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경춘도로를 쫙 달린다.
다섯식구의 가장이 얻은 모처럼만의 자유시간,
강촌을 접어 들어
강변을 따라 5킬로 정도 달리는 사이에
그 푸르고 넓은 강물은 보이지 않고
허옇게 퍼질러 핀 억새꽃들만 일렁이는구나
지천의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 산기슭에 당도하니
쉬이 자란듯한 쑥꽃대의 싱그러운 냄새가
여린 가슴에 스미어 들며 진동을 하고
해그림자 드리운 잔듸밭에는
제몸길이보다 긴 여덟개의 다리를 가진
이상 야릇한 생물체가 바짝 엎디어 포복하고
길죽하게 늘어져 굽이치는 호수엔
튀어 오르기 싫어 통곡하는 하얗게 질린 천사들이
언어를 잊어버린채 햇살속으로 분무질하며 솟아 오른다
그 사이 사이엔, 더러는 벤취에 앉거나
또는 너댓명의 아낙들이 떼지어 서성 거리고
두손 마주잡아 풀어진 마음이 섞여버린 연인들까지
배고픈 호수의 물고기인양
하얀 치아를 보여 가며 입만 벙긋 거린다
서산에 해저무는 지금, 주변은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잎으로 익어가는 소리 들리어
잔듸에 잠시 누웠더니 쏴~하게 일상생활이 씻기워 간다
= 강촌리조트에서 =
♣ 일렁이는 은빛물결에 '으악새' 슬픈 노래 담은...
아아! 으악새가 슬피 우는 계절이 돌아왔다. 여름이 다사다난할수록 가을 바람은 뼛속까지 상큼해 질만큼 차갑고, 그 찬바람 불어 내리는 하늘은 푸르디푸르다. 그런데 이 가을에 우리꽃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무슨 '으악새'가 우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이 가을 슬피 우는 새는 바로 억새이다. 가을의 들녘에서 혹은 산정에서 무리지어 자리 잡고서는 튼실한 대를 키우고 꽃을 피워내기 시작하여 온 산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겨울의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그 허연 머리채를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며 그렇게 서있는 가을식물, 억새.
▲ 억새 (사진/현진오)
흔히 사람들은 억새꽃이 한창 피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수염처럼 허연 억새의 꽃은 정확히 말하면 바람 따라 날려보낼 종자에 털을 가득 매어 단 열매이다.
억새는 여름이 갈 무렵 꽃대를 내보낸다. 가지 겨드랑이 사이로 붓처럼 뾰족하고 동그랗게 말린 꽃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해서는 햇살이 좋은 어느 가을 날, 술처럼 퍼진다.
이 술은 꽃잎도 없는 억새의 꽃들이 암술과 노란 꽃밥을 매어 달고 피워낸 꽃차례이다. 이때까지 억새의 색깔은 자줏빛과 갈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조금은 진한 빛깔이다.사람들은 이렇게 한창 꽃을 피운 이때의 억새를 보고 아직 꽃이 덜 피었으니 두고 보라고들 말하며 꽃이 지고 결실이 되면 비로소 억새의 꽃이 피었다고들 하는 것이다.
가을이 한창일 때 억새는 꽃을 아니 열매를 한껏 부풀려 낸다. 다채로운 가을꽃들과 화려한 단풍빛에 눌려 그럭저럭 지내오던 억새는 단풍마저 저버린 늦가을 홀로 남아 이 땅의 산과 들을 억새 천국으로 만든다. 가을 산을 바라보며 혹은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르다 문득 산마루에 올라서면 가을의 그 상큼한 산바람에 이리저리 굽이치는 은백색의 억새 물결, 키를 넘는 억새밭을 헤쳐 지나노라면 속새의 시름을 잊기 마련이다.
억새는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다 자라면 사람의 키를 훨씬 넘기도 한다. 줄기를 옆으로 뻗으면 퍼져나가는 억새는 잎의 나비가 손톱길이만큼이고 녹색을 띄나 가운데에 하얀 줄이 나있고 가장자리에 작고 단단한 톱니 때문에 자칫 손을 베일 염려도 있다. 보통 벼과 식물 가운데 기름새, 쌀새, 솔새처럼 새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이 많은데 아마도 억새는 그 날카로운 가시와 튼실한 줄기로 '억센 새' 즉 억새가 되었나보다.
♤ 기본종은 '참억새'
▲ 전남 광양 백운산의 억새밭
우리가 흔히 억새라고 부른 것 중에서 잎이나 꽃이 조금씩 다른 것이 여럿 있다. 기본종으로 가장 많이 있는 것은 억새가 아니라 참억새이다.
참억새를 기본으로 하여 잎에 얼룩이 지면 얼룩억새, 일이 좁으면 가는잎억새이며, 억새는 이삭이 자줏빛이 돈다. 이러한 특별한 특징들을 구별하기 어려우면 그저 참억새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저 억새라고 하면 간단하고 좋을 것을 굳이 참억새라고 하자니 어색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랴. 이미 앞선 학자들이 그렇게 정해놓은 것을. 그밖에 별개의 종으로 기재된 꽃이삭에 금빛이 도는 금억새, 물가에 주로 자라며 은빛의 꽃이삭이 부드럽게 늘어지는 물억새 등이 있다. 또 서울에 도봉산과 북한산이 이어지는 우이령에는 장억새란 보기 드문 종류도 자란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억새를 일컬어 갈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억새와 갈대는 별개의 식물이다. 억새가 산과 들에 많은 것에 비하여 갈대는 물이 있는 곳에 많이 자란다.
꽃도 억새가 술처럼 밑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반면 갈대는 가지가 위로 올라가면서 여러 번 갈리고 다 익고 난 후에도 갈대는 억새처럼 은백색이 아닌 갈색이 돈다. 우리가 흔히 갈대숲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억새숲이지만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 주변, 많은 물새들이 둥지를 마련하는 그곳에 자라는 것은 갈대이다.
이러한 억새들의 군무는 누구에게나 인상적인 까닭인지 노래와 시에도 등장하곤 하는데, 앞에 잠깐 언급하였고, 어지간히 나이든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짝사랑이란 노래의 '아아 으악새 슬피우우는 가아을 이인가아요♪♬'라는 구성진 가락에서 으악새는 새 이름이 아니고 억새를 가리키며 슬피 우는 것을 바람 따라 흔들리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만한 사람은 안다. 그 만큼 억새는 우리에게 친근한 식물인 것이다.
♤ 억새 머슴의 전설
어느 책에서 억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옛날 억새라는 이름의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 억새의 주인은 인색하기로 유명한 선비였는데 어느 날 억새를 데리고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도록 점심을 먹을 생각을 안더니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자 비로소 억새에게 팥죽을 한 그릇 사오도록 시켰다. 팥죽 한 그릇이라면 억새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아무리 인색한 주인이더라도 너무하다고 생각한 억새는 팥죽을 사왔는데 그릇이 아닌 요강에 담아 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양반의 체면에 요강에 담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지라 그 팥죽 한 그릇은 억새의 차지가 되었다.
다시 한참을 가다 이번에는 생굴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번에도 선비는 체면에 직접 가서 사먹을 수는 없어서 한참을 가다가 억새에게 되돌아가 생굴 한 대접을 사오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요강이 아닌 대접에 사 올 것을 당부하면서. 다시 배고픈 머슴을 굶기고 혼자 한 그릇만 먹겠다는 주인에게 심술이 난 억새는 생굴을 요강 아닌 대접에 담이 오기는 하였는데 그냥 오지 않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면서 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는 주인에게 가져오다가 자기의 콧물을 빠뜨려 찾고 있는 중이라 대답했다. 물론 이 생굴 한 대접 역시 억새의 차지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이 땅에 자라는 식물 억새와 머슴 억새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천하고 심술궂지만 살아가는 왠지 밉지 않고 정다운 머슴 억새, 들이든 산이든 이 땅의 어느 곳에서든 자라나 산딸기라도 따먹으려고 산길을 헤매는 시골 개구장이들의 그 꼬질한 종아리를 할퀴곤 하지만, 또 그 빳빳한 잎새의 날카로움으로 고분고분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넉넉한 가을의 들녘을 마련해 주어 만나면 한 움큼 꺾어다 두고 싶은 식물 억새.
사람들은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지만 이용면에서는 갈대가 단연 억새를 앞선다. 갈대로는 옛날 지붕도 잇고, 갈목비라는 빗자루도 만들고, 억새처럼 억세지 않아 사료로도 쓰고 갈대의 땅속 어린순을 죽순처럼 먹었으며, 김을 말릴 발이나 돗자리를 만들기도 했으며 갈대잎을 말면 훌륭한 풀피리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억새는 한방에 이용된다. 억새 줄기를 생약명으로 '망경'이라고 해서 이용하는데 햇볕에 말려 그대로 썰어서 달이면 된다고 한다. 뿌리는 '망근'이라 하여 함께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뇨, 진해, 해독에 효과가 있다. 특히 오줌이 잘 나오지 않거나 기침이 심할 때 쓴다고 한다.
♤ 억새 구경하기 좋은 곳들
억새의 물결도 단풍소식처럼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간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고 옆사람의 추천을 얻어, 억새구경이 그만인 몇 곳을 소개한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월출산의 억새밭이다. 월출산의 그리 급하지 않은 능선을 오르노라면 기이하면서도 정겨운 월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다가서고 그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억새군락이 펼쳐진다. 석양을 받아 반짝거리기라도 하면 선경이 따로 없을 듯 아름답다. 가을의 강원도 산들이 단풍놀이로 북적거리는 틈을 타서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선군 민둥산으로 발길을 옮기면 늦가을 이만한 억새구경도 드물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수십만 평의 억새군락이 정상부근까지 이어진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산정호수로 유명한 포천군의 명성산도 좋고, 무엇보다도 가평 유명산이 으뜸인데 정상부근의 억새밭은 물론이려니와 계곡의 기암절벽도 매력적이다. 운이 좋으면 바위틈에서 그 유명한 금강초롱의 청초한 자태도 구경할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영남알프스'라고 하는 천황산, 재약산, 취서산,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한다면 백만 평에 이르는 끝없이 이어진 억새의 무리를 구경할 수 있다. 가장 늦게 억새 소식이 전해오는 제주도에 가면 구태여 성산 일출봉이나 산굼부리까지 가지 않아도 그저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횡단도로 한 곳에 차를 세워도 한껏 억새 구경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을 억새구경은 구태여 이렇게 거창한 산행을 마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도심을 조금 벗어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억새는 이 땅에 지천이고 또 그 생명력 또한 왕성하므로 억새다발 한 아름 꺾어다가 투박한 옹기에 가득 꽂아두면 한동안 넉넉한 가을이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첫댓글 즐거운 날 이었지요? 앞으로는 그런 Event 행사도 계획하고 있어요.
가을을 맞이 하려고 아무리 들판을 해매어도 이 같은 정취를 느끼지 모했는데.... 오주삼님은 대단합니다.시 감상 잘 하였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 하시고 즐겁게 행복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