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죽음에 대한 인식 변화
"존엄사 받아들인다" 88%, "호스피스 이용하겠다" 85%
무의미한 생명 연장에 반대하는 시민 늘어나
우리 국민 열에 아홉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인위적인 생명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국립암센터(원장 이진수)가 지난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벌인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존엄사’에 대해서는 87.6%가 찬성 의견을 냈다. 2004년 82.3%에 비해 한층 높아진 수치다. ‘현재의 방법으로는 질병 치료가 불가능하고 점점 악화되는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하겠다’는 응답자는 84.6%로, 2004년의 57.4%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설명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항목에는 87.6%가 찬성했다. ‘질병이 위중해 말기 상황에 처했을 경우, 본인이 말기라는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질문에는 91.8%가 ‘알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인식과 현실의 온도 차는 크다. 대형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을 들여다보면 국민 의식 조사가 마음속의 바람을 반영한 것에 그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현실은
말기 환자 대부분 임종 직전까지 응급실서 항암치료
암환자 사망 전 마지막 한 달 의료비가 총 지출액의 36%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김범석 교수팀이 일본임상암학회지(Japanese Journal of Clinical Oncology·2008년 4월호)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 그런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들의 연구는 전이성 암으로 진단 받고 항암제 치료를 받은 국내 환자 298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사망할 때까지를 추적, 관찰한 것. 편안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기간인 임종 직전 1개월 동안에도 대형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암환자의 비율은 33.6%로 미국(9.2%) 등 서구 선진국에 비해 대단히 높았다. 절반이 넘는 50.3%의 환자는 임종 두 달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종 6개월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 받는 환자는 94.6%로 미국(33.0%)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호스피스 상담을 의뢰한 환자의 비율은 9.1%에 불과했고, 상담을 의뢰한 시기는 평균 임종 53일 전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의미 없는 치료를 받느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병실을 전전하다 삶의 마지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이다.
고통은 환자들의 육체적인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암환자가 사망하기 1년 전부터 사망까지 평균 2780여만원의 의료비를 사용했다는 국립의료원의 조사(말기 암 환자 의료비 지출실태 분석자료, 2005년 암 사망자 2653명 대상)는 암환자와 보호자들의 경제적 부담 역시 극심함을 보여준다. 의료비 지출 추이가 그 증거다. 사망 1년 전부터 7개월 전까지 반년 동안 사용한 금액은 전체의 20.1%. 6개월 전부터 매달 각각 4.9%, 5.4%, 8.1%, 9.8%, 15.4%로 점차 증가했고 사망 전 마지막 한 달 동안 의료비의 36.3%를 쏟아붓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암센터 관계자는 “사망 직전 한 달 동안 비용이 급증하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한 의료를 이용하기 때문”이라면서 “이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3만여가구가 저축의 대부분을 쓰고 집을 줄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안실만 화려하고 말기 환자가 세상을 떠나는 임종실은 한없이 초라한 우리 현실에 대한 지적도 있다. 최철주씨가 최근 펴낸 ‘해피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죽은 사람 시신이 호화판 영안실에 있으면 뭐합니까.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고통 없도록, 그리고 편안하게 떠나도록 돌봐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지는 않고 죽고 나자마자 번쩍하는 영안실에 넣어두다니. 우리나라는 임종실을 갖춘 병원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조용한 임종실은 없고 화려한 영안실만 있는 나라. 이 같은 의료현장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국내 첫 존엄사 판결
법원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 추정"… 병원 측 항소로 2심에
소생 가능성 판단할 주체·가족 결정권 범위 등 쟁점 많아
2008년 12월 17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존엄사 소송 관련 기자회견. 조선일보 DB
지난 11월 28일, 존엄사를 사실상 인정하는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 서부지법은 의식불명 상태인 김모(75) 할머니에 대해 “회복 가능성이 없는 연명치료가 환자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며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존엄사 권리를 인정했다. 법원은 지난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의 환자를 보호자의 요구로 조기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는 환자 보호자와 담당 의료진에게 살인죄와 살인방조죄 등 유죄를 선고했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18일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관지 내시경을 이용한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던 중 과다출혈 등으로 심정지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8개월째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상태(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에 빠졌다. 항생제 투여와 인공영양·수액 공급 등 치료를 받았지만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곧 숨을 거둘 수 있는 상태였다. 가족들은 김 할머니가 평소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리면서 “가족들의 요구가 아니라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현재의 절망적 상태나 기대 여명(餘命)기간, 현재 나이 등을 고려할 때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번 법원 판결에서는 존엄사와 관련, 3가지 쟁점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우선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 응급 상황에서 환자 측이 치료 중단을 요구할 경우, 응급의료법률에 따라 의사는 환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없고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명확할 경우에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인정돼 의사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가족과 친지에게 그가 평소에 말한 내용이나 타인의 치료에 대한 반응, 기대 생존기간 등을 종합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존엄사 문제에 대해서는 △소생가능성에 대한 판단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가족들의 결정권 인정 여부 △소생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 중단되는 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등 짚어야 할 문제가 많다.
지난 12월 25일 서울고법은 세브란스병원 측의 항소로 올라온 이번 사건을 의료사건을 전담하는 민사9부에 배당했다. 병원 측은 1심 판결에 불복, 항소심 없이 곧바로 대법원의 판단을 구하기 위해 비약상고 방침을 밝혔지만 환자 측의 반대로 무산됐었다.
법제화 되나
보건복지가족부 "국민의식 조사 거쳐 입법화 검토"
"오진 가능성·현대판 고려장 등 부작용 우려" 반대도
최근 학계와 정치권 등에서는 존엄사 문제와 관련,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2월 22일 자유선진당 변웅전·이영애 의원이 주최한 ‘안락사와 존엄사 토론회’에서는 연명치료 중단 허용에 대한 법제화를 놓고 “환자나 가족의 고통 등 현실적 측면을 고려해 허용해야 한다” “기계 장치에만 의존해 임종 시간을 미루는 생명유지 기술에 대한 거부는 인간적 죽음의 수용을 위한 준비”라는 주장과 “의사의 오진이나 반강제적 생명포기 같은 부작용을 감안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자칫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시민에 대한 새로운 고려장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 12월 19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존엄사 허용, 입법적 해결 가능한가:생명권의 법률적 제한적 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현안 토론회가 열렸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이석배 경남대 법학부 교수는 “환자의 사전의사표시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보호자와 의사 상호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 밝혔고, 구인회 가톨릭대 교수는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병왕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장은 “정부는 연명치료 중단의 입법화 가능성을 검토 중에 있다”면서 “법적·윤리적 정당화 가능성, 절차와 방법·요건, 국민의식 조사 등을 통한 우리 사회의 수용가능성을 중점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말기 암 환자들의 안식처인 포천 모현호스피스센터. 조선일보 DB
앞서 지난 9월 전 의원이 마련한 ‘존엄사, 사회적 합의와 제도화’ 심포지엄에서는 “임상 현장에서 임종 환자의 관리를 의사 개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말기 환자 관리의 표준적 지침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윤영호 국립암센터 기획실장), “입법 이전에 판례가 형성돼 우리나라에 맞는 존엄사 기준과 법률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강보험제도의 보장성 강화, 호스피스제도 등 제도적 정비가 선행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법률 제정이 뒤따르는 것이 순리다”(신현호 변호사) 같은 의견이 나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존엄사의 대상과 범위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할 ‘말기치료에서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입법안’을 마련해 입법청원을 추진하고 있다.
존엄사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한다.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학적 치료가 생명을 더이상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생명을 더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안락사
질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을 뜻한다. 존엄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제 등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적극적 안락사’,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의미한다.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신장투석 등 생명유지 기술은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말기 환자에겐 고통을 연장해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윤리적 지적이 나온다. 무의미한 치료는 환자가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호흡정지와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있을 때 실시하는 ‘의미 있는’ 생명연장치료와는 구별된다.
| 존엄사 관련 외국 사례 |
네덜란드가 가장 적극적 미국도 40여개 주가 인정
미국 1975년 ‘퀸란 사건’으로 논의가 본격화됐다. 당시 21세였던 퀸란이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술과 약물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 상태가 되자, 퀸란의 아버지는 딸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겠다며 의사에게 생명유지장치를 떼어 달라고 요청했다. 의사가 거부하자 아버지는 생명유지장치를 뗄 권한을 자기에게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고, 주 대법원은 이듬해 그의 주장을 인정했다. 15년째 식물인간으로 생명을 유지해 온 테리 시아보(당시 41세)의 영양공급 튜브 제거를 놓고도 큰 논란이 있었으나, 2005년 법원은 튜브 제거가 타당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시아보는 급식 장치를 제거한 지 13일 만에 숨졌다. 현재 약 40여개의 주에서 환자 가족의 동의 등 엄격한 요건 아래 생명보조장치를 제거하는 수준의 존엄사 행위를 인정한다.
영국 법률로는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고 있으나, 3년 이상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사람에게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1993년)이 나오는 등 존엄사를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호주 1996년 안락사를 법제화했다가 6개월 만에 폐기했다. 호주연방 8개주 가운데 3곳이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의료행위를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
일본 안락사 관련법은 없으나 △참기 힘든 고통 △죽음의 임박성 △본인의 의사 △고통제거수단 유무 등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존엄사를 인정한다.
네덜란드 가장 적극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다. 2000년 11월 불치병 환자의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대상자가 불치의 환자이고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하며 △환자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안락사에 동의하는 조건을 충족할 때 의사가 안락사를 실행할 수 있도록 했다.
<well-dying / Theme 1> 호스피스
한 해 동안 새롭게 발병하는 암 환자는 13만여명. 이 중 절반 정도가 완치되고 나머지 6만5000여명은 결국 목숨을 잃는다. 국민 사망 원인 중 1위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서비스를 받아 편안한 임종을 맞는 말기 암 환자는 5000여명에 불과하다. 관련 시설이 부족하고 호스피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보호자들은 환자에게 호스피스로 옮기자는 말을 쉽게 꺼내기 어렵다고 한다. 환자들에겐 치료 포기와 죽음 인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호스피스(hospice) 말기 환자 통증 완화해 편안한 죽음 맞게 해
영국서 처음 시작… 한국은 1960년대 도입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가 삶의 질을 유지하고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훈련된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성직자·자원봉사자가 환자의 통증을 줄여주고 심리적·영적(靈的)·사회경제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총체적인 돌봄(holistic care)을 뜻한다. 여기엔 사별 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는 노력도 포함된다.
1905년 영국 런던의 성 요셉 호스피스를 기점으로 호스피스의 개념이 처음 정립됐다. 1969년에는 가정간호와 데이케어(day-care) 호스피스가 본격화됐다. 미국에서는 1968년 뉴 헤이븐에서 가정 호스피스가 시작됐다. 일본에서는 1981년, 대만에서는 1990년 제도화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강릉의 갈바리의원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 최초다. 1982년 서울 강남성모병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돼 지금은 대부분의 가톨릭계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호스피스에는 독립형·병동형·가정형·산재형 등 4종류가 있다. 독립형은 가정적 분위기의 독립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포천의 모현호스피스가 대표적. 병동형은 병원 내 일부 병동이나 병실을 이용하며, 가정형은 환자 가정에 전문 봉사자와 의료진이 방문해 돌보는 것을 말한다. 산재형은 호스피스 환자들이 다른 환자와 섞여 입원해 봉사를 받는 형태다.
"우리는 죽음을 미리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자기 자신의 절실한 문제로 파악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기도 하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각각의 시기에 알맞게 실천할 수 있는 죽음 준비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죠.”
‘생사학(生死學)’의 대가인 알폰스 데켄(Deeken) 일본 조치(上智)대 교수는 저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삶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새로 발견하고 가치관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죽음 준비교육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생의 황혼을 맞은 노년층에만 해당하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말기 암환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웰 다잉에 관한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노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www.nowonsenior.or.kr)에서 시작한 ‘아름다운 생애 마감을 위한 시니어 죽음준비학교’는 우리 사회에 웰 다잉 바람을 일으켰다. 6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5주 동안 강의와 현장 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자는 뜻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서전을 한 자 한 자 적고, 직접 유언장을 쓰기도 한다.
영정 사진을 찍고, 직접 장묘 시설을 방문해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갖는다. 구로구에서는 지난 12월 9일부터 23일까지 5차례에 걸쳐 ‘웰 다잉 강좌’를 마련했다. 60대 이상의 노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강좌에는 20·30대 젊은층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 미리 준비를 하고 싶다”거나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서울노인복지센터(www.seoulnoin.or.kr)는 지난 10월 15~16일 ‘사(死)는 기쁨’ 축제를 열었다. 이번으로 3회째를 맞는 행사다. 장례문화 전시관, 생애 박물관, 전통 혼례 시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중 임종 체험관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체험자가 수의(壽衣)를 입고 좁은 관 속에 누우면 관 뚜껑을 덮고 네 귀퉁이에 못을 박아 10여분 동안 봉인하는 방식. 참가자들은 어둡고 답답한 관 속에서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들의 얼굴, 잊고 지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남 나주의 코리아라이프컨설팅센터(KLC·www.life2die.com·1600-6898), 서울 남가좌동의 사생체험연구소(www.deathlife. co.kr·02-308-3740) 같이 전문적으로 임종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등장했다.
한국죽음준비교육원에서 낸 ‘나의 임종노트: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웰 다잉과 관련, 홀로 성찰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고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로 시작하는 제1장은 아버지·어머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선택한 뒤 그들의 사진을 붙이고, 그들에게 전하지 못한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기록하게 했다.
제2장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나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 △소중한 나의 가족 △내 삶의 여정 중 중요한 순간 △나의 유년·청년시절과 가정·사회 생활에서 잊지 못할 순간(사진과 함께) △손톱과 머리카락 등 DNA를 붙여 보관하기 △가장 기쁘고 슬펐던 일, 힘들고 후회스러운 일 △용서하고 용서 받고 싶은 것 등으로 꼼꼼히 나눴다.
삶의 여정을 정리하는 제3장에는 △존엄사 선언서 △내가 바라는 죽음의 모습 △임종을 지켜줄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 △나의 장례 계획, 장례식 초대자 △유언·추도사·묘비명 △자산과 상속 △사후 처리에 필요한 증명서 목록을 적어 넣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삶이 각각 1년·6개월·3개월밖에 남지 않았을 때 꼭 하고 싶은 일을 세 가지씩 선택하고 그 이유를 기록하도록 했다. 임종노트는 나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남기고 싶은 순간의 사진을 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외국에서는 죽음 준비교육이 인격을 닦는 필수적인 과정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특히 초·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죽음 교육이 공교육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것을 애써 감추려 하기에 급급한 우리와는 구별된다.
미국의 대다수 주에서는 학교에서 죽음 준비교육을 다양한 교과목 안에 포함시켜 가르친다. 보건교육의 일부로, 혹은 죽음을 문학의 교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사회과학 수업에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에 대해 깨닫도록 교육한다. 대학에서는 일반 종합대학의 정식과목으로 죽음학이 보편화된 지 오래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더기(Dougy)센터는 미국 각지로 퍼져나간 비탄(grief) 교육과 비탄 카운슬링 시설이다. 더기센터라는 이름은 뇌종양으로 13살에 죽은 더기 투르노(Turno) 소년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이다. 가족을 잃은 상실 체험으로 괴로워하는 200여명의 어린이들이 상실한 대상과 나이에 따라 20여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카운슬링을 받는다.
독일은 죽음 준비교육의 전통이 풍부한 나라다. 일반 중·고교 종교교육 중 필수과정으로 죽음교육을 포함시켰고, 교재도 다양하다. 중학생용 교과서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Sterben und Tod)’은 △죽음과 장례식 △청소년의 자살 △인간답게 죽는 방법 △생명에 대한 위협 △죽음의 해석 등을 주제로 학생들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유도한다.
2002년부터 죽음 준비교육을 학교 공식 교육과정으로 채택한 일본에서는 임종에 대한 이해부터 죽음에 대한 금기를 없애는 것, 죽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 자살 예방 등을 다룬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죽음 준비교육이 학생들이 평소 성찰하는 자세를 갖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도록 하는 효과가 크다고 분석한다.
'죽음준비학교' 프로그램
1교시 마음 열기
죽음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느낌은?
색깔로 죽음을 나타내기
마음속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죽음의 기억은?
인생 그래프 그리기
나만의 잣대로 평가하는 내 인생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용서하기 어려운 사건과 사람들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들
화해하고 싶은 사람들
나의 사랑, 나의 가족
3교시
나의 사망기 쓰기 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1. ○○○는 어제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그의 사망원인은 ○○○이었다.
3. 그의 남은 가족은 ○○, ○○이며, 그는 ○○○의 구성원이었다.
4. 그는 사망한 그때에 ○○○를 하고 있었다.
5.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한 사람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6.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일 것이다.
7. 그가 세상에 남긴 업적은 ○○○이다.
8. 그의 시신은 ○○○ 처리될 것이며,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