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다. 세상이 하얗다는 건 좋은 일이다.
눈이 오면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개새끼, 아새끼, 계집. 내가 이런 말 하면 현석이 녀석은
웃을 것이다.
내가 군대 있을 때 그 무거운 박격포 메고 행군을 할라치면 눈 앞이 깜깜했었다. 특히나
혹한기 훈련 때 눈이라도 오면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난 눈 오는 걸 싫어한다.
그렇지만 오늘 내리는 눈은 너무도 좋다. 나는 아새끼가 되고 싶었다.
혼자서 약국을 꾸려 나간다는 것, 이럴 땐 참 좋다. 창으로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 보는 것.
약국엔 따스한 히터가 켜져 있고 내 손엔 고급 커피가 담긴 고운 잔이 들려 있다. 쌓이는
눈을 바라 보는 것이 참 좋다.
어떤 여학생이 눈을 맞고 들어 와 약을 사가지고 갔다.
그 여자의 머리와 어깨에 묻어 있던 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얀 눈,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낭만적인 것이 된다. 꽁꽁 언 군화를 파고
들어 와 발을 시리게 하는 눈이 아니라 내 여인과 즈려 밟고 싶은 눈이 창 밖에 내리고 있다.
가연씨와 가픈 입김을 뿜어 내며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장면처럼 그녀와 함께 쌓인 눈 위에
안기고 싶다.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이야 보던 말던 입에 담배 한 개피 물고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석이가 신나게 눈 위를 뛰어 다녔다. 춥지도 않나 보다. 개가 눈을 좋아하는 건 개의
시신경이 흑백 만을 구분 한다는 것 때문이다. 눈이 쌓이면 개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떨까?
우리에겐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석이는 시신경에 자극을 받아 헤매는 것이리라. 태어나
처음 보는 이 차가운 아름다운 것에 신기함과 당황해 저리 뛰어 다니는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좋아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석이와는 다르다. 눈 속에 좋아하는 사람의
미소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 무릎 높이의 눈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처럼 만들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손이 시리다. 시린 손에 걸린 하얀 담배가 야하다. 하얀 연기, 하얀 입김 좋다.
아이 러브 유. 빨간 손으로 눈 사람 앞에 아이 러브 유,라고 글자를 만들었다.
"멋있냐?"
"월."
석이 녀석이 뛰어 다니다 글자 몇 개를 망쳐 놓았다. 팰 수도 없고...
다시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글은 고칠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도 그럴까? 석이 같은
방해꾼이 이렇게 망쳐 놓아도 곧바로 원상 복귀 시켜 놓을 수 있을까?
눈사람이 눈을 맞고 있다. 내 약국 창 앞에서. 눈사람은 눈을 맞아 초라해져 간다.
오늘 눈 때문에 현석이는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오늘도 가연씨를 만났을까? 그는 내
친구다. 내가 그를 나쁜 쪽으로 너무 매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고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이 생기느냐 말이다.
눈을 보며 현석이 생각을 했다.
후훗, 아주 웃긴 일 하나가 생각이 났다.
현석이와 난 동시에 군대를 갔었고 휴가 날짜도 대부분 비슷했다.
일병 말호봉 때였다. 상병 휴가를 나왔을 때 눈이 온 적이 있다.
"이 지긋지긋한 눈. 오늘은 괜찮다?"
녀석과 석촌 호수에서 진혜를 만나기로 했다가 바람을 맞았던 때가 생각난다.
"진혜가 늦네. 전화해 볼까?"
"바람 맞았지만 기분은 좋다."
"왜?"
"니가 내 곁에 있으니까."
그 때는 녀석의 그 말이 날 좋아해 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때는 그가 나 때문에
진혜에게 바람 맞은 건 아니라고 변절된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때 진혜는 아무 이유 없이 우리 둘을 바람 맞혔다. 휴가 나온 우리를, 그렇게 자기를
보고 싶어 하던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바람을 맞혔다.
눈이 좋아 집에 있고 싶었다는 변명은 우리에게 아무 이유가 되지 못했었다.
"야! 눈이다."
"좋냐?"
"그럼. 다르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눈."
"후임병들 또 조뺑이 치겠군. 나는 눈이 싫다."
"허허, 너도 군대 가더니 말이 많이 험해졌다?"
"훗, 행여 기집애 같다는 말 하지 마라."
"야이 기집애야."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걸었다. 싸움!
정말 그때 석촌 호수 가에서 신나게 눈싸움을 했었다. 지워지지 않는 그와 나만의 추억.
눈이 좋아 그 곳에 나왔던 수많은 연인들의 데이트를 방해하며 우리는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눈 싸움을 했었다.
"나는 눈이 싫어 새꺄."
"잘 던져 봐. 그렇게 던져 내가 맞겠냐?"
"맞고 울지나 마라."
"이건 어떠냐?"
녀석은 눈싸움을 장난처럼 하지 않았다. 인정 사정 없이, 눈 뭉치를 맞아 기분 나빠 하는
내 표정에 전혀 상관없이 맞았던 곳에 또 눈을 던졌다.
"장난 아니네? 야아! 전쟁이다!"
오늘 현석이 그가 생각나는 건 눈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그와 단 둘이 있을 때면 그가 참
좋다. 진혜 때문에 상한 감정이 많았지만 둘이 있을 땐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요즘 난 또
그를 시기하고 헐뜯고 있지 않나? 난 가연씨에게 현석이에 대한 나쁜 말들을 많이 한 것 같다.
지금도 오늘 아침 눈 오는 버스 정류장 좋은 풍경 속에 가연씨와 현석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고 있다. 내가 잘못 된 것인가?
손이 떨렸지만 난 전화를 했다.
"할 만 하냐?"
"니가 왠일로 회사로 전화를 다했냐?"
"눈이 오길래 네 생각이 나서."
"나도 니 생각이 나더라. 도로 엄청 막히데."
"훗. 지각하진 않았냐?"
"오늘은 일 때문에 새벽에 나왔다. 새벽인데도 길이 그렇게 막혔는데, 가연씨는 출근 잘했을려나?"
"아침에 가연씨 못 봤냐?"
"응."
"너 가연씨 좋아하지?"
"그거 물어 보려고 전화했냐?"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가연씨 얘기가 왜 나와?"
"그냥 네 연인이잖아. 그런 말도 못 물어보냐?"
"차라리 내 생각말고 좋아하려면 니 자신만 생각 해. 그게 싫어 새꺄."
"왜 갑자기 화를 내?"
"날 위하는 척 하지 말란 말이다."
엉겁결에 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녀석은 날 위하는 척
하면서 진혜를 내게서 멀어지게 했고 주영씨도 뺏어 갔었다.
창 밖에 내리는 저딴 눈에 현석이를 두둔하지 말자. 내가 그를 내 스스로 위로하기
시작하면 난 또 지게 되어 있다. 그는 여자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나쁜 놈이다.
괜히 나를 정당화 하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난 다음 무언가 한 마디라도 내 뱉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난 아주 오랜만에 하나의 번호를 눌렀다. 아니 처음인 것 같다. 진혜의 집.
현석이는 모른다. 현재 진혜가 살고 있는 집 전화 번호는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보세요?"
"집에 있었네. 나 누군지 알겠어?"
"어? 종석이? 왠일이냐?"
생각보다 꽤 반가운 목소리다.
"하하,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저번에 날 찾아왔던 적도 있는데 전화 정돈 괜찮을까 해서."
"후후."
"뭐 하냐?"
"그냥 있지 뭐. 오늘은 눈도 내리고 외출하고 싶었는데 전화해 줘서 고마워."
그녀는 눈 온다고 그냥 집에 있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요즘 기분은 어때?"
"괜찮아. 넌 안 바쁘니?"
"나야 뭐. 이제 조금 바빠지겠지. 겨울이니까."
"이렇게 전화했는데, 나 너네 약국에 놀러 갈까?"
"우리 약국에?"
"응."
"아.."
"아줌마라서 싫어?"
"와라. 그럼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
"그래. 야, 신난다. 외출할 곳이 생겼다."
"어째 말투는 더 어려진 것 같냐?"
"흠."
창 밖은 눈은 내리지 않지만 사람들 발자국에, 자동차 바퀴 흔적에 지저분한 면도 없진
않지만 아직 세상이 하얗다고 말할 수 있는 풍경이다.
진혜는 전화하고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내 약국을 찾았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와
이렇게 여린 만남 정도는 얼마던지 만들 수 있다. 씁쓸하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밖에 눈 사람 네가 만들었니?"
"응."
"후후, 넌 여전한가 보구나."
"넌 직장은 완전히 관둔 거야?"
"응."
"애는 언제 나오는 거야?"
"배 많이 불러 보여?"
"아직은."
진혜에게 가연씨를 위한 잔에 가연씨를 위한 커피를 타서 주었다.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지나간 사람도 내게 소중하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잔이 참 예쁘다."
"너니까 그 잔에 주는 거야."
"응?"
"남편하고는 행복해?"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아."
"흠, 심심하니?"
"그래 좀 무료하긴 하다."
"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럴 거야. 얘가 태어나면 달라질 거라 기대하고 있어."
"행복해라. 한때나마 내가 사랑했던 사람인데."
"왠일이니?"
"모르겠다. 오늘은 확신이 서네. 전에 네가 물어 본 말 답한 거다?"
"후후, 진작 좀 그래보지."
"뭘?"
"사랑했단 확신 말이야. 그러면 나도 너도 다른 인연으로 살고 있을텐데."
"야,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지."
"왜? 나 아줌마라고? 과거는 과거야. 그때 남편은 아무 존재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말
못해? 이런 말 한다고 과거가 바뀌니 현재가 바뀌니."
"남들이 오해할 수도 있잖아."
"훗. 하나 물어 볼게."
"뭐?"
"나 진짜 현석이네 아파트에서 아무 일 없었어. 아직 오해하고 있는 거야? 아니 오해했던 거야?"
얘도 아직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나?.
"오해가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고 현석이 때문에 그랬던 거야. 너에게 기분 나쁘고 오해 했던 거 아냐."
"너네 둘 다 나에겐 나쁜 놈들이었어. 둘 다 날 좋아하면서 그 이유로 떠 넘기려 했어.
고마워, 그래서 내 남편을 만난 것 같애."
"고마워? 지나간 일이다. 후후 커피 맛 있지?"
들고 있는 찻잔으로 잠시 침묵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도 있다. 진혜와의 헤어짐은
매정하지도 매끄럽지도 않았기 때문에.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지?"
"어?"
"밖에 눈사람 그 사람 생각하고 만든 거지?"
"어떻게 알았어?"
"흠. 이번엔 그러지 마. 사랑을 확신하려고 내 마음과 상대방 마음을 의심하지마."
"충고니?"
"응."
"나도 하나 물어 볼게."
"뭐?"
"내가 현석이 보다 좋았니?"
"하하, 넌 역시 아직 그대로야."
"왜 웃어?"
"현석인 내게 사랑 고백 여러 번 했었다? 내가 현석이에게 갔니?"
"아까 서로 떠 넘기려 했다면서?"
"그래 차라리 현석이가 낫다고 생각했던 적 많아. 하지만 너 때문에 그 마음을 접었지. 널
더 좋아한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현석이도 널 너무 의식했었어. 둘 사이에 끼기가 싫어지더라."
오늘 진혜는 아줌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전 내가 좋아하고 현석이가 좋아하던 그냥
혼자였던 진혜처럼만 보인다. 혼자였던? 그때 진혜는 혼자였던가? 근데 왜 나는... 예전
그녀에게 마음을 숨겼던 것, 이제는 그러고 싶지가 않다.
"왜 그랬을까? 나 왜 그랬을까?"
"내게 묻지 마. 누구야? 좋아하게 된 사람?"
"있어. 흠, 근데 또 문제야."
"뭘?"
"또 현석이가 끼어 들었어."
"지금 네 생각은 어때? 그녀에 대한 생각 말이야?"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럼 끼어들 틈을 주지 마. 넌 너무 틈이 많았어. 그 틈이 웃긴 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이
끼어들 틈은 밀어 낸다?"
"후훗. 너 참 아름다워 보인다."
"응?"
"그렇네. 예전에 그걸 알았다면."
"무슨 말이야?"
"예전에도 넌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날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었는데..."
"그걸 이제 알았어? 앞으론 그러지마."
"흠, 가연씨는 너하고 좀 다르다."
"그 여자 이름이 가연?"
"응, 서 가연이야."
"이름 예쁘네."
"처음엔 너와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 똑같애. 좋아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거야. 너 또 현석이 의식하고 있구나. 왜 그러니?"
"흠. 너 내 편 되어 줄래?"
"응?"
"나 현석이에게 알 수 없는 열등감이 있다? 니가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
"어떻게 편이 되어 달라는..."
"그건 잘 모르겠다."
진혜는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하자 약국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하고 한 남자와
괜찮은 가정을 꾸미고 있으면서 왜 그 말을 하고 갔을까?
"앞으론 괜한 오해 하지마. 그때 넌 오해 했었어. 그래서 난 비참했구..."
#36. 왜 그랬을까?
아침 출근길은 눈과 함께였다. 겨울이라고 눈이 내리는구나,라고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젊다.
오늘 아침은 다르다. 일이 있어 오늘은 가연씨와의 만남을 포기하려 했지만 눈 때문에 핑계거리가 생겼다.
눈이 쌓이는 버스 정류장, 하얀 입김이 내리는 눈을 헤치며 정겹다. 멋있어 보일까?
롱코트에 침묵한 사내의 입김이...
버스 정류장에 오랫동안 침묵한 채 서 있었다. 가연씨가 나타날 때까지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여러 대의 버스를 그냥 보내버리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가연씨와 마주쳤지만 난 아무말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침묵하고 싶었다.
가연씨가 내게 미소를 던져 주었지만 한 줌 입김만으로 답을 하고 난 바로 버스를 타 버렸다.
그녀를 보기 위해 추운 아침을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서 폼 잡고 서 있었는데, 짧은 마주침과
동시에 난 그냥 지나쳐 버렸던 여러 대의 버스가 무안할 만큼 바로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가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가연씨의 눈동자. 저 눈동자를 공유하기 위해서 서두르지 않아야 했다.
훗, 내가 뭐하는 짓일까?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었나?
낮에 왠일로 종석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거짓말을 했지만 떳떳하지 못한 건 아니다.
종석이의 말에 난 오후 한 동안을 상념에 시달려야 했다. 졸음.
졸음이 몰려 왔다. 조금 존다고 해서 눈치 볼 정도는 아니지만 나의 상념은 오래 갔다.
"현석씨 정신 차립시다."
"아, 네."
"요즘 일이 없긴 하지만 정신은 흐트리지 맙시다."
팀장의 말이 오늘은 많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내 자신만 생각해라. 종석인 그 말을 왜 한 걸까? 내 마음을 잘 읽고 있는 것 같다.
난 종석이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내 몹쓸 짓을 많이도 변명해 왔던 거 같다. 그를 위해서?
훗, 난 한 순간 날 이기적인 놈으로 몰아 세웠다.
진혜에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종석이를 위한다면서 난 그녀를 뺏을려고 했고 그녀에게
사랑고백까지 하면서 종석이를 잘난 놈으로 만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주영씨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슨 이유로 그와 그녀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걸까? 종석이와 주영씨가 잘 되면 진혜가 가슴아파 할 것 같아서? 좋은 핑계다. 솔직히
내가 배가 아파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 난 속이 좁았다. 진혜를 진정으로 원했다면 종석이를 의식하지 말았어야지. 종석이를
진정으로 위했다면 그가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던 따지지 말았어야지.
진혜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던 날. 난 진혜를 변명한 걸까? 나를 변명한 걸까? 둘 다 잃고
싫지 않은 욕심?
아닌 것 같다.
난 나를 잃지 않고 싶었나 보다.
지금 가연씨에게 품고 있는 내 감정도 내 기분을 좋지 못하게 하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거 같다. 맞다. 난 가연씨를 뺏을려고 한다. 그를 위하는 척
하면서 말이다.
으이, 그 자식, 왜 낮에 전화를 해선 내 심기를 긁어 놓냐. 눈이 온다. 눈이 와?
잠을 깰 겸 밖으로 나가 눈 쌓인 옥상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침처럼 입김이 나왔다. 흩어져
버리는 입김, 금방 식어 버려 내게서 나온 입김은 세상의 그것과 같아져 버렸다.
그리운 것은 그냥 그리워 하면 될 것을 하하.
헤. 종이컵에다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도 별 이상한 짓 많이 하는 것 같다.
옥상에 버려져 있던 여러개의 종이 컵에다 작은 눈사람 하나씩을 모두 담았다.
"팀장님 눈이 왔습니다."
"이게 뭐야?"
"어릴 적 기분 나지 않습니까? 녹을 때까지 품으십시오."
"허허, 참."
"이건 선배님 꺼. 특별히 바람 한 번 피라고 여자 눈사람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현석씨 진짜 장가가야 겠어? 증세가 심해."
"우리 너무 스스로 이미 커버렸다고 자책한 건 아닐까요?"
"우리 마누라 그 소리 들으면 좋아하겠군. 나보고 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거든."
"하하. 애처럼..."
기분을 맑게 하기 위해 눈사람을 만들었지만 다시 난 상념에 휩싸였다. 오늘은 왜 그럴까.
가연씨에게 품어 온 마음들이 헛되게 느껴진다.
나는 종석이에 비해 애처럼 행동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겉으론 이미 다 자라버린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 비춰지기는 아마도 나는 종석이에게 투정이나 부린 어린애가 아니었을까?
그래, 네 말대로 해 주마.
널 위한 척 하지 않겠다.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가연씨는 이제 네 연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겠다. 애처럼 굴지 않겠다. 내 책상에 있던 녹아지고 있는 종이컵의 눈사람을 바로
휴지통에 버렸다.
눈이 온다. 뛰어 보고 싶다.
눈이 오면 같이 뛰고 싶은 사람. 종석이, 가연씨, 진혜. 흠, 진혜가 얼마 전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차라리 네가 나았다.
가연씨에게도 충분히 그 말을 들을 수 있다. 놓치기 전에 말이다. 이제 종석이를
가연씨에게 좋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깎아 내리는 말을 해도 자책하지 않겠다.
나중에 사과하리라.
이게 무슨 일이냐.
퇴근 무렵에 내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그것은 진혜에게서였다. 난 참 많이도 반가웠다.
저 번 아파트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 더 순수하게 좋아했다.
"어어? 어쩐 일이야?"
"곧 퇴근하겠다?"
"응. 어디야?"
"집이야. 이제 들어 왔어."
"외출했었나 보네?"
"응. 풀었어."
"뭘?"
"그런 게 있어."
"하하, 전화해 주어 고맙다."
진혜는 나보다 종석이를 좋아했던 사람. 차라리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에 기대를 걸었던 건 현재 가연씨 때문이다. 씁쓸한 차라리의 말을 오늘 전화
한 진혜에게서 지워 버릴 수 있다면 난 좀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내가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 그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게 전화한 것은 종석이와
상관없이 내가 보고 싶어 한 거라고 믿었으니까. 이랬다 저랬다 하던 오늘 내 마음들을 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말이다.
"너 참 멋있는 놈이야."
"엉? 새삼스럽게 뭘. 남편은 아직 퇴근 안했어?"
"요즘 좀 바빠."
"너 혼자 있는 시간이 많겠다. 너 괜찮은 거지?"
"그걸 왜 물어 봐? 훗."
"그래도 행복하게 지내야 돼?"
"그래야지. 그럴 거야. 후후, 너도 내게 똑같은 말 하는구나. 지나쳐 버린 인연에 대해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그 행복해라는 말, 그거 떠넘기는 거 아니니? 자신이 책임지기
싫으니까 떠넘기는 거잖아.."
"응? 무슨 말이야. 나는 그냥..."
"너 때문이었어. 그냥 둘만 있었으면... 차라리 둘만 있었으면..."
"무슨 말이야?"
"나 요즘 힘들어. 그래서 내 과거의 좋았던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말이 좀 이상타? 애까지 가졌으면서 왜 그래?"
"허! 그래서 더 힘든 줄은 모르지?"
갑자기 진혜의 말이 날카로워 졌다.
"무슨 일 있니?"
"너 아니었으면 종석이가 날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넌 내게 관심을 갖지 말았어야
했어. 처음부터 넌 아니었단 말이야."
"엉."
갑자기 걸려온 진혜의 전화는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움보다 황당함. 왜 내게
저런 말을 이제서야 하는 걸까? 이미 결혼까지 했으면서. 종석이를 못잊고 있는 걸까? 그건
불행일텐데... 나는 또 이기적이다. 진혜가 요즘 힘들까하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단지
왜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것과 여전히 난 종석이 뒤에 서 있는가, 하는 생각만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퇴근하기가 싫어졌다. 오늘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일순간 차가운 공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혼자 술을 마셨다. 기분 엄청 더러웠다. 나는 역시 종석이에게 안되는 것일까?
취하지 않았다. 곰곰히 따지고 드는 생각이 있으니 잘 취하지가 않았다.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앞으로 당분간 종석이와 가연씨를 보지 못할 것 같다. 자신감이 너무도 떨어져 버렸다.
"눈이 내리네. 돈버러 내죠. 푸하하!"
이런 것에 고민을 하고 기분 나쁜 생색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젊다는 이유지. 암, 좋게
생각해야지. 내겐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과거는 다 거짓말이야, 헤헤.
이런다고 내가 가연씨를 포기하냐? 아니지. 푸하하,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
사랑이라는 유치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건 내가 잘났기 때문이야. 좋다.
진혜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건 미련과 원망이다. 내가 싫어서 했던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의미가 되었단 말이다.
밤 늦게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길이 얼어 여러 번 넘어졌다. 기분이 좋다.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으니까. 종석이 약국 앞을 가 보았다.
"아... 엘? 이건 유다 유. 하하. 눈사람 더럽게 못 만들었네."
종석이 약국 앞에 만들어진 눈사람을 보았다. 누가 만들었을까? 혹시 가연씨하고 종석이
둘이서 만든 거 아냐? 잘들 노네 진짜.
쾅쾅 밟아 뭉게 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마디 썼다. 뷰티풀 월드. 한글로 썼다.
술 먹어서 영어 단어 까먹었다.
기분에 집에 바로 들어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오층 버턴을 눌렀다. 지금 시간이
몇 신지도 모른 채 종석이 집 벨을 눌렀다. 쾅쾅 발로 차기까지 했다. 내 한 손엔 무언가가
들려 있다.
요즘 사람들, 이런 일에 무관심하다. 내가 좀 더 시끄럽게 굴면 수위가 올라 오겠지?
직접 내게 따지러 나올 사람? 이 시간이면 드물다.
"누구세요?"
"나야 새꺄."
"현석이?"
"그래 임마."
"지금 몇 신데 날 찾아와."
"기분 더럽네. 좀 찾아 오면 안돼냐? 빨리 문열어 임마."
"가만 있어 봐."
"퍽!"
문을 열자 마자 그 놈 얼굴에다 대고 들고 있던 눈뭉치를 쎄게 던져 버렸다. 그리고 웃었다.
웃은 이유는 그래야 녀석이 화를 내지 못한다. 그랬던 적이 많다. 눈덩이 맞고 코피 터지는
놈 처음 봤다.
"뭐냐?"
잠시 고개를 숙였던 녀석이 눈을 매섭게 뜨고 아주 화난 표정으로 째려 보았다.
한 쪽 코에선 피를 찔끔 흘리면서.
"기분 나쁘냐? 헤헤."
"지금 시비거는 거야 씹쉐야!"
"어? 지금 욕했냐?
"그래 개새끼야."
"옆 집에서 시끄럽다 하겠다. 좀 조용히 말해 임마."
"뭐야 새꺄? 너 씨바 내려 와."
"나 특전사 출신이야 임마."
"지랄하고 자빠졌네."
"화났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새꺄?"
졸라 맞았다. 녀석이 주먹으로 날 때린 건 아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눈싸움 했다.
술 취한 상태의 난 거의 전투력이 제로였다.
난 녀석이 던지는 감정 섞인 눈에 맞으며 기분이 좋았다. 그래 던져라. 눈에 맞아 죽기야
하겠냐. 내일 가연씨 만날 핑계가 생기고 진혜에게 들은 말을 위로할 수 있다.
"에이 쒸!"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맞는 놈은 난데 왜 지가 소리를 지르고 그래.
"헤헤, 지쳤냐? 이제부터다. 야호! 전쟁이다!"
진혜는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저 녀석이 나와 다른 게 뭐가 있다고... 나 때문에? 웃기지 마라.
내가 또 그 녀석의 연인을 넘보는 걸 진혜는 알았을까?
한 밤중에 녀석과 한 눈싸움. 재밌었다.
<계속>
.. #37 그 새끼 진짜 나쁜 놈이다.
"아이 러브 유."
"가연씨 어서 와요."
"안녕... 종석씨 얼굴...?"
어제 밤 현석이가 한 밤 중에 눈을 들고 와 시비를 걸었었다. 예상치 못한 아픔 때분에
기분이 아주 나빴다. 주저없이 욕이 나오고 걸러지지 않는 말들이 나왔다. 악감정이
들어 간 눈덩이를 사정없이 녀석에게 던지며 화풀이를 했었다. 하지만 허허, 웃는
녀석때문에 기분이 금방 풀려 버리더라. 나는 녀석에게 오래 화를 낼 수가 없다.
나는 매정하지 못하다.
"이것 좀 발라 주시겠어요?"
"어머? 귀 밑에도 빨개요."
"어제 쇼를 좀 했죠."
"음?"
"눈싸움 했어요. 거의 새벽에 다 큰 놈들 둘이서 눈싸움 했죠."
"후후, 정말요?"
"눈도 잘못 맞으니까 피가 나던데요. 코피도 났었어요."
"이런! 그래서 코 밑이 이런 거에요?"
"네."
"누구와...?"
"누구겠어요."
"현석씨?"
"네."
"싸우지는 마세요."
"눈싸움이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일순간 감정이 상할 수 있어요."
하하, 일순간 감정이 나빠졌다가 격렬한 눈싸움을 하고 난 뒤 진한 입김 한 번으로 기분이
풀어졌었다. 한바탕 싸우고 난 뒤 오히려 마음의 벽이 없어지는 효과! 여자들에겐
그런 게 없나? 마음에 응어리진 게 있고 묻어 둔 말들이 많다면 한바탕 싸우고 난 뒤
마음을 털어 내 보는 것도 괜찮다. 어제는 그냥 웃었을 뿐이지만 ...
푸하하! 가연씨가 내 귀 밑과 목등의 빨갛게 피부가 상한 부분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진혜의 말처럼 현석이를 의식하지 말자. 가연씨는 현재 나와 사귀는 중이고 언젠가는
하나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될 것이다. 현석이는 그냥 내 친구일 뿐이다.
"잘 다녀 와요."
"종석씨도 하루 잘 보내요."
"그럼요. 저녁에 봐요."
"네. 흠..."
"가연씨?"
손가락으로 문 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 가슴에 손가락질을 했다.
"후후, 직접 듣는 게 더 좋아요."
가연씨는 뽀얀 웃음을 짓고는 출근 길을 떠났다.
"아이 러브 유."
누군지 몰라도 내가 만들어 놓았던 눈사람을 부셔 버렸다. 그 심보 참 고약하다. 왜 가만히
있는 눈사람을 저렇게 밟아 뭉개 버렸을까? 그냥 놔두었더라면 오늘 포근한 미소를 주었을
테고 가연씨에게 자랑도 할 수 있었을텐데. 뷰티풀 월드? 그렇게 내 사연 하나를 부셔 놓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자는 도대체 누굴까? 양아치여?
현석이 녀석, 진혜와 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다고 했다.
부셔진 눈은 때가 묻었고 햇볕에 퇴적된 눈은 얼음화 되어 눈사람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아침이 추웠는지 문 앞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사람은 없지만
저 뷰티풀 월드란 글자는 내일까지도 남아 있을 듯 싶다.
쇠로 된 쓰레받기를 가져와 약국 앞 눈들을 모두 치워 버렸다.
석이는 정말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이제 제법 개 같아졌다. 얼굴 생긴 건 어쩔 수 없지만
몸은 제법 잘 생겨졌다. 어깨가 벌어지고 있고 맵시 있는 허리선을 타고 꼬리가 돌돌 말린
게 순종 퍼그가 맞나 보다. 이 녀석이 내가 주인인 것을 안다. 밖을 나가면 자기 혼자
도망가 버릴 경우는 있어도 예전처럼 아무나 따라가지 않는다.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개의 매력이다.
"엄마."
낮에 어머니가 잠시 내 약국을 들르셨다. 참 오랜만이다. 우리 집은 대전에 있다. 서울서
줄 곧 살아 왔지만 아버지 직장 때문에 4년 전에 대전으로 이사를 가셨다. 오늘 연락도
없이 어머니가 날 찾아 오셨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아들 찾아 오는데도 연락하고 오냐?"
"그래도..."
"나 내일 내려갈 거다."
"그러세요."
"열쇠 줘."
"여기 좀 있다 가세요."
"심심한 여기 있어 뭐하게. 오늘은 일찍 들어와. 저녁은 집에서 먹어."
"그럴까? 근데 왜 올라 오신 거에요. 아버지는 어떡하라고."
"너 언제 장가갈 거냐? 설 세면 서른이다. 아홉수는 걸려서 암말 안했다만... "
"갈 때 되면 가겠죠 뭐."
"작년엔 사귀는 사람 있다 그러더니 그 뒤로 아무 말 없네?"
"헤헤. 그것 때문에 올라 오신 거에요?"
"생일이 빨라서 실제로 너 서른 한살이다?"
"알고 있어요."
"내일 선 하나 봐."
"에?"
"너네 아버지 정년 내년이면 이 년 남는다. 그 안에 가야지?"
어머니는 상가에서 대충 장을 보고서 아파트로 가셨다. 내 딴에는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산다 하지만 어머닌 아마도 지금쯤 내 방, 거실, 화장실 등 아파트 곳곳을 청소하고 계실
것이다. 혼자 사는 아들놈이 미더울 리 없다.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겠다.
저녁에 가연씨만 보고 집에 들어 갈 생각이다. 가연씨는 오늘도 내가 예상한 시간에 약국을
찾았다.
"아이 러브 유."
"흠. 어서 와요."
오늘은 가연씨와 오래 머물 수가 없을 것 같아 아까부터 커피를 끓여 놓고 있었다.
나는 가연씨의 존재를 아직 어머니께 말하지 못했다. 말하기가 아직 껄끄럽다. 어머니가
알고 싶어 하는 가연씨의 많은 것을 나는 모르고 있다.
"아니요. 대천이에요. 아버진 대천 근교에서 작은 묘목원을 하세요. 어머닌 교사였는데 5년
전에 그만두고 아버지와 같이 계세요. 언니 밑에 오빠가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아버지
일을 도우고 있어요."
"아, 그래요. 유아 교육과 나온 거에요?"
"흠, 문과대 쪽이에요."
뭐 별 거 없다. 가연씨는 그냥 무난한 집안의 막내 딸이고 대학 나와 직장까지 가진 무난한
아가씨다.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삐뚤어진 데 없다. 가연씨는 흠잡을 곳 없는 괜찮은 여자다.
그러나 난 어머니께 가연씨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눈높이는 아주
위에 있었다.
"내일 철수 엄마하고 걔 며느리 만날 거다."
"철수는 장가 가 잘 산대요?"
"잘 살고 있겠지. 봐라 걔는 너보다 3살이나 어린데도 곧 애 아빠 된단다."
"허허. 그 녀석 참!"
"내일 내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돼?"
"어디 계실 건데요? 그리고 철수 마누라는 왜 만나요?"
"마누라? 걔 친구 중에 괜찮은 처자가 하나 있다고 연락이 왔더라."
"진짜 선 봐요?"
"그럼 가짜로 선 보니?"
"철수 마누라 친구면 약사?"
"제약회사 다닌다더라."
"약사 여자들이 약사 얼마나 싫어하는 줄 모르죠?"
"그건 만나봐서 따지면 되고, 걔 아버지가 법대 교수고 오빠가 하나 있는데 어디
지원이라더라? 하여간 작년에 연수원 마치고 바로 판사 됐다네. 집 안이 좋아."
"그런 집안에서 나를 왜?"
"니가 어때서? 이 잘난 아들을 누가 마다 해?"
"제가 잘 났어요?"
"그러엄. 올 해는 내가 발 벗고 다녀야 겠다. 선 봐서 바로 결혼하라는 게 아니야.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지. 내일 꼭 한 번 만나 봐. 알았지?"
내가 가연씨를 말하지 못한 건 어머니의 눈높이 때문만이 아니다. 어머니가 말씀 하시는 걸
보면 가연씨는 분명 눈높이 아래에 놓일 것이다. 아직은 내 마음이 굳어지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무 생각없이 반대조의 말을 하게 되면 가연씨에 대한 내 마음이 수그러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아직은 그녀를 위해 부모님 기대를 저버릴 용기가 없다. 지금의
나는 부모님의 의사를 완전 무시하고 가연씨를 택할 용기가 없다. 부모님에게 지고
가연씨를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가연씨와 주고 받은 마음이 두텁고
가연씨만이 내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든다면 그때는 내가 부모님을 설득하고 안되면
싸워서까지 가연씨를 옹호하고 내 반려자로 맞을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이유도
포함이 되었다, 내가 오늘 어머니 앞에서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못한 이유.
지금은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다.
"현석이 왔나 전화해서 같이 밥 먹자."
"그럴까요?"
"그 녀석은 너보다 더 엉망이지?"
"예? 헤헤."
아까 잘난 놈이라 그러시더니.
어머니는 찌게와 고기와 요리하기 힘든 생선까지... 푸짐한 저녁을 차리고선 현석이 걱정을
했다. 하기야 현석이와 알고 지낸 게 몇 년이며 고등학생일 때도 현석인 우리 어머니께
어머님 그러며 우리 집을 잘도 들락거렸다. 집 안끼리도 제법 잘 아는 사이가 된 지 오래 됐다.
현석이는 바로 달려 왔다. 덥썩 큰 절까지 하더니 "어머님."이라 부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잘 계시지요? 아버님은요?"
"잘 있어. 넌 장가 안가냐?"
"가야죠. 어휴 된장찌게 냄새가 참 좋네요."
"밥 안 먹었지? 이리 와 앉아."
"어머님이 해 주시는 찌게는 일품이죠. 이런 찌게 끓여 주는 여자 있음 당장 장가가겠는데..."
"내 아들이 너한테 물들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둘 다 올해는 장가 가."
식탁에 앉아 많은 얘기들을 했다. 현석이의 말 한마디에 정적이 될 때까지는 화기애애했다.
"내일 선 봐요? 얘 사귀는 사람 있어요."
"응?"
"유치원 교사일 걸요 아마."
"아직 사귀는 거 아니에요!"
으으... 현석이 저 새끼 진짜 나쁜 놈이다.
#38.나쁜 시키.
아침에 일어 나니 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어제 술기운에 많이 무리 했었나 보다. 에구,
삭신이야. 혼자 사는 게 간혹 서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아파 보는 거. 오늘 아침은 열이 나고 몸도 뻐근하다. 목도 아프고 얼굴이나 손등에
상처도 나 있었다. 춥기까지 하다.
정리되지 않는 삶? 아니다 나는 정리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아파도 회사 출근을 미루지
않는다. 이렇게 컨디션이 엉망이어도 한 번도 회사를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퇴근무렵까지는 아주 규칙적이고 정리 된 삶을 산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가연씨는 오늘도 종석이 약국을 들렸다 유치원으로 향했다. 부럽지만 저 정도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길어지고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거다.
어제 녀석과 눈 싸움을 하면서 녀석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진혜가 한 말은 나도
의미가 되었다는 쪽으로 달리 생각하면 된다.
"가연씨!"
"엉?"
"타요."
"오늘은 버스 타고 갈래요."
"타세요."
"어제 종석씨와 싸운 거죠?"
"네?"
"종석씨 얼굴에 상처투성이에요."
"아아, 눈싸움 한 거에요."
"눈싸움을 그렇게 심하게 해요?"
"그 정도는 약과요. 타세요."
"진짜 눈싸움 한 거에요?"
"네, 그 녀석과는 종종 싸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감정 상하고 그러지는 않아요."
"어떻게 눈싸움을 했는데 목이랑 온 얼굴에 상채기가 남냐."
"안 탈 거에요?"
가연씨는 결국 내 옆에 앉았다. 이제 가연씨와 있을 땐 종석이의 부담을 털 것이다.
"현석씨도 목이랑 얼굴에 상처가 많아요."
"이런 거야 뭐. 웃기죠? 다 커서 눈싸움 했다는 거?"
"언제 했어요?"
"어젯밤에요. 자정이 넘었을 거에요."
"후후. 크림 있어요?"
"괜찮아요. 살갗이 벗겨진 것도 아니고 피멍이 든 것도 아닌데..."
"흠, 엄살은 안 부리나 보네요. 누가 먼저 시작한 거에요?"
"하하, 제가 먼저 했죠. 어제 술을 좀 마셔가지고."
"그래요. 현석씨 몸에서 술냄새가 나긴 나요."
"회사 일이라는 게... 사람들이 애들 같지 않네요."
"애들도 그 나이에선 생각들이 많아요. 애들이 쉽다고 생각지 마세요."
"후후."
"하루 잘 보내요."
"출근 잘 하세요."
"참 가연씨?"
"네?"
"종석이랑 진짜 사귀는 거에요?"
"에? 아직 잘..."
"그 녀석이 좀 미적거리는 성격이에요. 조급하지 마세요."
"제가 조급해 보여요?"
"아,아니 말이 잘못 나왔네요. 녀석은 왠만해서 마음을 털어 놓지 못해요. 천천히 털어 놓게
하시라구요."
"흠.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싸운 것처럼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 "
싸우는 것처럼 보였나? 하긴 내가 종석이에 대해서 요즘 좋은 말 해준 적이 없다. 변해가는
내 말투를 느낄 만도 하겠지. 내가 아직 그녀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가연씨 저
여자도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걸 많이 숨기는 타입인 거 같다. 솔직한 것처럼 보여도
꽉 쥐고 풀어 놓지 않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건 빗대어
맞추어 보기 위해서, 풀어 놓으면 상대방보다 자기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방어 본능
때문인 것 같다. 상처 받는 걸 싫어 하는 부류들이 있다. 상처 받은 기억 때문이 아니라
상처 받으면 못견딜 것이라는 지레 짐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상처
받을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그럴 것 같으면 미련없이 옆 길로 새거나 포기해 버린다.
곰곰히 따지고 여러 상황 설정을 가정하면서 스스로 틀을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가연씨도
왠지 모르게 그런 부류와 닮은 모습이다. 어설프다. 상처를 받아 본 사람은 오히려 그 상처
받는 상황을 태연하고 대범하게 받아 들인다. 가연씨는 어설프게 상처 받을 뻔 한 적은
있어도 상처 받았던 적은 없다. 그녀의 밝고 맑은 표정은 가식적이거나 잡티가 없었다.
그것을 소중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깨기가 싫은 것이다.
가연씨는 종석이처럼 종석이에게 조심 스럽다. 종석이를 알기 위해 나를 멀리 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가연씨는 분명 종석이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불안해 하고도 있다. 그것이 종석이의 미적대고 겉으로 느긋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조급해 하고도 있다. 종석이의 마음을 짐작은 하지만 확신은 못한다. 종석이는 확신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진혜에게서 잘 알고 있다. 종석이는 자기 마음도 제대로 판단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후후, 내가 그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의심하게 될 것이다.
가연씨는 그것이 싫으면서도 듣고 싶어 하겠지? 나는 가연씨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
왠만큼 감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니까. 난 가연씨를 진혜와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현석이에 대한 부담을 들고 서두르지는 않으나 어려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빵, 빵!"
알았어 임마, 가면 되지. 빵빵이는 왜 그리 눌러 되냐.
그래도 혼자 있으면 종석이를 생각한다. 그 놈은 착한 놈이기에. 내가 너무 나쁜 놈 아닌가
싶다. 진혜가 종석이 얘기를 하며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해 의심할 때 난 종석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종석이도 분명 가연씨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좀
더 그 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겠지만 주위에 끼어 드는 게 없다면
분명 그는 그녀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훗, 그대로 놔둔다면 가연씨와 종석이는 분명 하나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또 끼어 들고 있는가? 예전 진혜도 그녀의 말처럼 내가 끼어 들지 않았다면 하나의
인연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
좋아하는 마음이 죄가 될 순 없지만 묶어 둘 필요는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어제 종석이와 눈싸움 했었다.
이미 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난 아직 커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고운 것들이 있더라.
화가 났지만, 종석이도 화가 났을 테지만 우리는 참 순수하게 서로 좋아하는 마음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더라.
저녁 무렵에 그 생각들을 더 밝게 해 주는 일이 있었다.
종석이 어머님이 오셨다. 내가 참 좋아했었다. 종석이 어머님은 내게 거리감 없는 이웃이요
친척이요 가족 같은 존재다. 다른 친구의 부모님처럼 격이나 거리감이 없이 날 대하신다.
그래서 좋다.
나쁜 시키.
어머님이 이야기 하는 걸 들으면서 나는 다시 가연씨에게 종석이를 제외시키기로 했다.
"사귀는 사람 있어?"
"아직 아니라니까요."
"유치원 교사? 몇 살인데?"
"그냥 만나는 사람이에요. 자꾸 묻지 마요."
"내일 선볼 거야?"
"볼 게요."
그냥 만나는 사람? 그려, 그냥 만나는 사람인데 내가 널 의식할 필요는 없지.
<계속> ..
#39. 불안해?
선을 봤다는 거,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확인했다. 맞선 본 상대보다
가연씨가 내 곁엔 잘 어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은 가연씨라는 사실을.
맞선을 보고서 난 한 걸음 더 가연씨에게 갈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 나는 내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에게 모두 마음이 이끌리는가? 그건 아니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나는 그게 즐거웠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다소 수줍게, 가연씨가 내게 처음 왔을 때
처럼 수줍은 모습, 가연씨만큼 예쁜 외모, 그리고 좋은 조건의 아가씨를 앞에 앉혀 두고
내가 가연씨를 생각하며 그리워 했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즐거웠다. 무언가에서 얼핏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받은 기분은 좋았다. 나는 가연씨를 원하고 있다. 용기, 나는 가연씨에게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가연씨를 위해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움. 그것 때문에
나는 맞선 본 아가씨를 보내며 즐거웠었단 말을 가식적이지 않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집에 있었어요?"
나는 선을 봤던 아가씨와 헤어지고 난 다음 바로 가연씨에게 연락을 했다.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일었기 때문에. 이게 사랑하는 느낌 때문이라고 믿었기에.
"네. 오늘은..."
"어제 어머님이 오셨어요. 하하. 토요일인데 저녁에 뭐 하세요?"
"그냥 뭐..."
"지금 나와요.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토요일인데 집에 있음 안돼지."
"어디신데요?"
"여기요? 약국은 아니에요."
"밖인 거 같아요."
"우리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볼래요?"
"네?"
"오늘 근사하게 데이트 한 번 해요."
"흐음."
"우리 너무 약국에서만 만났죠?"
"하긴. 나갈께요. 어디로 가면 되요?"
"씨네 하우스 앞으로 나와요."
가연씨를 기다리면서 난 생각을 했다. 가연씨를 보게 되면 오늘 급작스레 생긴 이 용기가
굳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어제도 본 가연씨를 그리워하며 설레이고 있다. 오늘 가연씨와
만난 다음 난 어머니께 가연씨를 말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사람은 자신의 상대를 남과 잘 비교한다. 사람은,이라고 쓰는 의도는 내 생각을 보편화하여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잘못 되었다.
아까 맞선 본 상대에게서 가연씨에 대한 내 마음을 배웠다. 그런데 가연씨를 보고 나는 또
아까 그 맞선 본 아가씨를 생각하는 건 왜인가. 잠시였지만 택시에서 내린 가연씨의 모습을
난 아까 맞선 본 아가씨와 비교를 했다. 무엇 때문에 아까 가연씨를 그토록 찾았었는가?
매일 보는 가연씨의 모습은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본 모습에서 가연씨에게
난 아까의 그리움을 찾지 못했다. 내 마음이 가연씨에게 젖어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상하게 가연씨가 나타나자 그녀를 기다리면서 가졌던 생각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가연씨가 내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일상, 일상은 그 속에 있을 땐
느끼지 못하지만 깨져 버리면 어색하고 힘들다. 돌아가고 싶어 몸부림 칠 것이다. 그렇지만.
약국을 벗어난 어색함. 잠시 가연씨와 떨어졌었다는 묘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아까
가연씨를 원했던 내 마음을 잠시 헛갈려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모르겠다, 가연씨는 아까
맞선 보았던 아가씨 보다 좀 더 친숙하다는 느낌 빼고는 별로 다르지 못하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었는데...
"영화 뭐 보실래요? 마지막 회는 구할 수 있겠어요."
"흠."
"표를 끊어 놓고 우리 저녁 먹으러 가요."
"저거 보죠?"
"아름다운 시절?"
"네."
"하하. 그러죠. 잠시만 여기 서 있어요."
외출을 했다는 기분은 상쾌했다. 연인들이 많은 공간에서 나도 저들과 같이 연인과 함께
있다는 기분, 두 장의 표를 달라는 기분은 좋았다. 나는 괜한 것을 기대했었나?
이런 것에도 난 만족할 수 있는데 나는 가연씨를 기다리면서 무엇을 기대했었나?
"식사는 뭘로 할까요? 여긴 양식,일식, 한식, 거기다 중식, 퓨전 음식까지 갖가지 식당들이
근처에 있어요."
"종석씨 좋을대로 해요. 오늘은 그냥 외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거든요."
"그래요? 생선회 좋아해요?"
"그럼요."
"그럼 일식집으로 갈래요?."
"비싸지 않을까요?"
"뭐 그 정도야."
사람이란 가치관을 떠나서 확실히 아까 선 봤을 때보다 가연씨와 있을 때가 더 즐거웠다.
"맛있어요?"
"네. 전 광어회 밖에 못 먹어봤는데..."
"저도 그게 제일 맛있었어요. 이런 돔 종류는 부드럽긴 한데..."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
"하하. 가볍게 한 잔 해요. 기분 좋은 일이 있다기보다 가연씨와 있으니까 좋네요."
"네에. 제가 따라 드릴게요."
"헤헤."
괜찮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다음 극장에 나란히 앉는 기분도 좋았다. 내 곁에 꿈을 꾸고
있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가연씨의 어깨에 팔을 올려 보았다. 가연씨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래, 우리는 이미 연인사이다.
그런데 영화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저 영화. 내 어린 시절,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짚기에 가장 멀리 있는 어린 시절에는 가연씨도
없었고 진혜도 없었다. 오늘 맞선 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 새끼만이 있었다.
나는 왜 이런 동화 같고 빛바랜 사진 같은 영상을 긴장하면서 보는 것일까?
내 옆에 가연씨가 고운 눈망울을 하고 스크린에 시선을 두고 있다. 아무런 잡티가 들어
가지 않은 맑은 시선이다. 이런 사랑스런 여인을 두고 난 딴 생각을 했다. 내 곁에 두고
싶은 용기가 다시 생겼다. 하지만 그 새끼, 어제 어머니께 가연씨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버린 그 새끼 때문에 한 동안 내 옆에 있는 이 아가씨를 숨겨 두고 싶은 생각이 생긴다.
나는 가연씨 때문에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왜 가연씨에게 받는 이런
느낌들을 확인받지 못하고 살았나. 가연씨는 내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상상하는 그림들
속에 가연씨는 영화의 풍경처럼 풋풋하고 맑아야 한다. 내게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가연씨는 소중해야 한다.
어제 어머니 앞에서 현석이 때문에 잠시 언급 된 가연씨는 그렇지 못했다.
현석이 새끼가 얄미워 졌다. 내게서 가연씨를 위협했다면 현석이는 가연씨를 그렇게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었다. 그 새끼가 싫다.
저런 아름다운 시절 속에 현석이가 떠 올라서는 아니 되었다.
맞선 본 아가씨에게 가연씨가 그리움으로 떠올려 졌고 가연씨와의 좋은 시간에 현석이를 떠 올렸다.
"오늘 선 본 아가씨 어땠어?"
"괜찮았어요."
"그래?"
"마음에 썩 들던데요."
"나는 내일 아침에 내려 갈련다. 곧 다시 올라 올테니 자주 연락하고 만나."
"하하, 저도 신정 땐 내려가 볼게요."
"그래."
가연씨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던 길,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 진 공원에서 내렸다.
손을 잡고 오던 그 헤어짐을 위한 길이 아쉬워 공원에서 내렸다. 나는 확인받고 싶었다.
"아저씨 여기 세워 주세요."
"여기서 왜?"
"헤. 가연씨 우리 공원에 잠시 앉았다 가요."
여릿한 가로등 하나와 벤취, 우리는 앉지 않고 잠시간 껴안은 채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가연씨의 손을 놓지 않고 공원을 걸었고 용기를 내어 그녀를 껴안았다. 밤이었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겐 용기가 있었다.
"흠."
입맞춤을 끝내고 나는 미소 지었다.
"오늘 종석씨..."
"흠, 흠. 가연씨 참 사랑스러워요."
가연씨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머리칼을 치워 얼굴 표정을 살폈다. 그 곳엔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가연씨에게 다른 사람의 영상들을 담았던가? 나는 그토록 서툴렀었나?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가연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깨기가 싫었기에
오랜시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난 지금까지 괜한 생각들로 가연씨에게 나 스스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느낌이 일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응?"
가연씨가 정적을 깨고 살며시 입을 열었다.
"종석씨가 오늘처럼 한두 번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참 기뻐요. 하지만 서둔다는 느낌도 들어요.
내 잘못일까요? 조금씩 불안해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저 좀 성격이 이상한가 봐요."
가연씨를 배웅하고 집에 오면서 나는 히죽 웃었다. 기분 좋은 느낌으로 가연씨가
내 반려자라는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다. 가연씨가 한 말 때문에 마음으로 웃지 못하고
히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다. 가연씨를 원하고 내 마음을 확인 받았지만 난 이제
서툰 사랑을 하고 싶지가 않다. 내 알 수 없는 마음들을 매듭짓고 가연씨를 받아 들이고
싶다. 그래서 어머니께 가연씨에 대해 말하는 것을 유보시켰다.
현석이에 대한 불안감도 지울 것이다. 지가 뭔데 내 마음을 흔들 권리가 있나. 친구란
이유 때문에, 오늘 영화처럼 고운 영상의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그와 나의 문제다.
가연씨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
잠자리에 들면서 가연씨가 했던 말이 자꾸 떠 오른다. 불안하다. 예전 내가 현석이 때문에
진혜에게 가졌던 그런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얄밉게 허허 웃는 현석이의 얼굴이 떠 올랐다. 허공에 그려지는 그의 얼굴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그 웃음 때문에 가연씨가 불안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나쁜 놈.
이제 그가 웃어주는 허허, 그 웃음에 난 매정해 질 것이다. 아름다운 영상? 아름다운 시절? 니 뿡이다.
#.40 나는 집착하는가
어제는 종석이 어머님을 만나뵙고 뭔가 알 수 없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가연씨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난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연씨와 난 솔직히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그리고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종석이의 연인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와 요즘은 많이 다르다.
왜 그런 것인가? 난 여전히 종석이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나 보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난 싫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 가연씨를
유치원 앞에 내려주며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올려 졌다.
하고 나서 후회 하는...
"고마워요."
"잘 들어 가세요. 참 가연씨!"
"네?"
"오늘 오후에 뭐 할 거에요?"
난 오늘 종석이가 오후에는 가연씨와 상관 없는 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말이었다.
"집에 있을 거에요."
"오늘 점심 같이 하실래요?"
"네에?"
그녀는 꿈쩍 놀라는 모습이었다.
"오후에 할 일 없으면 식사나 하자는 말인데 왜 놀라..."
"아니에요. 제가 좀 과민반응을 보였어요. 출근 잘 하세요."
"오늘 오후에 종석이 없어요. 오늘 같이 점심이나 해요."
가연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러시면 현석씨 차 얻어 타기가 어려워져요."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실없이 내뱉었다.
"오늘 종석이 선 보는 것 모르죠?"
나는 그 말 뱉은 것을 후회한다. 종석이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다. 내 자신이 싫어진 느낌
때문이다. 나는 가연씨에겐 다르게 행동하려 했다. 종석이를 닮으며 진혜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연씨에게 접근해 가려 했다. 그러나 난 달라지지 못했다.
"너 때문이었다."
얼마전 진혜가 내게 했던 말이다. 내가 진혜에게 했던 사랑이라는 말, 그리고 어설펐던
행동들. 그것은 나를 그녀에게 접근 시키기 보다는 저런 원망으로 돌아올 웃기지도 않을 일
밖에는 되지 못했다. 참았어야 했는데...
얼마전까지 난 가연씨는 내가 아닐 바에야 그대로 종석이에게 머물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진혜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종석이는 그래서 내게 내 마음만을 생각해라 했던 것인가? 나는 비굴해 지는 것 같다.
종석이를 깎아 내리며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이며 나는 가연씨를 내게 돌려
놓기 보다는 그를 떠나게 하려는 것인가.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스스로 나는 종석이를
좋아한다는 마음에 새겨 놓고서 그 마음으로 여러 것들을 변명하며 종석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겐가? 그렇게라도 해서 가연씨를 내게 돌리려고 하는 것은 집착이다.
인정받지 못한 자가 인정받으려 하는 집착. 열등감?
"야, 이번엔 내 성적이 더 좋네."
"그래. 너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었나 보다. 더 열심히 해."
내가 고 2때 그 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을 때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기대하면서
종석이에게 자랑을 했었다. 약간은 비아냥거리며 또한 거들먹거리며. 그러나 그는 저 말
한마디만 해주고 담담해 했다.
자기 성적이 떨어 졌을 때 그토록 그는 실망을 했고 나는 내 성적을 들먹이며 그를
위로하려고 했었는데 그는 내가 그를 앞질렀는데도 무척이나 담담했었다.
뭔가 크게 실망하고 가슴 아파하고 나를 부러워 하는 그런 모습을 원했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훗, 그는 결국 일류대를 들어 갔고 나는 그보다 못한 학교를 진학했었다. 그렇게 될 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는 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내 여자 경험 이야기를 그에게 많이 해 주었다. 그가 귀를 솔깃해 하고 내게 부러움을
나타내자 나는 아주 과장까지 하며 내 여자 경험에 대해 자랑했고, 모르지 그 때문에 여자
문제에 있어 그보다 솔직해 졌는지도... 그는 그런 나를 부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만나던 모임이 깨져가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 오른다.
"넌 여자 문제에서 만큼은 맘에 안 들어. 추잡해, 좀 순수해라 임마."
귀를 세우며 내 경험담을 얘기하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그는 내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를 안 좋은 놈으로 몰아 세우고 있었나 보다.
어제 종석이가 어머님께 했던 가연씨에 대한 그 가벼운 발언 때문에 녀석에게 화가
났었다고 변명해 보지만 내 입은 너무도 쌌다. 저런 말을 한 내가 가연씨에게 좋은 점수를
얻을 리 없었다.
결국 토요일 오후는 나 혼자였다.
나는 연말 상여금 쪼로 받은 미니 콤포넌트를 들고 퇴근 해서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보냈다.
하하, 아직 날 찾는 여자들이 있긴 있었다. 오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여인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나가기 싫었다.
토요일 오후, 약속이 없는 토요일 오후, 내일은 또 약속이 없어 편히 쉴 수 있는 일요일.
이런 상황이 참 좋다고 생각한 때도 있지만 오늘은 답답하다. 막 외출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나 만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기도 싫었지만 외출을 하기도 싫었다.
저녁 무렵에 전화가 왔었다. 종석이에 연락이 안되어서 내게 한 걸까? 전화를 한 사람은
나를 조금 당황케 만든 진혜였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너무 매정한 소리는 하지 마라. 그 날 네 얘기 듣고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흠. 그 얘기 깊이 새겨. 괜히 한 말 아니야."
"야아!"
"혼자 있어?"
"응. 종석이 약국에 없지? 그래서 내게 전화 한 거야?"
"훗! 니가 보고 싶어 전화 한 거다."
"그래? 하하. 왠일이야?"
조금 어색했지만 내 웃음은 결코 가식적이지 않았다.
"술이나 한 잔 할래?"
"엉? 너 아줌마야. 더군다나 임신한 몸으로 술을 마셔? 아서라."
"지우면 안돼겠지?"
"무슨 말이야?"
"나 헤어지고 싶어."
"엉? 누굴 말하는 거야?"
"내 남편이라는 사람... 그냥 그래... 흑"
진혜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더욱 당황이 되었다.
"안 좋은 일 있니?"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지운다는 건 너...?"
"그래 내 뱃속의 아길 지우고 싶어."
"야!"
"너네 집 가면 안될까?"
진혜는 날 찾았다. 울고 싶을 땐... 그것은 좀 의아한 일이다. 예전 그토록 나보다 종석이를
원하면서도 진혜는 종석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진혜는 울고 싶을 땐 날 찾아 왔었다.
고민이 있을 땐 날 찾아와 물었다. 물론 종석이와 관계된 일들이라 그를 직접 찾을 용기가
없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진혜는 울고 싶을 정도로 요즘 힘이 든다고
했다. 무슨 일일까?
나는 모른다. 진혜가 시집 가던 모습도 보지 못했고 한 동안 종석이 때문에 진혜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최근 들어 어쩌다가 연락이 닿았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날 찾아오려는 걸까?
전에 내게 했던 말이 다시 가슴을 파고 들어 온다.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시간들이
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또 따지러 오려는 걸까?
만나기 싫었다. 그랬다. 오늘 가연씨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 말 때문에 난 가연씨가 좀 멀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종석이에게 괜한 열등감을 불러 들였는데 진혜마저 날 찾아와
종석이를 언급하며 내게 따지려 든다면 난 아마 가연씨는 물론 한 동안 종석이도 보지 못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절 할 수 없었다. 난 진혜를 우리 집으로 찾아 오게 했다.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면 데려오지 않겠다던 내 공간에 진혜를 다시 불러 들었다. 나는 그런가?
방 청소를 하면서 내심 불안했지만 또한 난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나 진혜의
눈물을 못이겨 내가 그녀에게 다시 감정이 생기지나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도 나 또한
진혜에게 위로 받고 싶은 게 떠오르고 있다. 진혜는 잊혀진 여자가 아니라 다시 불러
들이고 싶은 여자인가. 종석이는 잘도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니는데 실제로 한 여자를 못
잊는 건 나였단 말인가.
나는 왜 좋은 말로 진혜를 타이르지 못하고 내 집에 불러 들이려 하는가.
이것도 집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