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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신앙의 개념과 유형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태조 이성계의 왕릉 건원릉에서 바라본 전경. 풍수의 요건을 두루 갖춰 부드럽고 안온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 묏자리를 정한 뒤 시름을 덜었다는 뜻에서 ‘망우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 풍수신앙의 개념
풍수(風水) 이론은 땅의 이치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체계다. 풍수(風水)라는 용어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비롯된 말이다. 풍수 이론에서는, 땅 속에 있는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되기 때문에 바람을 막아 갈무리하고 물을 얻어야 자연 속의 기운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중국 진나라 때 곽박(郭搏, 276~324)이 쓴 『금낭경(金囊經)』에 의하면, “기(氣)는 바람을 맞으면 분산하고 물은 경계에 이르면 멈추게 된다. 옛사람들은 기가 분산되지 않도록 모으고 물을 멈추어 얻고자 했다. 따라서 풍수의 방법은 물을 얻음이 첫째요, 바람을 막음이 그 다음이다.”고 했다. 바람과 물의 운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 관념이 음양오행 등과 결부되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체계로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풍수지리설이다.
물의 이용, 주거지, 경작지 선정과 같은 환경의 적지(適地) 선정 의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구상의 어느 종족이나 마음 속에 공유하는 지리학적 사고다. 산천숭배나 자연인식 태도도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사고체계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것을 더욱 체계화해서 다각도로 적용하고 특화시켜왔다. 이와 같은 동양의 적지 선정 이론이 바로 풍수 이론이다.
풍수설은 오랜 기간 지배계층의 정치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학문, 사상, 민간의 생활철학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현상과 연계되어 적용돼 왔다. 이런 까닭에 풍수에는 복합적인 측면이 어우러져 있다. 풍수, 풍수설 등의 명칭만이 아니라 풍수지리(風水地理), 풍수사상(風水思想),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 풍수신앙(風水信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풍수 관련 명칭은 비슷한 의미를 공유하고 있지만, 약간씩 다른 국면을 지칭할 때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풍수나 풍수설은 일반적인 사실과 이론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해당한다. 풍수지리 역시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리적 측면을 주목한 용어이며, 풍수사상은 풍수설의 이념과 기저에 담긴 사상 철학을 강조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풍수도참설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연계해 풍수이론을 적용해서 설명하는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며, 풍수신앙은 풍수설의 종교적인 측면을 주목해서 설명할 때 사용된다.
풍수 이론의 여러 맥락 중에서 가장 기층적인 전통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풍수는 산천에 초월적인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구현시키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술․종교적인 현상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자연인식태도나 이론이 아니라 주술․종교적인 측면을 담고 있으므로 여러 영역에서 지속적이고 폭넓게 전승될 수 있었다.
풍수신앙은 풍수지리를 믿는 민속신앙이다. 풍수신앙에서는 산천의 지세, 맥락과 형국, 좌향(坐向) 따위를 보고 주택지와 묘지의 길흉을 점쳐서 미래의 복록(福祿)을 구하고자 한다. 풍수의 기본 원리는, 땅 속에 살아 있는 에너지가 있어 그것이 사람 몸 안의 피처럼 일정한 길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고 그것과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 정기가 모이는 곳에 집을 지으면 인물이 나고 가문이 창성하게 되고, 도읍을 정하게 되면 나라가 대대로 번성하게 되고, 무덤을 쓰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는다. 도읍지나 고을터, 집터, 무덤자리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다.
풍수신앙은 한국의 종교 전통으로 지속돼왔다. 공인 종교의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민간 생활 속에서 폭넓게 지지받으며 전승돼왔다. 풍수신앙의 지속은 경전 및 종교 전문가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풍수 경전이라고 할 만한 문서들이 중국과 한국에서 꾸준히 유포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십여 종에 이른다. 대표적인 경전을 들면 『금낭경(錦囊經)』, 『청오경(靑烏經)』, 『지리사탄자(地理四彈子)』, 『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 『설심부(雪心賦)』, 『양택대전(陽宅大全)』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은 풍수경전을 관찬(官撰)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풍수신앙은 풍수사, 음양가, 풍수승 등으로 불리는 종교 전문가의 활동에 힘입어 더 체계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 고려 건국을 도운 도선(道詵, 827~898)이나 조선 창업에 기여한 무학(無學, 1327~1405) 등이 대표적인 풍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풍수 전문가는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지리업(地理業)의 하나로 과거를 거쳐 행정 관료로 육성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묘지풍수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풍수 또는 지관(地官) 등으로 불리는 풍수 전문가의 활동이 널리 일반화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풍수신앙이 보편적인 종교 전통으로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수설 또는 풍수신앙에 대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건축학 분야에서는 주거 건축의 공간적 특성과 현대적인 가치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 분야에서는 풍수신앙의 역사적 전개과정이나 배경 그리고 사상사적 흐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민속학․종교학 분야에서는 민간신앙적 특성이나 조상숭배와의 관련성 등을 주목하고 있고, 지리학 분야에서는 서구적 관점과 다른 전통 지리학의 지평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국문학 분야에서는 풍수설화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관심은 풍수신앙의 비중을 잘 보여준다. 풍수신앙은 한국인의 심성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에 들어 그 비중이 약화돼 있지만 오랜 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의 삶과 죽음의 여러 영역에서 작용해온 풍수신앙의 기능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을 것이다.
2. 풍수신앙의 역사
풍수신앙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중국에서 풍수신앙이 전해졌다는 전래설이며, 다른 하나는 전래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풍수신앙이 발생했다는 자생설이다. 자생설의 경우 한국의 고대신화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고대국가 시기에 존재했던 풍수지리적인 사례들을 근거로 주장한다. 또한 풍수사상이 원초적인 산천숭배나 지모신(地母神) 신앙과 관련이 있고, 적지(適地) 환경을 선정하는 의식은 고유의 자연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전파와 상관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에서 전래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풍수사상이 존재했다고 보며 전래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부분이 있음을 강조해서 그것을 자생풍수(自生風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한국의 풍수신앙은 자생풍수의 기반 위에 중국의 전래풍수가 더해지면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중국 풍수의 전래 시기는 신라 통일 후 당(唐)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7세기 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풍수사상이 전래된 이후 기존의 자생풍수와 교섭 과정을 거쳤으므로 자생풍수와 전래풍수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풍수는 산보다 물을 중시하는데 비해 한국 풍수는 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중국이 인공 건조물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데 비해 한국은 자연의 형세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한국의 풍수신앙은 중국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적인 풍토에 맞게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수신앙은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며 전승되었다. 삼국시대의 풍수신앙은 신라 왕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음택(陰宅)풍수가 주를 이루며, 그 보급 상황도 왕가를 중심으로 한 상부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렇지만 당시까지는 풍수신앙이 별로 부각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전개는 신라 말 이후 고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도읍지나 양택풍수에 대한 부분이 강조되었고 조선시대 이후에는 음택풍수신앙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민간에 널리 보급되면서 사회적 쟁점이 되기도 했다.
풍수신앙은 신라 말 유행한 선종(禪宗) 불교와 연계되면서 폭넓게 유포되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불승(佛僧)이면서 풍수승(風水僧)이기도 했다. 당시 불교는 지방호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는데, 선종의 대중 포교 및 민심규합 등의 필요와 결부되면서 풍수신앙이 자연스럽게 발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와 풍수신앙의 접점에는 선승(禪僧)들의 활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인 도선은 한국 풍수신앙의 비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의 풍수신앙은 국가 공인 종교인 불교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풍수신앙이 고려의 건국과정에 기여를 했으며 도선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고려조에는 의식적으로 도선을 신비화시켰으며 국사(國師)로 추승하기도 했는데, 그 만큼 풍수신앙이 중요시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풍수신앙은 현실과 밀착됐던 대표적인 종교 전통이었다. 풍수서(風水書)의 관찬(官撰), 풍수 전문가의 관직화, 제도적인 육성책을 통해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았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풍수신앙은 여전히 중요시되었다. 조선 건국기의 한양 천도(遷都) 과정에서 무학대사의 역할과 풍수적인 해석이 크게 작용했듯이 이전 시기의 연장선상에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들어서는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층에까지 풍수신앙이 널리 보급되어 생활화되었다. 그리고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결합되어 더 폭넓게 수용되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신앙은 유교적 조상숭배와 연결되면서 더 확대되었다. 조선시대 묘지풍수신앙은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고 미래의 복(福)을 염원하는 자기구복(自己求福)의 종교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런 신앙체계가 널리 유포되면서 묘지와 관련된 소송이 줄을 이었다. 풍수신앙이 묘지 분쟁인 산송(山訟)이라는 이기적인 형태로 표출되면서 대사회적인 폐해가 되었다. 특히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적 움직임을 사도(邪道)라고 비난하던 상황이었으므로, 묘지풍수신앙은 집중적인 비판과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민간에 수용돼 있던 종교적인 생명력은 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허한 곳 보완하는 비보풍수가 자생풍수의 특징이다. 비보숲은 전국에 1340개 있다. 한반도서 꽃피운 풍수가 동아시아 전통지식으로 주목된다.
3. 풍수신앙의 유형과 내용
풍수신앙은 양기풍수신앙, 양택풍수신앙, 음택풍수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양기풍수(陽基風水)는 도읍이나 마을의 적지를 선정하는 취락풍수이고, 양택풍수(陽宅風水)는 개인의 집자리를 보는 주택풍수이며, 음택풍수(陰宅風水)는 죽은 이의 자리 곧 산소를 보는 묘지풍수(墓地風水)이다.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는 통하지만 적용 원리는 약간 차이를 보인다.
양기풍수와 양택풍수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거주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중요시 하는 조건은 약간 다르다. 주택의 경우 지기가 통하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하지만 마을이나 도시의 경우에는 지기가 집중되는 곳이 좋다고 여긴다. 특히 도읍지 선정은 국가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 국가적 차원에서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양기풍수는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채워 공동체의 안녕을 꾀하고자 하는 비보 신앙적(裨補信仰的)인 측면이 중요시 되었다. 이 경우 풍수신앙은 마을신앙과 겹합돼 전승되기도 한다.
음택풍수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묘를 주택의 연장이라고 여기는 관념과 관련 있다. 그런 점에서 양택과 음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음택은 양택보다 혈장이 꽉 짜이게 좁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음택풍수는 사자(死者)가 왕성한 땅의 기운을 누림으로써 후손에게 복을 준다고 여기는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상숭배나 효사상과 연계돼 널리 보급되었다.
풍수설의 구성은 산(山)․수(水)․방위(方位)․사람의 네 가지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풍수설의 원리는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 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기본 원리에 기초해서 길흉화복을 비는 길지 선정이 이루어진다. 간룡법은 산이나 산맥의 기운을 용(龍)으로 간주하고 길지를 탐색하는 원리이며, 장풍법은 바람이 들어오게 해서 저장할 수 있는 지형을 중시하는 원리다. 득수법은 땅속의 정기가 물을 타고 흐른다는 데서 연유한 원리이며, 깨끗한 물이 한동안 머물다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지형이 좋다고 여긴다. 정혈법은 정기가 뭉쳐 있는 혈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혈을 정확히 짚어 그곳에 묘를 쓰면 좋다고 해석한다. 좌향법은 혈의 위치를 찾는 방법으로서, 북쪽으로 주산(主山)을 등지고 남쪽으로 안산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가 좋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형국론은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을 상서로운 동물이나 관념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방법이다. 명당 자리에 와우형(臥牛形, 누운 소의 형국),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알고 품고 있는 금닭 형국), 행주형(行舟形, 운행하는 배의 형국)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형국론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주길흉론은 같은 자리라도 주인에 따라 길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이다.
풍수설의 원리는 땅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경험과학적인 논리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인 설명 위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이 적용되는 과정에는 신앙적인 측면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풍수 원리와 형국에 따라 인재나 재물 등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리상 완벽한 형국의 땅을 원하지만 이상적인 명당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우에 주술․종교적 기능을 지닌 장치를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원하는 형국을 조성하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돌탑 또는 숲을 조성해서 신령스러운 힘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보(裨補)와 불길한 기운을 눌러서 제압하고자 하는 엽승(厭勝)이다. 풍수설의 기본 이념이나 적용 과정에 길흉화복을 비는 주술․종교적인 사고와 해석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풍수신앙의 수용
풍수신앙은 계층을 불문하고 폭넓게 수용돼왔다. 오랜 기간 국가나 왕실에서 주목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종교 전통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상층의 수요만이 아니라 민간의 생활 질서와 통하는 점이 있어서 지속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다.
풍수신앙은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보편화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명당자리에 집을 짓고 살거나, 좋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사고가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좋은 집터를 골라 집을 짓고, 부모의 상을 당하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또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길흉(吉凶)을 점쳐서 이사를 하거나 이장(移葬)하기도 하였다. 한국 속담에 “잘 되면 제 복, 못되면 조상의 묏자리 탓”이란 말이 있다. 또한 “누구는 조상 묏자리 잘 써서 출세하였고, 누구는 할아버지 묘를 잘못 이장하여 망하였다.”는 식의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국인의 생활 속에 풍수신앙이 폭넓게 수용된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체계적인 이론과 심층적인 사상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경우 국가 차원의 관리와 풍수경전 발간, 풍수전문가의 활동에 힘입어 종교 전통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후대에도 상층과 식자층의 관심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다른 종교 전통 및 사상과의 원활한 관계 설정을 들 수 있다. 풍수신앙은 도교․불교․유교뿐만 아니라 무속신앙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와 같은 풍수신앙의 포용적 성격으로 인해 계층을 망라해 수용될 수 있었다. 이외에 한국적인 풍토와 풍수신앙의 부합, 잦은 전란이나 재난으로 인한 수요 등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수신앙은 별도의 신앙체계로 존재하지 않고 역사상의 여러 종교 전통과 연결돼 주술․종교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두드러진 양상을 보면 조상숭배와의 관계, 마을신앙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풍수신앙의 유형별 전개와도 연관되므로 주목된다. 전자는 묘지풍수와 연결되고 후자는 양기 및 양택풍수와 통하므로 그것을 중심으로 주요 전승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풍수신앙은 조상숭배사상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전승되었다. 풍수신앙에서는 부모의 해골이 명당의 생기(生氣)를 받으면 부모 자식 간에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자손에게 미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조상의 묘를 명당자리에 쓰고자 각별하게 노력했다. 조상의 유해를 명당에 묻으려는 묘지풍수신앙은 유교의 조상숭배와 자연스럽게 궤를 같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측면으로는 유교에서 채울 수 없는 구복신앙(求福信仰)을 제공했으므로 민간에 더 설득력 있게 수용될 수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묘지풍수신앙이 현세적인 목적으로 운용되면서 사회적인 쟁점이 되기도 했다. 묘지풍수는 조상에 대한 효의 극진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길지(吉地)와 관계된 현실적인 구복성이 더 큰 전제가 된다. 이런 까닭에 이기적인 사회현상을 부추기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이런 점은 현대에도 남아 있는데, 가끔 이슈화되는 부유층의 호화묘지 논란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풍수신앙은 또한 마을신앙과 결합돼 전승되었다. 한국의 마을은, 대부분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만큼 농업과 관련된 지형․기후․토양조건․물의 이용 등 자연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자연조건 이외에 전통 마을에서는 풍수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풍수에서 명당이라고 이르는 곳은, 험하지 않은 산지가 마을을 둘러싸고 하천이 마을 앞을 굽이치며 둥글게 감싸 안고 흘러 나가는 분지지형이다. 이런 풍수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땅 모양새를 문자나 상서로운 동물의 형상에 상응시켜 그 땅의 성질과 기운을 읽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형국의 상징적인 의미와 관련된 설화나 금기를 전승하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물(裨補物)을 조성한다. 예를 들어, 행주형(行舟形)에서는 우물을 파면 안 된다고 하며, 비봉형(飛鳳形)에서는 봉황의 날개가 되는 부분을 해치지 않는다고 하며, 또는 말이 물을 먹는 형국(渴馬飮水形)에서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조성하기도 한다.
마을신앙과 연관된 풍수신앙의 대표적인 형태가 수구막이다. 수구막이는 마을 앞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출구(出口)나 지형상 개방돼 있는 마을 앞부분을 은폐하기 위해 조성하는 조형물이다. 수구막이는 댐과 같이 물을 가두는 경직된 구조물은 아니다. 수구막이는 허전하게 열려 있는 부위를 가로막음으로써 댐이 물을 담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효과를 얻고자 하는 풍수적 의미의 구조물이다. 수구(水口)는 물리적 의미의 수로(水路)가 아니라 마을의 풍수지리적 형국이 지닌 상징적인 의미 즉, 복락(福樂), 번영, 다산, 풍요 등 상서로운 기운이 드나든다고 믿는 종교적 의미의 출구다. 이런 자리에 돌탑이나 비보림(裨補林), 솟대 등을 조성해서 공동체의 안녕을 얻고자 했다.
마을신앙 속에 적용된 풍수의 원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마을 지세의 허결(虛結)함을 방비하거나 보완할 수 있다는 논리에 기초한 비보(裨補)다. 마을 입구가 허전해서 마을 안의 재복이 흘러나가고 마을 바깥의 액이 무방비 상태로 침입한다고 여기는 지형에는 돌탑을 쌓거나 입석을 세우고 숲을 조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비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재액이 드나들 수 있는 원인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거나 다른 사물로 상쇄(相殺)시킴으로써 마을의 안정을 구할 수 있다는 논리로 행하는 엽승(厭勝)이다. 호환 방지를 위해 탑을 쌓거나 화기(火氣)를 품고 있는 산을 향하여 솟대를 세우고 소금단지를 묻는 것이 바로 엽승이다. 마을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조성된 비보물과 엽승물을 신성시 여기고 일정 시기에 의례를 수행한다.
(참고) 풍수신앙에 담긴 생태적 인식
지반 안정·물질 순환 생태학적 원리 담겨
풍수는 흔히 좋은 묏자리를 보는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실은 땅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하는 과학적인 사고체계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출간된 책 <전통생태와 풍수지리>(지오북)를 통해 이를 알아본다.
윤홍기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교수(문화지리)는 기를 받아서 잃지 않는 것이 풍수의 핵심 목적인데 기가 전달되는 길목인 산줄기를 파헤치려는 시도를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하는 식으로 마을의 변형을 막았다고 말한다.
또 환경용량을 넘지 않도록 개발을 억제하는 구실도 한다. 그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에 있는 양선부락의 사례를 들었다. 배에 해당하는 ‘행주형’ 풍수 형국을 지니고 있는 이 마을에는 집이 40호가 넘으면 운수가 기울지만 그 밑으로 내려가면 다시 흥한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마치 배에 실을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둔 것 같은 형국이 마을 개발의 한계를 두어 지속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윤 교수는 설명한다.
행주형 풍수형국에서는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우물을 파면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고, 실제로 이 형국인 평양에서 우물을 파지 않고 대동강 물을 길어 마셨다. 김선달이 한강이 아닌 대동강에서 물을 팔아먹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지형학적으로 타당한 측면이 있다. 박수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평양이나 안동 등은 강물이 구불구불하게 흐르면서 이뤄진 퇴적 지형이어서 이런 곳에 구멍을 뚫어 지하수를 채취하면 지반침하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풍수는 ‘환경’이란 용어의 원형인 셈이다. 최원석 경상대 교수는 “풍수가 마을의 자연환경적 조건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을의 풍수를 본다’는 말은 ‘마을의 환경을 평가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조선시대 풍수지식인(승려, 유학자, 지관 등)이 어떤 마을을 지나치면서 ‘이 마을은 풍수가 안 좋으니 동구에 숲을 조성하라’고 했다면 ‘마을의 기상과 경관생태적인 환경관리를 위해 숲을 조성하라’는 당시 환경전문가의 조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풍수는 생태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생태학)는 “터진 마을 앞을 수구막이로 막는 공간구조를 유지하면 영양물질이 내부순환을 통해 최대한 이용되는 물질순환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자연히 이런 곳에는 생물다양성도 풍부하다.
풍수에서 명당으로 치는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지형은 우리나라에서 광범하게 나타나며 지형 발달과정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박수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서서히 융기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융기하고 깎이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계단 형태의 지형이 생기는데, 먼 높은 산줄기부터 차츰 고도가 낮은 산줄기가 나타나고 산자락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사신사 지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신사 지형은 부분 안에 전체의 모습이 반복된다. 그래서 사신사 지형을 갖춘 서울 안에 다시 명당의 마을 터가 있고 그중에서도 명당 자리에 묘를 쓰는 것이 그런 예이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6220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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