩니다.
‘투쟁만 일삼는 그런 시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주 차원높은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심을 내어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세속적인 삶에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투쟁 속에 살다가도 어느 순간
한마디 탁 듣는 데서 귀가 열리고
눈이 문뜩 뜨여지고,
‘아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시비비에 취생몽사하며
산다고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취생몽사하며
살다가도 어느 한 마디에 홀연히
발심을 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