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최문희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위에서 차갑기만해라
「부용꽃 스물일곱송이」,난설헌
초희(난설헌)는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예견하고 남긴 시가 위의 시이다.
초희는 8세에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시를 지어 스승 손곡 이달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허엽은 동.서인의 당쟁시 동인의 영수였으며 정3품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냈다.
오빠 허성과 허봉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벼슬을 지냈다. 동생 허균도 조선의 학자·문장가이며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 문집』 엮었으며 중국과 일본에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릉에서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일찍부터 한문과 시 등 서책을 가까이하며 자유롭게 성장기를 보냈다. 남부러울 것 없고 용모 또한 출중하며 영특하기 이를데 없는 초희는 15세에 안동김씨 가문과 혼인을 하면서 전혀 다른 삶에 따고에 휩싸인다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에게는 전혀 바람막이가 되어 주지 못했다.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고 영혼과 영혼이 교감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주질 못했다. 서책을 가까이하는 며느리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시모. 서안 앞에 앉아 오롯이 붓끝으로 실어내는 한줄기 시어들만이 나날을 이어가것이 보람이거늘 , 시어머니는 그것이 기방의 노류장화나 하는 짓거리라고 꾸짖었다. 외도를 밥먹듯이 하면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남편성립, 두 아이의 죽음, 친정아버지의 객사. 두 친정 오빠의 귀향살이( 조선을 통틀어 서인과 노론, 벽파의 득세로 동인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특히 난설헌에게는 두 아이를 잃은 후 부터는 한줌의 흙으로 환원되는 생의 덧없음이 자신의 육신마저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고된 시집살이와 냉대 속에서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결국은 너무도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접고만다.
“나에게는 3가지 한(恨)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오빠의 기행문 『하곡 조천기』, 중국설화집 『태평광기』 ,『수호전』 ,<두보의 시>등은 난설헌이 사랑했던 서책들이었다. 죽고 사는 것도 한결 같고 얻고 잃음도 매 한가지라는, 고요함과 무위를 아우른 정신세계에 깊이 침잠했던 난설헌. 시라는 것이 그렇게 언제나 혀끝에서 숱한 문장들을 골라내고 다듬고 엮어 한 줄의 시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 난설헌.
그녀의 붉은 눈물이 세상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밋밋하게 자라난 창가의 난초
줄기와 잎새가 어찌 그리도 향그러웠건만
가을바람 한바탕 흔들고 가니
가을찬 서리에 서글프게 떨어지네
빼어난 맵씨 시들긴 해도
맑은 향기 끝끝내 가시진 않으리라
너를 보고 내마음이 몹시 언짢아
눈물이 흐르며 소맬 적시네
「난설헌」
첫댓글 조선여류시인들의 기구했던 삶, 뛰어난 재주를 포용할 수 없었던 조선.
하지만 이웃나라에서는 허난설헌과 이옥봉의 시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아마 지금의 한류 열풍을 일으킨 여류시인들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혜안님... 고마워요.... 덕분에 이옥봉의 시 '몽혼'등 한시를 보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사에서 소개된듯한데 이처럼 훌륭한 조선의 여류시인들이 있었다니.. 허난설헌 이옥봉 황진이 매창등 당대의 걸출한 시인들이 있어 행복한 시간입니다...........
언니. 부지런하시네요..^^ 저는 사놓고 읽지도 못하고 있어요... 훌륭하고도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조선의 여류시인..
난설헌을 깊이 음미해봅니다.^_^
레베카님...^* 그랬군요... 사실 난설헌의 시들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좀 아쉽긴해요... 원본에는 시가 많이 실렸는데 출판관계로 시보담은 이야기위주로 썼다는군요... 그래도 소설 틈틈히 난설헌의 시가 촉촉하게 적셔주었어요... 좋은 하루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