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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향 (태인) 시씨 [綾鄕 (泰仁) 柴氏] 모임
 
 
 
카페 게시글
태인 시씨 자료실 스크랩 고려 항몽 시무비 열사를 논개가 계승했다
시정환 추천 0 조회 52 14.12.03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 항몽 시무비 열사를  논개가 계승했다


           시무비의 고향 태인,  장악원정 이일제의  남고서원에서 김천일과 송상현이 무술을 배웠다

 

 여성열사 유관순, 논개, 그리고  충열왕의 시무비


올림픽스타 역도 이배영의 처 역도선수 시선희가 인터넷에 1위로 올라간 것을 보았다

그 댓글에서 서씨로 알기도 하고 무슨 성씨가 ‘시’씨가 다 있느냐구 하며 희귀한 성씨가 더욱 화제의 규모을 불렸다

역도의 왕 전병관을 키운 체육교사가 순창여중에서 시선희를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다

태인 시씨는 정읍시 옹동면 능향(綾鄕)에서 능향시씨(柴氏) 고려의 호족으로 시작하여  고려시대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다

 EBS교육방송  시길수 전 영화감독  태인시씨인데 조상이 동학운동, 3.1운동으로 상경하였다고 들었다

고려의 정중부난 이후로 전쟁에 시달리다가 몽고의 부마국으로 되어있다

고려의 모든 정치는 몽고의 황제의 딸 제국대장공주이 통치하고 있었다

몽고의 압박에 시달리는 시대에  몽고의 공주를 독살한 애국 여자열사가 태인 시씨 시무비가 충열왕의 마음속에 있었다

몽고공주를 독살하고 그 사실이 들통나서 정읍과 태인에서 올라간 궁중의 가무예술 집단이 망명하였다

고려사 기록은

'궁녀 무비(無比)는 본래 태산군(泰山郡)에 사는 시씨(柴氏)의 딸이었는데, 궁중에 뽑혀 들어가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왕이 도라산(都羅山)에 왕래할 때는 반드시 시종하였다. 후에 세자에게 죽임을 당했다.'(『高麗史』 卷122 「列傳」 第35 '宦者' '崔世延') 범려자비 范自比:신돈(辛旽)415)

 

여자 열사하면 논개와 유관순으로 만 알고 있고 고려시대 거대한 몽고제국을 밀어보려는 대담한 충열왕의 무비(미녀상궁)는 결코 유관순 논개에 뒤지지 않는데  역사에서 빠저 있다

정읍사노래 가수로 궁중에 들어 포악한 몽고공주를 암살했던 시씨무비 열사의 역사와 전통은 훗날 정읍에서 공부한 김천일장군을 사모한 논개의 순국열사가 이어?다


김천일장군이 시씨 성의 본관 옹동면 능향의 앞마을에서 이일제(이항)에게 무술을 배웠고 김천일이 임실현감 임기시에  논개를 만났고 진주성 전투에도 둘이 같이 갔었다

이능화의  '조선어화사'와 진주기생학교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부지원과 거대주씨 종친의 눈치를 보느라  기생이 아닌   경상감사 최경희의 정실 부인으로 정부인의 위치로 제사를 지내고 '기생'의 글자는 어디에도 없는 장수논개제 행사 그리고 막대한 경비로 만든 논개전 공연도 경상감사부인의 위상으로 표현하여

연극의 구성요소가 희박하다

김천일과 같이 배운 동래부사 송상현(정읍인)의 애첩 ‘심심’도 일본에서 송상현의 죽음을 듣고 자결했다

열사 시무비의 마을에서 무술을 배운 두분 장군의 애인들은  모두 충절가를 부르며 죽었다

충절 열녀  시씨를 알고 앞으로 시씨를 민족수호의 열사의 가문으로 멸문이 되어 희성이 된  시씨를 이해해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민비와 대원군의 불화에 망친조선인데 명성황후로 애국의 상징을 이루고 있는데 몽고의 공주를 독살시킨 열사 시씨는 후손이 힘이 없어 애국열사였지만  악인으로 버려저 있다


충열왕과 태산(태인칠보) 출신 무비 시씨가 개성 인근 무명의 야산에서 정읍사 노래로를 함께 불러 왕이 '도라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고려사 충열왕조에 전한다.

 이혼이 정읍사 악기를  시무비에게 바친 악기

 

장사훈지음 국악대사전책에서도 '도라산'이란 단어 표현이 나온다. 정읍사의 역사적 문헌을 더듬어 보자면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정읍무고' 자료가 고려사 충열왕 21년 시대의 기록이다. 이 시기에 정읍무고 즉 정읍사를 부를 때에 사용하는 큰 무고북(舞鼓)은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던 이혼(李混)이라는 고려 밀직부사가 귀양에서 풀려서 다시 입각하려는 의도에서 당시 최고의 실력자 무비 시씨에게 로비용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정읍사 음악과 처용무를 연주하는 북을 왜 동해안 영덕에서 만들었을까. 이 시대에는 임금 충열왕이 태산(태인 칠보)사람 무비 시씨와 사랑을 나누며 정읍사노래와 춤으로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므로 귀양 간 이혼은 동해바다에서 떠 들어온 큰나무통을 목공에게 고급으로 만들어 무비 시씨의 마음을 사서 귀양에서 풀리고 동지밀직지사로 재 등용되었던 것이다.


이혼이란 사람이 목수도 아니고 음악인도 아닌 높은 계급의 신분으로 체통을 잊은 체 천한 작업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은 상급자의 구미에 가장 잘 맞아야 할 것이고 이를 알아차리는 자가 정계에서 수명이 오래 가듯이 밀직사 이혼도 후에 충목왕 때까지 종신 최장기간의 벼슬을 한다.


이 충열왕 시대는 몽고의 침공으로 강화도정부 최충헌의 무신정권, 삼벌초군 등을 정읍출신


송군비(宋君斐)장군의 내장산 입암산 전투의 대승전으로 몽고군은 포위되어 드디어 화해를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어서 최충헌의 손자 최의를 죽이고   구테타 혁명으로 정읍 호족들이  고려 고종왕에게 정권을 넘겨준 몽고와 화친한 권력시대이다.

노령산맥 정읍의 내장산은 곡창평야 중에 요새지로 마한. 가야. 신라가 망하고 지근. 허세신. 마의태자가 망명하여 군사력을 이어서 기른 곳이였다

송군비 장군의 송씨 세력으로  송송래 송분 송인등 고려 국내세력이 집결되어 정읍 태인에 사는 옛 가야세력 허씨가 충열왕비 순비가 되고 그리고 태인 시씨 무비를 후궁으로 들여서  고려정부를 세웠으나 후에 원나라의 서방등 세계통일의 황제국으로  군림하여 몽고공주 제국대장공주가 다시 왕비로 들어 온다 

충열왕은 몽고공주에게  자주 매 맞고 사는 남편이 되었다 


충열왕은 몽고공주의 폭력과 간섭으로 고통스런 식민지 고려왕으로 사냥훈련을 핑계 삼아서 시씨 후궁 시무비와 새로 도라산에서 참사랑을 나누었다

경의선역 도라산에서 언제나 충열왕을 그리워 망부석 정읍사 노래를 불렀다


무비 태산시씨는 백제음악의 정읍사 계승자


‘도라산’이라는 이름은 정읍사 가사의 첫머리 "달아 노피곰"의 가사에서 연상해볼 수 있다. 몽고나 중국발음으로 "달아"가  '돌아 -‘ '도라'로 전이된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의 첫머리가 노래제목 으로 되어 ‘도라산’이 되었다

시무비 가무의 터 도라산이 있는 도라산역

 

태산에 사는 시씨는 이전 백제시대 정읍가, 지리산가, 방장(등)산가, 선운산가 등의 노래와 춤에 능숙하면서도 빼어난 미인으로 충열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후에도 계속 사냥을 핑계로 몽고 공주를 따돌리고 자주 도라산에서  밀애를 하였다.

충열왕의 몽고왕비(제국대장공주)는 고려왕인 충열왕을 몽둥이로 두둘겨 패기가지하는 포악한 왕비라고 고려사에 기록하고 있다.

5000년역사에 식민지 왕으로 매맞고 사는 충열왕을 보고 누구도  숨죽이고 바라보는 시대였다

충열왕 23년 5월 충열왕의 몽고왕비(제국대장공주)가 궁을 떠나서    현성사 절에서 행차하는 기회에   시씨 무비가  주관하여 몽고공주를  독살로 암살되었다. 고려시대의  안중근의사의 공훈이다

 

제국대장공부의 독살사건은 충열왕의 묵인하에 정읍출신 송분, 송인, 도성기 등의 국내파가 공주친위세력과 몽고파를 제거하기 위한 사건으로 학자들은 파악하고 있다. 충열왕 23년 5월 충열왕의 몽고왕비(제국대장공주)는  현성사에서 가서 무비의 독살로 암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몽고에서 돌아온 몽고공주(왕비)의 아들 태자(후에 충선왕)가 무비를 죽이려 하자 충열왕은 3년상을 마치고 보자고 하였으나 태자가 처형하여 버리자  애첩을 잃은 충열왕은 왕위를 버리고 물러나서 애통한 세월을 장순룡의 집에서 보냈다. 정읍사를 부르는 무비 태산시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노래와 술로 지냈다. 여기에 당황한 아들 충선왕은 장안에서 제일의 미녀를 바처 달래였다 후에 이 여자가  숙창원비로 삼았다.


백제 토탬 정읍사 소리는  상사소리, 도라산가, 농부가로 남아

 

백제부흥군  풍왕과 그를 따르는 궁녀, 그리고

 당나라 측천무후세력에서   고구려 왕모중의 구테타 당현종을 황제로 만든데 성공한 백제의 흑치상지 잔존세력인 서해안 해양세력이 있었다 

당현종이  그 후에 안록산이 난으로  당나라 국토가 거의 함락되었다 

고구려 백제항복군이 세운 당현종을 몰락에서 구하려고 허이기. 장보고. 이사도 김원웅등이 안록산 토벌대로 당나가에 참전한다

당나라 시인 왕유가 안록산에 잡혀 벼슬을 시켰다

난이 평정되어 죽게된 왕유는 ‘상사(想思)’라는 충성시가 발견되어 살아났다

당나라에 참전한 신라국 귀국군사들이 돌아와  왕유노래 ‘상사(想思)’라는 충성시(忠誠詩)가

지금의 농부가 “얼럴럴 상사디어”이다

이 노래는 후백제 군사들이 불렀고 이어서

견훤왕이 가무단을 두고 나주로 떠난 금산사 노래

 

견훤왕과 이별한 금산사 감금된 궁녀불럿고 ,  그리고 고려 현종이 나주로 피난가다가 태인시씨 허씨 마을 왕림(枉臨)에서  이 노래를 현종이 듣고 반하여  왕비 둘을 바꾸어 버렸다

 

 

 

 

                                      

이자겸이 송나라 사신과  사신맞이하던  음성향

 

그리고 계속하여 태인 허씨 후손 이자의 이자겸이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음성서(音聲署)를 정읍시 삼산동에 음성향에 두었다

여기서 열여 태인시씨가 부른노래는 당나라 충성가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변하였고  조선중종 때에 최세필이  음란가요로 없애버렸다

여기 소개한 충열왕과 태산 시씨무비의 사랑의  비련의 사연이 였다

이런 충열왕이 애인 시무비를 잃고 그리다가 다시 임금이 되어  개성과 도사산에서 유행되었고


안중근의사 처럼 고려시대에 몽고공주를 암살한 무비 시씨를 사모하는 백성들의 애창의 가요로서 정읍사는 고려와 조선의 궁중악으로 정착한 민족가요 기둥으로 존재한다.

정읍의 월붕산, 국사봉, 망제봉에서 견훤왕과 충열왕을 그리워하는 열여의 마을로 남아있다

마을이름이  열부(烈夫)가 지금은  승부(承富)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동학군 녹두장군시대의 파랑새가요 처럼  전봉준. 김개남장군을  그리워하는 유행민요로 정읍사노래가   정착하여 내려온  변천된  것이다.

 

 1980년대 당시 장수군 출신  계남중 교장이 이야기를 짓고 장수군출신 도립예술단 연출자등이 각색하여  실록기록의  '기생'을 '관찰사 마님'으로 승격되어 '뮤지컬 논개전'이 늘 공연된다

 

진주성 논개사당 에서는  논개 열사를  김천일의 애인으로 부르고 있다

원나라 황제의 공주를 암살한 시씨 가문은  멸문으로 희성이 되어    올림픽스타 역도 이대영의 처 시선희가 인터넷에 1위로 올라간 것에서 여걸  시무비열사가 역사에 버려?기에 시씨 성을 서씨로 잘못 알고 있다

 화랑도등 순국열사의 사당을  전시대는 지방호족 조상의 사당으로 변질된 서원되었다

  

 


notany3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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