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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들어 서기 위해 첫번째로 통과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의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4개의 기둥을 사방에 세우고 지붕을 얹는 일반 건축물의
형식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이다. 여러 개의 산문 중에서 유독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일주문을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 즉 일심(一心)을 의미함에서 연유한다.
즉 세속(世俗)에서 수미산(須彌山)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일주문의 지붕은 팔작 혹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주문의 규모는 일주삼간(一柱三間)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일주삼간이 뜻하는 바는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연관된다. 즉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普薩)로 나뉘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향하게끔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일주문에는 사찰의 현판을 걸어
놓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사찰의 성격을 표출하게 된다.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일주문에는 영축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좌우의 기둥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란 주련(柱聯)을 붙여서 삼보 중
불보사찰(佛寶寺刹)임을 나타내고 있다. 부산 범어사의 일주문은
일주삼간의 형식은 여타 사찰과 동일하나 굵고 긴 돌기둥을 세워
공포와 지붕을 얹은 점에서 매우 주목을 받고 있다. 돌기둥을
일주문에 사용한 예는 경북 영천의 환성사에 남아 있는
돌기둥에서도 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범어사의 일주문에는
금정산 범어사(金井山梵魚寺)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현판을 내걸어 선종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주문은 건물의
특성상 일반 건물에 비해 기둥의 직경이 매우 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옥개부의 과중함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 앞뒤에는
작은 직경의 기둥이나 가새 형태의 부재를 덧대어 지탱하는 형태를
취한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의 동서남북의
4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不二門)과의 중간 위치에 천왕문이 자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심(一心)이 구도자 앞을
가로막는 숱한 역경에 의해 한풀 꺾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은 사찰을 청정도량(淸淨道場)으로
만들려는 목적 외에도 역경을 거쳐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구도자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에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사천왕을 모신 건물인 천왕문 대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왕문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는 경우가
많다. 전남 영광군의 불갑사(佛甲寺) 천왕문이 이러한 예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따로 금강문(金剛門)을 천왕문 앞쪽에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좌우 1칸에는 천왕을 2구씩 봉안하고 중앙에는
출입 통로를 만든다. 동쪽을 수호하는 왕은
지국천왕(持國天王)으로 온몸에 동방을 표방하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붉은 기운이 도는
적육색의 몸에 노한 눈을 가진다. 오른손에는 용을 꽉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의 몸은 백색이며 웅변을 통하여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쳐 입을 벌리고 눈은 부릅뜨고 있다.
손에는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몸은 흑색이며 비파(琵琶)를 잡고 비파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은 곧 해탈문(解脫門)이다. 불이는 둘이 아닌 경지이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생사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선과 불선(不善), 색(色)과 공(空)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 근거는
법계의 실상이 여여평등(法界實相 如如平等)하다는 데 있다.
불교적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이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며
서 있다. 도리천은 불교의 28천(天) 중 욕계(欲界) 6천의 제2천에
해당된다. 그 위계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하늘 세계로는
아래에서 두번째 되는 곳이다. 도리천은 모두 33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33천의 인도음인 도리(tray)로 부르고 있다.
이곳을 다스리는 제석천왕은 원래 고대인도의 천신 인드라(Indra)
신이다. 벼락과 천둥과 비바람을 관장했던 마신(魔神)은 부처님의
감화를 입어 불교에 귀의한 뒤,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옹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제석천왕은 현실세계인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이다. 그는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오른손으로 불자(拂子)를 쥐고 왼손으로 금강저(金剛杵)를 받치고
있다. 불자는 중생의 번뇌를 털어 내는 상징적인 도구이고 왼손의
금강저는 탐욕과 죄악을 타파하는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불국사를 살펴보면 불이문의 조성과 이에 따른
사상적 투영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불국사의 불이문에 해당되는
자하문(紫霞門)에 도달하려면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계단을 거치게
되는데 이 다리들은 도리천의 33천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한 것이다.
즉 도리천에 올라서야 수미산의 정상인 불이문에 다다를 수 있다.
지하문이라는 명칭은 자주빛 안개가 서려 있는 문으로 부처님의 몸
빛깔을 상징하며, 자하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있는
곳 즉 불국정토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사찰의 주불전과 마주하는 곳에는 보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마당을 둘러싸고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다. 즉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찰의
배치는 원래부터 이러한 형식이 아니었다. 고대의 절터를
발굴하여 보면 금당이 사찰의 중심에 자리잡고 뒤로는 강당이
앞에는 출입문인 중문(中門)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회랑으로 빙 둘러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주불전인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에 의해 폐쇄되어 있다. 고대
절터는 주로 평지에 위치해서 회랑으로 구획된 경역을 이루었다.
고대 절터에서의 중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 등의 개창을 시발로
절이 산속에 입지하면서 누각의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은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이다. 누각의 기능은 출입
통로로서의 역할, 불전사물의 봉안 장소, 수장고 및 대법회가 있을
경우 불전에서 행할 행사를 준비하게 된다. 부석사(浮石寺)의
안양루(安養樓)는 누각의 전형적인 예이다. 안양루는 높이 차이가
나는 지형에 걸쳐 있기 때문에 누하부로 출입을 하고 있다.
누상에는 마루를 깔고 주위에는 난간을 둘러 여타 세간의 정자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좋은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 비슷한
예로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덕휘루(德輝樓)를 들 수 있다.
덕휘루도 경사진 지형의 석축에 걸쳐 있으며 누하부의 기둥 사이를
출입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누하부 출입은 경사진 지형을
처리하는 방법인 동시에 구도자가 누하부의 계단을 통해 중정에
올라서면서 극적으로 전개되는 공간의 효과적 연출기법이기도
한다. 이런 공간을 통과한 구도자는 더욱 종교적 경외심을 갖게
된다. 완주군 화암사(花巖寺)의 누각인 우화루(雨花樓)는 경사진
대지에 걸쳐 세운 중층의 누각이기는 하나 누하부를 출입 통로로
사용하지 않고 누각의 옆에 따로이 출입문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화루가 부석사의 안양루와 다른 점은 누상에 난간을 돌리고
사방에 판문을 달아 폐쇄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문.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통과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불이문
근처에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놓는
보호각 기능을 한다. 간혹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 등의 '불전사물(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이들은 조석예불 때 법고.운판.목어.범종의 순서로
치게 된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으로 불변의 진리로
중생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법고는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친다고 한다. 운판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원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 부엌이나
재당(齋堂)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하나 차츰 불전사물로 바뀌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배부분을
파내어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의식 용구로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난(阿難)이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을 모을 때
건치라 불리는 악기를 쳤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발전한 것이
범종이다. 범종은 욕계(欲界) 6천.색계(色界)
18천.무색계(無色界) 4천 등 모두 28천(天)을 상징하여 28번을
타종한다. 범종 소리는 하늘 나라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신호이며 고통 받는 중생의 제도를 염원하는 소리이다.
범종각은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와 같이 단층 건물 혹은 양산
통도사(通度寺)와 같이 이층의 누각으로 짓기도 한다. 누각일
경우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와 같이 하부는 출입문의 기능을
하고 2층에는 범종을 비롯한 불전사물을 놓기도 한다. 범종각은
방형평면이 일반적이나 전북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범종각은
십자형 평면을 전남 영광 불갑사(佛甲寺)는 다각형 평면의 특이한
모습을 하는 경우도 있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맬 수 있도록
가구를 튼튼하게 짜고 바닥에는 음이 공명하도록 구멍을 만들어
둔다.
금당이란 금빛이 나는 불상을 모신 전각이란 뜻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삼국시대의 절터를 발굴해 보면, 가람의 중앙 부분에
금당이 있고 그 앞에는 탑이 있으며 뒤쪽에는 강당들이 배치되어
있다. □자형의 회랑(回廊)이 이들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당시의 금당은 오늘날의 불전(佛殿)과는 조금 다른 평면형태를
지니고 있다. 옛날의 금당에는 중심에 불단(佛壇)이 자리하고
있으나 현존 불전에서는 불단이 중심에서 뒤로 물러난 위치에 놓여
있고 불단 앞에는 예불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반면에 옛
금당 평면에는 불단 앞에 여유공간이 없어 건물 내에서 예불하기에
힘이 든다. 고대의 금당 평면이 오늘날의 불전과 다른 점은 비단
삼국시대 절터 발굴 결과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고대의 건물과
예불의식을 보존하고 있는 일본의 오래된 사찰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법륭사 금당에도 오늘날과는 다른 불전의 명칭과
평면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 양양군 선림원(禪林院)의
금당터에도 중심부에 불단자리가 있다. 경주의 황룡사의
금당터에도 유명한 금동장륙삼존상(金銅丈六三尊像)이 놓이는 자리
밑에 거대한 돌로 만든 받침대가 금당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평면 형태의 상이점 외에도 금당 내에는 오늘날
사용하는 마루 대신에 방전(方塼)을 깔고 있음이 특이하다.
실제로 비교적 오래된 사찰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혹은 무위사 극락전(極樂殿) 혹은 장곡사 상대웅전(上大雄殿)
내에는 방전을 깐 모습을 보여 주어 고대의 금당에서 사용하던
유례를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의 금당에서도
본존상이 원형평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변 공간은
예불하기에는 좁다. 대신 석굴암에는 금당 전면에 전실(前室)을
만들어 예불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원의
미륵대원(彌勒大院)에도 석실금당(石室金堂)의 유구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도 석굴암과 같이 전실이 달려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내부에도 마루대신 금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방전이
발견된 바 있다.
대웅전은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이 세상을 밝힌
대영웅(大英雄)을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주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모니불 외에 여러 불보살들이 함께 모셔지기도 하는데
그 조합 형태와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대변되는 가섭(迦葉)과 다문제일
(多聞第一)의 제자인 아난(阿難)이 각각 선법(禪法)과
교법(敎法)을 상징하며 봉안된다. 둘째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수행과 원(行願) 이
광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협시하여, 모든 구도자들이 지혜와
행원에 의지하여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 준다. 셋째
과거의 연등불인 갈라보살, 현세의 석가모니 부처님, 미래의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시간을
달리하면서 불법으로 교화함을 나타낸다. 넷째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에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불과
고통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비의 약사여래를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대신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및 대원본존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전은 보통 단층의 건물형태를 많이
취한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은 조선 중기(1717년)에 중창된 단층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평면을 가지고 있다. 건물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조각을 한 기단 위에 놓여 있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다포식 공포 위에 지붕은 맞배 형식인
절충형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대웅전으로서는
드문 중층의 건물이다. 대웅보전은 대적광전 후면의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공포는 살미의 끝이 앙서형(仰西形)
으로 연꽃봉오리.용머리 등을 조각한 후기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
준다. 2층은 1층에 비해 체감율이 큰 모습이며, 2층 가구(架構)는
내부의 고주에 의지하여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대적광전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장엄된 세계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주로 화엄종 계통의 사찰에서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소의경전인 <화엄경>에 근거하여
화엄전(華嚴殿),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는 의미에서 비로전,
연화장세계가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란 의미에서
대적광전이라고도 부른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한다. 삼신이란 부처님의 몸을
본질(體).양상(相).작용(用)의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진리를
인격화한 진리불(眞理佛)인 법신(法身), 바라밀(波羅蜜)의 수행을
통해 완덕의 경지에 이른 이상적 부처님인 보신(報身),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따라 특정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한
화신(化身)을 말한다. 대적광전은 이들 삼신불이 삼위일체를 이룬
조화의 세계를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대적광전 내에는
비로자나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선종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의 삼신을
봉안하기도 한다. 비로자나불의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적광전 내에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며, 아미타불의 좌우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약사여래의 협시살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普薩)과 월광보살(月光普薩)을 봉안하게 된다. 즉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불보살 들이 모두 한곳에 모인
전각으로 자연히 삼신불만을 모신 일반 대적광전에 비하여 그
규모가 커지게 된다. 불타기 이전의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5불과
6보살을 봉안한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었다. 전라북도 완주군
위봉사(威鳳寺)의 보광명전(普光明殿),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의 대적광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法堂)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고 한다.
극락이란 명칭은 즐거움이 있는 곳(sukhavati)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안양(安養)으로 번역된다. 아미타불은 성불 전에는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法藏比丘)로서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佛國士)를 비추고(光明無量),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壽命無量).따라서 극락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한편 주불의 이름을 좇아
'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고해의 세상에서 번뇌하는 중생은 누구나
절대적 행복으로 충만되어 있는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추구하고자
함은 매우 절실하다.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염불을
중시하며 그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 깨끗한 연꽃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일반 중생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는
대상이었다. 그런 결과로 우리나라 사찰의 법당 중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불전이 극락전이다. 즉 1600년의
한국불교사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극락전에는 당연히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 좌우에는 고해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불의 뒤쪽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인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나 극락구품탱화 등이 현괘되어 있다.
극락전은 여타 불전과 특별히 다르지 않으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보듯이 남향의 무량수전에서 아미타불은 서향을 하는 점이
특이하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금산사 미륵전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이
미륵전은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도 하여 용화전(籠華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意譯)인 자씨를 취하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직 성불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네 가지 일(四事) 즉 국토를 정화하고 수호하며,
중생을 정화하고, 중생을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大乘的) 자비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 뒤에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6억7천만 년 되는 때에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때의 세계는 이상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인간은 수명이 8만 4천 세로 늘어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여 이들을 진리에 눈뜨게 하기를 6만 년, 그 뒤에
미륵불은 열반에 든다. 미륵전에는 미륵보살 혹은 미륵불을
봉안하는 2가지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미륵전의 대표적 건물로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을 들 수 있다. 미륵전의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
이라고 쓴 현판이 있어 미륵불 도량임을 나타내고 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도 3회의 설법을 상징적으로 가람배치에 연결하여
3원(三院) 가람의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혹은 용화세계를
상징화한 용의 초각을 기둥머리에 끼우고 용화전(龍化殿)의 현판을
달기도 한다.
전북 무주 백련사 원통전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에는
'원통전'이라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는 현판을 걸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 의하면 갖가지 고뇌를 가진 무량 백천만억의
중생이 관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칭명하면 그 음성을
관하여 모두를 해탈케 한다고 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이나 미래불인 미륵불과는 달리 현실 세계에서 괴로움을 겪는
인간의 음성을 듣는 절대자이며, 인간의 간절한 기원과 요구에
의해 나타나는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이다. 따라서 불교의 깊은
교리를 알고 모르고에 관계없이 고난에 처해 있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난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중생의 원에 따라 나타나는 자비로운 부처님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자비를 베푼다. 보통 관세음보살은
성(聖).천수천안(千手千眼).마두(馬頭).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준제(准提).불공견삭 등으로 분류된다.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봉안된다. 관세음보살은
왼손에 봉오리 상태의 연꽃과 오른손에 감로병(甘露甁)을 들고
있다. 불상과 함께 관음탱화도 걸려 있다. 관음탱화는
무위사(無爲寺)의 양류(楊柳)관음탱화, 해인사(海印寺)의
수월(水月)관음탱화, 도갑사(道岬 )의 관음응신도(觀音應身圖)
등이 대표적이다. 원통전의 건물형태는 다른 불전과 특별히
구별되는 점은 없다. 다만 전남 여천의 흥국사(興國寺)의
원통전은 법당 주위에 사방으로 빙 둘러 툇마루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의 불상을 모신
불전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약사여래는 과거에 12대원을 세워서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고, 재난(災禍)을
소멸시키며 의복.음식등을 만족케 하고 또 부처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묘과를 증득케 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약사여래 불상의
형상은 큰 연화 위에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施無畏印)을 맺고 있다. 약사여래의 좌우에는 각각
일광변조보살(日光遍照菩薩) 및 월광변조보살(月光遍照菩薩)이
협시해 있다. 불상 뒤에는 약사회상도가 탱화로서 현괘된다.
약사회상도는 약사정토(藥師淨土)의 특성을 도상화하고 있는데
<불설약사여래본원경(佛設藥師如來本願經)>에 의하면 일광보살,
월광보살과 12신장이 호법신장으로 되어 있다. 간혹 사천왕을
12신장과 같이 그리는 경우도 있다. 강화도 전등사의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법당이다. 건물형태는 팔작집의
모습을 하고 있는 18세기경의 건물이다. 이 불전의 공포 자체는
외 1출목 내 2출목의 다포계 공포로 구성되었으나 평방(平枋)을
생략하였으며 건물 전면을 제외하고는 공간포 대신에
화반(花盤)으로 교체하였다. 즉 다포계의 공포에 주심포계의
가구방식이 절충된 특이한 양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약사여래
불상문을 독존으로 봉안하였고 닫집도 생략하였다. 경남 창녕군의
관룡사(觀籠寺)에 있는 약사전은 정.측면이 모두 단칸인 매우 작은
규모의 법당이다. 이 집은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 형태를 한
15세기경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에는 오늘날과 달리 방전을
깔았다. 천정은 가구가 그대로 노출되는 연등천정이며, 실내에는
석조(石 )로 만든 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전남 승주군
송광사(松廣寺)의 약사전도 사방 1칸의 작은 법당이다. 17세기에
축조한 다포계 팔작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천정을 별도로
가설하지 않고 공포가 화려하게 천정을 메우고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불전이다. 여덟 폭의 그림에서 연유하여 팔상전
혹은 부처님의 설법회상(說法會相)인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
유래한 영산전(靈山殿)이란 명칭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첫번째
그림인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에는 탄생을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흰코끼리를 타고 북인도의 가비라 왕궁을 향하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두번째에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마야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산기가 있어
룸비니동산에서 부처님을 낳는 광경이다. 세번째는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으로 도성의 성문에 나가 노인과 아픔을 호소하는
병자와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를 동.서.남문에서 본다. 한편
북문에서는 출가한 사문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그림이다.
네번째 그림은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으로 스물아홉 살 나던 해에
사랑하는 처자와 왕위를 계승할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니다. 다섯번째 그림은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겪으며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광경이다. 여섯번째 그림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선정에 들어가자 내면적 갈등이
비등하나 맹렬히 정진하여 마군들에게서 항복을 받고 대각하는
광경이다. 일곱번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은 대각을 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케 하는 그림이다. 여덟번째 그림은 쌍림열반상(雙林涅盤相)
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법을 한 후에 '제행무상
불방일정진(諸行無常 不放逸精進)'을 최후로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팔상전이나
영산전에는 내부에 큰 불단을 조성하지 않고 벽에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팔상전에는 주불을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협시로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법주사 팔상전은
사천주에 친 벽체를 이용하여 두 폭씩 사면 벽에 걸었다.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아라한은 응공(應供).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춘
분들이다. 응공은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을 의미하며,
응진은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의 소지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한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봉안돼 있다. 그 좌우에 열여섯 분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형상이 배치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한의 숫자가 500명인 경우가 있다.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한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모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을 때 모인
비구가 500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의하면 이들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성불하리란
예언을 받은 분들이다. 나한전의 불단은 대웅전과 같은
불전(佛殿)과 달리, 좁은 폭의 불단을 'ㄷ' 자형으로 배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한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불단 대신에 헝겊으로 막은 소박한 불단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일반 법당의 불상 위를 장엄하는 화려한 닫집은
보이지 않는다. 닫집이 없이 소박하게 한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석가모니 부처님에 비하여 깨달음의 정도가 낮은 아라한을
주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평면의 간략함 외에도
나한전은 사찰의 중심에 배치되는 주불전에서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며, 건물의 외양도 주불전에 비해 격이 낮은 맞배형태의
건물인 경우가 많다. 전북 완주군의 송광사의 대웅전 후면에는
오백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십육나한을 모신 전각과는 달리
벽면에 여러 단을 설치하여 각양각색의 표정을 하고 있는 나한을
ㄷ자형의 불단과 함께 배열하는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며, 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고려 말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독립된 전각으로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 시대에 불교를
말살하려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죽은 부모를
좋은 세계로 보내기 위한 불교신앙과 의식만은 그나마 인정을 받게
됐다. 그 결과 망인의 형벌 및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인 시왕과, 망인을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과의 결합이
보다 쉽게 이루어져, 각각 독립된 채 존재했던 지장전과 시왕전을
명부전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략 조선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사바세계에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토록 하는
부촉(付囑)을 받았다. 지장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대한
서원(誓願)은 지옥문에까지 이르러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인간울 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일반
불상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는 두건(頭巾)을
쓰거나 삭발한 승려형의 2가지이다. 한 손에는 석장(錫杖)을 짚고
있다. 시왕은 <예수시왕생칠경(豫修十王生七經)>에 근거한 것으로
시왕에게 공양하고 죄업을 참회하는 칠재의(七齋儀)를 행함으로써
죽은 뒤에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부전은 사찰
내의 불전들 중에서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므로 건물의 크기나
양식도 주불전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전각 내의
배치에서도 차이가 난다. 즉 대웅전 등에는 중앙의 불단 위에
불상을 봉안하나 명부전에서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를,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고
그좌우에 명부시왕상.동자상.판관(判官) 2인.녹사(錄事) 2인.장군
2인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게 된다.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전각을 말한다.
대장전이란 편액을 단 건물로는 경북 예천군 소재의
용문사(籠門寺) 대장전과 전북 김제군 소재의 금산사(金山寺)
대장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은 인도의
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하였다는 고사와 용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 등에 의해 이곳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한 전각이다. 전각 내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윤장대(輪藏臺)를 좌우에 각각 1기씩
설치하고 있다. 윤장대는 그 모습이 특이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그 예가 유일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유물이다.
윤장대는 바닥에 돌둔테를 놓고 중앙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다. 이
기둥에 의지하여 하대(下臺).몸체.옥개부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에는 연꽃을 조각한 판재로 장식하고, 몸체에는 풍혈청판과
계자각으로 구성한 난간을 대고 기둥 사이에는 화려한 꽃살창과
살창을 대었다. 옥개부에는 닫집과 유사하게 짧은 기둥을 달고
연봉오리와 낙양각으로 장식하였다. 기둥 상부에는 다포식의
공포에 금단청을 하고 겹처마 형태의 지붕의 씌워 마감하였다.
금산사의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 전면에 위치한 목탑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목탑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만 지붕에
있는 복발과 원추형 보주(寶珠) 등의 일부 잔재에 의해 탑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본래 목탑에
불상과 경전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므로 목탑이 변화하여
현재의 건물로 되면서 대장전이란 전각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장전은 장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 건물이다. 전체
규모는 아담하나 건물 내부에는 작은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고주(高柱)가 2개 서 있다. 고주에는 후면과 측면으로
퇴량(退樑)을 걸었으며, 다시 45도 방향으로 귀잡이보로
연결하였다. 전체 건물규모에 비해 다소 어색한 이러한 가구연결
방식은 대장전이 원래 목조 탑이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대장경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이나 여러 고승의 저서 등을
집대성한 경전으로 고려 때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일심으로 대장경을 각인(刻印)하였으며 이를 보관하기 위한
경판고를 축조하였다. 오늘날 현존하는 대장경판은 경남 합천군
해인사(海印寺)에 있으며 고려대장경을 모두 81,258장의 경판에
양면으로 새겼다. 해인사의 대장경판고는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 형태의 수다라장(修多羅藏)이 남쪽에 동서로 길게
자리 잡았으며, 같은 크기의 법보전(法寶殿)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동서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두 건물의 마구리에는
정.측면 각 2칸의 잡판고(雜板庫)가 놓여 완전한 장방형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대장경판고의 바닥에는 흙과 소금과 숯이 켜를
이루도록 쌓여 있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방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판고의 바닥은 흙으로 마감하였고, 벽에는 통풍을 위한
창을 내었다. 위창은 작게 아래창은 크게 만들었으며 창문의
형태는 모두 살대를 끼운 모습니다. 남측 벽에 비하여 북측 벽의
광창(光窓)은 위 창문이 크고 아래 창문이 작다. 한편 북벽의
광창 위치에 따라 창의 크기를 칸마다 다르게 배치하여 어떤
조건에서도 별도의 인공적인 시설 없이 배기.환풍.제습 및 가습이
가능토록 과학적으로 축조하였다. 통일신라에서는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판석(板石)에 새겨 법전(法殿)에 보장하기도 하였다.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覺皇殿)은 석각(石刻)한 <화엄경>을
보장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대규모의 중층건물이다. 문무왕 17년(677)에 화엄사에 비치할
화엄석경이 완성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중건한
것이다. 내부는 통증으로 되어 있으며 불단 뒤의 거대한
후불벽에는 현재 탱화가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석벽(石壁)을 이루도록 장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단 뒤편에
화엄석경을 수장하던 관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와 불단 뒤를
물건 수납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선종(禪宗)사찰에서는 스승에 대한 공경이 지극하다. 종은
교종과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
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거나 염화미소의 고사에 발생의 의미를
근거하기도 한다. 즉 교종의 여러 종파가 소의경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데 반하여, 종의 특질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心法)에 크게 의지하는 데 있다. 따라서 선종에서의 조사는
후인들의 귀의처가 될 만큼 존숭 받는다. 조사에 대한 존숭의
방법으로는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을 세우고 행장을 남기기 위한
탑비를 건립하는것 외에 사찰 경내에 조사전을 짓고 조사의 영정을
봉안하여 제의를 받들기도 한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서는 조사전
대신에 국사전(國師殿)을 짓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남
송광사의 국사전을 들 수 있다. 이 건물 내에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송광사에 머물렀던 16분의 국사들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조사전이 없는 사찰에서는 영각(影閣)을 짓는다.
조사전은 사찰 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살림집에서의 가묘(家廟) 혹은 유교나 서원의
후묘선학(後廟先學) 배치법과 대동소이하다. 불교나 유교의
조령(祖靈)에 대한 제도는 유사했음을 엿볼 수 있다.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은 조사전 중에 대표적인 건물이다.
현존하는 몇 남지 않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을 취하며, 광창의
존재, 항아리형 단면의 보, 솟을합장의 존재, 권살하여 다듬은
포작의 수법 등은 흔치 않은 고려시대의 흔적을 보여 준다.
송광사 국사전은 역시 주심포계 공포를 가진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형이며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건물
내에는 탁자가 있고 비단으로 탁의(卓衣)를 입혔다. 그 위에
1725년에 왕성한 송광사 출신 16국사(國師)의 초상이 걸려 있다.
초상화 위에는 운궁(雲宮)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경북 예천군의
관룡사에는 조사당 대신에 간략한 형태의 영각을 따로 지어 조사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다.
불전의 뒤쪽 한켠에는 보통 사방 한 칸 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전각이 있다. 이 전각 내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한 칸씩의 건물일 때에는
각각 산신.독성.칠성을 따로 모시고 있으며 3칸의 건물일 때에는
삼성각이 된다. 독성(獨聖)은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계신 나반존자(那畔尊者)를 이른다. 나반존자는 삼명(三明)과
이리(二利)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생들의 복을 키우는
복밭(福田)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신다. 독성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 를 얻은 존재이다. 우리나라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에 구복과 외침 극복을 기원하는 나한재(羅漢齋) 를 많이
함에 따라 이것이 점차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한의 뛰어난 신통력이 현실적 행복을 강조하는 말세의
대중들에게 먹혀 들어 독성각이 사찰 내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 운문사 사리암, 서울 수유동의 삼성암, 합천
해인사의 희랑대 등이 독성각을 가진 대표적 사찰이다.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산에 대한 숭배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불교가 재래신앙을 수용하면서 산신을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조 중기 이후 신도들은 복을 많이 받고 돈 많이
벌고 가족 모두 질병 없이 부귀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장소로
산신각을 찾고 있다. 산신각 내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혹은 탱화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칠성각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七星)을 봉안한 전각으로 북두각(北斗閣)이라고도 한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불교에는 찾아 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에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칠성각 내에는 삼존불.칠여래.도교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불가에 출가한 수행자는 제반 절차와 학문을 먼저 익힌다.
부처님이 45년 간 설법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경전들을 근간으로
해서 교육하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강당이다.
고대의 절터에서는 보통 중심이 되는 건물인 금당의 뒤편인 북쪽에
강당을 배치한다. 소위 선묘후학(先廟後學)의 배치방법이다.
강당은 한꺼번에 많은 수의 학인(學人)이 공부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규모가 큰 건물인 경우가 많다. 금당 뒤편에 대규모의 강당
건물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의 절터가 평지에 위치하여 공간이
넉넉한 경우일 때가 많다. 후대에 선종(禪宗)이 유행하면서 절이
도성 등지에서 점점 산속에 위치하게 되어 절터가 지형상의
제약으로 좁아지면서 대규모의 강당 축조가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절터에서 볼 수 있던 절서정연한 배치를 갖춘 큰
규모의 강단 건축은 힘들어지고 지형 여건에 맞추어 적절한 위치와
규모로 조정, 변모하게 되었다. 불국사의 무설전(無說殿)은 강당
역할을 하는 건물로 고대 가람의 흔적이 그대로 잔존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무설전의 편액은 무수한 설법을 하는 곳 혹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법이 한가지라는 생각을 담아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자들에게 모여
앉으면 마땅히 해야 할 두 가지 일로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일과 침묵을 지키는 일을 권한 사실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사찰 규모의 축소로 인해 작은 사찰에서는 별도의 강당이
없이 요사채 맞은 편의 건물을 겸용해 사용하기도 한다.
요사는 사찰 내의 불전, 신중문 외의 승려의 생활과 관련되는
대부분의 건물을 총괄하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흔히 요사채라
불린다. 그 구성 요소를 살펴보면
승방(僧房).선방(禪房).부엌.곳간 외에 수각(水閣)과 측간까지
포함한다. 요사는 그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으로
심검당(尋劍堂), 말 없이 명상한다는 뜻에서 적묵당(寂黙堂),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된 설선당(說禪堂) 등이 대표적인
명칭이다. 노전채는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는 향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다고 한 고사(古事)에 따라 향적전(香積殿), 그리고
조실스님이나 노장 대덕스님의 처소는 염화실 또는 반야실(般若室)
등의 이름을 많이 붙였다. 옛 절터에서 요사는 금당의 뒷부분에
위치하며 궁궐의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방법과 흡사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요사가 법당의 전면에 배치되게 된다.
법당 앞에 요사가 배치되는 경우에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법당의 좌우에 대칭되게 배치하는 방식, 둘재 법당 전면의
한쪽에 요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부불전을 배치한는 방식, 셋째
주불전의 맞은 편에 요사를 배치하는 경우, 넷째 가람배치 자체가
일정하지 않아 요사도 불규칙하게 배치되는 방식 등이다. 요사는
건물의 성격상 사찰 내의 법당 건물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아 건물
규모나 장엄이 소박한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건물의 형식은
익공계임이 통상적이다. 기능상으로 툇마루가 넓은 경우가
많으며, 복합적 기능이 한 건물에 집합될 경우에는
ㄷ자형.ㄴ자형.I자형 등의 복잡한 평면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누각을 흉내내 누마루형식의 집모양을 취하기도 한다.
안동 봉정사의 요사채인 해회루(海會樓)가 그런 예이다. 요사의
기능 중 스님과 대중들을 위한 곳간도 필요한데 남부지방의 큰
사찰에서는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2층으로 건물을 지어
1층은 요사로, 2층은 마루와 방 그리고 곳간으로 활용하는 등 사찰
내에서 가장 세속의 건물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회랑은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건축물이다.
특성상 지붕은 갖추고 있으나 벽체는 한편은 폐쇄하고 한편은
개방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연결의 기능을
하는 건축물의 형태는 비단 사찰에서만이 아니라 세속의
궁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의 기능도 거의 유사하다.
신라의 거찰(巨刹)이었던 황룡사(黃籠寺)의 축조와 관련된 설화를
살펴보면, 원래 궁궐을 짓던 중에 꿈의 계시를 받아 궁궐 대신에
황룡사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설화는 궁궐의 배치와 고대
가람(伽藍)의 형상이 유사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세속의 왕인군주와 종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거소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폐쇄성과, 위엄을 갖춘 공간이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절터를 발굴해 보면 회랑의 존재를 확인해 볼 수
있으며, 회랑의 연결방식이 몇 가지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경북
경주군의 감은사(感恩寺) 절터에서는 중심 부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지, 후면에 정면 8칸 측면 4칸의 강당지를, 정면에 3칸
측면 2칸의 문지를 남기고 있다. 회랑은 이것들을 'ㅁ'자 형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회랑의 중간 부분에서 금당의 양측면을 연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회랑 형태는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불국사의 대웅전 일곽 에도 같은 유형으로 남아 있어 복원한 바
있다. 한편 부여 동남리사지에서는 감은사지 가람과는 달리
중앙의 금당과 남북 회랑을 연결해 주는 동서 방향의 회랑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유형은 군수리 폐사 발굴 혹은
금강사지의 발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절터는 3개의 절을 같은 자리에 배치한 형태를 취하고
있고, 회랑 역시 타 절터에서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금당과 탑지를 포함한 3개의 원(院)을 놓고서, 중앙원은
'ㄷ'자형을 아래로 놓은 형태로 회랑을 연결하였으며, 나머지는
'ㅗ'자형으로 전체를 연결하였다. 물론 금당과 회랑을 연결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사찰의 대부분이 심산유곡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물이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 다리를 놓을 필요성이 많았다. 다리는 물을
건넌다는 기능 외에도 사찰 입구의 다리를 지나면서 세속의 온갖
번뇌를 씻고 불국정토에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도 겸하고 있다.
한편으로 다리를 놓은 작업은 불교의 선업(善業)으로 공덕을
베푸는 일이 된다. 절의 입구에 놓인 다리는 평교(平橋)도 있으나
대부분이 홍교(虹橋)이며 교각을 겸한 누교(樓橋)형식도 있다.
전남 여천군의 흥국사(興國寺)입구에는 계곡을 가로질러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다. 인조 17년(1639)에 가설된 것으로 홍예
폭이 11.3미터에 이르며 가운데가 높고 양끝이 낮게 축조되어
자연스러운 곡면을 유지하고 있는 수작이다. 전남 승주군
선암사(仙巖寺)에는 계류를 건너는 곳에 무지개 다리가 둘 있다.
절 가까운 쪽에는 큰 다리가, 아래 쪽에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후에 다시 가설된 것이다. 다리의 곡선이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전남 승주군에 위치한
송광사(松廣寺)는 사천왕문을 지나기 전에 단칸의 반원형 홍예로
구성된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가 가설되어 있는데 이 다리의 이름이
삼청교(三淸橋)이다. 무지개 다리의 윗부분에 멍엣돌을 깔고
장대갓돌을 좌우 설치하였다. 다리 위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인 우화각(羽化閣)이 있는데, 이러한 누교(樓橋)형식은 매우
특이한 존재이다. 전남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泰安寺)의
능파교(凌波橋)는 사찰의 금강문을 겸한 누교이다. 계곡의 양쪽에
석축을 쌓고 여기에 의지하여 통나무보를 걸쳐 대고 직각방향으로
바닥판을 깔았다. 여기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을
지었다. 그 형태가 조그마한 문루를 연상케 한다. 경주의
불국사(佛國寺) 경내에도 석교가 놓여 있다. 즉 안양문 앞에 놓여
있는 연화교.칠보교 및 자하문 앞의 청운교.백운교가 그것이다.
이들 두 쌍의 다리는 계류에 직접 놓인 다리는 아니고 계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계단 중간 아래는 홍예를 틀고 그 아?
구품연지의 물이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불교경전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정토에
태어나는 자의 성격이나 행위의 차이에 따라 정토에서 태어나서
받는 과보(果報)에도 아홉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즉
상.중.하의 삼생(三生)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삼품(三品)으로
분류한 극락왕생의 아홉 가지 단계이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면 평생 지은 업(業)의 깊고 얕음에 따라 아홉 가지의 차등이
있는 연대(蓮臺)에 앉게 된다. 연지는 연꽃을 키우는 연못으로
연꽃은 불교의 연화세계(蓮華世界)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연화장세계라고 칭한다. 따라서
극락세계의 상징인 구품연지를 사찰 내에 배치하는 것은
극락정토의 성중들이 연지에 둘러앉아 설법(設法)을 듣는
연화회(連華會)의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초기에는
구품연지를 축조하기보다는 금당 전면에 석연지(石蓮池)를 놓는
간단한 방식으로 출발한 듯하다. 법주사(法住寺)의 석연지,
공주박물관에 옮겨 놓은 한쌍의 석연지,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석연지 등이 그 예에 속한다. 석연지 는 차츰 실제로 연지를
파고 원림을 조성하는 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서도 불사의 원지(苑池)를 중요하게
보는 구절이 있으며, 돈황벽화(敦煌璧畵)에도 건물의 전면에
배치한 연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의 연지 조영은
석연지, 수조(水槽) 등을 거쳐 익산 미륵사지의 연지, 정림사지의
동서 연지 등이 발굴을 통하여 조사.확인되었다. 정림사지에서는
동서로 나뉜 연지가 발견이 되었는데 크기는 동편 측 연지의 경우
동서 15.3m 남북 11m의 방형이며 호안은 석축을 쌓아 만들었다.
미륵사지의 연지는 남문지의 남쪽으로 약 300m거리에 노출되었는데
넓이가 약 5,500평의 거대한 규모이다. 이 연지는 특별한 호안의
석축 없이 자연경사면을 이용하였다.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앞에는 지금은 메워져 없지만 원래 원형의 큰 연못이 있었고
여기에 배를 띄우면 다리 밑의 홍예를 통과할 수 있는 커다란
구품연지가 존재했다고 한다.
계단(戒壇)의 본래 목적은 수계의식(受戒儀式)을 집행하는
장소로서, 수계자를 중앙에 앉히고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戒法)을 전수하는 곳이다. 따라서 단순한
묘탑(墓塔)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계단은 대승계단(大乘戒壇)이라는 신앙 표현의 한 조형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호계(護戒)를 위해 조성되었다. 이러한
예로는 통도사(通度寺),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대구의
용연사(龍淵寺), 금산사(金山寺) 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이 대표적인 유례이다.
계단은 초기불교 이래 인도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계단은 단의 중앙에 소탑(小塔)을 두었고 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소탑이 차츰 복발형
부도(覆鉢形 浮屠)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위대
(魏代)에 이미 입단득계(立壇得戒)의 의식이 행해졌으나, 이것이
도선(道宣) 의 <계단도경(戒壇圖經)>에 의해 사면방형 중층에
복발형 부도를 놓고 사자.천인상.제신상.용 등을 배치하는 것으로
정립되었다. 우리나라의 금강계단의 축조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통도사를 창건할 때에 계단을 설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도사의 계단은 654년 처음 세워진 이래 거듭된
중수(重修)로 당시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며, 지금의 계단은 일부
고려 때의 석물이 섞여 있을 뿐 조선시대 후기의
후보석물(後補石物)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형의 2중
석단의 중앙에 2매의 연화대석(蓮花臺石)을 중첩시키고 종형의
사리부도를 올려 놓는 고식(古式)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금산사의 방형계단도 상하 2단의 기단부와 상부의
사리부도(석종형) 등으로 구성된 점은 대동소이하다. 기단에는
천부보살상(天部普薩像) 혹은 천인상(天人像) 등을 조직하였다.
하부기단의 주위에는 난간
(欄干).사천왕석(四天王石).신장석(神將石)을 빙 둘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는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로, <화엄경>을
설파한 적멸도량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개의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의
대웅전,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의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에서 태백산
정암사(淨巖絲)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다.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인 대웅전은 특이한 건축 형식과
금강계단의 존재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적멸보궁이다. 통도사
대웅전은 1645년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평면형식은 이 전각 내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출입상의 정면과 예배상의 정면 양쪽 모두를 강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건물의 격에 맞추어 격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부의 불단과 천정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단청을 하여 장엄하고 있다.
석굴승원은 원래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이다. 초기의 인도 석굴승원은 번거로운 도시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곳에 자연암벽을 뚫어서 석굴을 만들고 그곳에서 승려들이
수도생활을 영위하던 곳이다. 이러한 형식의 석굴승원이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전파되어 4-5세기에 걸쳐
돈황(敦煌).운강(雲岡).용문(籠門)석굴을 조영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석굴승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백제의 서혈사(西穴寺), 동혈사(東穴寺) 등의 석굴승원의
유구를 남기고 있다. 이외에도 서산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도
석굴승원의 퇴화한 형식의 한 가지로 보인다. 경북 군위의 석굴도
서산 마애불과 유사한 형태의 석굴승원의 일례이다. 초기의
간략한 형태의 석굴은 발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중원
미륵리사원.경주 석굴암과 같은 완형의 석굴승원을 낳게 되었다.
중원 미륵리사원은 장방형의 돌로 인공의 석벽을 쌓았는데,
축조방식은 3단의 기단석을 쌓아 그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를
인방이 가로지르는 등 목조건축의 구성을 연상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인공 석굴의 상부에는 중층의 목조건물로 지붕을
씌웠다. 즉 인공의 석굴과 목조건축을 결합한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석굴암에서 목조건축과 융합한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순수한 인공의 석굴로 화강암을
이용하여 돔형식으로 축조하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마치 자연
형태의 굴처럼 마감하였다. 돔의 벽에는 10개의 작은 감실을 두어
보살좌상(菩薩坐像)을 봉안하였다. 석굴암 원형 공간의 전면에는
당시 방형의 전실을 만들었고 여기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하였다.
전실의 조각들은 일반 사찰의 금강문과 사천왕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갖추고 있다. 석굴암은 비록 인공의 석굴이지만
내부의 공간구성, 조각의 뛰어남, 보존 환경의 절묘한 통제 등으로
자연석굴사원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예술품이라 하겠다.
원당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 또는 사찰 내의 법당을
말한다. 이 법당에는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폐를 모셔두고
원주(願主)의 명복을 사승(寺僧) 으로 하여금 대신 빌게 한
것이다. 원당은 불력(佛力)에 기대하여 인간사의 길흉화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원당사찰은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 및 고려시대에서도 유행하였다. 신라 때는
원당전(願堂典)이란 관할 관청이 있었으며, 고려에서는 예종의
화상(畵像)을 해인사(海印寺)에 봉안하여 원당으로 삼았다.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새로이 내세운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사찰이 폐쇄되고, 요행이 남겨진 사찰들도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국왕
개인을 비롯하 궁중 내의 불교신앙은 좀처럼 없어지지를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불교가 철저히 봉쇄되었으나 지위나
출신성분을 막론하고 여전히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서 그 뿌리가
강했기 때문이다. 원당사찰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째 국가의 안위를 축원한다는 명분하에 건립되는
원당사찰로 황룡사의 구층탑이나 조선조의 원각사(圓覺寺)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둘째 능침수호사찰(陵寢守護寺刹)로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신성 왕후 김씨의 정릉(貞陵) 옆에 세운
현화사(玄花寺),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
옆에 세운 홍천사(興天寺),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호할
목적으로 세운 용주사(龍珠寺) 등이다. 셋째 내원당사찰로 궁중
내에 있던 불당을 말하는데 조선 태조가 1401년에 만덕전을
흥덕사(興德寺)로 만들고 교종 수사찰로 삼은 것 등이다. 넷째
위축원당사찰(爲祝願當寺刹)로 기존의 사찰을 지정하여 이를
원당으로 삼은 것으로 조선 태조 때의 진관사(津寬寺).세조 때의
건봉사(乾鳳寺)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섯째
태실봉안사찰(胎室奉安寺刹)로 쓰인 은해사(銀海寺) 등이다.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로서 묘탑(墓塔)을 의미한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입멸한 이후 여덟 나라 국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8분하여 각각 자기 나라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고 하며
이것이 불교에서의 탑의 기원이다. 그 이후 아쇼카왕의 출현과
함께 많은 수의 탑이 조성되는데 유명한 유적으로는 산치의 탑을
들 수 있다. 산치의 탑은 전체적으로 복발형(覆鉢型)으로
밑에서부터 기단.복발.평두(平頭).산개(傘蓋)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내부에는 불사리(佛舍利).불아
(佛牙).불발(佛髮) 등을 넣도록 되어 있다. 평두 위에 장치한
산개는 당시 인도의 왕후.귀인들이 '산(傘)'을 존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부처님의
유물을 봉안하는 묘탑에서 출발한 탑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졌으며 그것에 따라 형식도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부처님의 입멸 이전에는 탑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으며 자연히
가람은 승려들이 거처할 수 있는 승방 즉 승원을 위주로
형성되었다. 초기의 기원정사.죽림정사 등을 승원의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에 부처님의 묘탑으로 탑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사찰
배치에 있어 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묘탑으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대신에 숭배의 대상으로
사찰 내의 위치를 차지하던 탑도 불상(佛像)의 등장과 함께 가람
내의 배치에 변화가 오게 된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그
숫자에 한계가 있으며,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불상이 출현하여
이를 모신 당우를 짓게 됨으로써 비로소 승원.탑원.금당원의 세
가지를 포함한 가람이 형성되게 된다. 가람은 삼국시대에 전파될
때 이미 탑.당 및 승원을 갖춘 형식이었다. 이때의 가람 중에
탑원.금당원.승원이 분리된 초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고구려의 절터로 알려진 정릉사지(定陵寺址) 등에서 3개의
원으로 분리된 가람배치를 발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원시불교시대는 승려는 무주처(無住處)를 주거로 하였으므로
일정한 주거처로서 승방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 휴식처
등의 필요에 따라 간소한 형태의 승방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의
부처님은 1일1식1숙(一日一食一宿)을 원칙으로 사방으로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소박한 승방이었다. 즉 비바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으면 족했다. 기원정사.죽림정사.대원정사 등이 모두 이런 류의
승방이었다. 한편으로는 석굴을 승방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석굴 승방은 두 가지 형태를 가졌다. 첫째는 차이티야(caitya)로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이루어진 말발굽형 혹은 원형의 단일한
홀(hall)을 의미한다. 전실에는 대개 석주(石柱)가 열을 지어
있고 전실과 주실 사이에는 복도가 있고 그 위에 전실에 햇빛을
주기 위한 채광창(採光窓)이 있다. 차이티야는 단일의 성격을
갖는 승방 혹은 예배당의 기능을 가졌다. 보통 주실 안쪽의
반원형 평면의 중앙에는 스투파(stupa)를 안치하고 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중앙에 안치한 스투파의 장식이 화려해 진다. 둘째는
비하라(vihara)로 굴의 평면이 방형(方形)으로 굴 내의 좌우
양측에 승방을 두어서 승려가 집단으로 기거하며 수도하도록
구성되었다. 승려의 기거 목적으로 출발한 승원은 부처님의
입멸로 말미암은 탑파와 불상의 등장으로 이에 따른 탑파의 조성과
불상을 봉안하는 당우를 가지면서 배치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고구려의 정릉사지에서는 당, 탑 및 승원의 3가지 영역이 구분된
배치 형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대 가람에서는 승원이
금당과 강당의 후편에 많이 위치하는 가람배치를 나타낸다. 그
뒤에 사찰이 산속으로 들어가 소위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의
간략한 가람배치로 바뀌면서 승원 즉 승원방은 불전의 전면좌우,
불전의 맞은편 혹은 불전 전면의 한쪽 등에 축소된 채로 배치되게
된다. 그러나 후기의 사찰이라 하더라도 대규모의 사찰에서는
이와 관계없이 적절한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주로 백제의 가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형식이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원년(384)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서 전래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한산주에
불사(佛寺)를 창건한다. 이것이 백제가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정확한 가람배치에 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
후 백제는 공주.부여로 남하하면서 주로 이들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가람을 조영하였다. 이들 백제가람들 중에서
군수리사지.정림사지.금강사지 등을 발굴한 결과 소위
'일탑일금당식'의 정연한 배치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는 1935년과 1936년에 발굴.조사된
옛절터로 와당 및 중공유문전(中空有紋塼)이 출토된 백제의
절터이다. 여기서는 추정 탑지(塔地)의 북쪽에 금당지, 남쪽에는
중문지가 일직선상에 놓였으며 금당지의 북쪽에는 큰 규모의
강당지가 자리하고 있다. 강당지의 좌우에는 회랑이 아닌 별도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한편으로는 중문지의 좌우에서 남쪽 회랑이
북쪽으로 꺾여 강당지까지 연결되고 있다. 강당지 좌우의 두 개의
건물지는 종(鐘)과 경루지(經樓址)로 추정된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사역(寺域)의 중심에 오층탑이 서 있으며 그
북쪽에는 금당지가 2중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남쪽에 중문지가
배치되었다. 금당지와 중문지 사이에는 2개의 연못이 노출되었다.
강당지는 금당지의 북쪽에 현재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놓여 있는
곳에서 노출되었다. 회랑지는 중문에서 강당지와 연결하여
ㅁ자형으로 사역을 둘러싸고 있다. 금강사지(金剛寺址)는 앞서
설명한 가람배치와 유사하나 다만 강당지의 좌우에 별도의 건물이
없어지고 북쪽 회랑으로 연결되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 방식은 백제가 많은
영향을 미친 일본 비조시대(飛鳥時代)의 사찰인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가람배치와 같다.
고구려의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의 이웃 국가인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신라의 쌍탑이금당식의 배치와는 달리 소위
일탑삼금당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구려에 정식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것은 소수림왕 2년(372)에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함께 경전과 불상을 보내면서부터이다. 그 후 374년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 왔고,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375년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를 짓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불사 조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영탑사(靈塔寺) 및 평양에 9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평양 부근의 몇 개의 사지 발굴결과를 통하여
고구려의 가람배치 방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평양의
청암리사지(靑岩里寺址)는 문자왕 7년에 창건된 금강사지로
추정된다. 청암리사지의 중앙에서 팔각형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으며, 그 남쪽에서 문지가 노출되었다.
팔각전지의 북.동.서편에서는 금당지로 보이는 3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금당지와 팔각전지는 보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고구려의 사지에서만 독특하게 발견되는
일탑삼금당식의 배치방식이다. 일탑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평양의
동명왕릉 앞에 위치하고 있는 정릉사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사지
동서 약 200m, 남북 약 130m되는 중심곽 내에 배치되었다.
중심곽을 동서로 5개의 구역을 구분하고 각각을 회랑으로 막은
특이한 형식이다. 사역(寺域)의 중심에는 폭이 약 20m이고 한
변의 길이가 8.4m인 팔각형 평면의 목탑지가 있고 그 동서쪽에는
금당지가 탑지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동서 건물지가 탑지에서
떨어진 거리는 약간씩 달라 엄밀하게 좌우대칭은 아니다. 그
북쪽에는 회랑을 사이에 두고 북편 금당지가 놓여 있다. 고구려
가람배치의 특성은 이러한 일탑삼금당식이며, 중앙의 목탑지가
다각형 평면인 점이다. 고구려식의 배치로서 일본의
비조사지(飛鳥寺址)가 유사하다. 다만 비조사지의 탑지는 방형인
점이 차이가 난다.
쌍탑일금당식은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형식을 말한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5세기 중엽 승려 묵호자에 의한 개인적인
포교였으며, 그가 모례(毛禮)의 집에 굴실(窟室)을 지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구체적 형태는 알 길이 없다. 그 이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법흥왕 14년(457) 불교가 공인되면서 최초로
흥륜사와 영흥사 등을 세웠드며 황룡사.분황사 등을 건축하였다.
그 후에도 감은사지.망덕사지.천군리사지. 사천왕사지.불국사
등을 조영하였다. 감은사지는 문무왕 때 창건된 사찰터로 현재
동서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발굴 결과에 의하면 양 석탑의 중앙
후편에 금당과 강당을 설치하고 강당의 동서에는 별도의 건물지를
설치하였다. 석탑의 남쪽에는 중문을 시설하고 중문의 좌우에서
시작되는 회랑을 북쪽으로 꺾어 강당 좌우의 별도 건물지에 접하고
있다. 한편 금당의 좌우에는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이
놓여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형식이 전형직인 신라의
쌍탑일금당식 가람의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약사사식(藥師寺式)의
가람배치가 같은 쌍탑식이다. 신라의 쌍탑일금당식 가람의 조영은
경주 불국사(佛國寺)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국사의 중문인
자하문(紫霞門)을 지나가면 좌우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석탑형태이나 다보탑은
파격적이고 우수한 형태의 공예적 탑이다. 두 탑의 중앙 후편에는
대웅전이 자리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강당인
무설전(無設殿)이 배치돼 있다. 강당과 중문을 위시해 ㅁ자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웅전과 동서 회랑을 익랑으로
연결하고 있다. 쌍탑이 가람에 배치되는 형식은 주로
법화계(法華系)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법화계 신앙의 소의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의
소설(所說)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보여래가 있는 다보탑(多寶塔)이
나타난다는 소설에 의해 석가탑(釋迦塔)과 함께 쌍탑 구성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삼국시대 이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에 사찰의 중심 불전은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혹은 신라의 쌍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에서 볼
수 있듯이 단일의 건물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불전의 명칭은
금빛나는 불상을 봉안한 건물이라는 측면에서 금당(金堂)으로
통칭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종파신앙이 성행하면서
각각의 소의경전에 따라 주불전의 명칭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시대의 통불교화 관정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일신앙(單一信仰) 사찰의 성격을
유지해 단불전의 가람배치를 고수한 사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법당의 명칭은 달라졌으며 종파에 따른 가람배치의
특징은 약간씩 구분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완주
화암사(花巖寺)는 미타계 사찰로서 극락전(極樂殿)을 주불전으로
하는데 여기서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법계에 충만하므로
영탑(影塔)을 두지 않는 것이 배치의 특이한 점이다. 둘째
관촉사(灌燭寺)는 미륵계 사찰로 미륵불과 탑을 사찰의 중심축상에
배치하는 규범울 충실히 지키고 있다. 중원 미륵대원도 이러한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셋째 화엄계 사찰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통일이라는 화엄사상에 따른 강력한 통합을
가감배치에도 반영하고 있다. 평창의 월정사에서는
사찰중정(寺刹中庭)의 탑을 중심으로 4동의 건물이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 넷째 청도 운문사는 법화계의 사찰로 중정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다. 다른 종파의 사찰에서는 희귀하나 법화계
사찰에서는 쌍탑가람제가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소의경전인
<묘법연화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 도중 공중에 다보탑(多寶塔)이 나타나는데, 그 안에는
다보여래가 있어 부처님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이러한 경전상의 장면을 구현하는 것으로 쌍탑(雙塔)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불교는 통일신라 전기까지만
해도 종파신앙(宗派信仰)이 일반화 되지 않아 사찰 본당을
금당(金堂)으로 통칭하였으나 고려시대에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종파불교의 영향으로 금당의 명칭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불리게
되었다. 종파신앙은 그 소의경전을 달리하며 자연히 불상도
다르고 이를 봉안하는 불전(佛殿)의 명칭도 다르게 된다. 여기서
불전이라함은 물론 사찰의 삼단(三壇)의 위계 중 부처님을 모신
상단(上壇)을 대상으로 한다. 조 시대에는 비록 종파의 개념은
희박해져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을 띠었으나 신앙체계의 법통은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어 다양한 형식의 불전이 한 사찰 내에
조영되었다. 즉 이전까지의 단불전형 사찰에서 다불전형 사찰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찰 내 여러 종류의 불전이 배치된
경우를 분석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첫째 경주
불국사(佛國寺) 및 안동 봉정사(鳳停寺)는 대웅전(大雄殿)과
극락전(極樂殿)이 동등한 위계를 가지고 나란히 병렬 배치되는
형식이다. 둘째 김제 금산사(金山寺)와 같이 3층의
미륵전(彌勒殿)과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직교축으로 배치시켜
사찰의 중정에 강한 시각적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방법을 취하는
경우이다. 비슷한 예를 하동의 쌍계사(雙溪寺)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대웅전 영역과 금당 영역의 지형 차를 직교축으로 연결하고
있다. 셋째는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전면에
대광보전(大光寶殿)과 후면에 중층의 대웅보전(大雄寶殿) 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은 높이 차가 있는
지형에 다른 형태의 건물을 중첩시킴으로써 시각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넷째 형식은 남원의 실상사(實相謝) 가람배치를
예로 들 수 있다. 실상사의 중정을 면한 쪽에는 보광전(普光殿)과
약사전(藥師殿)을 나란히 배치하고 여기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극락전(極樂殿)을 배치, 전체적으로는 3개의 주불전을 병렬한
형태이다.
큰 가람이 갖추고 있는 일곱 종류의 당우(堂宇)를 칠당(七堂)이라
하고 이 칠당을 구비하고 있는 가람을 칠당가람이라 한다. 그러나
칠당의 명칭과 배치 등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①
선종에서는 부처님을 모신 불전(佛殿), 수행승들에게 설법을
베푸는 법당(法堂), 수행승들이 좌선을 하며 기거하는 승당(僧堂),
식량을 보관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고리(庫裏), 삼해탈을 상징하는
삼문(三門), 목욕시설인 욕옥(浴屋), 화장실인 서정(西淨 ; 東司를
들기도 함)을 말한다. 이 중 승당과 욕옥.서정에서는 일체의
말(言語)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삼묵당(三黙當)이라 한다.
삼문.불전.법당.방장을 순차적으로 일렬에 배치하고 삼문의 남쪽에
총문, 방장의 북쪽에 고리를 세운다. 경당.승당.
종루.북두.욕옥을 세워서 선가(禪家) 특유의 가람배치를 이룬다.
② 진언종에서는 오중탑(五重塔).금당(金堂).강당(講堂).
종루(鐘樓).경장(經藏).대문(大門).중문(中門)을 둔다. ③
천태종은 쌍륜당(雙輪堂).중당(中堂).강당(講堂).
계단당(戒曇堂).상행당(常行堂).법화당(法華堂).문수루(文殊樓)를
둔다. ④ 당(唐) 양식에서는
보탑(寶塔).불전(佛殿).종루(鐘樓).북루.삼문(三門).
사방장(四方丈).동방장(東方丈)을 둔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시대에 칠당가람제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 가람배치 제도는
남북조시대에 백제에 들어왔으며, 또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이때의 칠당은 탑.법당(대웅전).승방.강당.종루.북루
등이었다. 남중 (南中線) 상에 당탑(堂塔)이 남북으로 연하고
북쪽에 강당, 남쪽에 중문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존하는
유적지로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군수리사지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