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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經濟規模와 야쿠자 組織.
1. 日本 야쿠자 組織의 經濟的 規模
82년도 일본경시청의 공식발표를 참고하면 일본 야쿠자가 마약밀매, 도박, 매춘, 마권조작, 고리대금 등으로 벌어들인 돈은 약9조6천억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야쿠자 조직의 전통적인 사업으로는 일본 내의 포르노 사업과, 빠찡코 사업을 들 수 있으며, 일본 사회에서도 야쿠자 조직의 기본사업으로 이를 기정사실화 하며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쿠자 조직은 이러한 전통적이 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더 나아가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여 가고 있으며, 근자에 야쿠자 조직이 벌어들이고 있는 주요수익원의 비중을 살펴보면 마약이 35%, 도박이 20% 등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매춘, 증권시장 개입, 주가조작 등 폭넓은 사업을 벌여 연간 1조3천억엔(한화 10조 40억)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야쿠자 조직원들의 1인당 년 평균소득을 계산을 하여보면 1인당 평균 7천4백만엔 수준이나 오야붕 급 보스는 1인당 년 평균 10억엔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하위 조직원들은 년 평균 1인당 300만엔 정도의 소득으로 야쿠자 조직원들은 그 지위에 따라 소득의 격차는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야쿠자 조직원들의 생활상을 5개 층으로 분류하여 보기로 하자.
① 組織 定着形 - 연간수입이 약3천만엔 가량으로 중간보스 이거나 간부급이 대부분으로 합법적인 기업으로 유흥주점 등 조 직의 사업체를 경영한다.
② 組織 依存形 - 연간수입이 약2천만엔 가량으로 간부 혹은 중견 조직원으로 조직 내에 생활기반을 두고 주요 조직의 업무나 실무를 맡는다.
③ 女性 依存形 - 연간수입이 약1천만엔 가량으로 특정여성에게 기생충처럼 붙어 생계를 유지하며 조직 활동을 한다.
④ 家族 依存形 - 연간수입이 약3백만엔 가량으로 부모 형제들에게 생계를 의존하거나 노점, 공사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며 하부조직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⑤ 暴力 常習者 - 연간수입이 약3백만엔 가량으로 소속된 조직이 해산되었거나, 스스로 조직을 탈퇴하여 조직원은 아니나 상습적으로 폭력적인 불법행위를 하고 있는 자.
위와 같이 야쿠자 조직은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벌이는 사업을 보면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금품강요, 기부강요, 공갈, 밀수, 매춘, 마약, 도박, 고리대금 강요, 부당한 대출요구 등을 강요하고 또한 수많은 식당과 술집, 슬럿머신, 트럭회사, 연예인 기구, 택시회사, 일반회사, 공장 등의 업소에 관여하기도 한다. 또한 자동차경주, 경마, 주주총회, 도박장, 유흥업소 보호, 채권해결, 풍속사범, 인력공급 등에서 불법적인 수입을 올리며 최근에는 민사사건 개입과 대기업상대 폭력 등 새로운 형태의 자금취득 활동과 금융권에 대한 고의부도 등을 야쿠자 조직의 수입원으로 이용하고 있어 일본 수사기관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2. 日本 야쿠자의 紀元
日本 야쿠자의 기원은 중세 일본의 노름꾼들인 바쿠토(이들은 오늘날 카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피아와 같은 존재임) 들이 1에서 10까지 숫자가 적힌 카드로 하는 노름인 카타르에서 유래한다.
카타르의 경우 3장의 카드를 뽑아 9가 나오면 최고의 수로 하는 노름이다. 그런데 노름을 할 때 가장 나쁘게 나오는 패인 8.9.3(망통. 나가리)의 일본어 발음인 야, 쿠, 자인데 이를 지칭하여 야쿠자라고 불리었으며 이것이 일본 범죄조직인 "야쿠자"이름의 기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야쿠자들은 야쿠자의 기원을 350여년 전의 인물인 조베이를 자신들의 시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조베이 라는 인물은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자 검술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있던 50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실직하게 된다.
이에 사무라이들이 상인이 되기도 하고 사무라이로 남아 거기의 무법자가 되기도 하지만 조베이는 사무라이로 남아 서민들을 위한 선행을 하고 서민들을 위하여 싸우다가 무법자들에게 의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맞아 많은 일본인들에게 전설적인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를 전후하여 야쿠자의 처벌에는 ①추방, ② 단지의식(유비쯔메), ③문신(Tattoo)등이 있으며 문신은 17세기에 들며 점차 그 본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1867년은 일본은 매우 중요한 시기가 도래한다. 그 동안 일본을 다스려왔던 도쿠가와 15대 막부가 물러나고 메이지 왕이 들어서면서 메이지 정부는 메이지유신 정책을 실시하며 근대적인 개혁정책을 통해 외국의 문물과 기술, 군사체계, 무기 등을 들여와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함께 "도야마" 라는 사무라이가 나타난다. 도야마는 일본의 범죄조직과 정치를 연결시키고 오늘날까지 정치와 범죄조직을 지속적으로 연결시키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도야마는 후쿠오카 근교에서 태어났다. 도야마는 미천한 사무라이 집안 셋째 아들로 태어나, 20대에 사무라이들의 봉기에 가담하며 자신의 추종자를 규합 강력한 폭력단으로 성장한다.
도야마는 자신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에게는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나누어주는 등 후쿠오카 지방의 로빈 후드로 명성을 날리고, 정치인들과 손을 잡으며 지방민들에게 존경의 받게 된다.
도야마는 1881년 玄洋社 라는 단체를 창설하며 전국적인 세력으로 성장을 하며 일본의 대동아경영에 앞장을 서게 되는 것이다.
현양사 조직은 한국과 일본 등지에 파견되어 요인 암살과 스파이 역할을 시작하며 메이지 정부는 일본 국내에서도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이를 이용하며 내무대신 등은 현양사를 자신의 사병으로 활용하였다.
현양사는 일본 육군성의 비밀요청에 의하여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할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왕궁에 불을 지르는 등 활동을 하다가, 1895년에는 암살과 스파이공작을 위하여 무술을 익힌 낭인 10여명을 조선 왕궁에 침입시켜 왕비인 명성황후 살해하였다.
현양사는 1901년 도야마의 심복이던 우치다 료헤이 에 의하여 흑룡회 라는 비밀 결사 조직을 창설한다. 이 흑룡회의 창설목적은 아시아 전체의 지배에 그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흑룡회는 러일전쟁당시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여,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온갖 정치적 테러를 감행하였고, 더 한 걸음 나아가, 일본과 서방세계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도록 고취시키며 일본의 극우국수주의에 군림하였다.
1920년대는 일본의 민주화가 진행되던 시절이었으며, 노동조합의 활동이 자유로운 시절이었다. 도야마는 이들 민주세력을 분쇄하고자 1919년 전국적인 깡패조직인 "대일본국수회의" 라는 극우폭력단체를 만든다. 이 단체는 일본 천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제거하였다.
"대일본국수회의" 는 전국의 야쿠자 들을 한데 모은 전국규모의 야쿠자 조직이었으며 "대 일본국수회의" 는 독일 히틀러 S.S 친위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실제로 모방을 하였다.
1930년대 일본은 무장군국주의의 절정기였으며, 일본국내에서는 반 군국주의를 주장하던 2명의 수상과 2명의 대신이 도야마 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일본의 군국주의는 도야마 에게 내각구성을 상의할 정도로 도야마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도야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본떠서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중국과 조선에서 수많은 토지를 약탈하였으며, 도야마가 이끄는 범죄조직은 일본 내의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며, 일본 내에서 다른 범죄조직들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는 범죄조직의 대부로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였으며, 도야마는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지역의 종군 위안부 공급까지 도맡아왔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일본의 범죄 집단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 전쟁의 시작으로 극우파 및 일본 야쿠자와 정부의 유착관계는 갑자기 끝장이 난다. 이 당시는 일본 군부와 대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우경화한 일본정부는 이제 독립된 세력으로서의 극우파나 범죄조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야마는 1944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日本의 야쿠자 組織
일본 야쿠자 조직의 두드러진 특징은 세습적 연결이 혈연이 아닌 입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일본 야쿠자 조직의 두목을 오야붕(親分) 이라고 부르며, 그 밑에는 꼬붕(子分)이라 한다. 이는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가족관계라는 설명이며, 야쿠자 조직이 친족과 같은 개념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오야붕은 꼬붕의 생계유지와 보호를 책임지며 꼬붕은 오야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하여야 하며 조직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야쿠자 조직은 조직결성 당시 사무라이와 같은 의식을 치르는데 때로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하고, 술을 마시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이 의식은 "사카스끼 배" 라고하며 술잔에 들어있는 술의 양에 따라 신분이 다른데 두 사람의 관계가 동급의 형제이거나 두목끼리의 조약을 맺는 경우는 술잔의 양이 같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형과 동생인 경우는 형은 60%의 량을 동생은 40%의 량을 술잔에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토리모치닌" 혹은 "아즈카리닌" 이라는 보증인과 중개인이 입회한다. 이 의식 제단에는 밥과 생선과 소금을 놓는데 그 앞에 오야붕과 꼬붕이 마주앉으며 그사이에 "토리모치닌" 이 앉아 사회를 보면서 컵에 술을 채우고 생선조각과 소금을 넣는다. 그리고 "토리모치닌" 은 부하에게 엄숙하게 경고한다.
너는 오야붕이 주신 잔을 받았고 오야붕 또한 술을 마셨으니 이제 우리 조직과 너의 오야붕에 대한 충성을 받칠 의무가 생겼다.
처자가 굶주리고, 너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이제부터 조직과 오야붕에 대한 의무가 앞서는 것이며 이제부터 너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을 갖지 못한다. 앞으로 오야붕은 너의 유일한 아버지이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야붕을 따라야한다.
이러한 야쿠자들의 의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오며 있으며, 특히 20세기 초반에 절정에 달하여 정당, 사회운동, 군, 상공업 및 지하세계에 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일본 야쿠자의 전성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야쿠자 조직은 약2,500여개에 달하였고 조직원수는 약 20만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그 조직수가 약 3,000여개에 조직원수는 약9만5천여 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최대조직인 야마구찌구미(山口組)는 조직원 수가 약2만5천명, 하부조직은 314개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은 각종 무기로 무장하여 일본 자위대, 경찰 다음가는 일본내 무장조직이다.
? 여기서 일본내 야쿠자 조직을 7대 거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① 고베의 야마구찌구미 (25.000명)
② 도쿄의 스미요시 가이 (8,000명)
③ 도쿄의 이나가와 (10,000명)
④ 도쿄 및 후쿠오카의 구토렌코 (8,000명)
⑤ 쿄오토의 고메이츠 (2,000명)
⑥ 히로시마의 교세이가이 (800명)
⑦ 시모노세기의 고다이가이 (700명) 등이다.
그러나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은 야마구찌구미(山口組). 이나가와카이(稻川會). 스미요시카이(住吉會) 등 3대 조직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야쿠자 세계에 최근 들어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마약, 도박, 매춘 업에 큰 투자를 하며 새롭게 등장한 신흥 야쿠자 조직이 있는데 조직의 명칭은 아이스코데츠(會律小鐵) 라고 하며, 조직원수는 약3,000명으로 그 규모는 일본내 4번째 야쿠자 조직인 바, 특이한 것은 이 조직의 오야붕이 한국인 재일교포인 강외수 라는 사람으로 1997년1월8일 69세의 나이로 오야붕 자리를 스스로 내어놓고 제2선으로 후퇴한 일본 최초의 야쿠자 오양붕이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 야쿠자계나 일본 경찰까지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일본 야쿠자 조직의 변화를 본다면 2개 이상의 지역에 걸쳐 세력을 가지는 이른바 광역범죄단으로 변모하며 야쿠자 조직이 광역화, 계열화하면서 불법자금 취득과 야쿠자 조직의 정당성을 위장하기 위하여, 정치활동, 사회운동 등을 가장 모방하고 있으며 야쿠자 조직의 무장과 새로운 자금원의 확보를 위하여 야쿠자 조직의 해외진출을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
日本 야쿠자 組織과 韓國政治權 과의 關係
1. 日本 內의 韓國 야쿠자 組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내의 야쿠자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귀국하였으며 일본내 300만명의 한국인들 중 약200만명은 귀국을 하였으나 약80만명의 한국인들은 그대로 일본 내에 남아있었다.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그 동안 일본사회에서 냉대 받던 억압과 탄압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미군정 당국과 협조하며, 미군 구호물자 거래를 하는 암시장을 석권하며 수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계 야쿠자 조직은 도쿄에서 한인들을 중심으로 동성회(東聲會)를 조직한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이 주로 동경 긴자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여 동경지역 유흥가 장악과 각종이권에 개입하며 활동을 하였으며, 한편 오사카에서는 일본 이름 고야마고로 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명우회(明友會)라는 조직을 만들어 오사카 미나미 거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이 두 조직이 한국계 야쿠자 조직의 시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동성회는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찌구미(山口組)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어 활동을 하였으나, 명우회(明友會)는 야마구찌구미(山口組)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괴멸을 당하는데 이 당시 명우회를 공격한 조직은 역시 한국계 야쿠자 조직인 야나가와구미(柳川組)의 오야붕인 양원석 이었다.
이 한국계 야쿠자 조직인 야나가와구미(柳川組)는 야마구치구미조의 전투부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 전역을 장악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 일본내 야마구찌구미(山口組)의 핵심간부 120여명 중 20여명이 야나가와구미(柳川組) 출신의 재일 교포들이다.
2. 日本 야쿠자 組織과 韓國 政治權과의 關係
한국계 야쿠자들은 한국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것은 일본 야쿠자 조직이 전통적으로 우익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와 대처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일본 야쿠자 조직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내 한국 야쿠자 조직은 일본으로 입국하는 한국정부의 관리들을 조총련으로부터 보호하여 주고, 조총련과 민단의 대결에서도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이 앞장을서 조총련 간부들을 납치하고 사무실을 습격하는데도 앞장서서 행동하여 줌으로서 한국정부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한국정부는 제주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데 있어서 제일교포 야쿠자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도록 좋은 여건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더 나아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의 한일국교 정상회담에서 한국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회담이 이루어지도록 한국계 야쿠자 조직을 통하여 정부에 대대적인 로비가 이루어지도록 협조를 부탁하였다.
정건영(일본명 : 마이치 히사유키)은 이러한 공로로 한국의 정계지도자들을 친분을 쌓으며, 박정히 대통령과도 상견을 하게 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을 왕래하는 연락선의 운항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1973년 여름 김대중이 망명객처럼 미국으로부터 일본 도쿄에 도착을 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순회강연을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K. C. I. A)는 김대중을 납치하려하였으나, 김대중은 한국계 야쿠자 조직원들에게 자신의 납치에 관한 정보를 받고 3일 동안 두 번이나 호텔을 옮겨 다니며, 중앙정보부의 미행을 피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 도쿄의 그랜드 팰리스 호텔211호에 신병치료차 묵고 있던 양일동 씨와 만난 후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중 6-7명의 건장한 청년들에 의하여 납치된다.
이 납치사건에는 한국계 야쿠자 조직들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며 의혹을 받는 핵심인물 중에 동성회(東聲會) 조직을 결성한 정건영(일본 명 마치이 히사유키)이 있었다.
이 당시 홍콩의 경제 주간지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지는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마치이 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가담한 중요인물이라고 보도를 하였으며, 마치이가 맡은 임무는 김대중이 묶고 있던 층 전체를 세내어 그 방들을 공작원들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는 오사카 야나가와구미(柳川組)조의 오야붕 양원석과 사카우메구미조(조직원1,000명)의 두목이며 재일교포 출신 김재학에게 협조를 구하여, 이들 조직 책임자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새마을헌금과 올림픽헌금 등 많은 자금을 지원함으로서 두 사람 모두 한국정부로부터 새마을 훈장을 받았으며 87년대선 때에는 여당에 일본돈 3억엔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야쿠자 組織과 한국 범죄조직과의 關係
1. 日本 야쿠자 組織의 海外進出
日本 야쿠자 범죄조직은 오래전부터 주변국가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야쿠자 수익의 다변화를 모색하여 왔다. 그러나 일본 내의 경기가 호황이던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증가하며, 해외로의 눈을 돌리지 않고, 일본 내의 사업에만 신경을 써오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내의 경기불황 등으로 인하여 야쿠자 조직의 수익이 감소 추세를 보이자. 이를 만회하고자 환태평양 지역 다른 국가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이 지역의 국제적인 범죄조직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등 야쿠자 조직의 해외진출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2. 韓國 犯罪組織과의 關係
1970년대 야쿠자 조직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정기여객선의 운항 권을 확보하고, 서울에도 유흥장을 설립하였으며, 한국 부산지역 범죄조직과 연계하여 밀수에도 관여 카메라, 손목시계, 금괴, 보석, 밍크코트 등 다양한 품목들을 밀수출하여 큰 수익을 올렸다.
한국의 범죄조직과 일본 야쿠자 조직은 상호유착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더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일본 야쿠자 조직 "아이스코데츠"의 오야붕 강외수가 부산 호텔을 매입하기 위하여 30억원을 투자하였으며, "사카우메구미조"의 김재학이 부산 칠성파 두목을 앞세워 울산의 그랜드호텔을 인수하고, 부산시 서구 대신동 꽃마을 부지 1만6천평을 골프장용으로 매입하고, 일본 제1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찌구미"의 하부조직이며,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 인 "야나가와구미"는 서울 워커힐호텔 카지노에 투자를 하고 천안시 백석동에 대지 2만평을 매입하였다.
또한 재일교포 이정웅이 이끄는 후쿠오카의 "이즈구미" 야쿠자 조직은 부산시내의 빌딩과 양산에 대규모 임야를 사들였다
日本야쿠자 組織의 向後展望
일본 야쿠자 조직의 최고 두목 격인 " 이나가와 가쿠지 " 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향후전망을 한마디로 " 일본의 야쿠자 조직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 마피아 조직처럼 된다고 하였다 " 이 말은 장래에 가장 큰 조직이 작은 조직들을 흡수하여 전국적인 야쿠자 조직이 나타날 것이며, 이 조직은 국제적인 조직들과 연대하는 세계적인 조직이 된다는 뜻이다.
또 " 이나가와 가쿠지 " 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미국의 마피아 조직은 돈을 위하여 사람을 죽이지만, 일본의 야쿠자조직은 도덕과 법률을 존중하고 준수하여 왔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전통들이 시들고 있다고, 일본의 전통적인 야쿠자 원로들이 걱정하는 부분이며, 이러한 사고의 차이는 신세대들의 사고의 차이에서 오는 것임을 걱정하였다.
야쿠자 조직은 많은 변화를 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리와 인정, 문신, 손가락 절단, 절대복종 등 사무라이식 정신이 무너지고 조직보다는 개인 자신들을 위하여 행동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세계적인 범죄조직의 특성을 보면 이데오로기나, 동일민족, 기사도, 절대복종 등 전통적인 사고가 사라져 가고 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추구만을 위하여 세련된 배신, 교활한 음모, 모험적인 행동방식들만이 요청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야쿠자 조직도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며, 조직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야쿠자 조직은 일본 특유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사고를 감안한다면, 앞으로 오랜 세월동안 세계적인 범죄조직으로 살아남을 것으로 보인다.