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숲과 금속벌레가 주인이 되어버린
도시섬에서
물 밖을 나온 물고기처럼
가픈 숨을 몰아쉬는
언제나 타인의 탈을 쓴
슬픈 피에로는
오늘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춤을 춘다......
몇일전부터 태풍 라마순의 영향으로 비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항상 뒷북
치는 당국의 대응앞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피
해가 막심하다. 맘이 아프다. 그렇다고, 이 태풍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
가. 사실 태풍은 지구의 열기와 지상의 오염을 뒤집어 엎는 역할을 한
다. 그래, 엎어라 제발 엎어라. 도시의 오염. 정치가의 오염. 세속의 오
염.... 태풍의 바람 때문인지 세상은 제법 깨끗해진 것 같다. 바람이 분
다. 가슴속에 바람이 분다.
사실 모놀과 정수는 진작에 가입했었는데,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그
래, 큰 맘 먹고 저번 동구능 답사 신청했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취
소하고, 이번 답사도 이미 신청완료되어 실망하던 차에 갑자기 결원이
생겨 우여곡절 끝에 막차를 타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 산 운동화가 몸
에 어색하듯 그러한 어색함을 애써 감추려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절은 이미 7월, 실록의 계절이다. 채 시간반도 안 달렸는데, 여름들판
의 실록은 들불처럼 일어나 내 시선 앞으로 다가온다. 일찍이 천재시인
이상은 이를 실록의 공포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실록의 공포다. 실록
이 이리 무서운 지 미처 몰랐다. 온통 실록을 무기로 감싸면서 점점 조
여온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런 실록의 기세 앞에선 그도 역
시 이방인일뿐이다.
첫번째 일정은 한국자생식물원이다. 자생식물이라. 무심 무심 무심했
구나. 그래, 우리 산하에서 엄연히 자리잡고 있는 그들을 그동안 너무
도 몰랐구나. 정말 정겨운 한글 이름들이 눈 앞에 멈춘다. 하늘매발톱,
솔나리, 술패랭이 등등. 그리고, 개불알꽃. 허 그놈 참, 이름한번 거시
기하네. 물론,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사실 너무 종류가 많아 일일이 그
들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나. 그리고, 이름 모
를 야생화가 더 정겹지 않은가.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그들이 묵묵히 우
리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 또한 의미있으리라 생각하며, 김수영
의“풀”을 읆조려 본다.
풀
김수영 詩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東風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처음이라 늦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부산떨고 나오느라 아침이 부실했는
데, 갑자기 뱃가죽이 등하고 키스하려고 한다. 답사집에 따르면 오대산
맛집에서 산채비빔밥을 먹는다고 하는데, 입안엔 이미 군침이 그득하
다. 산채비빔밥에 도토리묵, 토속주. 아, 행복해. 역시 맛이 있군. 일찍
이 문화의 알파와 오메가는 음식이라 하지 않았던가. 매양 화학 실험의
마루타로 이미 혀는 맛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이처럼 토속음식
으로 샤워하다보면, 잃어버린 본능이 살금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맛있게 잘 먹었슴다. 금강산도 식후경했으니, 다음으로 출발.
다음은 월정사다. 월정사라. 달의 정령이 머문 곳쯤되겠군. 일주문을
지나 한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전나무 숲길은 가히 일품이다. 간간이 흩
뿌리는 여우비는 전나무의 향취를 울어내어 그동안 매연으로 입을 다물
고 있던 피부조직들을 간만에 환호 지르게 하고, 너나 할것없이 전나무
내음을 빨아드린다. 아마도 전나무 마사지로 피부는 10년을 회춘했으리
라. 그리고, 잠시 전에 보았던 이름모를 자생식물들이 조용히 자신의 존
재를 알린다. 그래, 알아. 너도 있었구나. 이처럼 때론 풀과 때론 태풍
으로 요동치고 있는 수룡들과 희롱하면서 월정사 경내로 유유히 들어가
고 있다.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불이문). 수미산 3天을 하나씩 통과하
면서 세속의 번뇌를 털어버린다. 오대산 월정사는 육이오로 불타고 최근
에 불사를 다시 해 전체적으로 품격이 떨어진다. 왜 이리 눈에 거슬리
는 것들이 많은지 실망 그 자체다. 한암과 탄허 등의 큰스님들을 배출
한 절치고는 정말 아니다. 비교적 작은 면적에 도솔전(적광전)은 제 분
수도 모른체 크기만 해 그 허세가 가엾고, 지나치게 치장한 화장(단청)
과 악세서리 등은 상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불귀신 신세를 면한 앞마
당의 월정사 8각9층탑의 위용이 옛절의 품격을 다소나마 느끼게 한다.
길눈이 이종원님의 자세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
다. 근데, 왜 8각9층탑이지. 8각이라.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사방
(즉, 동서남북)이 아니라 10방(주역의 8궤+위아래)이다. 그러니, 8각은
모든 방위를 막론한 것일테고. 9층이라. 9는 동양에서 최극수로, 이는
양으로 하늘을 뜻하는데, 이는 하늘 두루를 상징하는 것일테니. 아마
도, 탑은 즉, 부처와 동격이니 부처의 진리의 말씀이 모든 방위를 초월
하고, 저 33천을 두루 미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걸 상징하는 걸
까. 그리고, 저 귀퉁이의 풍경들은 부처의 음성이리라. 그리고, 엄청난
사자후를 토해 내고 있으리라. 그런데, 이 어리석은 중생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진영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엔 이
절집의 참된 주인들이 기거하고 있다. 방한암 선사, 탄허대율사. 한암
큰스님의 영정 속에선 빛이 나오는 것이 같다. 맑고 밝은 눈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파장이 일어나 탄허스님에게 했던 것처럼 잡아 당기고 있
다. 하지만, 이 또한 세속의 티끌에 마비된 객은 요지부동이라 미련없
이 발길을 돌린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무거운 다리를 옮길 수
밖에. 내려오다 보니, 절집 난간이 온통 구름문양이다. 마치 공중누각
을 형상화한 것처럼. 그래, 이제 하늘을 내려가야지. 그리고, 살포시 담
장이 이어진다. 사실 우리 담장을 볼때마다 감탄한다. 인공적인데, 아
주 자연스레 내려가는 그 모양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고, 집안을 살짝
이 안은 것처럼 안온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때론 폐쇄적이고 때론 개방
적인 그 이중성이 예술이다.
다음은 마지막 일정이란다. 원래 일정상으로는 적멸보궁까지 포함되었
지만, 항상 이런 단체답사는 시간에 쫓기기 마련임으로 아쉬움을 접어
야 한다. 우리 대장께서도 아쉬운 지 ‘이리 여백을 둬야 다시 올 게 아
니냐’며 한마디를 덧붙이신다. 그럼요, 다음에도 또 와야죠. 아니 자
주 와야겠죠. 상원사. 세조, 방한암 선사. 그들의 이야기가 전설이 된
사찰. 상원사라. 아마도 세조와 관련된 원당사찰이니, 문수보살을 우르
러 보는 사찰정도일까. 하튼, 아주 높은 곳에 모셔져 있다. 그에 앞서
부도로 향한다. 이 사찰을 대표하는 두 선사가 모셔져 있다. 당연히 한
암과 탄허스님. 물론, 요즘 만들어져 여러모로 미술적 가치는 떨어지지
만, 유현님의 멋진 설명은 이러한 실망을 앗아간다. 참으로, 대단한 식
견이다. 다시한번 캄사. 사실 상원사하면 상원사동종이 따라 붙는다.
그 정도로 이 종은 세계 최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보호각으로 그 모
습이 희미하다. 이런 제길. 이게 뭐야. 차라리 보여주지나 말지. 종은
포뢰가 울어줘야 되는 것 아닌가. 포뢰가 신나게 울어 줘야 중음신도 잠
시 한번 쉴게 아니겠어. 에이, 못난 후손들 땜시 벙어리가 되어버린 포
뢰가 처량해 보인다.
침묵에게 묻는다.
너는 어이하여
입을 귀우리지 않고
너는 어찌하여
귀를 다물었느냐 ?
소리없는 아우성
침잠된 절대고성아 !
침묵에게 묻는다.
침묵이여 ?
침묵이여 ?
너의 침묵을
말하여라.
너의 말없는 말을
깨우거라.
너의 아우성과
너의 절대고성을
말 많은 입과 귀에게
울리거라.
그들의 입이
멀도록.....
그들의 귀가
침묵하도록...
상원사 건물은 특이하다. 기단이 이단으로 대단히 높다. 그래, 상당히
위압적이다. 마치 궁궐을 연상케 한다. 아마 세조의 입김 때문 아닌가.
하여튼, 법당 안은 행사가 있는지라 볼 수 없고 잠시나마 기단 위를 올
라가 본다. 그러자 눈 언저리에 산봉우리 선이 걸친다. 그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리 높이하니 그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것 같
다. 오대산은 달의 형국이란다. 동양, 특히 한국은 달 이미지가 강한
데, 달은 슬픔, 정한, 여자 등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 법당에서 밤 늦
게까지 참선하고, 잠시 일어나 산등성이를 본다. 별들이 쏟아지고, 달
은 시시각각 카드섹션을 하며 우주쇼가 벌어진다. 아,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상념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세속의 인연을 잊
어야 하는 선사들의 그 신념이 부럽다. 한암선사여. 당신의 눈은 달처
럼 처연했지만, 당신의 심안은 손끝의 달이었군요. 끊임없는 상념들이
지나간다. 역시 하수는 어쩔 수 없어. 이것으로 바람따라 찾아온 천년
의 숲길은 끝났다. 이 숲길을 거닐면서 비속에서도 침묵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생존을 지속하고 있는 풀을 보았다. 그리고, 최근에 발표한 김지
하 시인의 빗소리가 울린다.
빗소리
김지하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
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
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
私産된 채로 드러나
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
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침묵으로 나직이 공모하듯
숨어 있다
빗소리는 그러나
침묵을 연다
숨어서
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
나의 침묵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