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품에 안겨.
-남산의 이름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칠공, 팔공(70,80)세대가 어린 시절에 불렀던 이 동요는 달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낸다. 달의 실체보다는 1,2,3절 모두 나(우리)와 달과의 다정한 관계를 노래한다. 그 달이 떠 있는 하늘, 즉 남산은 어디인지 묻지 않아도 당연히 우리 마을 앞산에 떠 있는 달로 여긴다. 동요나 동시는 그래야 한다. 동심을 꿈과 동경의 세계로 인도하면 그만이지 그 구조나 지정학적 위치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부르고 듣는 애국가는 그 남산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증을 제기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에도 변하지 않는 기상으로 서있는 그 남산은 어디인가. 1989년 봄,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조카가 남산 식물원에서 애국가를 들먹이며 왜 남산에 이렇게 소나무가 없느냐며 실망어린 질문을 해왔다. 일본인들이 좋은 소나무를 다 베어가고 그 자리에 아카시나무를 심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그 질문을 받은 이후 남산의 정체를 더듬기 시작했다. 남산은 경주에도 있고 천안, 마산, 춘천, 대전, 광주 등 전국의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왜 꼭 서울의 남산만을 생각하는가. 시골이나 지방도시나 자기 고장에 있는 남산을 생각하며 부르면 그만인 것을 왜 애국가는 서울의 남산을 생각하게 하는지.
여기에 대한 이론은 분분하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한 박갑천님은 「재미있는 어원이야기」에서 남(南)은 앞을 뜻하고 북(北)은 뒤를 의미하여 남산은 곧 앞산을 뜻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은 항상 전방이나 측면에 떠있지 후면에 떠있지는 않다. 각 지방의 남산도 앞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그 이유다. 그래서 남산의 고유어는 ‘마뫼’였다. 마파람의 ‘마’가 남쪽, 하늬바람의 ‘하늬’가 서쪽, 높새바람의 ‘높새’가 북동쪽의 방향을 나타내는 고유어이듯 남산도 ‘마뫼’였다. 수도를 개경에서 이곳으로 끌어왔다 하여 인경산(引京山)이라고도 하고 목멱산, 종남산, 잠두봉 등 여러 이름이 있지만 애국가에서의 남산은 앞동산을 뜻하는 것이 오히려 정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애국가를 작사한 당시의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아무래도 서울의 남산이 애국가적 정서에 가장 어울린다.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말이 상징하듯 서울은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조선시대에도 ‘삼각산’과 ‘목멱산’은 한양이나 임금이 계신 곳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쓰였다. 하물며 나라를 상징하는 애국가의 남산이 부르는 사람마다의 고향에 있는 앞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 남산의 위상
조선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북한산에 북한산신, 남산에 목멱대왕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그래서 남산을 목멱산이라 했는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은 국사당(國祀堂)이라 하여 신성시했다. 남산에 등을 기댄 후암동에는 조선초기부터 전생서(典牲暑)라는 관청이 있었다. 전생서는 국가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되는 가축을 기르던 기관이었으니 국사당과의 연계가 깊은 곳이다. 그런데 일제는 1925년에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 하기 위해 국사당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조선신궁을 지어 참배를 강요했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조신인의 자존심을 뭉개버리고 황민화 정책을 펴기에는 제격이었다.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 다행히 지금도 옛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나 원래의 위치인 남산 팔각정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평소에는 국가의 평안을 위해 기도처로 여겼던 남산이 국가 위난의 시기에는 통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내란이나 변방으로부터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봉화(烽火)를 올려 중앙에 보고했다. 요즈음의 도로망이 1번, 3번. 5번, 7번 등의 간선 국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듯이 세종은 국가의 통신망을 다섯 개의 간선로(幹線路)로 정비하여 효율적인 연락을 꾀했다. 이는 도로를 국도와 지방도로 나누듯 간선로를 직봉(直烽)이라 했고 중간 노선을 간봉(間烽)이라 했다. 직봉을 통해 국가의 변방에서 올린 봉화가 남산의 봉화대까지 도착하기는 최대 12시간이 걸렸다. 직무 소홀로 시간이 늦거나 봉화를 올리지 못하면 큰 벌을 받기도 하고 심하면 참형을 당하기도 했다.
봉화대의 구조는 다섯 개의 굴뚝과 아궁이 그리고 초소가 전부다. 이 초소에 근무하는 봉수군은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위급상황을 알렸다. 평상시에는 일거(一炬) 적군이 해안이나 국경에 나타나면 2거(二炬), 적이 해안이나 국경에 가까이 접근하면 삼거(三炬), 적군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사거(四炬), 적과 접전이 이루어지면 오거(五炬)를 올렸다. 만일 비비람 등으로 봉수를 올리지 못하면 봉수군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위급 상황을 전해야 했다. 남산에는 각 노선의 봉화를 받는 봉화대가 다섯 군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어 확인된 한 기만 팔각정 북쪽 아래에 표본으로 복원했다. 원래의 위치에는 봉화대터라는 돌비가 있다. 이 봉화대로 인하여 남산은 봉화의 종점이라 하여 종남산이라고도 했다.
그 곳에 남산 타워가 세워져 TV 전파송출은 물론 각종 뉴스 채널의 송신소역할을 하고 있다. 해발 479.7m(남산 235.7m, 탑신 135.7m, 철탑 101m)로 세계 어느 곳의 탑보다 입지 조건이 좋아 국내외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N TOWER. 이는 뉴스 전문채널 YTN의 소유라서 그 남산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결과물이다.
더구나 1889년에 세운 파리의 에펠탑이나 상해의 푸동의 동방명주 탑 등은 모두 평지에 있어 그 웅대함이 반감되고, 일본의 도쿄탑은 에펠탑의 아류 같은 느낌이 있어 신선감이 없는데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양식의 남산타워는 서울의 자존심이자 우리의 자랑이다.
- 남산의 역할
선문대학원장 이형구 박사와 강남구 도곡동의 선사시대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풍수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풍수지리도 대단한 학문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풍수지리? 그것도 학문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풍수지리를 얼마나 공격하려고 그러는지 뒷말이 두려웠다. 그러나 잠간의 침묵 뒤에 하는 말은 나를 감동케 했다.
“풍수지리는 학문 이전에 본능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살기 좋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산짐승도 햇볕과 바람이 적당한 곳에 집을 짓습니다. 미물이 그러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렇다 풍수지리는 학문이전에 본능이다. 누구나 물 맑고 산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풍수의 시작이다. 한양에서 그 본능을 채워주는 첫 번째 조건은 다름 아닌 남산이다. 한양으로 천도하려 할 때 하륜은 무악산을 중심으로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이는 터가 좁고 위치가 좋지 않아 북악산, 인왕산, 낙산, 한강변을 내사신사(內四神沙)로 삼아 궁궐을 지었다. 이 때 남산은 바로 사신사의 안산에 해당한다. 원래 세종로 끝부분에 황토현이라는 안산이 있었으니 이는 산이 낮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일반적으로 남산을 안산으로 여긴다. 관악산은 조산으로서 곧 손님을 뜻한다. 손님이 주인과 담화를 나누려면 책상에 해당하는 안산이 있어야 한다. 이 안산이 좋아야 주인과 손님의 대화가 편해져 한양이 윤택해진다. 그런데 남산을 강남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머리를 내민 누애의 형상이다. 누애는 잠을 잘 때 머리를 하늘로 쳐들지만 남산과 같이 앞으로 내밀면 먹이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먹이를 찾아 떠나려는 누애를 붙잡아 두기 위하여 뽕나무를 심었다. 서잠실 동잠실 신잠실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의 잠실이 동잠실 연희동 연희궁쪽이 서잠실, 잠원동은 이보다 늦게 조성되어 신잠실이라 했고 여의도에 남잠실이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별 의미가없다. 이는 모두 남산이라는 누애를 잡아두기 위해 지은 풍수적 지명이다. 결국 잠실에 뽕나무가 풍부해야 남산이 제자리에 머문다. 그래서 남산을 잠두봉(蠶頭峯)이라 했다. 남산은 한양의 빈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산이다. 남산에 함부로 집을 짓고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리게 한 것은 분명 남산의 역할을 모르는 소치다. 이제 남산 제 모습 찾기를 시작하여 건물을 헐고 전국 시도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심어 소나무 동산을 조성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남단이었으나 이제는 한양의 한 복판이다. 조선 말기 일제가 남산 일대의 남촌에 집을 짓고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남산 일대와 용산은 총칼에 맛이 들여진 군사도시가 되었다. 남산의 신성성을 지키지 못한 결과임을 알고 신성한 남산, 서울의 안녕을 지키는 바로미터로서의 안산으로 잘 가꿔야 하겠다.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회현역에서 내려 남대문 시장을 경유하여 힐튼호텔방향으로 오르는 방법을 택하거나 명동역 3번 출구에서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는 방법도 좋다. 명동역에서는 10여분 걸음이면 족하다. 남산 산책로는 잘 가꾸어져 있고 통행하는 버스마다 천연가스 차량이라서 매연도 없다. 팔각정에서 국립극장쪽으로 걸으면 남산 토종 소나무 숲을 구경할 수 있어 좋다. 지하철 3호선 동국대 역까지 가는 과정에 유관순 동상과 3.1운동 기념탑, 장충단 공원, 수표교 등도 볼 수 있어 볼거리가 쏠쏠하다. 출출하면 장충동 족발집에서 한 잔 곁들이는 것도 답사여행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이다.
첫댓글 남산에 관한 좋은 역사자료 잘 보았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후학들을 위한 역사고증 많이 보기 원합니다.
풍수지리는 본능이다 라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누구나 좋은곳에 자리하고싶은 마음은 편안한 삶을 추구하려는 본질적인 모습이니까요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정보 잘읽고 갑니다
Xth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