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의 저자인 한동석 선생은 1911(辛亥)년 음력 6월 5일(양력 7월 3일) 寅時에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22世孫으로 父 한희춘(韓希椿)과 母 辛卯生(1891년) 李氏(李泰欽의 딸)와의 사이에서 3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태어날 때 다리가 먼저 나오는 逆産으로써 어머니 李氏가 難産 끝에 가까스로 先生을 낳았다고 전한다. 본명은 항렬의 돌림자인 欽字를 써서 국흠(國欽)이었으나, 1950년 월남후 동석(東錫)으로 改名하였다고 한다. 호는 東岩 또는 斗岩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유년기에 상기천면에 있는 오로리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15,6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에 집에서 정혼한 사람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이때 영흥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7,8세가 되던해 집안의 어른들이 공부를 그만시켜야 되겠다는 말을 듣자 공부를 하기위해 장진으로 도망을 쳤는데, 이때 어느정도의 한문공부가 되어있었다고 하며, 초혼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으나 이때 이혼을 하였다.
20때 초반기에는 만주를 유력하였고, 27,8세때에는 함흥으로가서 장사를 하였으며, 이때 재혼을 하여 딸 둘을 두었다.
32세 되던 1942년에 재취부인이 폐병으로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부인이 죽기전에 동무 이제마선생의 二傳弟子인 김흥제선생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부인의 병을 치료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고쳤으나 나중에 재발하면 못 고친다고 하였는데 후에 결국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게되자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흥제선생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조선 민주당 함경남도 조직국장(선전부장 이었다고도 한다.)을 맡았는데 음성이 좋고 언변이 뛰어나 이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6,25 발발이후 함흥에서 민선 경찰국장을 지내다가 중공군의 참전이후 월남을 하였는데, 40세 이전에 세 번째로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다.
월남한 이후 41세가 되던 1951년 부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사람과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였고, 이때 네 번째로 결혼을 하였으나, 그후 네 번째 부인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한다.
1952년 부산 영도에서 진료하는 틈을 내서 동양의학 전문학원에 강사로 출강을 하였고, 1953년에는 부산 영도에서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한후 정식으로 개원하여 仁溪漢醫院을 운영하였다.
1956년 선생의 나이 46세때 이웃에서 산부인과를 경영하던 이영자씨로부터 자신의 동생인 이옥자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여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장녀 敬淑氏는 결혼하여 일본에 살고 있고, 장남 仁哲氏는 중국에서 중의학원을 졸업한후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차녀 敬姬氏는 서울에서 살고있고, 차남 秉哲氏는 소재가 不明하며, 삼남인 英哲氏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이때 12월 서울로 와서 인사동 사거리에서 “韓東錫漢醫院”을 개원하였다. 이후『역학원론』의 저자이며 周易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한장경(韓長庚) 선생으로부터 설태훈등과 함께 주역을 배웠다. 한장경 선생과는 북한에 있을때부터 정치생활을 함께 하여 서로 아는 사이였다.
또한 서울로 이사한 이후, 선생은 계룡산 국사봉을 출입하면서 주역과 正易등을 심도있게 공부하였다. 이 당시 李正浩는 정역을 연구하기 위하여 김일부선생께서 말년에 은거하던 계룡산 국사봉에 강학의 터전을 마련하고 권영원, 유승국, 백문섭, 이용희, 김근수, 한장경, 김경운, 유남상, 육종철등과 더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역을 공부하고 토론하였다. 이때 한동석선생은 한달에 3~4회, 어떤 때는 1주일에 2회씩 방문하여 이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우주변화의 원리』에 나오는 정역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1960년을 전후하여 선생은 『내경』「운기편」,『주역』,『본초』등에 관한 내용을 한의사, 한의과 대학생등에게 한의원2층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몇 년간 지속하였으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 시간강사, 이후 전임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의 전반기에 선생은 많은 원고를 집필하여 한의학관련 잡지에 기고를 하였고, 일본의 天理敎大學에 6~7개월간 음양오행에 관한 원고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때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여름만 되면 계룡산으로 내려와 목욕재계를 하며 원고를 수정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1963년에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였고, 이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 입학을 하여 수료를 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집필하였으나, 석사학위를 받지는 못하였다.
53세(1963)가 되던 4월 1일 대한 한의사협회 초대 이사에 임명되었고, 56세 때에는 인사동에서 삼선교 돈암동쪽으로 이사를 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1966년 5월5일에 행림출판사에서 초판발행이 되었으며, 이후 이제마선생의 자손집에 전해 내려오던 동무 이제마선생의 『동의수세보원』친필주를 입수하여 『동의수세보원 주석』을 집필하여 성리회출판사에서 출판을 하였다.
비증, 고혈압, 중풍 등으로 2년여 투병생활을 하던 선생은 1968년 58세가 되던 봄에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병원에서 집으로 옮긴이후 자신의 태어난 날인 음력 6월 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병상에서 자신의 생일날 生時인 寅時를 넘기면 살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를 넘기지 못하고 서세(逝世)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도봉산 밑의 방학동 天主敎 墓地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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