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3> 스승 박맹호 민음사 대표, 제자 이갑수 궁리출판사 대표
조선일보 2004.11.08
問 "요즘 아이들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있습니다"
答 "책은 자연스럽게 人生문제를 푸는 비밀 열쇠죠"
박맹호(朴孟浩·70) 민음사 대표와 이갑수(李甲洙·45) 궁리 출판사 대표는 각별한 사제지간이다. 이 대표는 박 대표가 창간한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박 대표의 권유로 민음사에 입사해 편집장과 사이언스북스 대표를 지내는 등 약 8년간 출판을 배웠다. 인문학 대중화에 기여한 국내 대표적 단행본 출판인으로 꼽히는 박 대표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6년민음사를 창립했다. 76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조성기 등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1985년 대통령표창, 199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식물학과를 나온 이 대표는 짧지 않은 방황 끝에 서른이 넘어 ‘천직’인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1998년 창립한 궁리출판 대표로 있다.
▲이갑수=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말 중에서 무게 있는 것들이 침전돼 책으로 남습니다. 평생 책을 만들어오면서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박맹호=나에게 책은 천재들을만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가령 김수영과 니체를 만나는 것, 베토벤의 생애에 젖어 보는 것, 철학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이 모두가 책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생의 교사들을 누구나 손쉽게 만나는 것, 그게 바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우리 사회는 평생교육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출판의 교육적 기능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식이나 교양의 전수가 칠판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출판사도 진리를 전파하는 교육기구라 할 수 있겠는데요.
▲박=물론입니다. 학교에서도많은 것을 배우지만 책을 통한 배움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우리는 책에서인생의 다양한 좌절과 성취와 깨달음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과외에 치중하는 것을 봅니다만,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은 책을 만났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대부분 사람들이 학교를 떠나면 공부는 끝이라고 치부합니다.학창 시절 교과서 읽기가 독서의 전부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책을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박=책에는 어느 순간 전율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책에 다가가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책은 쉽고 재미있는 것부터, 예를 들면 대중소설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책을 읽어라 읽어라 너무 강요하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만화나 애니메이션같이 쉬운 것부터 시작해 사물의 본질을 터득해 나가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이=고려대 이남호 교수가 쓴 ‘박맹호론’을 보니 “민음사는 우리 사회의 결여된 부분으로 촉수를 지속적으로 뻗어나감으로써 새로운 출판시장을 개척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박=개척했다는 것은 좀 과분한 표현이고요. 출판이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체계화하고 에너지화하는 겁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므로 항상 새롭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출판 기획의 대상이란 거의 무궁무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출판의 어려운 상황을 정면 돌파하면서 새 국면을 전개해 왔고,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해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세간의 평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한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박=초창기에는 돈은 안 되고 빚만 쌓이면서 집사람이 쓰러지기도 했지요.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저 나름대로 개안을 했다고 할까, 터득한 게 있습니다. 이왕 돈을 쓰려면 손해를 보더라도 제대로 좀 하자, 가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좋아하되 남들은 잘 안 하는 것을 하자고요. 그래서 제일 안 팔리는 시집·문학평론·창작물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독자들이 손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가격도 대폭 내리고, 신인들도 과감히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획들이 젊은 세대의 욕구와 감각에 맞았고 시대의 흐름에도 부응했던 것이겠지요.
▲이=어느 대담에서 하신 말씀을 보니 책은 폭풍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국 출판의 자생력을 강조한 말씀이겠지요.
▲박=물론 그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처럼 격변의 세기를 산 민족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10년 단위로 전쟁과 혁명을 겪었고,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변화도 경험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 왔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긴 하지만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험난한 순간들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견뎌낸 책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우리 출판도 한글 독자만을 상대로 하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세계를 무대로 시각은 높이고 시야는 넓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박=차근차근 단계적으로 해야하겠지만 우리 아동도서 시장이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아동출판은 10년 만에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디자인·장정·일러스트 등 모든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 수준입니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주빈국으로 초청받을 정도입니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보다 더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양성해 세계를 향한 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외국인에게도 우리 책의 내용과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내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주빈국 행사에 관해 이를 근심스럽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년 행사와 관련해서 우리 출판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박=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출판을 어떻게 세계에 보여줄 것인가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기회입니다. 출판계가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우리의 역량과 참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세로쓰기를 하는 일본책들과는 달리 우리 책들은 가로쓰기여서 장점이 많습니다. 우리 책의 외형, 작품화된 모양을 보여주는 데 우리 단행본 출판의 주역들이 적극 나서 주기를 바랍니다.
▲이=최근 들어 출판 불황, 특히 교양서 시장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박=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발견합니다. 각자 타고난 재능이지요. 책은 그릇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습니다. 예술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인터넷이 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 활자매체가 할 수 있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출판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개인이 자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잘 노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것처럼 잘 노는 것도 없을 텐데요. 저만 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수불석권(手不釋卷)해라, 즉 손에서 잠시도 책을 놓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해서 늘 장식으로라도 외출할 때에는 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있습니다.
▲박=노는 시간은 자기 충전의 시간, 지적으로 재무장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니터를 통해 보고 읽는 것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책은 자연스럽게 인생의 문제를 푸는 비밀 열쇠입니다. 당장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 보면 우리 아이들도 이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의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왕도(王道)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책과 가까이 지내는 것입니다.
<정리=이갑수 궁리출판사 대표>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4> 스승 임영웅 연극 연출가, 제자 김광보 연출가
조선일보 2005.01.31
問 “스스로 틀에 가두면 연극도세상도 자유롭지 못해요”
答 “우리 연극계는 연출가의 성향을 쉽게 단정해요”
임영웅(林英雄·71)과 김광보(金洸甫·41)는 극장에서 맺어진 사제지간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를 보고 연출가가 되기로 결심한 김광보는 연희단거리패를 거쳐 93년 신촌 산울림소극장에 조명 기사로 들어가서 임영웅을 만났다. 1969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 초연한 임영웅은 사실주의 극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작업을 해온 연출가. 김광보에겐 임영웅의 작품이 교실이자 스승이었다. 임영웅도 90년대 초반부터 대학로에서 왕성한 작업을 한 김광보를 눈여겨보았다. 임영웅은 1985년서울 신촌 자신의 집을 헐고 산울림소극장을 지은 뒤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위기의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산울림표 연극’을 만들었다. 김광보는 1994년 연극 ‘지상으로부터의 20미터’로 데뷔한 뒤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등을 내놨다.
▲김광보=산울림에서 작업하면서 혼쭐난 기억이 참 많습니다.
▲임영웅=허, 그래? 난 기억이 없어. 지나가면 그만이야. 원래 화 잘 내긴 해도 다 일 때문에 그런 거지사람 때문은 아냐. 늘 악쓰면서 연극을 해왔는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면 병나지.
▲김=연극계도 그렇지만 극장 밖 세상도 요즘 ‘위기’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임=IMF때도 그런 얘기 많이 했지. IMF 때문에 경제가 불황이고 사회가 뒤숭숭하니까 연극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연극하면서 IMF 아닐 때가 언제 있었나? 한국에서 연극은 독립운동한다는 각오 없이는 안돼요.
▲김=그래도 한국 연극이 활발하고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던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임=내 경험으론 6·25 전쟁 중 피난갔을 때, 그러니까 50년대가 그랬어요. 아이러니지. 피난 시절에 연극이 가장 역동적이었으니.
▲김=흥미로운 말씀이네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연극이 꽃을 피우다니. 몸도 마음도 가난해진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게 필요했을 테고, 그때 연극이 순기능을 한 것이군요.
▲임=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래도 그땐 전쟁으로 폐허가 됐어도 연극을 볼 정도로 정서의 값어치를 아는 사회였어요. 지금 세상은 갈수록 모래알처럼 까칠해지는 것 같아. 교육부터 문젭니다. 시험에도 안 나오고 점수 올리는 데 바로 도움 안 되는 정서에 왜 신경을 쓰냐는 식이지.
▲김=타의에 의해서라도 연극 보러오는 아이들이 자발적인 관객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연극을 해야 할까요.
▲임=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설 때 ‘오늘 연극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합니다. 다음에 연극을 다시 봐야겠다는 동기를 심어주는 거, 그만한 연극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동기 부여만 된다면 어떤 연극을 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임=그렇진 않아요. 연극을 통해서 스스로 무대 위에 비춰진 인간들과 자기 삶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지요. 연극에 비춰보고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나’ 점검하면서 말이죠.
▲김=선생님은 연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강조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하는 건 관객의 수가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연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대학로 연극은 다분히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으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창작자들은 불안해합니다. 이런 풍토에서 어떤 생각으로 연극을 해야 할까요.
▲임=‘관객의 수가 아니라 연극의 질이 문제’라고 말한 걸 오해하면 안됩니다. 관객의 수도 중요하지요. 다만 객석을 채우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건 관객의 구미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관객을 잡아당길 만한 감동적인 연극을 만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문제예요. 어려울 때일수록 ‘왜 연극을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다지고 반성할 건 반성하면서 지켜나가야지요.
▲김=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을일군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극장을 지켜야 하는 고달픔과자존 사이에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임=고단하지. 산울림은 어느 정도 고정관객이 있다 치더라도, 소극장이라는 게 경영의 측면으로 보면 바람직한 공간이 결코 아니니까요.
▲김=키워서 부를 늘리는 자본 논리로 보면 그렇겠네요. 연극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미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꼬박 20년을 버티지 않으셨습니까.
▲임=1985년 산울림 개관하면서 나한테 다짐했던 게 있어요. ‘한 10년 만 버텨보자. 그러면 뭔가 될 거다’라고 믿었어요. 20년 지난 지금도 상황은 그때 개관할 때하고 똑같아요. 그럼 그만둘까? 나 개인이나 산울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극계 전체에 패배감을 줄 수 있어 그러지도 못합니다. 앞으로 더 잘 해야죠.
▲김=저는 요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연극계는 연출가의 성향을 하나로 단정 짓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성을 고루 보아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임=연출가를 미술이나 문학처럼 무슨 파(派)나 주의로 구분하는 건 아주 구식이예요. 분류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 없지. 연출가의 연출 방식을 좌우하는 건 그의 성향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날더러 ‘리얼리즘 연극의 마지막 교두보’라고 하는데 물론 내가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연출 공부를 했고 또 그렇게 작업해 왔지만 모든 연극을 다 리얼리즘으로 연출하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를 어떤 틀에 가둔다면 연극도 세상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김=저는 우리 연극에 없는 게 400~500석 규모의 중극장용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극장에선 잘 만들어도 중극장으로 옮기면 헝클어지고 고전하는 이유죠. 최근 중극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임=그나마 소극장이라도 있어서 한국연극의 명맥이 이어져 왔어요. 하지만 소극장의 역기능이라고 할까, 소극장에서만 아옹다옹 연극과 씨름하다보니 사고도 왜소해지고, 그래서 문자 그대로 ‘작은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듭니다. 중극장에서 좋은 작품이 많이 태어나고 자연스레 스케일도 커지면 우리 연극이 좋은 방향으로 가겠지요.
▲김=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1990년에야 봤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역설과 페이소스, 그리고 선생님만의 독특한 연극적 양식은 제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임=처음 ‘고도…’를 하기로 마음먹고 집에 와서 읽는데 보통 두 시간에 끝날 일이 꼬박 사흘 걸렸어요. 원전대로 하겠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나름대로 해석을 얹은 거야. ‘고도…’는 인간을, 특히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잘 그렸어요. 그러니까 이건 부조리극이라든지 전위극이라든지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는 작품인 거죠. 어떤 날은 오전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7시까지 연습을 했죠. 참 신기한 게, 할 때마다 새로운 걸 하나씩 발견하게 돼요. 늘 긴장되고.
▲김=몇 시대에 걸쳐 계속 회자될 수 있다는 건 ‘고도…’가 공시성과 통시성을 함께 지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와 소통 할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지요. 마지막으로 연극과 관객 사이에서 어떤 연출가가 돼야 할지 일러주십시오.
▲임=진실하게 대하는 길밖에 없지 않나요. 술수로 접근해가지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완성된 연출은 없어요. 숨이 멈출 때까지 도전하고 방황하며 찾아갈 밖에요.
<정리=임광보 연출가>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5> 스승 조순 前 서울대 교수, 제자 박원암 홍익대 교수
조선일보 2004.11.15
問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答 "개혁을 말하면서 또다른 불균형 만들면 안되죠"
소천(小泉) 조순 전 서울대 교수는 무엇보다 74년에 펴낸 ‘경제학 원론’으로 이름 높다. 70년대 말부터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왜곡된 한국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88년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학교를 떠나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 초대 민선시장, 한나라당 총재, 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행보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공과(功過)가 엇갈린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는 미국 MIT에 유학하여 거시경제와 국제금융을 전공하였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을 거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있다. 요즘도 조순 교수가 주도하는 경제사상연구회에 매달 참가하며 ‘산신령’으로 불리는 스승과 북한산·관악산을 즐겨 찾는다.
▲박원암=유가가 급등하고 수출증가세도 둔화되면서 내수 회복이 늦어질 것이라고들 전망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경제 활력이 떨어졌다는 지적입니다. 현재 우리 경제를 어떻게 보고 계시며, 그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순=매우 어렵습니다. 성장률이 5%대로부터 4%대로 하향 조정되고 있습니다. 경쟁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치입니다. 그것도 전적으로 수출에 의존하는 것이고, 내수가 아주 부진합니다. 수출이 아니라면, 성장률은 0% 내외일 것입니다. 우리 경제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하나는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빈부 격차의 심화, 지역경제의 불균형 확대 등 양극화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 금융, 정부 등 각 경제주체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박=세계화에 따른 경쟁 심화와 기업별·개인별 생산성 격차로 불가피하게 차별화가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조=우리 경제의 불균형은 매우 오래된 현상인데 정책당국이 그때그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균형이 확대되었습니다. 사실 외환위기를 맞게 된 것도 역대 정권이 불균형의 비효율을 간파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고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박=불균형 현상 중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특히 우려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은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내수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중소기업의 부실 도산이 늘어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조=중소기업은 공급과 수요 면에서 모두 어렵습니다. 공급 면에서는 유능한 인재들은 중소기업 가기를 꺼리고, 은행들은 대출을 꺼립니다. 때문에 중소기업은 혁신할 능력이 부족하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습니다. 수요 면에서는 내수 침체로 국내 수요가 줄어들고 수입 자유화로 싼 물건이 들어오면서 외국제품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의 대책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자금지원 대책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고 경제 전체 구조 속에서 인력, 기술과 시장의 문제를 소홀히 했습니다.
▲박=우리 경제 주체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하셨는데요.
▲조=기업의 생명은 슘페터가 말한 대로 혁신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업의 혁신이 적고, 특히 중소기업의 혁신이 아주 미약합니다. 선진국의 경우는 중소기업이 혁신을 하여 대기업이 되며, 그 예로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런 예가 거의 없습니다. 대기업도 전자, 자동차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는 정부 정책에 대한 의구심과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와 혁신을 안 하고 있습니다. 금융기관도 혁신의 자세로 기업 금융의 위험을 부담하는 것을 피하고 가계 금융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가장 중요한 경제주체인 정부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우리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조=우리 경제의 문제점은 사실 외환위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단기대책으로 극복하기는 어렵고 단기대책과 아울러 참으면서 중장기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개혁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시키는 것이지,불균형을 치유한다면서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화란 지금과 같은 글로벌 경제에서 성장이냐 분배냐를 논하지 말고 경쟁력 강화방안을 강구하고 추진하는 데 있습니다.
▲박=개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위정자들이 개혁을 할 때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조=역사적으로, 문제 해결의 대책을 방치해 두다가 한꺼번에 개혁하려다 실패하는 과오를 많이 범했습니다. 호미로 할 일을 가래로도 하지 못한 사례가 많습니다. 개혁은 제도와 습관을 바꾸는 것인데 제대로 고쳐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미리미리 손을 써야 합니다. 외환위기 이후의 개혁을 보아도 한꺼번에 경제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것이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로 1894년 김홍집 내각의 갑오경장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 정부는 아무런 개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본이 와서 개혁을 하라고 하니까 조선 500년 동안 내려오던 것들을 준비도 없이 한꺼번에 고치려 했습니다. 그것이 국력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내 망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박=정부는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구상하였고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바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에서 어떻게 우리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합니까?
▲조=글로벌 경제에서는 자유화, 자율화가 모든 정책의 기본이 돼야 합니다. 대외개방을 하려면 먼저 대내적인 자유화를 통해 경쟁체제를 갖추어야 합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먼저 국내에서 실력을 갖추어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내적인 자유화를 안 하고 있다가 IMF를 맞아 갑자기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대외개방을 하다보니 기업과 건물을 헐값에 팔게 되었습니다. 이를 외국인 투자로 보고 환영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대내적인 자유화 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고등교육까지 일률적으로 통제되고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고 있어서 교육이 경제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박=요즘과 같은 지식경제시대에서는 인재 양성을 통한 경쟁력 향상이 매우 중요하고, 교육에도 경쟁의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씀인데요.정부의 ‘2008년 대입제도 개선방안’을 보면 평준화의 원칙이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조=우리 경제가 제대로 되려면 교육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여야 하므로 교육과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평준화를 가지고는 경쟁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평준화를 하면 다 같이 잘 안되니 우리끼리 마음은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학을 포함하여 각급 학교에 자율권을 주어야 합니다. 마치 교육의 문제가 대학입시제도에 있는 것처럼 하면서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제한다면, 사교육비도 음성적으로 더 많아지고 나라의 경쟁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게 됩니다.
▲박=참여정부는 “물 흐르듯이 개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만 최근 학자들 간에 참여정부의 정책이 반(反)시장경제적이 아닌가 논란을 벌인 바 있습니다.
▲조=정부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지난날의 방식을 가지고는 시장기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과 같은 정부의 프로그램만으로 경쟁력이 강화될 수는 없으며 민간의 자발적인 경제활동을 통한 창의성의 발휘가 있어야 경쟁력이 강화됩니다. 케인스는 시장 실패와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반대로 하이에크는 정부 실패와 시장 자율을 강조했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골고루 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첫째 경제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떠나서는 가치가 없다는 점, 둘째 실사구시는 역사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 이 두 가지를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최근 경제학은 현실에 대한 적합성을 잃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경제학이 공리공담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정리=박원암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6> 스승 허영 명지대 교수, 제자 정종섭 서울대 법대교수
조선일보 2004.11.22
問 "민주주의 외치면서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答 "타협과 토론없는 다수결은 多數의 독재이죠"
허영(許營·68) 명지대 법학과 초빙교수와 정종섭(鄭宗燮·47) 서울대 법대 교수는 정 교수가 1981년 ‘헌법의 정당성’ 문제를 연구하겠다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교수를 찾아 허 교수가 재직하던 경희대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허 교수가 연세대로 학교를 옮기자 정 교수도 박사과정은 연세대로 진학해 학위를 받았다. 허 교수는 경희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의 본대학과 바이로이트대학 교수를 거쳐 경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고시헌법학에 머물러 있던 국내 헌법학을 ‘학문이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첫 세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교수는 사법고시에 합격,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근무하면서 초창기 헌법재판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건국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에서 헌법을 가르치고 있다.
▲정종섭=저는 유신 시대에 법대를 다니면서 당시 유신(維新) 헌법은 전혀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헌법이 모진 수난을 당하던 시절에 헌법을 공부하셨고 가르쳐야 했지요.
▲허영=72년 3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헌법학을 강의하는데,회의와 절망과 분노와 좌절의 시기였습니다. 헌법이 국민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헌법적 가치에 따라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모범적인 법국가 독일에서 5년간 헌법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당시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지요. 72년 당시 천주교에서 내던 월간 ‘창조’지에 기고한 글이 검열에 걸려 정보부로부터 심한 곤욕을 겪었던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선생님께서는 당시 유신헌법 정당화에 동원된 독일의 카를 슈미트의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시고 그 대안을 통합이론에서 찾고자 하셨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통합이론도 너무 우향우하면 자유가 억제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점에서는 선생님과 좀 다른 길로 갔습니다만.
▲허=유신 통치를 정당화하려고동원된 헌법학자들 중에는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 헌법철학을 신봉한 분도 있었고 법실증주의 헌법철학의 추종자도 있었습니다. 두 이론 다 독재정치 정당화에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헌법학자로서 그 이론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그런 방향으로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통합이론은 아무리 비틀어서 적용해도 독재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될 수는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공감적 가치와 생활감각 내지 시대정신에 따른 사회통합을 헌법의 목표로 설정하는 통합이론에서는 처음부터 ‘장식적 헌법’이나 ‘명목적 헌법’이 발을 붙일 공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80년대에는 좌파 급진 운동세력에서 카를 슈미트의 민주주의이론, 즉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급진 좌파 진영에서 극우 이론을 혁명 이론으로 둔갑시킨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동안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것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절망감도 느꼈습니다. 즉 민주주의라는 구호 아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전율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구호로만 난무할 때 역사의 방향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었지요.
▲허=기본적으로는 우리 헌법의기본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 그리고 법치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비록 다의적인 개념이기는 해도 그 본질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현실은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도 정책 결정과정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수렴하기보다는 다수당 내지 여당의 정치적인 독선이 우선적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다수결 원칙을 민주주의의 본질로 오해하는 것도 민주정치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이유의 하나입니다. 국회에서 야당과 절충과 타협을 하기보다 수로 밀어붙이려는 의식이 지배하는 것도 다수결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인 자유·평등·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형식원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다수결로 하더라도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실현에 역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타협과 절충을 위한 토론과정을 생략한 채 수로 밀어붙이는 다수결은 다수의 독재의 불과합니다.
▲정=1988년 아시아 최초로 헌법재판소를 도입하고 16년여 동안 엄청난 업적을 쌓은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우리 헌법재판소는 지난 16년 동안 우리 헌법을 규범적인 헌법으로 실현하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했습니다. 200개가 넘는 기본권 침해 법률을 위헌결정해서 무효화한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우리 헌법재판제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정=탄핵재판이나 수도이전법률에 대한 재판에서 보듯 헌법재판은 본질적으로 항상 법과 정치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지요. 그런데 요즈음 각기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헌법재판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데, 비평은 좋지만 무력화하려는 의도는 불순하다고 봅니다.
▲허=최근 일부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가 헌법재판소에 대해서 퍼붓는 저주와 매도는 우리 헌정질서의 뿌리를 흔드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정치 행태입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이 나라를 또 통제 없는 독재정치체제로 되돌리겠다는 발상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존립 근거는 바로 국회와 정부, 그리고 법원 등의 위헌적인 권력행사를 막는 데 있습니다. 헌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정=이번 헌법재판을 계기로 ‘관습헌법’이라는 것이 우리 헌법질서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되는 국면을 맞이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법의 구조 속에서 관습헌법의 등장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허=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특별법의 위헌성을 지적하면서 불문헌법의 대명사로 통하는 ‘관습헌법’을 핵심적인 논거로 제시한 것은 개념 사용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관습헌법이라는 불문헌법의 개념보다는 성문헌법의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헌법적 관행 내지 헌법관습법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논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헌법재판소도 그런 취지가 아니었는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즉 한 나라의 수도, 국기, 국가, 국어 등은 그 나라 국민통합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헌법적인 비중을 가지는 사항이기 때문에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세계 80여개 국가는 이들 사항을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이들 사항을 헌법에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헌법적인 비중을 가지는 헌법적인 관행으로 굳어진 사항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헌법적인 관행으로 확립된 국민 통합의 상징인 우리의 수도이전 문제는 반드시 헌법개정에 준하는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인정한 것을 불문헌법인 관습헌법이 아니라 성문헌법을 전제로 한 헌법적 관행 내지 헌법관습법이라고 이해한다면 더 이상 논란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저는 국회에 범국민적 국가적 차원에서 중립적인 헌법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문가들이 2~3년 정도 자료를 모으고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진정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헌법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치권에서 정략적으로 갑자기 개헌문제를 띄워 올리거나 대선 쟁점으로 삼아 논의가 왜곡되는 것을 막는 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허=좋은 생각입니다. 헌법은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헌법은 가장 강한 효력을 가지는 규범이기 때문에 침해의 유혹도 제일 강하게 받는 규범이기도 합니다. 헌법개정을 지나치게 어렵게 해 놓으면 오히려 헌법이 더 쉽게 침해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헌법 개정의 목적이 아니라도 국회에 헌법전문가로 구성된 헌법평가팀을 두고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상설적으로 헌법적인 차원의 검토와 평가를 하도록 맡김으로써 위헌적인 입법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도 헌법재판소와의 관계에서 국회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우리는 반세기 동안 9차례나 헌법을 개정하는 역사를 살아왔습니다만, 헌법이 우리의 삶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며 왜 중요한지를 체화하지 못하고 있지요.
▲허=헌법은 사회통합의 기초가되는 공감적인 가치를 집약해 놓은 국가의 기본법입니다. 국민이 헌법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일상생활에서 헌법적 가치를 자신의 가치지표로 삼아 실천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리=정종섭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7> 스승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제자 최영미 시인
조선일보 2004.11.29
問 "80년대 젊은이들은 이념적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지요"
答 "교수·지식인들이 진실探究의 자세를 못지킨 탓이지"
이인호(李仁浩) 서울대 명예교수(명지대 석좌교수)는 러시아사를 전공한 서양사학자이자 한국 외교사상 ‘최초의 여성 대사’로 이름 높다. 미국 컬럼비아대, 고려대·서울대 교수를 지낸 그는 주 핀란드 대사, 주 러시아 대사를 맡아 외교 증진에 뛰어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영미(崔泳美) 시인은 1992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등을 통해 선풍적인 주목을 끌었다. 두 사람은 1981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지도교수와 학생으로 첫 대면했다. 최씨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에 이 교수가 촌평을 실었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황인욱씨의 석방을 위한 동문들의 탄원서에는 사제가 모두 동참하기도 했다.
▲최영미=선생님과 저는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공부한 스승과 제자로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문과계열의 여학생은 대개 문학을 전공하는 게 당대의 추세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역사를, 러시아사를 공부하게 되셨는지요? 반공이 국시였던 냉전시대에 대한민국의 어느 용감한 남학생이라도 머뭇거렸을 공산주의 종주국가의 역사를 감히(?) 파고들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이인호=아버지께서 역사 관련서적이나 역사소설을 갖고 계셔서 어려서부터 이야기로서의 역사에 상당히 재미를 느끼게 된 듯 합니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는데 어린 귀에도 주위에서 온통 들리는 것이 ‘약소민족의 설움’이니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어서, 왜 우리는 약소국이 되었고 서양은 우수한 세력이 되었는가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지요. 교양 교육으로는 역사가 좋다는 집안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의 격려도 있고 해서 사학과엘 입학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교육 여건이 매우 실망스러웠고 마침 기숙사비까지 전액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을 기회가 있어 한 학년만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내가 월슬리 대학 2학년 재학 중인 19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려 미국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지요. 소련연구 강화가 시급하다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우리 대학에도 바로 그 다음해 러시아 지성사가 개설이 되었는데 그 강의를 들은 나는 그것이 남의 나라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개항이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지식인들이 당면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들로 고민하면서 결국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치달았던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지야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한국 사람 누군가는 소련을 정식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러시아 역사를 전공하기로 했습니다.
▲최=제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 서울대에 여자 교수님은 매우 드물었지요. 1980년 가을이었어요. 2학기 축제기간에 이인호 선생님께서 발표자로 나오는 심포지엄을 청강하며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부임한 지 몇 년 되지 않으셨을 때인데 벌써 여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했지요. 인문대학 1학년 여학생의 대다수가 선생님 말씀을 들으러 우르르 몰려갔어요. 주제가 러시아혁명사였는데 내용은 모두 잊었지만 선생님의 독특한 목소리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제 인생에 영향을 끼쳤지요. 전형적인 한국여성인 저희 어머니의 ‘밥 먹어라’ ‘이제 들어오니’ 같은 일상적인 언어들과 집안에서만 울리는 순종적인 목소리에 익숙하던 제게는, 마이크를 타고 드넓은 강당을 휘어잡는 정열적이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여성이 거세된듯한 선생님의 중성적인 음성이 무척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어려운 말들을 하나도 더듬지 않고… 역사니 혁명이니 하는 심각한 단어들이 여성의 몸에서 나올 수 있을까?" 신기했지요. 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표현하는 목소리에 반해 ‘나도 선생님처럼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제가 대학에 입학해 저의 앞날에 대해 품었던 최초의 구체적인 꿈이었다고 할까요. 저희때는 계열별로 입학해서 일년을 수강한 뒤에 2학년부터 전공학과를 정했는데, 제1지망을 독문학이라고 쓸까 서양사라고 쓸까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선생님의 얼굴이 아른거려 서양사학과로 진학했죠. 그런데 정작 서양사학과에 진학해서는 학내시위에 휩쓸려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돌이켜보면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못했고, 20대에만 가능한 풋풋한 연애를 못해봤다는 게 제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쉬운 부분인데요. 학생들도 힘든 시대였지만, 80년대에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었을 거라 짐작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학생들을 보호하려 다치지 않게 애쓰던 선생님의 모습이 제 기억에 남아있는데, 실제로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대학교수들에게 굉장히 곤혹스러웠던 시기가 1970년대와 80년대였어요. 미국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2년부터 79년까지 고려대에 있었는데 당시 고려대는 학생운동의 중심지였고 79년 여름 서울대로 옮기니까 이번엔 서울대가 데모의 중심이 됐어요. 67~70년 미국 컬럼비아대에 있을 때는 그곳이 민주화를 주창하는 운동의 중심지였는데….
▲최=시끄러운 데만 골라서 가셨군요.
▲이=대학생활 4년이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인이 되는 관문에 들어서는 젊은이들이 성인으로서의 책임은 유예 받은 상태에서 자(智)·덕(德)·체(體)를 집중적으로 연마하는 기간이 돼야 하는데, 우리 학생들은 그 기회를 빼앗기고 살았던 것이죠.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시기에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보다는 삶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는데 몰입해 봄으로써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데 1970~80년대에는 그런 탐구의 자유가 젊은 사람들에게 허용되지 않았지요. 현실 정치가 잘못 돌아가니까 자기들만이 민족적 양심의 수호자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너무나 일찍부터 그리고 오래 동안 실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이 그 세대들 뿐 아니라 나라의 비극이었다고 봅니다.
▲최=그때는 마르크스 레닌 원전을 읽는 게 유행이었지요. 아직 사회경험이 없는 20대에 외부로부터 급진개혁이념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지요. 젊음은 그 속성상 선명한 것에, 이분법적 사고에 더 이끌리지요.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심적인 기성세대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거의 전멸했다는 사실 또한 사상의 편식을 방치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지식인들도 총칼이 무서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원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사회변혁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역사의 불행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단절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대학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상당히 안타깝고 죄책감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당시 교수들이 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지식인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몰두 해야 할 교수들이 데모를 막는 데 동원되었지요. 학생들이 아까운 대학시절을 데모하는 데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사독재 아래서 반공의 필요성을 핑계로 정치적 진상이 은폐되고 역사가 왜곡되는 것은 막지 못했던 기성세대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진실에 목말라 하는데 교수 사회가 강의 내용이나 학사 운영에서 조차 학문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본연의 자세나 권리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초 학생데모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도 학생들의 관심이 길거리가 아니라 강의실을 통해 충족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저명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교수와 미국의 비판적 지성의 대표 스튜어트 휴즈 교수를 학교 당국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국제문화협회의 지원으로 초청해 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어요. 바로 옆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들어와 열심히 듣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놀라고 흐뭇하면서도 그런 기회를 더 만들어 주지 못하는데 대해 안타깝게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최=요즘의 역사교육을 어떻게보시는지요? 우리가 극복해야 될 것들이 있다면 예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내가 매우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나라에서 역사교육이 실종된 지 이미 오래 됐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귀국한 것이 1972여름 유신 초기였는데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대학교에서 세계문화사 강의를 없애고 국사의 내용을 군사정권의 편의에 맞추어 마구 고치더니 나중엔 중고등학교에서도 세계사 교육이 약화되고 드디어 국사마저 선택과목이 되었어요. 역사의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할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 등이 모두 독립과목으로 분리되어 나가면서 역사과목에는 백과사전식으로 이름과 연대가 나열된 지식만 남을 뿐 인간이 살아 온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변화라는 축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접할 기회가 우리 교육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해서가 아니라, 사실 인간과 시민을 교육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언어 다음으로 역사교육이거든요. 자본주의의 아성이라는 미국에서도 오늘날 법학대학원에 가는 사람들이 학부 전공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이 역사인데 우리는 그게 없다 보니까 역사의 흐름이나 변화들을 전 세계의 흐름과 연결해 보지 못하는 편협하고 반지성적인 풍토가 조성된 겁니다. 다행히 우리는 민주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1970~80년대에 비하면 학문과 토론의 자유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보장이 되어 있고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학문 수준은 옛날보다 상당히 높아졌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후배들이 쓴 책을 보면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보여 행복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학문을 전달해 학생들 스스로 진실이 뭔가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 중요하지요. 지금 중·고등학교 검인정 역사교과서들은 내가 봐도 딱할 정도로 너무나 편향돼 있어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수능시험 인용문을 봐도 불필요하게 우리 역사의 부정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과거에 한쪽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그 반대급부로 다른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공식 커리큘럼과 지하 커리큘럼으로 역사해석이 양분된 이후 이제 예전의 지하쪽이 우세하게 되었지만 편향된 점은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최=언젠가 사석에서 선생님은제게 “위선은 허위가 진실에게 바치는 마지막 찬사”라는 말을 인용하신 적이 있지요. 진실이 허위보다 우월하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지식인과 위선에 대해 좀더 상세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선보다 더 큰 문제는 자기가 거짓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마음과 다르게 말을 하고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만연되어 정신적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억압 속에서 살아남다 보니 위선이 내면화 되었다고 변명할 지 모르지만이젠 벗어나야 하지요. 사적인 자리에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공식적인 자리에선 이상한 얘기들이 나와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학계에도 이런 위선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학문의 수준이 올라가도 공론의 수준이나 질은 나아지지가 않는 듯합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감정에 의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는 도가 심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문제에 관한 논의를 보면 누가 지적 기율(紀律)을 가지고 있고 없고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노사 관계 같은 사회 문제에서는 분석을 잘 하던 남자들도 남녀문제에만 오면 사고의 궤도를 이탈하는 사례를 허다하게 봅니다.
▲최=한국의 지식인들은 좌우를막론하고 너무나 경직돼 있어요. 하다못해 개인의 창의성을 가장 존중해야 할 문화영역에서조차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양식이 지배적이지요. 한국사회에는 조직은 있지만 ‘개인’이 없습니다. 제도와 관습이라는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부딪칠 때마다 저는 때로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예술이 가능한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이=지식인의 존재방식이나 역할이 옛날과 비교해서 매우 달라졌어요. 지식인층의 확대라고나 할까요. 옛날에는 책을 독점한 계층이 모든 걸 장악했지요.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보지 못하는 책 한 권을 가지고 계속 가르친 교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때로 걸러지지 않은 지식과 정보들이 물리적 폭력에 버금가는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가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것을 찾아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선 개방된 자세와 동시에 엄격한 지적 기율에 기초한 도덕적 사유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최=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지식의 상품화가 심화, 확대되었지요. 지식과 정보는 재료일 뿐 그것을 토대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시각을 키우고 이를 실천해야 진정한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의 천박한 풍토에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지식이나 싸구려 처세술들이 대단한 지혜로 포장되어 시장에서 팔리고 있지요.
▲이=교육과 인력 훈련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초점이 다르지요. 교육의 핵심은 “협동하면서 사는 게 싸우면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가르침을 밑바닥에 깔아야 하는데, 우리 교육에는 그게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교육받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생겨 급기야 반(反)지성주의가 형성되는 거죠.
▲최=선생님께서는 한국 최초의여성대사(大使)이십니다. 핀란드대사와 러시아대사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해외에서 한국을 대표하셨고,국제교류협력기관 이사장으로 재직하시다 최근에 은퇴하셨습니다. 최근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고대사 왜곡을 비롯해 과거사문제가 볼거지면서 한·중·일 삼국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얼마전까지 친일청산을 둘러싸고 정치판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주고받았지요. 바야흐로 ‘과거’가 현재의 이익과 결부되어 시국의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며 우리사회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전직 외교관으로서 과거청산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지금 과거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 대다수는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마치 도덕적 고민이 없이 이기심 때문에 애국자였던 사람들도 친일 구호를 외친 듯 단순논리를 펴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지요. 민족을 서로 끌어안고 미래의 화합을 위해 과거를 돌아봐야지, 우리에게 해를 가했던 일본 사람들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우리들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진리나 역사 앞에서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러시아혁명 이전에 황제와 국가를 위해 독일군과 싸우다 죽은 러시아 병사들이 도덕적으로 단죄돼야 합니까?도덕적 평가란 여러 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를 모두 살펴봐야지요.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에서는 찬탁도 반탁도 친공도 반공도 모두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행동일 수 있었던 반면 분명히 민족적 반역자로 규탄 받을 만한 행등을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을 직위에 따라 법으로 도식화해서 단죄하려 한다는 것은 너무나 유치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일제시대, 그리고 6·25 동란기의 삶이란게 어땠는가를 제대로 이해할 만한 명확한 지식이나 역사적 상상력을 기르지도 못한 사람들이 조상들을 단죄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가령 김활란 같은 경우에는 여성교육을 포기하는가 마는가라는 선택의 문제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시비의 경우도 신문을 폐간해 버렸다면 친일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살아남기 위해 밤에는 친공, 낮에는 반공을 외쳐야 했던 분들을 단죄하는 데는 그만한 고뇌가 따라야 합니다.
▲최=그럼 친일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야 할까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잘못된 과거를 분명히 알려줄 필요는 있지 않습니까?
▲이=물론이지요. 역사학자들이 친일청산 문제를 연구해 오고 있는데, 학자들에게 맡겨둬야 합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만 아니라 남이 보아도 수긍 할만한 현대사 쓰기 작업을 거국적으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만 아니라 동아시아의역사를 다시 써야지요. 핀란드의 경우엔 스웨덴의 변경지역이었다가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었고 러시아혁명 기에 내란을 겪으면서 독립을 성취한 후로도 계속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나라지만, 핀란드·스웨덴· 러시아 사람 누가 읽어도 괜찮은 역사책을 만들어 냈습니다. 동북아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는 있던 사실대로 가르치면서,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하듯 각국이 노력해야 합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60년대에 중국의 대국주의 때문에 한국인들의 강역이 줄어든 데 대해 북한학자들 앞에서 사과를 한 연설문을 얼마 전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최=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는데, 제가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선생님께서 핀란드 대사로 계실 때 제가 찾아뵌 얘기를 한 신문에 썼는데 제 여동생의 시어머님이 그책을 읽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묻더랍니다 “너희 언니가 이인호란 사람과 어떤 관계냐”고.(웃음) 선생님의 이름만 보고 남자로 오해했던 거죠.
▲이=내가 젊은 역사학도였을 때만 해도 ‘여류 시인’ ‘여류 학자’니 하면서 은근히 여성들을 깔보는 풍토가 있었어요. 그런데 내 경우 이름 때문에 남자로 오인받아서 오히려 편한 점이 많았지요. 필자가 여자면 글도 읽어보려 하지 않던 시대에도 ‘이인호’가 쓴 것은 읽었고 “여자로선 제법이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최=요즘 여성 정치인들이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희 때는 선생님이 가장 앞서나가는 분이셨지요. 정치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은 없으세요?
▲이=나야 정치인은 아니지요. 학자로 있다가 전문직인 외교관으로 나간 것이니까요. 지금은 여성 대법관, 헌법재판관이 있고 국회에도 여성의원들이 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균형이 잡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공직과 그 밖의 고위 관리직에도 여성이 좀 더 진출해야지요. 사회각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나 둘씩 맡고 능력을 발휘하다 보면 사실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구별은 없어지게 될 거예요. 지도자적인 자질이라면 첫째가 인품이지요. 그 다음은 자기 자신을 좁게 보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자신의 확장으로 보는 포용력과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철저하게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헌신입니다. 그것을 갖추면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최=그런데 언론에서 여성정치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미모와 패션에 주목하는 언론보도에 편승해 일부에서는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무로 바쁠텐데 언제 옷이며 악세서리를 구색을 맞춰 살 시간이 있을까” “저 여자의 옷장 한번 볼만 하겠군” 생각하게 하죠. 의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커트를 입거나 화장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80년대의 억압적인 대학분위기와 비교해보면 자신을 가꾸는 게 ‘해방된 여성’의 하나의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요.
▲이=그건 사회적인 풍토와 관계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 감각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심지어 남성들도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하니까요. 현대야말로 삶에서 ‘신체’라는 게 가장 크게 부각되는 시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이성보다 감성이, 정신보다 육체가 우선시되는 시대의 요청에 여성들도 부응하는 것인데, 지나치면 미모보다 중요한 인품이나 능력이 무시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요. 얼굴을 다 뜯어고치고 나서도 그것을 자기라고 할 수 있는지? 결국 균형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화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은데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게 되는 게 아닐까요.
▲최=선생님은 학자이셨고, 외교관이셨고, 한편으로는 어머니로서의 생을 사셨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라고 여자로 태어난 억울함을 가장 크게 자각하셨을 때가 언제였는지요?
▲이=사소한 일들은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최영미씨가 앞서 언급했던 억울함을 뼈저리게 느낄만한 사건은 별로 없었어요. 사회적 차별은 물론 느끼지만 내 인생 전체로 보면 항상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보상을 받고 있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병역의 의무를 남자들만 지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요. 여성이라기보다는 학자로서 제대로 연구할 환경이 못 되어 괴로웠던 점은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자료 접근에 제약도 많았고, 미국에서 교수는 30% 정도의 시간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70%는 자기만의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였어요. 조교를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야 하니까요.
▲최=선생님은 저희 어머니와 연세가 비슷하신데, 제가 아는 두 분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사셨죠. 저희 어머니는 대학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셨는데도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삶을 택하셨지요. 남편과 자식들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며, 의식주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욕구를 식구들에게 양보하고 가정의 좁은 틀 안에 당신의 몸과 영혼을 가두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답답한 적이 많았어요. 지금 60~70대 할머니들은 그 연배의 옛날 어머니들이 누리던 노년의 평화를 못 누리고 있지요. 환갑 즈음에는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인생을 즐겨야 하는데, 직장 나가는 딸과 며느리를 대신해 손주들을 돌봐주느라 아직도 고생하시지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여성들은 자기 윗세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했어요.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아흔 한살이세요. 내가 한국에서 많은 활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와 내 어머니가 살아온 삶을 비교해 내가 어머니보다 더 충만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았는가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지요. 어머니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과 다른 사람까지 뒷바라지하며 남의 삶에 활력을 넣어주는 자양분 역할을 아직도 크게 하고 계시니까요. 지금도 손자 손녀 열일곱명을 포함해 200명은 넘는 사람들을 컴퓨터처럼 머릿 속에서 관리하고 계시거든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겉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남에게 많은 걸 주며 살았느냐에 그 인생의 가치와 무게가 가늠되는 것입니다.
▲최=어머니가 환갑을 맞으셨을때 처음 저와 둘이서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았어요. 찬 음식을 안 좋아하시고, 닭고기를 좋아하시고 등등. 얼마 전에 “컴퓨터를 배울까, 손주를 돌볼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남편과 자식의 그늘을 벗어나 이젠 엄마 인생을 사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결국 손주를 택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어머니는 할 수 없구나’ 탄식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어머니가 존경스럽기도 했어요.
▲이=그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베푸는 삶이 자기 속에 내면화되니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해서 보람을 느낀다’는 식의 의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지요.
▲최=어느덧 시간이 다 되었네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선생님께 묻는 것으로 대담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삶은 지난 몇 십년 동안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법적인 지위도 향상됐고 사회적인 기회와 의식면에서도 변화가 많았지요. 그러나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유리벽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결국 개개인이 하나의 존재로서, 영적·정서적·지적·신체적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게 가장 구체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인가 하는가 데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오늘날 ‘가정주부로 사느냐’ ‘직장여성으로 사느냐’는 식의 양분법적인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봐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기가 가진 능력을 얼마나 충분히 발휘하느냐에 따라 내적인 충만감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든집에서든 외부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언젠가는 공허함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리=최영미 시인>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8> 스승 주정일 아동학자, 제자 유미숙 숙대 교수
조선일보 2004.12.06
問 "요즘 아이들에겐 놀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答 "어린이답게 자랄 수 있는 권리돌려줘야죠"
한국 여성의 출산율 저하 곡선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도로 떨어졌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서다. 육아의 사회적 책임과 성숙한 자녀교육관에 대해 원로 아동학자 주정일(朱貞一·77) 선생과 그의 30년 제자 유미숙(劉美淑·49) 숙명여대 교수가 이야기를 나눴다.
주정일 선생은 1968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부녀아동국장 시절‘어린이집’이란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우리 나라 아동학의 선구자인 그는 서울대와 숙명여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정부에서 일하며 어린이집의 양적·질적 향상에 초석을 다졌다. 또 정서장애아를 위한 상담소를 열어 한국식 놀이치료와 아동심리 상담의 기초를 닦았다. 유미숙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1974년 대학에 입학해서 주 선생을 만난 뒤 원광아동상담소까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유미숙=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아동복지의 길을 돌아볼 때 무엇이 가장 또렷이 떠오르십니까?
▲주정일=보사부에서 일하면서 ‘어린이집’이란 이름을 만들고 특히 사회의 지원이 필요한 저소득층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하던 시절입니다. 어린 시절이야말로 두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이고, 이를 잘 도와줄 환경을 저소득층까지 확대해야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고 그때도 생각했습니다. 이제 벌써 36년 전입니다. 지금 유아교육 환경은 크게 발전했지만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 증가하는 이혼가정의 자녀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어 마음 아픕니다.
▲유=선생님이 서민들을 위해 고안해낸 보육시설 ‘어린이집’은 현재도 보육과 교육의 몫을 잘 병행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숫자도 전국으로 엄청나고요. 하지만 질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주=물론입니다.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이 집과 가까운 곳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국가의 철저한 보육정책이 뒤따라야 합니다. 국·공립, 민간어린이집들 사이의 격차를 줄여나가야 하고, 특히 나라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 그 혜택을 100%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정확한 보육실태 조사가 전제돼야 하지요. 중앙정부 공무원부터 면사무소 보육담당 직원까지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과 프로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유=선생님께서는 전문 치료가 필요한 장애어린이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보이셨지요. 아이들과 놀이치료하는 모습에서 느낀 감동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아동 상담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합니까?
▲주=아동상담도 이제는 예방사업으로 가야 합니다. 가끔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상담을 받아야 하나요?’ 하고 물어요. 그 말 속엔 상담을 받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상담을 받지 않고 버텨내면 문제없는 아이라는 편견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생긴 아이를 치료하는 상담이 아니라 ‘건강한 아이를 더욱 건강하게!’라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제는 아동상담을 민간이 아닌,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합니다. 학교마다 상담실과 놀이치료실을 갖춰야 하지요. 지금처럼 ‘소비자 부담’방식이라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집안 아이들은 방치되고 맙니다. 어린이집 보육 혜택처럼, 아동상담도 같은 수준의 서비스가 이뤄져야 합니다.
▲유=아동상담자, 유아교육자로서 제일 중요하게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은 무엇입니까?
▲주=‘공감(共感)’ 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을 키우려면 우선 자기 문제에서 해방돼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교육 분석을 받아야 해요. 나도 상담을 하기 위해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내 문제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아이들과의 공감이 훨씬 쉬웠습니다.
▲유=공감 이외에 저는 지식도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놀이치료실에서 아이가 장난감을 던지는 행동을 하더라도 아이의 나이와 정신적 연령, 환경상태 등을 알아야만 이해가 되고 공감이 일어나니까요. 자기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잘 키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주=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키운다는 뜻이지요.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 발달 단계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겨 떼어놓았다가 초등학교 갈 무렵부터 데려다 기르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아이의 발달단계를 모르기 때문이죠. 신뢰감이 형성되고 자율감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이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릴수록 부모 손이 필요하고 부모가 잘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육아 환경이 대체로 나아지고 있습니다. 출산휴가가 90일이고, 육아휴직도 3년까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육아휴직제도가 있어도 과연 사회에서 인정하는 분위기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여성들은 ‘돌아갈 자리가 있을까?’ 하고걱정하고요.
▲주=직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3년간 육아에 전념한다고 사회와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되지요. 인터넷교육, 사회교육기관, 지역사회의 각종 강의를 찾아다니며 자기 계발을 해야 합니다. 또 자신을 돌아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고, 여성들에게 이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가족이나 사회가 알아야 합니다.
▲유=자녀가 있는 성공한 여성뒤에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등 다른 여성의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결혼을 해도 자녀를 갖지 않으려는 부부, 또 결혼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미혼여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출산장려금을 준다고 출산욕구가 올라가지 않지요. 해결책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출산은 여자의 일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공유돼야 합니다. 또 아이는 부모만이 아닌,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우선 질 좋은 어린이집을 가정이나 직장 옆에 많이 만들어 사회가 함께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육아휴직 후 여성들이 안심하고 직장에 되돌아올 수 있도록 재교육을 위한 지원도 아낌없이 해야 하고요.
▲유=줄 세우기식 평가방법, 대입 위주의 교육, 획일적 교육 제도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양화 속에서 각자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교육문화를 일구려면 어디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요?
▲주=부모, 사회, 국가 모두 변해야 합니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획일화와 혼동해서는 안 되지요. 각각의 개성을 존중하고 환경을 평준화한다는 것은 많은 경제적 지원이 따라야 하니 단번에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라는 공동체적 입장에 서면 보다 멀리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유=선생님에게 ‘우리의 아이들’이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주=우선 우리 손자녀들이 있고, 일주일에 한 번 내가 놀이치료 해주려고 만나는 강동구 어린이집 아이들이 있습니다. 최근엔 북한 이탈 남한 거주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돕고 있어요. 밥 없어 굶는 아프리카 아이들도 우리의 아이들지요. 그들을 위해 유니세프 같은 기관에 천원짜리 한장 내는 것도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입니다.
▲유=요즘 아이들에게는 놀 수있는 시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주=아이들에게 아이들 자신의 시간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어린이답게 자랄 수 있는 권리입니다. 또 내 아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남의 아이가 건강해야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품을 넓혀가야 할 때입니다.
<정리=유미숙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19> 스승 이헌조 LG전자 고문, 제자 김성우 한국퀄컴 사장
조선일보 2004.12.13
問 "우리 기업의 세계화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答 "국제기준에 맞게 제품 만들고 경영해야죠"
이헌조(李憲祖·72) LG전자 고문과 김성우(金聖宇·57) 한국퀄컴 사장이 기업의 세계화와 혁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이 몸담고 이끈 반도체·휴대전화기·디스플레이 등 전자산업은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 고문과 김 사장은 1990~96년 LG전자(옛 금성사)에서 CEO와 임원으로 함께 근무했다. 이 고문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LG그룹에 입사한 뒤, 1976년 국제증권 사장을 시작으로 96년 LG전자 회장으로 퇴임할때까지 20년 동안 LG그룹 주요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김 사장은 지난 1990년 통신·미디어연구소장(이사)으로 LG전자에 입사했다.
▲김성우=국내 기업들이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때가 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10년 전 경험에 비춰볼 때, 우리 기업은 앞으로 어떻게 세계화를 진행해야 할까요.
▲이헌조=세계화라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반을 갖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과연 우리 기업들이 국제 기준에 따라 경영하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윤리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 세계적 기업과 경쟁을 하려면 로컬 룰로는 안 됩니다. 골프장마다 로컬 룰이라는 것이 있지만, PGA(미국프로골프) 대회에서 로컬 룰대로 하려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제가 지금 한국 쪽 책임을 맡고 있는 퀄컴이라는 회사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지역본부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책임경영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퀄컴은 전체 직원이 8000여명인데, 대부분이 기술개발인력입니다. 한국 기업은 어떻게 기술 혁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아직도 우리 기업은 기술에 대한 투자를 충분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정부·기업이 기술개발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두는지도 의문입니다. 기술 혁신이 안 되는 이유는 사람에 있습니다. 지금 같은 평준화 교육으로는 좋은 인재가 나오기 힘들고 기술의 혁신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김=우리나라는 해외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원천 기술 분야에서 미국이나 일본에 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과학교육이 문제입니다. 광복 이전에는 과학교육이 없었고, 60년대 들어서야 과학교육이 시작됐습니다. 과학교육과 산업 발전은 서로 맞물려 가는데, 우리가 언제 기초과학을 공고히 다질 여유가 있었습니까. 또 기술개발을 위한 인재가 부족합니다. 우수한 학생이 눈앞의 돈만 생각하면서 공대에 가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김=한국은 아직 정부가 기술개발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정부가 제시하는 기술로 세계화와 맞출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글로벌 기준은 우리가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우리를 인정할 만큼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국제 정치적인 이해 관계도 고려해야 합니다. 차세대 DVD(디지털 비디오 디스크) 표준을 놓고, 세계가 양분되는 것도 그런 예입니다.
▲김=기업이 기술혁신을 이끄는것은 당연하지만, 기업이 힘이 없으니까 정부가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닐까요.
▲이=기업은 자생력이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인프라를 마련해 주었지만, 휴대전화기나 자동차를 세계 각국에 파는 것은 결국 기업입니다. 기업의 창의력과 기업가 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환경이 와야 합니다. 기업가 정신을 저해하는 정부의 리더십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우리나라 기업의 노사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이=일찌기 산업사회를 구축한 선진국들의 기업은 이미 노사문제로 인한 홍역을 다 치뤘습니다. 그런데 ‘노사(勞使)’라는 말은초기 산업사회에서나 통용되던 낡은 개념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성된 기업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주주·경영자·근로자 등 각각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기업입니다. 기업이 발전해야 노조원들도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의 이윤은 적정한 수준만큼 기업발전을 위해 재투자해야 합니다. 노조의 권익을 위해서만 쓰라고 요구한다면 비합리적인 욕심이 될 수 있습니다.
▲김=경영자의 인식도 바뀔 부분이 있을 듯합니다.
▲이=노사문제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경영자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노조와 대화할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노무관리 책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직접 나서서 책임있게 대화해야 합니다. 셋째, 성의를 가지고 노조를 존중하는 입장을 가져야 좋은 방향으로 노사문제가 흘러갑니다.
▲김=외국 기업은 신입사원을 잘 안 뽑습니다. 경력을 보고 일에 맞도록 사람을 채용합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신입사원을 몇 천명씩 뽑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일 잘하는 선배들이 이른 시기에 퇴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맞습니다. 회사의 나이를 지나치게 낮추는 것은 사회적 자원의 낭비이며, 문화적 축적의 훼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우리 기업이 성장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김=사회적으로 사회의 혁신, 기업의 혁신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사회의 혁신은 정치인의 역할이지만, 기업의 혁신은 윤리와도 관계가 있을 듯합니다.
▲이=자기의 소임·역할·윤리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기업인이 아직 많습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나 정부가 기업인들을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잘못한 점을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좋지만, 공개적으로 벌을 주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모는 것은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기업인의 윤리의식 자체를 저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김=지난 6~7년 사이에 거래 관계가 있는 한국의 유수한 기업인들이 구속되는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결과적으로 벌금형이라든지 집행유예가 됐는데, 판결이 나기 전 감방에 수감돼 있는 것을 보고 외국 사람이 물어오면 대답하기 곤란했습니다.
▲이=‘하늘 보고 침 뱉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부도덕한 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우리에게 돌아올 이익이 결국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죄는 기업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고 부도덕했기 때문입니다. 더 크게는 우리 사회가 바로잡혀야 한다. ‘하면 된다’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된다’는 목적지향적인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 어떤 과정을 밟을 것인가를 중시하는 사회 풍토, 기업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도 경영입니다.
▲김=혁신을 하려면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혁신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앞으로 10년 후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이=기업이 10년 전보다 외형적으로 커졌고, 경쟁력도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재의 질적인 면에서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으냐는 것은 의문입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부정적인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젊은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의 여건에 부합하는 기업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20> 스승 윤후정 梨大 명예총장, 제자 김선욱 梨大 법대 교수
조선일보 2004.12.20
問 "호주제가 폐지되면 家族제도 무너진다고 걱정들 하는데요"
答 "男女가치의 근원적 차별 없애고 변화하는 가족구조 반영해야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인 윤후정(尹厚淨·72) 이화여대 명예총장은 초대 한국여성학회장,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며 한국 여성 문제의 이론적·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왔다. 1976년그가 주축이 돼 발족한 ‘여성사회연구회’는 한국 여성학의 씨앗이 됐다. 80년 헌법 개정 때에는 현행 헌법 제36조 제1항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조항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의 법률적 근거가 됐다. 98년 여성특위 위원장 시절엔 현재 한국 여성정책의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는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에 산파 역할을 했다. 김선욱(金善旭·52) 이화여대 법대 교수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법여성학자다. ‘여성정책담당관’ 제도 도입 등 한국 여성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김선욱=헌법학 전문가이면서 여성 문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연구와 교육 활동을 병행해 오셨습니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윤후정=내 고향이 함경남도 안변, 농촌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서 당시 농촌여성들의 고달픈 생활을 보면서 ‘여성의 삶은 무엇인가?’ ‘여성의 인생은 무엇인가?’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됐어요.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국력이 약해지고 나라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게 됐지요. 여성과 민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생각해 왔어요.
▲김=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늘 여성 문제를 사회 문제 속에서 찾고 해결하고자 노력해 오신 것 같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여성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윤=사회적 상황과 여성의 문제를 함께 봐야 해요. ‘사회변동론’에서 보면 남녀의 역할과 기능이 완전히 구별·분화되는 권위적 체제의 시기가 있고, 다음으로 양성이 부분적으로 함께 기능하는 혼재적 단계가 옵니다. 이어서 여성이 전문성을 갖춰 남성 영역에 경쟁적으로 도전하는 단계가 있고, 그 후에는 재창조 단계에 이르지요. 이 단계에 오면 기본적으로 남녀 생활 패턴에 구별과 차별이 없는 ‘통합사회’가 이뤄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모든 단계가 광복을 기점으로 60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밀어닥쳐 왔기 때문에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양태가 혼재돼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요.
▲김=선생님께서는 이미 1970년대 초에 여성 문제는 지위 향상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여성운동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었지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 방향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윤=갑이라는 머슴에게 그의 생일날 옷을 잘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게 했다고 해서, 갑의 머슴 자리가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성지위향상론’이 갖는 한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지요. 오랫동안 우리의 남녀 생활 양태를 지배해온 가부장제와 유교문화는 남녀의 속성 내지 기질과 성품의 차이를 이분법으로 구분해 남녀 역할에 자연스런 차이를 두었어요. 이러한 기질과 역할의 다름은 신분과 지위, 가치매김도 달리하여남녀의 우열과 상하 지위를 설정했지요. 더욱 문제는 이러한 기질·역할·지위가 천부적·생물학적 요소에 기인한다고 본 것이었죠. 그런데 과학·인지의 발달은 남녀의 기질과 성품의 차이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많은 부분이 생물학적·천부적 요인에서가 아니라 후천적·문화적으로 형성돼 왔음을 밝혀냈습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생각과 생활태도가 바뀌어야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김=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일체감 사상, 자유평등의 공존론, 통합사회 지향을 배경으로 ‘통합여성(Integrated Woman)론’을 제시하셨지요.
▲윤=여성과 남성은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며, 기능에 있어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남녀에게 교육과 훈련과 기회와 숙련성을 똑같이 부여한다면 그 우열은 있을 수 없지요. 차이는 개별적으로 봐야지 성(性) 간에 집단적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요. 통합여성은 남성과 여성이 적대·대립 관계에 있지 않으며, 동등한 의착관계에서의 보완과 조화의 파트너십 속에서 실현됩니다. 여성이 인간답게 살아야 남성도 해방됩니다. 통합여성의 실현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인간애와 동격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가 바탕이 되며 평화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김=선생님께서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이셨을 때 1998년 여성정책의 기조로 성주류화(gender-mainstreaming)를 처음으로 채택하셨는데, 통합여성상의 실현이 그 배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 산파 역할을 하셨던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한국여성정책의 중요한 인프라가 되고 있습니다. 여성 차별을 없애고 통합사회를 일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세요.
▲윤=문제를 핵심적으로 보고, 핵심적인 해결법을 찾아 사회적 공감대를 일궈가야 합니다. 여성 리더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해요. 또 하나는 남성들의 참여를 활발히 이끌어내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인력의 활용은 국력의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저출산 문제 때문에 국가의 장래가 걱정이라고 야단들 아닙니까.가사와 육아는 더 이상 여성만의 몫이 아닙니다. 남녀 역할 분담 차원에서 더 나아가 사회화가 이뤄져야 해요. 직장문화, 노동시장의 구조, 국가 공공정책 등이 모두 이를 가능하게 해줘야 하지요.
▲김=통합사회로 가기 위한 정책들이 초기에는 많은 저항을 받기도 합니다. 성(性)을 사고파는 개인과 알선자를 처벌해 성산업의 고리를 끊고 성매매 피해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마련된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둘러싼 논란이 그렇고, 호주제 폐지와 관련한 민법개정논의가 그렇습니다. 또 여성발전기본법에 근거한 할당제 등의 적극적 조치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에 대해 남성들은 역차별을 우려하기도 합니다.
▲윤=현실을 보면 기회와 훈련등의 조건에서 남녀 차이가 여전히 큰데, 동일한 출발점에서 경쟁시키면 그건 불공평한 것이지요. 여성들이 이제껏 받아온 차별과 고통이 사라져 남자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하게 될 때까지는 이러한 적극적 조치가 있어야 실질적 평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김=이미 여성공무원채용목표제도는 양성채용목표제로 바뀌어 남성도 30%가 안 되는 소수가 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적극적 조치는 사회 모든 부분에서의 성의 균형이 이뤄질 때까지 필요한 조치이므로 말씀하신 통합사회가 이뤄질 때까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주제 폐지에 대한 찬반논쟁도 뜨겁습니다. 특히 호주제가 폐지되면 한국의 가족제도가 와해된다고 우려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윤=호주제도는 가부장제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대가족 제도에서의 버팀목이었어요. 후기산업사회인 21세기 상황과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호주제 폐지는 변화되는 가족 구조의 기반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호주제로 인해 재혼 가정 등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요. 호주제의 더욱 큰 문제는 아들과 딸, 남성과 여성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김=이번 국회에서 민법개정안이 통과되어 ‘통합사회’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한국사회의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어떤 것이 될까요?
▲윤=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고, 사회와 국력의 문제이며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육아와 가사 문제의 총력적인 해결과 여성 근로조건의 개선, 그리고 과학계와 정치계에 여성이 적극 진출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 전통사회의 여성들은 인고와 희생으로 가정과 역사를 섬겨왔지만, 이 시대의 여성들은 성숙한 인간애와 적극적인 협동, 능력으로 가정과 사회, 국가와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에 책임을 함께 져야 합니다.
<정리=김선욱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21> 스승 송복 延大 명예교수, 제자 김호기 延大 교수
조선일보 2004.12.27
問 '압축 성장'한 우리 경제처럼 사회도 '압축 갈등' 겪고 있어요
答 '1만∼2만弗 갈등대' 통과하려면 빠른 성장이 이뤄져야 하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송복 교수는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한국사회의 갈등구조’ ‘열린 사회와 보수’ 등의 저작과 칼럼을 통해 보수주의 담론을 주도해 왔으며, 최근에는 동양사상을 오늘의 한국사회에 연관해 재해석하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김호기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송 교수 지도로 석사학위를 받고 독일 유학을 거쳐 1992년부터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쳐 온 진보 성향의 학자다.
▲김호기=갈등의 전성시대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은 일시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노사갈등은 세계화가 가져오는 ‘고용 없는 성장’에, 환경갈등은 성장 주도의 발전전략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송복=갈등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사회란 본래 질서와 갈등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니까요. 현재 우리 사회는 갈등대(葛藤帶, conflict zone)를 지나고 있지요. 어느 나라이건 5000달러에서 2만5000달러 사이는 사회갈등이 분출하는 갈등대라 볼 수 있어요. 이 가운데 특히 1만달러에서 2만달러 사이는 갈등이 폭발하는 ‘갈등중심대’이지요.
▲김=우리나라 경제가 ‘압축성장’인 것처럼 사회변동 역시 ‘압축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만큼 해결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송=갈등 중심대를 통과하기위해서는 빠른 성장이 이뤄져야 해요. 하지만 요즘 분배를 중시하고 성장을 부정하는 흐름이 갈등을 더 심화시키고 있지요.
▲김=성장 위주로 갈 것인가, 성장과 분배가 함께 갈 것인가는 쉬운 선택이 아닐 것입니다. 경제성장전략은 사회복지정책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결국 ‘부익부빈익빈’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송=문제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정책으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이지요. ‘작은 정부, 시장경제의 활성화’는 불가피한 선택이에요. 일단 파이를 키우고 분배를 추진하는 게 현실적이지요. 작은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무원 수를 줄여야 해요. 예를 들어 영국의 공무원 수는 47만명인데, 우리보다 10만명이나 적어요. 더불어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대기업을 키워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게 해야 합니다.
▲김=올해 중요한 사회문제 중 하나는 교육문제였습니다. 고교등급제, 수학능력시험 부정 등 한국 교육이 시험대 위에 올랐습니다. 최근 ‘밀양 사건’은 우리 교육이 처한 도덕적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송=‘학교는 있되 학교 교육은 없다’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지요. 공교육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예요. 우리 교육의 문제는 본연의 자리, 다시 말해 우수한 인적 자원의 확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지요. 이를 위해서 학교는 학생선발권, 학부모는 학교선택권을 가져야 해요. 국가가 개입해 이를 막고 있는 게 우리 교육의 걸림돌이지요.
▲김=교육이 점차 계급재생산의수단으로 돼 가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평준화의 틀 내에서 경쟁을 활성화하는 게 바람직한 교육정책의 기본틀이 아닐는지요. 더불어 학벌사회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송=평준화 모델은 박정희 시대에 적합한 모델이에요. 당시에는 평균인을 육성해 산업현장에 투입해야 했으니까요. 이 모델은 시효만료됐어요.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수월성 모델로 전환해야 해요.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창조적 소수’를 위한 교육을 과감히 추진할 필요가 있어요.
▲김=저희 세대는 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자연스레 진보적 성향을 갖게 됐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보수 대 진보 사이의 본격적인 이념논쟁이 개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송=보수와 진보의 생산적인 대립은 정치 및 사회발전의 중요한 조건이에요. 하지만 최근 이념구도는 감정 충돌 내지 한풀이 충돌의 성격이 두드러져 안타까워요. 서구의 진보는 미래지향적인데 반해 우리의 진보는 과거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과거지향적이지요.
▲김=한국의 진보는 서구와 비교하면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합니다. 시장에 적절히 개입해 사회적 약자를보호하려는 게 진보의 핵심이자,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 더욱 요구되는 가치입니다.
▲송=진보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틀 내에서 담론을 펼쳐야 해요. 논란이 되는 ‘386 세대’의 경우 자신의 과거 이념에 대해서 당당히 고백할 필요가 있어요. 솔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곤 해요.
▲김=한국 보수는 서구와 달리 철학이나 정책이 부재한 것 같습니다. 대안 부재와 기득권 옹호가 우리 보수주의의 현주소가 아닐는지요.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색깔론은 이제는 철 지난 유물인 것 같습니다.
▲송=상층집단의 도덕적 의무인‘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게 한국 보수의 문제이지요. 더불어 물러날 때 과감히 물러나야 해요. 어느 나라이건 보수가 역사의 주류를 이뤄왔어요.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안정 속의 개혁을 위한 보수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요.
▲김=이념을 포함한 사회갈등을해소하기 위한 전략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요즘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송=우리 사회가 갈등중심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생각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나만 옳다는 식의 아집과 독선으로는 합의를 끌어낼 수 없어요. 자신의 결점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환골탈태의 자세가 요구되지요.
▲김=관용의 문화와 시스템의 구축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통치하던 시대는 지났고, 서로 다른 이익과 가치관을 생산적인 토론과 조정을 통해 합의하는 민주적 거버넌스(governance)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합리적 대안을 갖고 맞서는 갈등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윈-윈 게임’이 될 것입니다.
▲송=현재의 갈등은 미래를 위한 진통이지요. 지난 10년간 성장이 없었던 게 아쉬워요. 갈등은 성장을 통해 해소될 수 있어요. 작은 정부와 시장경제의 증진으로 성장 드라이브를 다시 걸어야 해요. 아울러 법치도 중요해요. 법치를 통해 제도를 공고히 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하지요. 부디 내년에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기를 이뤘으면 합니다.
▲김=은퇴 이후의 생활은 어떠하신지요. 선생님의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1999)는 ‘논어(論語)’의 사회학적 해석이란 점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후속 연구를 계속하시는지요.
▲송=서구사상의 보편적 가치는자유와 평등이에요. 동양의 유교사상에도 이에 필적하는 인(仁)과 덕(德)이란 가치가 있지요. 효(孝)와 예(禮)는 인과 덕을 이루어가는 행위로 볼 수 있어요. ‘논어’에 이어 요즘은 ‘맹자(孟子)’에 관한 책을 쓰고 있어요.
▲김=동도서기(東道西器)를어떻게 볼 것인가는 우리 모더니티의 과제입니다. 사회학도 서양의 학문인 한,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고려할 때 동도(東道)보다는 서도(西道)가 여전히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송=전통은 죽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됨으로써 우리 삶과 사회를 풍부하게 해주는 소중한 유산이에요.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교사상은 개인주의의 과도한 발달로 인한 현대사회의 병폐들을 치유할 수 있는 실천의 윤리이자 사회학이라 볼 수 있어요.
▲김=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매일 아침 7시에 연구실에 나오셔서 책을 읽으시거나 글을 쓰시는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송=이제까지 가슴에 품어 온 말의 하나는 시성(詩聖) 두보의 ‘어불경인 수사불휴(語不驚人 雖死不休)’이에요.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나는 쉬지 않겠다”는 뜻인데, 두보의 성실성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학문의 길이예요. 언제까지나 계속 정진할 뿐이지요.
<정리=김호기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22> 스승 정현종 시인, 제자 성석제 소설가
조선일보 2005.01.24
問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라는데, 그럼 詩는 무엇인가요”
答 “우리들이 잊고 지내던 참마음을 되살려내는 것이지요”
정현종(鄭玄宗) 시인과 소설가 성석제(成碩濟)씨는 20년 넘게 문학으로 맺어진 사제지간이다. 법학도였던 성석제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1984년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임하던 정현종 시인의 연구실에 출입하면서 시와 문학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는 제자로서, 졸업 후에는 후배 작가로서 정 시인을 만나왔다. 정현종씨는 1965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시력(詩歷) 40년의 시인으로, 일간지 기자를 거쳐 1977년부터 서울예대·연세대에서 강단에 섰다. 시집 ‘고통의 축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견딜 수 없네’ 등이 있으며, 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받았다. 성석제씨는 198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해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힘’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성석제=새해가 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올해가 정년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선생님을 연구실로 찾아 뵙고 낮에는 시와 문학을 배우고, 밤에는 주점에서 도취와 ‘감격’에 빠지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그동안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가르쳐 오면서 느끼셨던 소회며 보람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정현종=대학에 문학이나 예술교육, 인문적 소양이 참 중요하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왔습니다. 이건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도 마찬가지예요.예를 들어 이공계나 상경계 교수들이 대학 경영에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학이든 국가든, 경영이나 실용 차원의 실제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긴 하겠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교과 과정도 기술·정보·지식 같은 것에 집중되고 있는데, 대세(大勢)라든지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이 그래도 어떻게 살든 그저 살고 보자는 게 지상과제일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넓게 말해 문화적 환경도 아울러 가꾸어야 합니다. 인문적 가치에 대한 소양이나 자각 없이 기술이나 정보의 달인이 될 때 그 기술이나 정보가 파괴적으로 작용해서 자칫하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기 쉽다는 말이지요. 인문적 가치라는 건 심성을 제대로 키우고, 그래서 남을 조금이라도 덜 해롭게 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덜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앎이 아닌가…. 학교생활에서 인품이 착한 젊은이들,문학적 재능이 있는 후배들,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을 갖춘 사람들을 얻은 게 큰 기쁨입니다.
▲성=사회적인 정년은 한편 시인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을 돋보이게 합니다. 한번 시인이 되면 영원히 시인이라는 점에서 ‘천형(天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소설을 쓰다가 절필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시를 그만 쓰겠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것은 시가 그만큼 소설보다 육화(肉化)되기 쉬운 것이고, 진정한 시인은 시가 육화된 인간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께 시는 무엇입니까?
▲정=글쎄, 시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설명이, 나도 그런 글을 몇 편 썼지만, 시 자체하고는 늘 거리가 있어요. 시라는 게 늘 개념적인 설명이나 정의에서 빠져 달아나니까…. 그런데 여러 해 시를 읽고 쓰면서 분명하게 느낀 건 그게 살 맛을 느끼게 한다는 겁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솟아오른다고 할까, 고양되거든. 그걸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시적 이미지는 싹과 같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음이 싹튼다고 해도 좋고 홀연히 새싹 같다고 해도 좋고 끊임없이 새로움 속에 있게 한다고 해도 좋고, 하여간 마음 안팎을 무슨 여명과 같은, 동트는 분위기에 싸이게 해요.
비슷한 맥락에서 시를 두고 ‘깃-언어’니 ‘빛-언어’니 하고 얘기한 적도 있지요. 시를 쓰거나 읽는 순간, 고요한 마음에 자기와 남과 세상이 잘 보이고 잘 들리고, 하여간 잘 느끼는 그 순간, 우리들이 잃어버린 채 사는 어떤 참마음을 회복한다면 다행이겠지요.
▲성=제가 청년기에 읽었던 선생님의 시는, “나는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에 경배한다”라는 ‘나는 별아저씨’의 한 구절처럼 시의 사원에 있는 사제의 육성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뒤로 남다르게 빨리 자연과 생태,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발표하시는 시를 보면 대사회적 발언이 강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난경’이라는 시에서는 “권력이나 돈이 걸린 싸움이 너무 상스럽고 맹목적이면/ 그 탐욕의 난경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된다./ 국가든 정부든 무슨 기관이든 개인이든/ 그 탐욕은 사회 전체를 난경에 처하게 한다.”고 쓰셨고, 작년 9월 발표한 시 ‘지옥’에서는 “낯설고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정=권력이나 돈 같은 이권을 좇다 보면 인간은 거의 예외 없이 맹목적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물론 그런 면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정치처럼 공동체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는 활동이 맹목이 되거나 심지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특히 통치집단의 정신상태나 태도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비판과 경고가 있었는데도 문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대의 궁핍을 궁핍으로 느끼지 못하는 게 치명적인 궁핍”이라고 독일의 한 철학자가 20세기 전반에 말한 적이 있는데, 개인들은 물론이고 특히 우리들 전체의 운명과 관계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경청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그동안 여러 번 얘기된 것이라 또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태도가 오늘날 참으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이라는 게 생물의 기본조건이라 하더라도 공인(公人)이라면 좀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선생님의 작품 세계에서는우리 문학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머와 낙천성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정=살아가면서 개인이나 전체나 빈번히 난경(難境)에 부딪히게 마련인데, 그래서 유머는 항상 중요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책 중에 유머는 대단히 유쾌하고 탁월한 방법이에요. 이해 관계에 얽혀 너 죽고 나 살자고 싸우는 아수라장에서 특히 필요한 게 그런 여유입니다. 우리 사회, 특히 정치판은 유머가 전무해서 큰일입니다. 서로를 즐겁게 살려내는 것, 그래서 자기도 사는 게 유머의 미덕입니다.
▲성=요즘 우울증·자폐증 같은 단어를 수반한 우리 문학의 위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현실이며 극단적으로는 휴대폰 메시지, 인터넷 글쓰기로 대변되는 수많은 유사 글쓰기, 치고 빠지는 글쓰기들이 기존 방식의 글쓰기를 무력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관통할 새로운 문학정신, 새로운 방법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정=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통찰이 문학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정치·경제·과학 같은 것들의 전망과 다른, 그러니까 좀더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 게 진정한 문학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회복해야 할 가치이거나 새로 발견한 가치이거나 뭔지 하여간 전 지구적인 삶에서 한 가닥 기쁨을 전해주는 그런 게 아닐까요.
▲성=올해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의 이분화와 양극화의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혼돈스러운 시절, 시인과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정=글쎄, 혼돈이라는 게, 모든 창조 신화에서 보듯이, 창조를 위한 에너지가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소용돌이로서 그 속에 무슨 씨앗이 들어있는 그런 혼돈이라면 좋겠는데, 우리가 겪고 있는 혼돈은 수준이 그에 한참 모자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며 작가가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모르겠으나, 일단 대세나 역사의 흐름에서 균형이 깨질 때 그걸 민감하게 느끼는 역할이 있겠지요. 마음의 여유와 기쁨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욕심이 없어서 늘 정신이 맑은 시인과 작가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건 이런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문단에서까지 무슨 조직이니 자리니 하여 목전의 이익과 권력에 입맛을 다시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지요. 내적인 부(富)에 늘 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며 작가입니다.
제자,스승에게 길을 묻다<23> 스승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제자 김현선 경기대 교수
조선일보 2005.02.21
問 "대학구조조정으로 교육계가또 술렁입니다"
答 "올바름 떠나 이익만 쫓는건 학문학살이죠"
조동일(趙東一·66) 계명대 석좌교수와 김헌선(金憲宣·44) 경기대 국문과 교수는 198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조교수는 계명대·영남대 교수를 거쳐 1981년부터 정문연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김 교수는 석사과정으로 입학했다. 조 교수는 1987년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지만 학문적 열정이 남달랐던 김 교수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애제자(愛弟子)’로 꼽는다. 조 교수는 ‘한국시가의 역사의식’ ‘한국문학통사’(전5권) ‘세계문학의 전개’ 등을 출간하며 국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혀왔다.조 교수로부터 구비문학과 비교문학을 배운 김 교수는 ‘구전민요의 세계’ ‘사물놀이 이야기’ ‘무속의 역사와 원리’ 등의 저서를 출간하며 스승의 학문을 이어가고 있다.
▲김헌선=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교육에 관한 온갖 병을 앓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시대가 과연 후대에 어떻게 비쳐지게 될지 궁금합니다.
개인의 욕망과 자본주의적 가치관만이 천박하게 남는 시대일지, 아니면 인류가 새롭게 시작되는 전환점이 될지 말이죠.
▲조동일=우리 시대는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런 눈부신 발전을 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위기다’고 외치는 것은 교육의 위기가 모든 방면의 위기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해요.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죠. 하지만 말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말보다 실행이 더 큰 효과를 가지고 있어요. 가르치는 사람이 스스로 실행해야 입으로 하는 말이 타당성을 가져서 듣는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죠. 감동을 주어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지금도 참다운 스승이 얼마든지 있지만 묻혀 지내야 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핍박받기까지 하고 있어요.
▲김=최근 정부에서 여러가지교육개혁이다 대학의 구조조정이다 하는 문제를 들고 나와서 다시 한번 교육계가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또 교육부장관을 경제 관료였던 인물로 교체하면서 학문보다 경제적 가치 창출, 교육의 이익이 긴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조=학생이 많이 모여들어 수지가 맞는 대학이나 학과는 남기고 그렇지 못한 것은 없애는 것이 지금 하고 있는 대학의 구조조정입니다. 교육은 경영이라는 것이죠. 교육은 산업이라고 하지만 이는 공연한 말이에요. 산업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해도 일시적인 인기와 구별해서 평가하는 절차나 방법이 없어요. 이 시대에 ‘학문 대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의 학문이 멸종되는 것은 생물의 한 종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재앙입니다. 현재 교육부의 전략이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지만 있어야 할 학문분야 중에 없는 것이 너무 많아요. 이러한 상황에서 경영합리화를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어요. 무엇이 올바른 가는 묻지 않고 무엇이 이익이 되는 가만 추구하는 쪽으로 교육이 나아가고 있어요.
▲김=대학이 학문을 창조하려면현실적으로 학문을 할 수 있도록 학자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 소중합니다. 학문의 제도적 조건이 재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 학문의 연구를 위해서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돼야 합니까.
▲조=황우석 교수에게 200억원의 연구비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문학문을 하는 학자에게 20년간 마음대로 강의 없이도 연구할 수 있는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중요해요. 인문학문은 20년 동안의 세월을 투자해야 추수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현실에서는 1년에 모든 연구결과가 나와야 해요. 조그마한 연구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죠. 20년간 10명의 학자가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나라의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김=선생님께서는 학문적으로 남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불문학을 하시다 갑자기 국문학으로 바꾸시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이러한 전환이 어떤 학문적 의의가 있는지요.
▲조=그때는 불문학이 제일이었죠. 불문학을 통해서 독일문학과 영문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어요. 4·19 이후에 불문학에서 국문학으로 바꾸었죠. 국문학 중에서도 구비문학으로 시작했다가 고전문학으로, 다시 한국문학 전체로, 동아시아 문학으로, 세계문학으로 나가면서 불문학을 배운 경력을 써먹을 수 있었어요. 이 전환은 수입에서 수출로, 독서에서 학문으로 업종을 바꾼 거라 생각해요.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불문학은 참 좋지만, 학문을 하면서 받아들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낼 때 국문학은 큰 위력을 가졌습니다.
▲김=학자로서의 삶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대학생이던 시절은 우리 민족의 격변기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신 시대 속에서 학문의 길을 택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조=대학 3학년 때 4·19를 겪었어요. 4·19를 겪은 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 가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죠. 그렇다면 답을 찾아야겠다, 또 그 답은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4·19의 주역인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없는 답을 찾으려는 건 참으로 막막한 일이지만 그 답을 찾기위해서는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학자로서의 삶을 택한 것은 그러한 답을 찾아가는 문제의식의 실천적 연속이죠.
▲김=학문을 실천해 가는 데 직면하는 어려움과 최근 학문의 불신이 조장된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과 관련해서 어떠한 것입니까?
▲조=수많은 교육제도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불필요 하다고 말하고, 스스로 개척하는 ‘창조학’은 그만두고 외국에서 내놓은 답을가져다 쓰는 ‘수입학’을 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곧 학문의 파괴이고, 교육의 위기입니다. 이들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 오늘날까지 그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요.
▲김=참다운 학문의 도달점이 창조학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진정한 학문의 모습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교육의 실제적 변혁과 내용이 중요합니다. 창조학이 경쟁력을 갖추려면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조=요사이 교육이 경쟁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대학을 비교하는 수치가 있는데 그 수치에는 속임수가 많이 있어요. 대학의 서열 매기기는 미국의 잣대를 사용한 겁니다. 유럽 대학은 수치를 매기는 데 모두 빠져있는 상황이죠. 대학 강의를 영어로 하면 경쟁력이 커진다고 흔히들 말해요. 학문의 모국어가 영어일 수 없는 한국에서 교수 노릇을 하면서 학문의 모국어를 영어로 바꾸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지만 많은 힘만 들일 뿐 아무 소득이 없어요. 오히려 국내에서는 우리말로 강의해야 우리말 학문을 제대로 할 수 있어요. 국산품의 질을 높여야 하는 것이지, 학문은 기술 도입과 같은 문제나 주문자 생산 방식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해요. 국내에서 생산한 물건을 외국 것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서 그것이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어요.
▲김=선생님은 지난해 교수로서의 정년은 하셨지만, 계명대에 석좌교수로 자리를 잡으시면서 새롭게 학문을 개척하고 계십니다.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와 답을 제안하시는 끊임없는 열정은 무엇에서 기인하신 것입니까.
▲조=10여년 전에 공개 구직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어요. 내가 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어디라도 가겠다는 것이었죠. 강의 역시 내가 연구하는 내용을 마음껏 강의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를 원하는 대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국법이 허용하지도 않더군요. 교수의 책임 시간 수를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죠. 현재 나는 만족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지만 후진들에게는 그러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학문에 대한 기초과정을 쌓은 젊은 학자를 알아 볼 수 있는 깨달은 자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하죠.
<정리=김현선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24><끝> 스승 송수남 화백, 제자 문봉선 화백
조선일보 2005.02.28
2월 25일 서울 평창동 송수남 화백의 작업실.
"매화나무에 봄이 왔습니다."(문봉선)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를 보니 겨울이 일순 물러나는 것 같군요."(송수남)
송수남(宋秀南·67)과 문봉선(文鳳宣·44), 두 동양화가는 1980년봄 홍익대 캠퍼스에서 교수와 신입생으로 처음 만났다. 원로화가 송수남은 제자를 ‘어려서 서예를 배워필력이 좋았던 학생’, 중견화가 문봉선은 스승을 ‘첫 강의 때 교실에 슬쩍 들어와 “난 책 장사입니다”라고 말해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유머감각 넘치는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1980년대는 송수남이 무기력하고 구태의연하다는 비난을 받던 동양화단을 새로운 한국화를 통해 흔들어 깨우려는 ‘수묵(水墨) 운동’에 앞장서던 때다. ‘따뜻한 남쪽 하늘-고향(전주) 하늘’이란 뜻의 ‘남천(南天)’이란 호를 가진 송수남은 30년간 재직했던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에서 지난해 정년퇴임했다. “한지와 먹으로 대기의 미묘한 뉘앙스를 담는다”는 평을 받는 문봉선 교수는 제주에서 태어나 서예를 시작으로 그림에 입문하여 홍익대 입학 후 사군자와 수묵화의 기초를 닦았다. 20대에는 도시의 공사 현장, 시장 골목 등을 화폭에 담으며 암울한 시대 상황에 관심을 돌렸고 이어 섬진강과 북한산 등을 답사하며 진경산수를 펼쳤다. 얼마 전부터는 중국에서도 작업하며 전시를 여는 등 활약하고 있다.
▲문봉선=제 학창시절 “작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던 선생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은 작가’란 어떤 사람입니까.
▲송수남=원래 남의 떡이 커 보이기 마련이니까 남의 그림이 좋아 보이겠지요. 그러나 신라의 석굴암과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세요. 당연히 다르지요. 크고 좋아 보인다고 콜로세움만 좇아가면 안 되겠지요. 자기 개성을 찾고 자기 그림을 추구하는 사람이 좋은 작가지요. 정작 할 때는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빛을 봅니다. “뭘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고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자기 성격대로 다듬어야지요. 그러고 보면 그림은 자기 성격인 것 같습니다. 시대와 유행에 휩쓸릴 수도 있고 모방할 수도 있겠지요.
▲문=다시 새학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순수미술, 특히 한국화(동양화) 전공 학생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송=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요. 시대적인 이유 때문일 겁니다. 서양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실용적인 것, 즉각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실질적으로 벌이가 되는 것을 공부하려 하니까요. 전통적인 것은 고루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겠죠.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기 때문 아닙니까. 순수미술의 위기는 전반적으로 기초과학, 인문학의 위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문=전통 회화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옛날 같지 않습니다. 한국화가 진정한 한국 현대 회화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면 어떤 변신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송=지필묵(紙筆墨)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동양화는 현대라는 시대성을 갖춰야 합니다. 현대화라는 게 뭡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옛날 사람이 쓰던 궤를 그냥 갖다 쓰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든 현대인이 공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이야말로 우리 그림이 살길입니다.
▲문=선생님께서는 늘 “여백은 비움과 나눔의 미학”이라고도 강조하셨는데요.
▲송=여백이라는 게 화면의 하얀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의 여백, 마음의 여백을 말한 겁니다. 급하게 가지 말고 천천히 가자는 겁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는 문제입니다. 꼭 잘 살아야 여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옛사람은 치부(致富)보다는 향유를 위해 서화골동을 모았지요. 봄에 꽃 그림 족자를 내걸었다면 여름에는 제비가 나는 그림으로 바꿔 거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질보다 정신’이라고 하면 또 뻔한 이야기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열쇠입니다. 어떤 물건이 있다고 칩시다. 여럿이 그 물건을 봤습니다. 물건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가질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 가져도 좋다” “꼭 가져야 할 사람만 가지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질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안달복달하는 게 지금 사회의 문제입니다.
▲문=선생님께서는 목기도 많이수집하셨습니다. 목기 속에 조선조 장인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하셨는데 한국 회화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요.
▲송=옛날 물건을 보면 참 애정이 갑니다. 조선시대 도자기, 목기나 생활용품을 보세요. 형태가 단순합니다. 사람이 단순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림도 그래야 합니다. 한국미의 본질은 단순함이고 그쪽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단순할수록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이 단숨에 느낌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림만 그럴 것이 아니라 생활이 그래야겠지요. 단순하고 간결해야 할 때에 거꾸로 마구 벌여 놓고 장식하고 꾸미는 것이 바로 현대문명의 폐해가 아니겠습니까. 내용이 없으니까 요란한 것처럼요.
▲문=그림은 만국 공통어입니다. 21세기 문화전쟁 최전방에 회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회 전반적으로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송=말씀대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참 부족하지요. 미술인들끼리학연·지연·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복잡하니까 외면 받고 비난도쏟아집니다. 또한 생활에 여유가 없고 세상이 각박하다 보니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심미안을 키울 겨를이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당장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일, 당장 재미있지 않은 일이 아니면 통 관심이 없지요. 평생을 두고 예술을 즐기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어려서부터 훈련이 필요합니다.전시장에 가는 일은 정신적인 여유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갤러리나 미술관에 갔다가 잠깐 나와 도시락 먹고 다시 들어가 보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겠습니까. 생활방식이 차차 바뀌어야 합니다.
▲문=화가는 고독하게 홀로 작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편 화가에게도 사회적 사명감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송=새로운 문명과 역사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해야 합니다. 시각예술 차원에서 사람들의 행복에 도움이 돼야겠지요. 자기 혼자 그리고 마는 것으로 끝나면 되겠습니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희열을 느끼며 그린 그림을 남이 보면서 감동받을 때 희망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술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참 즐겁고 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겸재 정선 같은 대가가 여럿일 수 없듯이 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다 그런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요.
▲문=사회와 미술의 단절 현상이 심각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송=작가들의 허영 때문일 수도 있고, 난해하고 복잡하거나 외국 미술 이론을 좇아가 억지로 갖다 붙이는 작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나 평론가들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술평을 읽다 보면 외국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의 이름이 줄줄이 등장하긴 하는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글이 많습니다.
▲문=캠퍼스에 다시 봄이 왔습니다.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송=선생이 생각하는 틀 속에 학생을 가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돌아보면 말 안 듣고 숙제 안 해 오던 학생이 더 성공합디다. 저도 이상범·천경자·김기창 같은 대 선배들에게 배우면서 “그림이 저게 뭐냐?” 하고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모필(毛筆)에만 의지할 것이 아닙니다. 상 몇 개 받고 정기적으로 전시회나 하면서 그냥 그렇게만 가면 화단의 활력이 죽습니다. 부디 학생을 자유롭게 놓아주면서도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스승이 되길 바랍니다.
<정리=문봉선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